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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졘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첫 장을 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계도가 3페이지에 걸쳐 소개됩니다.
크게 보면 세 가문의 가계도인데 여기에 소개된 인물이 무려 40명입니다.
물론 주요인물은 20명 남짓이지만 시작부터 그 스케일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이야기 덕분에 이 복잡한 가계도는 쉽게 뇌리에 각인되고,
그 많은 인물들을 촘촘히 엮은 작가의 필력에 몇 번이나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뭇 산들의 꼭대기’는 사실 핵심적인 줄거리나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는 작품입니다.
룽잔진이라는 중국 북부의 가상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토박이든 이방인이든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인물들의 기구하고 복잡한 ‘이력서’ 같기 때문입니다.
사법경찰인 안핑, 도축업자인 신치짜, 룽잔진의 장(長)인 탕한청 등 세 가문이 중심인데,
각 가문에 속한 인물들의 사연들과 함께 살인-강간사건 용의자를 쫓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안핑의 집안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아버지 안위순 덕분에 영웅 호칭을 받습니다.
안핑의 딸 안쉐얼은 난쟁이라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죽음을 예지하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룽잔진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는 ‘정령’ 같은 존재입니다.
사형집행을 담당하는 사법경찰인 안핑은 직업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경계심을 사지만
영웅인 아버지와 정령인 딸 덕분에 그런대로 무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핑의 집안은 예기치 못한 사건과 사고로 인해 끔찍한 비극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그와 반대로 룽잔진에서 가장 유능한 도축업자로 손꼽히는 신치짜는
탈영병이라는 오명을 쓴 아버지 신카이류와 개망나니 아들 신신라이 때문에 곤경에 빠집니다.
영웅과 정령이 깃든 안핑의 집안과는 극과 극의 상황인 셈인데,
문제는 이 두 집안이 3대에 걸쳐 비극적인 갈등을 겪는다는 점입니다.
룽잔진의 권력자인 탕한청은 청렴하면서도 룽잔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관리로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유능함은 물론
아름다운 룽잔진이 무모한 개발논리에 의해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애향심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끝 모르는 탐욕의 화신이자 권력의 냄새에 예민한 아내와
의대 졸업 후 도시의 큰 병원 대신 작은 룽잔진의 보건소에 틀어박힌 딸 때문에 고민입니다.
작가는 이 많은 인물들의 현재와 함께 그들의 과거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세 가문의 선대들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는데,
그들이 겪은 고난, 그들이 일족을 이루게 된 계기, 인연과 악연이 거듭된 운명적 만남 등
다채로운 선대들의 과거사는 현재 후손들의 이야기에 못잖게 매력적입니다.
특이한 점은, 인터넷이나 PC방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 작품 속 ‘현재’가 현대인 게 분명한데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1970~80년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도시화와 환경 파괴, 불임 수술과 불법 장기매매, 매관매직, 영웅 만들기와 선전 선동,
총살 대신 독극물 주사로 바뀐 사형 집행방식, 매장을 금지하는 장례제의 변화 등
21세기보다는 20세기 중반에 어울리는 소재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나라의 작품을 막론하고 아날로그 시대를 그린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뭇 산들의 꼭대기’가 풍기는 시대적 느낌이 너무 좋았지만,
그래서인지 인터넷, PC방, 휴대폰 같은 현대의 이기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무척 낯설었습니다.
룽잔진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강간사건이 현재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긴 하지만,
사실 대단한 미스터리나 반전이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의 제각각의 사연과
그 사연에 얽힌 크고 작은 조연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중심입니다.
‘평범한 인간 군상이 만들어낸 웅대한 삶의 서사’라는 홍보카피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애초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언급했던 건데,
이런 식의 구성은 분명 묘하게 독자의 마음을 훔치는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반대로 취향이 안 맞는 독자라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 때문에
끝까지 인내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빠져 살다가 뉴스에서 본 짧은 소개글 덕분에 우연히 읽게 된 작품인데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대륙의 스케일을 맛볼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고,
다양한 인물들의 기구하고도 신산한 삶의 흔적들은 꽤 깊은 여운을 남겨주기도 했습니다.
뚜렷한 기승전결의 부재가 유일한 아쉬움인데
그게 이 작품의 미덕 가운데 하나이니 결국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인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특별하고도 오래 기억에 남을 간식을 맛봤다는 만족감이 더 컸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