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가 불야성 시리즈 2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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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에서 1997년에 출간된 진혼가는 한해 앞서 출간된 불야성의 후속작입니다.

(이 뒤에 나온 장한가까지 3부작으로 완결되는 시리즈입니다.)

신주쿠 가부키초를 장악한 중국계 마피아들의 냉정하고 잔혹한 폭력의 세계를 그린 시리즈로,

그야말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온통 피범벅인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육이 난무하는 마피아 액션만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반반(半半), 즉 대만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류젠이는

중국계 마피아와 일본 야쿠자가 지배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가부키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또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당초 살인이나 조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던 류젠이는

가부키초 내 중국계 마피아의 핵심권력자이자 양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양웨이민으로 인해

인생이 갈래갈래 찢긴 것은 물론 자신의 연인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에서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했던 류젠이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가부키초로 돌아간다. 언젠가,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였습니다.

그리고 진혼가프롤로그에서 류젠이가 선전포고처럼 터뜨린 첫 한마디는

그렇게 몸 안에 냉기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다린다.

양웨이민을 죽이기 위해. (연인이었던) 샤오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입니다.

진혼가가 어떤 이야기를 다룰지 확실히 알려주는 예고임에 분명한데,

작가는 의외로 류젠이와 양웨이민을 잠시 한발 뒤로 물러서있게 만들어 놓곤

진혼가만을 위한 특별한 두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양웨이민 휘하의 뛰어난 킬러 궈추성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퇴직형사 타키자와가 그들입니다.

 

궈추성은 양웨이민의 미션을 수행하던 도중 마피아 보스의 정부인 러지아리에게 빠져듭니다.

그녀는 궈추성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의붓누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궈추성은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됩니다.

부패형사 출신의 일본인 타키자와는 수하의 죽음의 진실을 캐내라는 마피아의 청부를 받지만

정작 그의 목표는 큰돈을 장만하여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경찰에게도, 야쿠자에게도, 마피아에게도 쫓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부여받은 미션보다 자신만의 목표에 한눈을 팔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적으로 조우하지만

그들은 이내 자신들이 류젠이와 양웨이민, 그리고 마피아의 꼭두각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가부키초를 패닉 상태에 빠뜨리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벼랑 끝까지 치닫기 시작합니다.

 

전작인 불야성이 마피아간의 세력 다툼이라는 큰 그림을 정교하게 그렸다면

진혼가는 보다 개인적인 차원 궈추성과 타키자와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물론 폭력성과 선정성은 두 작품 모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하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불야성, 감정적 이입 면에서는 진혼가가 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다만, 인물간의 관계라든가 사건의 디테일에 있어 진혼가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많은 편인데

일단 설정 자체가 너무 복잡해서 좀처럼 사건의 얼개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았고,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적 교류 역시 다소 혼란스럽거나 억지스러운 점이 자주 보였습니다.

 

사실, 이 모호함과 억지스러움은 누가 주인공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입니다.

형식적 주인공인 궈추성과 타키자와가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끌어가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실질적인 주인공은 류젠이와 양웨이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을 위해 실질적인 주인공의 비중을 조연에 가까울 정도로 낮춘 탓에

좀처럼 중심을 잡고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야성역시 적잖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인물이 명확해서 집중도가 높았던 반면,

진혼가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불야성이나 진혼가모두 워낙 폭력적인데다 성()과 관련된 노골적인 묘사도 많아서

비위가 약한 독자나 성적 도구로 묘사된 여성성에 반감을 가진 독자라면

꽤나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피아 액션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금세 완독할 수 있고,

재미 면에서는 같은 장르의 여느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불야성을 먼저 읽은 뒤에 진혼가를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텐데,

국내 출간된지 6년밖에 안됐음에도 시리즈 전체가 대부분 품절 상태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최근 발표된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결과를 보니

하세 세이슈의 신작 山嶺’ (직역하면 푸른 산봉우리’)18위에 올라있네요.

2013장한가이후 국내 출간작이 없어서 이 작품 역시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의 신작 소식만으로도 무척 반갑네요.

