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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카멜레온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각색해 들려주는 라디오 DJ 기리하타의 프로그램은 꽤 인기가 있다.
하지만 멋진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추한 외모가 기리하타에겐 가장 큰 콤플렉스다.
심야방송 후 단골 바 ‘if’에서 각양각색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하루를 정리하는 게 그의 일과.
그러던 어느 날, 미카지 케이라는 수상한 여자가 비에 젖은 채 바를 찾아오는데,
자신의 팬이라는 그녀에게 기리하타는 엉겁결에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일로 인해 기리하타는 물론 바의 마담과 단골들까지 온갖 소동에 휘말리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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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핵심 코드는 ‘거짓말’입니다.
주인공 기리하타와 그를 곤혹스럽게 만든 수상쩍은 미녀 미카지 케이는 물론
단골 바 ‘if’의 모든 멤버들 모두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들은 상대를 속이거나 기만하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고,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라고 할까요?
기리하타는 외모콤플렉스 때문에 미카지 케이에게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한 대가로,
또 ‘if’의 멤버들은 기리하타의 거짓말에 동조하고 거짓 쇼까지 벌인 대가로
미카지 케이에게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한순간에 미카지 케이의 포로가 된 기리하타와 멤버들은 그녀의 요구사항을 듣곤 경악하지만
이내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대로 상당히 위험한 미션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카지 케이의 진심을 알게 된 멤버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도 하는데,
기리하타만은 미카지 케이가 끝까지 감추는 ‘뭔가’, 즉 그녀만의 거짓말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뭔가’ 때문에 모든 인물들이 큰 위기에 처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또는 ‘다분히 연극적인 인물과 설정이 뒤범벅된 소동극’에 가까운데,
현실적인 관점으로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이 자주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단골들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건물 4층의 바,
그런 곳에 출근도장을 찍듯 매일 같이 찾아와선 소소한 취기와 대화를 즐기는,
하지만 다들 하나 이상의 기구한 사연을 가진 듯한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멤버들,
또, 거짓말의 대가치곤 말도 안 되는 미카지 케이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
거기에 어딘가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웃음과 민망함을 내뿜는 작품 전반의 분위기 등
현실감 따위는 일찌감치 접어버린 듯한 우화에 가까운 설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라디오 디제이인 기리하타가 집착에 가깝게 소중히 여기는 게르마늄 라디오도 특이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한번 따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독자에 따라 이런 분위기와 설정에 대한 호불호가 꽤 갈릴 것 같긴 한데,
미치오 슈스케의 전혀 다른 감성의 두 작품(‘랫맨’, ‘외눈박이 원숭이’)밖에 못 읽은 탓에
원래 이런 분위기의 작가인지 아니면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인지 잘 모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호불호의 비율이 반반쯤 된 것 같습니다.
다만, 미치오 슈스케 본인이 밝힌 작의 - “웃고 울며 계속 재미있게 읽다가,
마지막에 그때까지의 재미를 훌쩍 뛰어넘는 결말이 기다리는 이야기.” - 에 대해서는
일부는 성공한 것 같지만 일부는 다소 과한 설정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외모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멋진 목소리의 디제이 기리하타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였지만
거짓말의 대가를 요구하며 기리하타와 바의 멤버들에게 무리한 미션을 요구한 미카지 케이나
그 요구를 (아무리 그 진심을 이해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상황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또, 마지막에 밝혀진 미카지 케이의 진실이나 바의 멤버들의 과거사 역시
어딘가 반전을 위한 반전, 엔딩을 위한 엔딩처럼 읽힌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제를 함축시킨 ‘투명 카멜레온’이라는 제목과 그에 대한 설명도
크게 공감하기 어려웠고 가슴에 쏙 맺히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작품과 흡사한 ‘오버센스 소동극’의 분위기를 느낀 적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더 소구력이 강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기리하타와 미카지 케이의 케미도 배우가 직접 연기하면 훨씬 더 매력적일 것 같고,
개성 강한 조연들 역시 더 빛을 발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올해 독서목표 중 하나가 ‘책장 속 먼지 쓴 책 구하기’인데,
그 가운데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도 포함돼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그의 진면목이 궁금해서라도 올해는 꼭 책등 위의 먼지를 털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