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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1978년 겨울, 부유층의 귀중품이 보관된 ‘대여금고’를 운영하던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가
갑작스럽고도 석연찮은 이유로 파산하면서 1,300여 개의 대여금고는 먼지와 함께 잠든다.
어린 나이에 비서로 입사했던 베아트리스는 파산 직전 대여금고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그 때문에 목숨이 경각에 매달리는 치명적인 위기에 빠지고 만다.
20년 후, 매각이 결정된 은행건물의 정밀조사를 위해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가 투입된다.
건물 곳곳을 꼼꼼히 조사하던 그녀는 한 비서의 서랍에서 오래된 대여금고 열쇠를 발견한다.
이어 은행 곳곳에서 찾아낸 각종 서류와 메모들과 정체불명의 열쇠들을 통해
20년 전 은행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비밀에 점차 다가간다.
하지만 20년 전의 베아트리스처럼 아이리스 역시 비밀을 알아낸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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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페이지에 육박하는 꽤 두툼한 분량의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두 명의 화자에 의해 번갈아 진행되는데,
한 명은 1978년 은행 비서로 입사한 16살의 소녀 베아트리스이고,
또 한 명은 1998년 매각될 은행 건물의 조사를 위해 투입된 건축기술공학자 아이리스입니다.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이들은 은행을 둘러싼 거대한 부정부패와 비리는 물론
은폐된 살인사건의 비밀까지 쥐고 있는 ‘대여금고의 데드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스스로를 치명적인 위협에 빠뜨리는 닮은꼴의 운명에 처하고 맙니다.
“왜 그것들을 ‘데드키’라고 부르죠?”
“금고가 여러 해 동안 이용되지 않으면, 우린 그걸 ‘죽었다’고 해요.
우린 데드키를 이용해 죽어버린 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말하자면, 20년 전, 누군가 ‘죽은 대여금고’를 이용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그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거나, 스스로 잠적하는 등 큰 상처를 입었지만,
일부는 20년 동안 ‘대여금고의 비밀이 해제될 그날’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한 끝에
자신들의 탐욕을 완성하려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가 그들의 탐욕에 가장 큰 방해꾼인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설정 자체는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부유층의 대여금고에 얽힌 은행의 비밀을 캐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창구에선 손으로 전표를 기입하고 상사는 당연한 듯 비서를 희롱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은행과
모든 것이 컴퓨터로 제어되는 디지털 시대의 은행을 동시에 지켜보는 듯한 낯선 느낌과 함께
다가가지 말아야 할 비밀에 대한 호기심, 부정하고 부당한 자들을 향한 정의감,
그리고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어서
두 사람을 한 시대, 한 공간에서 콤비로 활약하는 자매나 동지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도리스(베아트리스의 이모), 맥스(베아트리스의 동료), 맥도웰 형사(맥스의 오빠),
카마이클(맥스의 단골 바텐더), 레이먼(은행 경비원) 등 적잖은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대여금고 사건과 크고 작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라
읽는 내내 주인공 못잖은 흡입력과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1978년과 1998년 두 무대에 모두 등장하기도 해서 더욱 관심을 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점은 ‘악당들의 정체와 범행 전반에 관한 모호한 묘사’입니다.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가 대여금고에 얽힌 은행의 비밀을 캐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반면,
정작 ‘죽은 대여금고’를 통해 부정을 저지른 악당들은 그 실체도, 목적도, 방법도 모호합니다.
그들은 협력자이면서 동시에 내분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누가 주범이고 누가 종범인지,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누가 누구와 연대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탐욕을 채우겠다는 건지,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열심히 비밀을 캐는 와중에도 도대체 누가 타격을 입게 되는 건지,
누가 두 주인공의 비밀 캐기를 전력을 다해 막는 것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물론 1978년 베아트리스를 궁지에 몰아넣은 자와 1998년 아이리스를 위협하는 자가 누군지,
또 20년이나 묵혔뒀던 대여금고를 왜 이제 와서 탐내는 건지 대부분 후반에 설명되긴 하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은행-투자자-행정관청 간의 복잡한 관계 위주로 설명된 탓에
결국 앞서 제기한 여러 모호함들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베아트리스와 아이리스는 목숨을 걸고 대여금고의 비밀을 밝히려 애쓰는데 비해,
그녀들을 위협하는 악당들은 끝내 애매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퇴장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디테일한 묘사와 촘촘한 이야기 설계, 20년을 넘나드는 매력적인 구성 등 미덕이 많았음에도
좀 박해 보이는 평점을 준 이유는 결국엔 ‘부실한 악당들’ 탓입니다.
데뷔작임에도 꽤 호평을 받았고, 유력한 상도 수상했다는데,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돋보인 만큼 혹시 신작이 나온다면 한 편쯤은 더 읽어볼 예정입니다.
이왕이면 구조공학자였던 작가의 전공이 다시 한 번 발산될 수 있다면 좋겠고,
특히 오래된 건물의 비밀을 소재로 삼는다면 기대감을 좀더 키워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