‘201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정보가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카페 일본미스터리 즐기기의 자명종 님께서 올리신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naver.com/mysteryjapan/3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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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런던의 사설탐정 버니와 동업 중이던 22살의 코델리아 그레이는

버니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탐정사무소 대표를 맡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사설탐정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한 마디씩 거든다.

그러나 코델리아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고 드디어 첫 번째 의뢰가 들어온다.

한 유명한 과학자로부터 아들의 갑작스런 자살 원인과 배경을 밝혀 달라고 의뢰받은 것.

코델리아는 버니에게 물려받은 유무형의 자산을 장착하고 첫 의뢰자에게 달려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개글에 따르면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추리작가라는데,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검색해보니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몇 편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은 90년대에 출판됐다가 지금은 절판 상태입니다.

그녀의 대표 캐릭터는 런던 최고의 형사 아담 달글리시인데,

이 작품은 달글리시 시리즈가 아니라 스핀오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업자 버니가 달글리시의 부하였고, 또 막판에 달글리시가 카메오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리즈 자체는 읽어보지 못했어도 그가 꽤 매력적인 캐릭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모두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며 코델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진로를 만류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예리한 추리와 강철 같은 담력으로 첫 사건을 해결합니다.

과학자의 아들이 자살한 오두막에 머물며 그의 지인들을 탐문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탐정의 정석대로 조사를 진행하던 코델리아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단서에서 아들의 비밀스런 과거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지인들의 사소한 언행에서 아들의 사망 직전의 정황을 포착해냅니다.

결정적 단서를 찾아낼 즈음에는 괴한의 습격을 받지만

22살의 초보 탐정이라고는 볼 수 없는 강한 멘탈을 기반으로 위기를 벗어났고,

드디어 추악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1972년 작품이라 부지불식간에 (아날로그&올드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게 사실이고,

작품 전반적으로 보면 이 선입견이 그리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재미와 속도감을 겸비한 멋진 고전이라는 생각입니다.

지독한 영국식 유머나 풍자 없이도, 또 슈퍼히어로 같은 주인공 없이도

P.D. 제임스는 페이지를 술술 넘어가게 하는 매력적인 필력을 자랑했고,

22살의 코델리아는 당황과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초짜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동업자로부터 물려받은 탐정으로서의 재능과 돌직구 같은 과감성을 통해

장래 명탐정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선보입니다.

특히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난 엔딩은 자신만의 정의에 충실한 코델리아의 매력은 물론

탐정으로서의 그녀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도 꽤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든 대목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소 단선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실망감보다는 재능 있는 신인작가의 작품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앞섰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풍경이나 사람에 대한 지나치게 세밀하고 장황한 묘사가 잦아서

책읽기의 흐름을 뚝뚝 끊게 만드는 경우가 적잖았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스케일이나 무게감 면에서 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별 1개를 뺀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 소식이 궁금해서 소개글을 더 살펴보니 코델리아 시리즈는 두 편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도 이 작품 이후 10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출간됐다고 합니다.

코델리아의 탐정으로서의 성장기가 궁금했던 입장에서 무척 아쉬운 소식이지만

나머지 한 편이라도 한국에 꼭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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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김나연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작가 본인 말대로 반쯤은 에세이로, 반쯤은 소설로 읽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픽션이 아니라 직접 겪은 일들을 글로 표현했으니 에세이임에 분명하지만,

다분히 극적인데다 픽션 못잖은 굴곡과 감정을 지녔으니 소설이라 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에세이라고 하면 그동안 질릴 정도로 자주 들어온 힐링이란 단어가 즉각 떠오르겠지만

이 작품은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독자를 향한 근거 없고 무책임한 가식적 위로와 달리

유년기부터 30대까지 롤러코스터처럼 살아온 한 사람의 희로애락에 대한 고백을 통해

때론 공감을, 때론 웃음을, 때론 , 왜 이래?’라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야릇함을 선사함으로써

착하고 예쁘기만 한 힐링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쾌감(?)을 만끽하게 합니다.

 

세 개로 나뉜 챕터의 주제는 각각 가족, 연애, 그리고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후기에 따르면, 이 주제들은 작가를 그렇게 서럽게 만든원인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주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날 서럽게 만든 것들이라고 지목할만한,

그러니까 무척이나 보편적인 개념들입니다.

