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전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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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에도 시대, 마을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괴멸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집들은 남김없이 파손되었고 사람들은 전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조사하러 간 무사들까지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화상을 입은 채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 마을 소년에 의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 작품의 원제는 황신(荒神)입니다.

네이버에서 한중일 사전을 다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신이라고 할까요?

낯설기도 하고 애매해서 그런지 몰라도 번역 제목은 다소 직설적인 괴수전이 됐는데,

이 작품에는 원제와 번역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괴수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흉측한 모습과 극강의 파괴력을 지닌 괴수는

일본 동북지방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마을에 나타나

수많은 인명을 앗은 것은 물론 마을 자체를 초토화시켜버립니다.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한국영화 괴물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시리즈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에일리언도 자주 떠올랐는데,

이 두 작품은 물론 괴수전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똑같은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그릇된 탐욕과 악의가 그것입니다.

100여 년 전, 상대를 궤멸하기 위해 주술과 신의 힘을 빌려 괴물을 만든 이들은

자신들의 후대에 이 괴물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괴물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채 무차별적인 식인과 파괴를 자행하고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두 마을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물론 괴물을 만든 이들은 혹시라도 벌어질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막 방어선을 준비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극을 미리 막아낼 순 없었습니다.

 

6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는 괴물과 인간의 대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갈등, 100년 넘게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온 두 마을의 갈등은

괴물 못잖게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설정입니다.

왕래는커녕 살짝 경계만 넘어와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이던 고야마 번과 나가쓰노 번은

괴물의 등장으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지만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더 큰 갈등을 빚습니다.

하지만 각 번에서 괴물에 저항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힘을 모으면서

이야기는 극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거기에 더해 (괴물의 탄생에 개입했던) 가문의 저주를 물려받은 인물들의 비극이 드러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이야기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고 인물이나 서사 역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두께를 자랑하지만

괴수전은 한 번 잡으면 좀처럼 중간에 쉬어가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 자체를 못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취향이라 해도 괴수전황당한 괴물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미야베 미유키의 근작이자 현대를 배경으로 괴물이 등장하는 비탄의 문

분권된 1~2권 중 1권만 읽고 접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현대에 등장하는 괴물이라면 괴물에일리언처럼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비탄의 문은 제가 볼 때는 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순도 높은 판타지 설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이 훨씬 더 황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설정에 빨려 들어간 건 역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로서의 미덕들(재미와 반전 등)이 다소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월드 2의 모든 작품들을 애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시대물의 아날로그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야베 월드 2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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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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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오캇피키라는 직책명이 자주 눈에 띄곤 합니다.

작품 속 각주를 그대로 옮기면,

치안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인 요리키나 도신 밑에서 범인의 수색, 체포를 맡았던 직책인데,

공식적인 관리가 아니라 민간인으로서의 성격도 강해서 비교적 운신의 폭이 자유롭고,

특히 관할 주민들과 좀더 밀착 가능한 캐릭터라 시대물 미스터리에 단골손님이 된 듯 합니다.

 

주인공 모시치는 혼조 후카가와 일대를 맡고 있으며 일명 에코인의 나리라고도 불리는데,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할지역에서 벌어지는 대소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모시치는 시리즈물의 주인공치곤 너무 소탈해서 아쉬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시치 시리즈첫 편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나 이 작품 모두

뭔가 대단한 미스터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충격적인 반전을 다룬 것도 아닌,

말하자면,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나 평범한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라

어쩌면 모시치 같은 인물이 훨씬 더 주인공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가 일대에 떠도는 7개의 불가사의를 소재로 삼았다면,

맏물 이야기는 절기(節氣), 음식, 기구한 사연 등이 버무려진 현실적 일상 미스터리입니다.

초봄의 뱅어, 여름의 가다랑어, 가을의 단감 등 다양함 음식들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고,

절기마다 행해지는 전통적인 놀이나 관습들도 미스터리 곳곳에 흥미롭게 배치돼있습니다.

모시치가 마주친 사건들 역시 소소한 해프닝부터 잔혹한 살인사건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나름 기구하고 불가피한 사연들이 깔려 있어서 안쓰러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을 해결한 모시치가 통쾌해 하거나 한바탕 웃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비빌 언덕도 없는 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는 모시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혼조 후카가와의 수호신 같은 존재입니다.

