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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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출판사의 소개글은 크든 작든 과장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창백한 말의 경우 그런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수식어가 들어가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결과적으로 다 읽은 뒤의 만족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ZA(Zombie Apocalypse) 문학공모전에서 6회 만에 장편으로서는 처음 당선작에 오른..”

좀비라는 소재와 사회적 메시지를 스릴러 전개 속에 잘 담아낸...”

때로는 사회파 소설을, 때로는 첩보 스릴러를 연상하게 하는 빠르고 강렬한 전개

 

여느 좀비물과 달리 창백한 말의 공간적 배경은 무척 독특합니다.

좀비 바이러스는 이미 26년 전에 출몰했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시체들이 공존합니다.

사람들은 면역자보유자로 구분되는데,

면역자가 건강한 신체와 사회적 권력을 향유한 채 (서울) 북쪽의 안전지대에서 살아간다면,

보유자는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바이러스 억제제를 먹어야만 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하층에 위치한 약자들이며 대부분 남쪽과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을 가로지른 엄청난 장벽은 1차적으로는 시체들의 공격을 막는 기능을 하지만

실제로는 면역자와 보유자를 갈라놓는 사회적 장벽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 하에 몇몇 인물들이 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이러스 억제제를 생산하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에서 해고된 뒤

생활고로 인해 억제제를 구하지 못한 나머지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보유자 김수진,

윗사람의 눈에 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시체들의 위협에서 100% 안전한) ‘거주권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의 사장이자 면역자 진석호,

그리고 구인제약의 비리를 캐던 동생이 불법 시체게임장에서 살해되자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는 전직 군인 박세영이 그들입니다.

 

딱히 좀비물을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책이든 영화든 좀비를 다룬 작품 가운데

창백한 말만큼 현실감 있게 다가온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좀비가 등장하기만 하면 도시든 국가든 절멸의 운명에 처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 작품 속 한국은 나름 시체와 공존하며 균형감(?)있는 체제유지에 성공한 상태입니다.

26년에 걸쳐 다져진 체제는 면역자와 보유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고,

장벽 너머에서 시체들에게 무참히 물어뜯긴 보유자들이 새로운 시체로 전락하는 사이

장벽 반대편에서는 천하태평인 면역자들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유전자 덕분에 억제제 없이도 건강한 삶을 보장받은 면역자와

비싼 억제제 없이는 언제라도 바이러스에게 먹힐 수 있는 비참한 신세의 보유자의 격차는

빈부, 의료, 복지, 인권 등 모든 면에서 까마득할 정도로 벌어져있으며,

그 격차는 결국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기준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설정은 좀비의 공격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공식을 넘어선 특별한 힘을 발산했고,

인물들이 겪는 위기와 고민, 갈등과 협력, 삶과 죽음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충만한 이야기로 만들어줍니다.

얼마 전 본 영화 월드 워 Z’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살짝 전개되긴 하지만,

창백한 말의 압도적인 리얼리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각 인물들이 지닌 리얼리티도 굉장히 생생했는데,

각각 딸과 동생을 잃은 채 구인제약이라는 괴물에 맞서는 김수진이나 박세영도,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진석호도,

또 바이러스가 지배한 세상에서 제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크고 작은 조연들도

각자 자신만의 정의와 생존을 위해 나름 제대로 분투하고 있어서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만 나눠서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물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나름 특별한 이력과 과거를 지닌 탓에

다소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스토리의 힘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중반부에 약간 늘어지는 대목이 있었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좀비물의 상투성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으로 보입니다.

(1개가 빠진 건 좀비물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이 대목의 느슨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상투성은 사라지고 예상외의 전개가 이뤄지는데

특히 마지막 50페이지는 분노, 동정, 안쓰러움 등 여러 감정을 뒤섞이게 만들면서

영화 월드 워 Z’의 허망하고 억지스런 해피엔딩과는 급이 다른 현실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적잖은 제작비가 들겠지만 창백한 말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부산행못잖은 매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전부는 아니라도) 공포 자체에 방점이 찍힌 부산행의 시체들과 달리

창백한 말의 시체들은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함께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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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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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강력 허리케인 딜런이 다가오는 롱아일랜드의 몬탁.

30여 년간 외면하고 살아온 아버지의 끔찍한 사고 소식을 들은 FBI 특별수사관 제이크 콜은

불편한 마음으로 고향집을 찾았다가 지역보안관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살해당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

현장을 찾은 제이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분노를 느낀다.