내게 너무 가까이 존재하지만 때론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힘든 가족,

행동, 표정, 말 한마디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절정과 파국으로 갈리는 연애의 속성,

그리고 굳이 설명 안 해도 내 인생 최고의 애증의 대상인 자기 자신...

 

일기장이든 블로그든 자신의 감정과 일상을 글로 남겨놓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누구나 가장 많이 활용할 주제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일기장에조차 솔직해지지 못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가족, 연애, 자신에 대한 소회를 도발적이라 할 정도로 민낯 그대로 드러낸 작가의 고백은

(그것이 공감이든 못마땅함이든 간에) 타인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일기장이나 싸이월드에 갖가지 감정을 쏟아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 역시 작가처럼 우울할 때 쓴 글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꺼내 읽어보면 문장과 단어는 너무 투박하거나 유치하거나 날것처럼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문장과 단어들을 자기검열하기 시작했고

명목은 정제와 세련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남의 이야기처럼 밋밋해진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욕설과 민망한 표현과 돌직구 같은 고백들로 채워진 이 작품을 보면서

오래 전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솔직했던 일기장이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특히 세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로 읽힐 것 같은데,

어느 세대가 됐든 한 10년쯤 지난 후에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아마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유치했어?”부터 이제야 이 감정을 알 것 같네.”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그것이 성장의 결과인지, 노화의 결과인지, 사회화의 결과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테니

혹시 궁금하다면 책장에 푹 묵혀놓았다가 다시 한 번 꺼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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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소리나무가 물었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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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내는 놀이.

15년 전 이 놀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실종되면서 놀이에 감춰진 무서운 진실이 드러난다.

놀이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의 얼굴과 자리를 내주고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

전통 가옥촌 도동 마을로 진입하는 국도변 갓길에서 빈 택시가 발견된다.

실종자 수사 전담 형사 차강효는 사라진 운전자 정국수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그와 관련된 인물들 중 이미 실종자가 여럿임을 알게 되고 이상함을 감지한다.

실종자들이 모두 같은 마을 출신의 친구들이라는 실마리를 따라 도동 마을로 찾아간 그는

15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발상도 독특하고, 거기에서 확장된 공포 서사 역시 특별함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악마와의 거래를 받아들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결국 그 거래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던 끝에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되고,

애초 악마와의 거래를 이끌었던 주인공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만

오히려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파국은 시시각각 주인공과 친구들을 막장으로 몰아갑니다.

 

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낸다는 기이한 의식,

그것의 힘을 빌려 친구의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이후 그것이 낸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거나 누구에게라도 놀이에 대해 언급할 경우

얼굴과 영혼을 빼앗긴 채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끔찍한 벌칙,

그리고,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려면 그것을 불러낸 자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비극적 설정 등

각종 호러물의 코드들이 뒤범벅된 작품인데,

거기에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이 개입한 미스터리 서사도 함께 전개돼서

마지막까지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데다

자칫 잘못 언급하면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인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도시괴담이 적절히 믹스된 호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7년에 읽은 전건우의 소용돌이가 자주 떠오르곤 했는데,

어린 시절 주인공과 친구들이 일으킨 특별했던 사건이 결국엔 큰 비극으로 이어졌고,

멈추지 않은 비극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을 다시 고향에 모이게 만들었으며,

업보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큰 상처를 감내해야만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는데,

무엇보다 놀이자체에 대한 설명이 때론 모호하고 때론 너무 복잡해서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의도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론 몰입도 저하라는 부작용이 더 커보였습니다.

후반부에 등장한 (‘놀이의 규칙과 비밀을 담은) 한 장의 그림은

꽤 중요한 단서이자 일종의 독자에게 내민 퀴즈같은 흥미로운 장치였지만

몇 번을 되읽어도 그 그림이 연상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형사 캐릭터도 다소 작위적으로 보여 아쉬웠는데,

하필 그의 주변에도 주인공 친구들처럼 의문의 실종을 당한 사람이 있었고,

그런 탓에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연쇄실종사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존재에 의한 범행이라는 가설까지 큰 갈등 없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스토리공모대전에서 수상한 걸 보면 영상화 가능성도 꽤 커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이해도 쉽고 몰입도도 높을 거란 생각입니다.