영웅적인 주인공은 아니지만 모시치는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맏물 이야기는 미스터리로서의 충격적인 재미는 상대적으로 덜 한 편이지만,

모시치라는 인물을 통해 에도 시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보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한 미스터리 읽기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시치 만큼 흥미를 유발하는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

영험한 능력을 지닌 기도사로 추앙받는(하지만 모시치에겐 영 못마땅한) 10살 소년 니치도,

전직 무사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다리 위에서 밤새 유부초밥을 파는 수상쩍은 노점 주인,

그리고 그 노점 주인과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폭력배 두목 가쓰조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아홉 편의 단편 대부분에 게스트처럼 잠깐씩만 등장할 뿐이지만,

모시치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으면서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킵니다.

 

수록된 작품들은 1994년부터 2003년에 걸쳐 몇몇 잡지를 통해 연재됐다고 하는데,

덕분에 미야베 미유키의 10년에 걸친 성장과 변화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다만, “, 이 시리즈는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제대로 된 마침표 없이

모시치 시리즈가 더는 이어지지 않은 점은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시치를 비롯 흥미유발자인 세 인물에게 제대로 된 엔딩을 부여할 수 있는

멋진 후속작(이왕이면 장편이면 최고겠지만)이 뒤늦게라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이 2003년에 발표됐으니 벌써 16년이나 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치 시리즈의 멋진 완결을 바라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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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스토리콜렉터 72
스티브 캐버나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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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리우드의 톱스타 로버트 솔로몬이 아내와 경호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전 미국이 발칵 뒤집혔고 이 역대급 형사재판에 모두의 눈과 귀가 쏠립니다.

그런 와중에 조슈아 케인은 이 재판의 배심원이 되기 위해 기상천외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한편, 한때 알코올중독자에 사기꾼이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변호사가 된 에디 플린은

대형 로펌으로부터 솔로몬의 재판에 차석 변호인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 받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에디는 솔로몬의 변호를 전담하게 되고

전직 FBI 요원 하퍼를 비롯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 합니다.

 

● ● ●

 

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다 동명의 일본 미스터리(아시베 다쿠 )도 재미있게 읽어서

배심원 제도가 확고히 시행되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 관심이 갔습니다.

원제인 ‘Thirteen’은 엄밀히 말하면 열세 번째 배심원이라는 번역 제목의 의미보다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희대의 연쇄살인마의 살인행각 자체와 더 연관 있습니다.

하지만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이 된다는 설정을 생각해보면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조슈아 케인이라는 악당의 정체를 바로 공개합니다.

그리고 그가 로버트 솔로몬의 재판에 배심원이 되기 위해

애초 배심원 소환장을 받은 평범한 시민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곤 주인공 에디 플린이 솔로몬의 재판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과 함께

그가 어떤 변호사인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등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단이 된다는 설정부터 무척 파격적입니다.

악마의 가장 위대한 속임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믿도록 한 거요.”라는 서문은

단순히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완전범죄가 아니라

명백한 단서와 정황을 꾸민 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경찰에 넘김으로써

자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게 만든 케인의 범행 패턴을 단적으로 설명해줍니다.

 

한편, 주인공 에디 플린의 캐릭터는 여기저기 할리우드 히어로의 캐릭터를 조합한 느낌인데,

한때 알코올중독에 사기꾼이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멘토를 만나 변호사로 변신했지만,

결국 자신이 맡은 사건 때문에 수차례 위험에 처한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입니다.

변호사로서 에디 플린은 유죄가 분명해 보이는 의뢰인은 절대 맡지 않는,

그러니까 돈이나 명예보다는 반골 기질이 적절히 믹스된 정의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솔로몬을 진범으로 추정했던 에디는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그의 무죄를 믿게 됐고

이어 적절히 배치된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끝내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밝혀냅니다.

법정 안에 범인이 있다는 확신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라서 크게 시비를 걸 만한 전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할리우드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지능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로 중무장한 완벽한 연쇄살인마와

선하고 정의롭고 똑똑한데다 가족에 얽힌 상처를 품에 안고 있는 변호사의 대결은

법정은 물론 법정 밖에서도 치열한 수 싸움과 강도 높은 폭력을 통해 벌어집니다.