모든 정황이 어머니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삼십여 년 전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

제이크는 그놈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복수심을 느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놈은 제이크를 놀리듯 주변 사람들을 계속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끔찍함 자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독자에게 최대한 강한 충격을 선사하려는 것이다.”

작가인 로버트 포비가 이 작품에 관해 코멘트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함 때문에 꽤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불과 2~3일 만에 수많은 희생자들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살해당하는데,

역대급 허리케인의 습격이 예고된 소규모 지역에서 연이어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벗겨진 살가죽은 물론 단서라곤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자 지역사회가 패닉에 빠진 것입니다.

 

일단 끔찍함과 충격을 예고한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례 없는 엽기적인 살인수법, 도시 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것 같은 엄청난 허리케인,

시시각각 주인공인 제이크 콜을 향해 조여드는 듯한 범인의 광폭 행보 등을 통해

작가는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내내 독자를 마음대로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희생자가 등장하면서부터 제이크 본인은 물론 독자들도

범인의 최종 목표 또는 타격 대상이 제이크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30여 년 만에 고향에 온 FBI 특별수사관 제이크 콜의 지인 또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운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 즉 범인의 동기인데 이 부분이 작품 속 가장 큰 미스터리입니다.

 

작가는 그 미스터리의 핵심에 제이크의 아버지 제이콥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유명 화가였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린 제이콥은 아들 제이크와 오랜 기간 절연한 상태였는데

최근 끔찍한 사고를 겪은 탓에 결과적으로 제이크를 고향으로 불러들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일련의 연쇄살인에 대해 뭔가 아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치매 상태인 그의 언행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어 제이크와 독자 모두 혼란을 겪게 됩니다.

,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설정 중 하나는 뉴욕에서 온 제이크의 아내와 아들입니다.

제이크는 지금 현재 오랫동안 등 돌렸던 고향이자 끔직한 사건 현장에 있는 셈인데,

그런 곳에 가족이 나타났다는 건 곧 그들에게도 위기가 닥칠 거란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끔찍함과 충격으로 포장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끔찍함과 충격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외의 서사들이 탄탄해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 ‘누가, 어떻게, ?’라는 대목이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다 읽은 뒤에 공포든 여운이든 그 작품만의 미덕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블러드맨의 경우 작가가 의도한 끔찍함과 충격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이 그다지 놀랍지 않았고,

어떻게?’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통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충분한 설명 없이 마냥 끔직함과 공포에 대한 서술만 거듭하다가 막을 내린 듯 했고,

특히 엔딩은 정해진 분량이라도 있었던 듯 급하고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 느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운이고 뭐고 맛볼 틈도 없이 책을 덮어야만 했습니다.

 

,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인 제이크의 과거에 대한 설명은 반칙에 가까웠다는 생각인데,

당연히 초반부터 공개됐어야 할 중요한 정보를 중반이 넘어서야 반전처럼 내보인 대목에서는

놀라움보다는 어이없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엔딩이 희미하게나마 예측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이런 구성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각주역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심도 있는 비유나 은유를 위해 여러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지적 허영심이 과도하게 발휘된 것으로만 보였을 뿐

수시로 책읽기의 템포와 긴장감을 무너뜨린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끔찍함과 충격 면에서만 보면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역시 블러드맨에 못잖은데,

제가 의사 3부작을 좋아하는 이유는 끔찍함과 충격을 뒷받침한 튼튼한 서사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 의도, 수법은 물론 범인을 쫓는 주인공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독자가 충분히 긴장감을 갖고 몰입할 수 있게끔 설득력과 개연성을 갖췄다는 뜻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중에 이 작품을 떠올리면 산 채로 벗겨진 살가죽허리케인외엔

인상적으로 기억할 만한 뭔가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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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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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고백하자면 악스는 중도 포기한 작품입니다.

원래 중도 포기한 작품은 서평 자체를 쓰지 않는데,

왠지 악스는 이것저것 좀 할 말이 생각나서 짧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알라딘에서 이사카 고타로를 검색하면 처음에 68편의 리스트가 뜨지만,

만화, 편집본, 개정판 등을 제외하고 나면 30편의 작품이 국내에 출간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세어보니 이 작품까지 겨우 6편밖에 읽지 않았더군요.

그나마 대표작 중 한 편인 골든 슬럼버는 읽지도 못했구요.