호러물을 읽는 건 좋아해도 보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취향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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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레퀴엠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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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시체배달부라는 별명까지 얻게 만든 어린 시절의 살인 이력이 폭로된 미코시바는 든든한 돈줄이던 기존 고객들을 잃고 폭력조직의 고문 변호사를 하면서 사업을 연명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의료소년원 시절 자신을 속죄의 길로 이끌었던 교관 이나미가 요양병원 보호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미코시바는 이미 선임된 국선변호사까지 끌어내려가며 이나미의 변호를 맡지만 이나미는 미코시바에게도, 판사에게도 자신의 죄를 제대로 처벌해 달라고만 할 뿐입니다. 미코시바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그 결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살인사건 이면의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 미코시바 레이지는 최강이자 동시에 최악의 변호사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어떤 중범죄를 저질렀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무죄 혹은 집행유예를 받아내는가 하면, 그만큼 힘 있고 부유한 의뢰인만 상대하며 돈을 밝힌다는 풍문을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살인자의 낙인이 찍혀 있기도 합니다. 소년 시절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곤 의료소년원에 수감됐고, 그곳에서 교관 이나미 다케오를 만나 속죄의 길을 걸은 끝에 변호사가 되긴 했지만, 전작인 추억의 야상곡에서 맡았던 사건으로 인해 그 과거가 온 천하에 폭로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미코시바가 평생의 은인이자 살인범으로 체포된 이나미의 변호를 맡게 된 건 그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은 물론 무척이나 비극적인 일입니다. 더더욱 미코시바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계속 처벌을 요구하는 이나미의 태도입니다. 냉정하고 엄격했던 교관 시절의 이나미를 떠올리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돼 무죄를 선고받을 만한 정황이라고 확신한 미코시바로서는 이나미가 왜 이렇게 처벌과 속죄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특히 이나미가 살해한 보호사가 과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피해간 인물인 탓에 미코시바는 소년이라 제대로 벌 받지 않았던자신을 떠올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처벌속죄입니다.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은 죄인을 인간이 처벌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것인가?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은 죄인의 속죄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혹시 가능하다면, 속죄란 어느 정도까지 실천해야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법이란 때론 처벌속죄에 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알량한 법조문의 말장난이나 해석의 방법 때문에 살인범이 무죄를 선고받기도 하고, 반대로 정당한 방어나 의로운 행위가 살인 또는 상해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처벌도 피하고 속죄도 거부한 채 살아가다가 이나미에게 살해당한 요양보호사, 살인자였지만 소년이란 이유로 처벌을 피한 뒤 속죄를 거쳐 변호사가 된 미코시바, 미코시바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 자신이 살인자가 된 이나미 등 이 작품 속 주요인물들은 처벌속죄라는 어렵고도 무거운 화두를 짊어진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도 후련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가슴 속에 돌을 하나 얹어놓은 것 같은 무거운 여운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엄중한 화두와 여운에 비해 전체적인 설계는 다소 아쉬워 보입니다. 살해된 요양보호사의 과거, 이나미의 불행한 가족사, 살인을 초래한 우연과 운명 등은 분명 극적으로 읽히기도 했고 반전의 맛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완벽하고 정교하게 짜인 나머지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를 위해 리얼리티가 희생된 느낌이랄까요?

 

, 전작에 비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미코시바의 모습도 위화감이 느껴졌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처벌을 요구하는 이나미의 태도도 현실감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이 역시 주제를 위한 의도적 설정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탓에 분명 롤러코스터를 타듯 흥분 가득한 책읽기를 경험하고도 다 읽은 뒤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나?’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재미와 아쉬움이 딱 반반씩 느껴진 작품이었는데, 주제에 대한 강박만 없었더라면, 또 인물들이 조금만 더 현실감을 지녔더라면 오히려 작가의 의도가 훨씬 더 강렬하게 독자에게 전달됐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미코시바 레이지의 캐릭터와 나카야마 시치리의 미스터리 서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당연히 앞으로 이어질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예전과 달라지진 않았지만, 주제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킨 일부 사회파 미스터리를 생각해 보면 이 시리즈의 앞으로의 행보가 살짝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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