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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가 ㅣ 불야성 시리즈 2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일본에서 1997년에 출간된 ‘진혼가’는 한해 앞서 출간된 ‘불야성’의 후속작입니다.
(이 뒤에 나온 ‘장한가’까지 3부작으로 완결되는 시리즈입니다.)
신주쿠 가부키초를 장악한 중국계 마피아들의 냉정하고 잔혹한 폭력의 세계를 그린 시리즈로,
그야말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통 피범벅인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육이 난무하는 마피아 액션만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반반(半半), 즉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류젠이는
중국계 마피아와 일본 야쿠자가 지배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가부키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또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당초 살인이나 조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던 류젠이는
가부키초 내 중국계 마피아의 핵심권력자이자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양웨이민으로 인해
인생이 갈래갈래 찢긴 것은 물론 자신의 연인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에서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했던 류젠이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가부키초로 돌아간다. 언젠가,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였습니다.
그리고 ‘진혼가’ 프롤로그에서 류젠이가 선전포고처럼 터뜨린 첫 한마디는
“그렇게 몸 안에 냉기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다린다.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 (연인이었던) 샤오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입니다.
‘진혼가’가 어떤 이야기를 다룰지 확실히 알려주는 예고임에 분명한데,
작가는 의외로 류젠이와 양웨이민을 잠시 한발 뒤로 물러서있게 만들어 놓곤
‘진혼가’만을 위한 특별한 두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양웨이민 휘하의 뛰어난 킬러 궈추성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퇴직형사 타키자와가 그들입니다.
궈추성은 양웨이민의 미션을 수행하던 도중 마피아 보스의 정부인 러지아리에게 빠져듭니다.
그녀는 궈추성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의붓누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궈추성은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됩니다.
부패형사 출신의 일본인 타키자와는 수하의 죽음의 진실을 캐내라는 마피아의 청부를 받지만
정작 그의 목표는 큰돈을 장만하여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경찰에게도, 야쿠자에게도, 마피아에게도 쫓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부여받은 미션보다 자신만의 목표에 한눈을 팔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조우하지만
그들은 이내 자신들이 류젠이와 양웨이민, 그리고 마피아의 꼭두각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가부키초를 패닉 상태에 빠뜨리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사랑’과 ‘돈’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벼랑 끝까지 치닫기 시작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이 마피아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큰 그림을 정교하게 그렸다면
‘진혼가’는 보다 개인적인 차원 – 궈추성과 타키자와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물론 폭력성과 선정성은 두 작품 모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하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불야성’이, 감정적 이입 면에서는 ‘진혼가’가 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다만, 인물간의 관계라든가 사건의 디테일에 있어 ‘진혼가’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많은 편인데
일단 설정 자체가 너무 복잡해서 좀처럼 사건의 얼개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았고,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적 교류 역시 다소 혼란스럽거나 억지스러운 점이 자주 보였습니다.
사실, 이 모호함과 억지스러움은 ‘누가 주인공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입니다.
‘형식적 주인공’인 궈추성과 타키자와가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끌어가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실질적인 주인공’은 류젠이와 양웨이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을 위해 ‘실질적인 주인공’의 비중을 조연에 가까울 정도로 낮춘 탓에
좀처럼 중심을 잡고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야성’ 역시 적잖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인물이 명확해서 집중도가 높았던 반면,
‘진혼가’는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불야성’이나 ‘진혼가’ 모두 워낙 폭력적인데다 성(性)과 관련된 노골적인 묘사도 많아서
비위가 약한 독자나 성적 도구로 묘사된 여성성에 반감을 가진 독자라면
꽤나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피아 액션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금세 완독할 수 있고,
재미 면에서는 같은 장르의 여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불야성’을 먼저 읽은 뒤에 ‘진혼가’를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텐데,
국내 출간된지 6년밖에 안됐음에도 시리즈 전체가 대부분 품절 상태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최근 발표된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결과를 보니
하세 세이슈의 신작 ‘蒼き山嶺’ (직역하면 ‘푸른 산봉우리’)가 18위에 올라있네요.
2013년 ‘장한가’ 이후 국내 출간작이 없어서 이 작품 역시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의 신작 소식만으로도 무척 반갑네요.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정보가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카페 ‘일본미스터리 즐기기’의 자명종 님께서 올리신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naver.com/mysteryjapan/3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