그런데, 왜 늘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이라면 호감 또는 호기심을 가져왔을까, 따져보니

결정적인 한 작품, 사신 치바가 제게 너무 강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사신 치바전에 읽은 작품이 그래스호퍼였으니 연이어 두 작품에서 호감을 느낀 셈이고,

그 결과 이사카 고타로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로 만난 사신의 7부터 가장 최근에 읽은 화이트 래빗에 이르기까지

매번 왜 내가 이사카 고타로를 좋아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갖곤 했는데,

이번 작품 악스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골든 슬럼버를 비롯, 읽지 않은 그의 대표작들이 워낙 많은 상태에서

함부로 그런 의문을 가져선 안 되겠지만 악스는 제법 기대했던 작품이라 실망감이 더 컸고

그런 탓에 그의 작품을 중도 포기한 것은 물론 이런 서평까지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스는 겉으론 평범한 영업사원이자 세 식구의 가장이지만

실은 업계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유명한 20여년 경력의 살인청부업자 미야케가 주인공입니다.

당연히 그래스호퍼가 떠올랐고, 최근 재미있게 읽은 청부살인 작품들이 생각났는데,

제가 책장을 접은 2/3쯤까지는 청부살인 이야기는 잠깐씩 스쳐 지나듯 등장하기만 했고,

대부분은 아내에게 구박 받고 쩔쩔 매는 공처가 미야케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의뢰를 처리하고 늦게 돌아온 밤이면 아내를 깨울까봐 소리 나지 않게 야식을 먹고,

아내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만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을뿐더러,

아내의 발소리만 들으면 위가 오그라드는, 좀 과도한 공처가 캐릭터입니다.

물론 그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고, 그를 위해 업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가족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충실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청부살인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로 분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친구 만들기, 마당에 자리 잡은 말벌 집 없애는 이야기,

아내가 각인시킨 트라우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공처가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는 점입니다.

다음 챕터엔 뭔가 나오겠지, 기대하다가도 계속 이런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자

(가족을 지키기 위한 킬러의 분투를 다뤘을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챕터를 남겨둔 지점에서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중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톡 쏘는 유머와 한껏 비튼 은유는 언제 봐도 매력적입니다.

악스에서도 이런 그의 매력은 여전했지만

읽는 내내 인물, 사건, 감정 가운데 몰입해야 할 것을 전혀 찾지 못했기에

어떤 때는 그 매력적인 유머와 은유가 무슨 소용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 별점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더군요.

그의 매력적인 유머와 은유 때문일 수도 있고, ‘악스자체의 완성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쫓아가야 할 알맹이가 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는 호평을 하긴 어려웠습니다.

 

앞으로도 이사카 고타로를 포기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근거 없는 호감에 휘둘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신작보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작품들부터 마음을 비우고 도전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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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에 없었다
조너선 에임즈 지음, 고유경 옮김 / 프시케의숲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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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화려한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2016년 타임스에서 '올해의 범죄소설'로 선정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2017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불과 144페이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약간 짧은 중편이라고 할 정도의 소소한 분량인데,

그 안에 담긴 스릴러 서사는 거의 500페이지 급에 어울리는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마치 핵심 내용만 정리한 요약본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주인공 조는 전직 FBI요원이었지만 지금은 청부업자로 일하는 중년 남자입니다.

과거, 인신매매 조직의 냉동차에서 비참하게 죽은 수십 명의 중국소녀 사체를 목격한 뒤

그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해 FBI를 그만두고 청부업자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그가 다루는 주된 의뢰는 납치 또는 실종된 여성들을 찾는 일입니다.

그런 그가 상원의원의 납치된 어린 딸을 찾는 꽤 위험한 일을 맡게 되는데,

그 일로 인해 조 자신은 물론 주변의 인물들이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조는 이 납치극의 배후에 소아성애에 빠진 권력자들의 추한 욕망이 있음을 알게 되곤

자신이 아끼는 무기(망치)와 순수한 분노를 앞세워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합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의 공식에 충실한데다 요약본의 느낌이 들 정도로 짧은 분량이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재미 위주의 사건 나열에만 열중한 작품은 아닙니다.

특히 주인공 조가 뿜어내는 묵직한 매력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조는 꽤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연을 지닌데다 늘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이고,

어떤 지독한 참극 앞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하드보일드 캐릭터입니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조의 캐릭터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입체적으로 느껴진 것은

사족 하나 없이 압축적인 문장들만으로 효율적인 묘사를 이끌어낸 작가의 필력 덕분인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만한 필력에 이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이 더해진 장편이라면

유수의 스릴러 시리즈에 못잖은 명품이 태어났을 게 확실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량의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한 것도 사실인데,

사건은 너무 급하게 전개됐고, 그 결과 악당의 실체나 파워도 다소 불분명하게 보였고,

결국 너무 급히 먹느라 그 맛을 음미할 수 없었던 값진 요리같은 미련이 깊이 남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는 짧은 분량으로 인한 아쉬움이었습니다.

올해의 범죄소설로 선정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면 분명 후속작이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의 엔딩에 이은 뒷이야기와 조의 활약이 궁금한 저로서는

후속작 소식이 하루라도 빨리 들려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장편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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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여로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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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전의 맛이 진하게 밴 일본 미스터리를 만났습니다.

나쓰키 시즈코는 이미 ‘W의 비극’,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를 통해 만난 적 있는데,

두 작품이 각각 엘러리 퀸과 애거서 크리스티에 대한 오마주 또는 변주였다면

흑백의 여로는 오롯이 나쓰키 시즈코의 필력을 맛볼 수 있는 첫 기회라 꽤 기대가 됐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유부남 도모나가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여대생 리카코.

하지만 죽지 않고 깨어난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칼에 찔려 죽은 도모나가를 발견합니다.

범인으로 몰릴 게 뻔한 상황에서 리카코는 신고 대신 직접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도모나가의 아내 유키노를 의심한 끝에 잠복을 하던 리카코는

실종된 매형 이와타를 찾기 위해 역시 유키노를 감시하던 다키이와 극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남녀의 위험천만한 진실 찾기가 전개됩니다.

 

일단 이 작품이 1975년에 출간된 점을 감안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DNA감식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이다 보니

요즘이라면 현실성 없어 보이는 설정들이 꽤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없으니 사람 찾기나 서류 검색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고,

추격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질 위기인데도 휴대폰이 없으니 파트너에게 연락할 수 없거니와

지명수배된 리카코는 간단한 변장만으로도 꽤 오랜 기간 신분을 감출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런 아날로그적인 느낌들이 너무 좋았는데,

발달된 문명에 의존하는 요즘 장르물에 비하면 정말 인간적인 냄새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리카코와 다키이의 진실찾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난항을 겪게 되는데,

마치 문을 열면 새 문이 끊임없이 나타나듯 새 인물과 사실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살해당한 도모나가의 아내 유키노 주변에는 낯선 남자들이 맴돌곤 하는데,

리카코로서는 그중 누군가가 유키노와 짜고 도모나가를 살해한 것으로 보였고,

다키이로서는 그중 한 명이 실종된 매형 이와타가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추적 과정에서 도모나가, 유키노, 이와타의 뜻밖의 과거들이 하나씩 드러나는데다

예상치 못한 또다른 살인사건에 맞닥뜨리게 되자 리카코와 다키이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도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후쿠오카, 동북쪽으로 훗카이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을 돌면서

리카코와 다키이가 벌이는 진실찾기는 100% 아날로그적인 행보로 진행되는 탓에

때론 답답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경찰도 아닌 민간인 입장에서, 더구나 언제 정체가 들통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만

진실을 찾고 누명을 벗을 수 있는 리카코의 처지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 씻을 수 없는 죄, 일그러진 욕망, 모든 것이 덧없어 보이는 우울감 등

대부분의 인물들 배후에 자리 잡은 어둡고 씁쓸한 이력들 때문에

사건의 전모와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는 통쾌하고 깔끔한 느낌보다는

운명처럼 날아든 비극에 삶이 산산조각 나버린 인간들의 참담함이 더 강하게 배어있어서

다 읽은 후에도 꽤 진하고 오래 갈 것 같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다소 느리고 올드하더라도 고전의 맛을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는

1975년에 출간된 이 작품이 색다른 별미처럼 반갑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 겉멋에 치중한 채 현란하기만 할뿐 정작 서사는 텅 빈 요즘 미스터리에 질린 독자에게도

사건과 인간의 이야기를 잘 배합한 흑백의 여로는 고전 이상의 여운을 전해줄 것입니다.

부록으로 실린 나쓰키 시즈코의 방대한 출간목록을 보곤 그 양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 한국에 소개된 게 이 작품을 포함 4편밖에 없다는 점에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걸출한 대작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요즘,

나쓰키 시즈코나 요코미조 세이시 같은 대가들이 생각나는 건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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