주인공의 분노를 유발하는 저열하고 치명적인 적들도,

,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매력적인 조연들도 잘 배치돼있어서

단순히 연쇄살인마와 변호사만의 투맨 쇼처럼 단선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독자에게만 정체를 드러낸 범인을 현실감 있게 또 개연성 있게 찾아내야 하는 주인공은

여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주인공보다 훨씬 고될 수밖에 없는데,

반면, 그만큼 독자 입장에선 쫄깃한 긴장감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거기에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 반전을 거듭하는 증인심문, 수상한 배심원단의 동태 등

법정물 특유의 서사들까지 더해진 덕분에 페이지는 정말 순식간에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재판이 열리기까지의 사전 설명이 다소 지루하고 설명적으로 읽혔다는 점인데,

그 대목의 분량을 조금만 줄였다면 더 임팩트 있는 전개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재판이 시작된 뒤부터는 이야기는 초고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는, 에디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동료들이 그를 구하는 장면들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되지만, 조금은 과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야기 외적인 아쉬움은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딱히 오타나 비문이 눈에 띈 건 아닌데, 문장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이 번역가의 작품 중 디온 메이어의 페닉스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썼던 서평에도 거듭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했다.”라며,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놓았더군요.

0.5개가 빠진 큰 이유 중 하나가 번역 때문인 건 분명합니다.

원작 자체가 매력이 없다면 몰라도 이 작품의 경우 좀더 충실한 번역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에디 플린이라는 매력적인 변호사 캐릭터가 이 한 작품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후속작이 나온다면 정말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조슈아 케인에 맞먹는 엄청난 악당이 등장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구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에디 플린의 새 이야기가 빨리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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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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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지망생 칸나가 유명 화가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임상심리사 유키는 이 사건을 책으로 내자는 의뢰를 받곤, 그녀를 면회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유키는 칸나의 변호인이 시동생이자 오래전 특별한 사이였던 가쇼라는 걸 알곤 당황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그와 함께 칸나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칸나의 진술은 매번 모호하고, 어머니와 친구들은 그녀를 허언증 환자라고 단언한다.

유키는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해 칸나의 성장 과정을 알아내는데 몰두하고,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되는 것을 발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여러 장르가 혼재된 듯한 작품입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칸나의 동기와 살의를 추적하고 재판 과정까지 그린 미스터리가 기본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유년기에 당한 직간접적 학대의 후유증과 상처를 그린 심리소설이기도 하고

또 세 남녀(그것도 형 부부와 시동생 사이)의 미묘하게 뒤엉킨 애증도 다루고 있습니다.

 

임상심리사 유키가 칸나의 주변 인물들과 과거사를 취재하는 과정은 다소 느리고 답답합니다.

당사자인 칸나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답변만 거듭하고 있고,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칸나에 대해 너무나도 상이한 진술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은 단서에서부터 끈질기게 앞길을 찾던 유키가

칸나가 초등학생 시절에 겪은 학대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급물살을 탑니다.

물론 일반적인 미스터리처럼 명쾌하고 선명한 전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학대 자체가 직접적인 경우도, 간접적인 경우도 있는데다 학대의 주체도 명확하지 않아서

이 대목부터는 심리소설 같은 모호한 분위기가 더 짙어지기도 합니다.

 

칸나가 왜 아버지를 살해했나? 의도적인 살인이 맞나? 무엇이 살인의 발화점인가?’

아버지를 죽인 칸나의 미스터리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10여년 전부터 이어진 임상심리사 유키와 변호사 가쇼의 특별한 관계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깊은 상처로 인해 함부로 몸과 마음을 굴리던 유키는

자신과 닮은꼴인 가쇼를 만나면서부터 갑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지만,

지독히도 냉소적이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가쇼에게 도리어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그의 형 가몬을 만나 결혼에 이릅니다.

형수-시동생의 관계로 10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두 사람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한 적 없지만

우연히도 칸나의 사건에 함께 연루되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사실, 읽는 내내 무거운 돌 하나가 가슴 한쪽에 놓인 듯 편치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주요 인물 대부분이 가장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수시로 자신의 숙주를 괴롭혀왔습니다.

직간접적인 성적 학대는 물론 함부로 다뤄지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등

그들이 겪은 상처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결과가 비참하기는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미스터리의 당사자인 칸나도, 임상심리사가 된 유키도, 유키에게 상처를 준 가쇼도

어떻게 보면 상처에 관한 한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칸나의 재판 시퀀스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독자에게 씁쓸한 여운을 남길 것만 같았고,

역시나 예상대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상처와 치유 등 그 어느 것도 경계가 불분명한,

하지만 그래서 현실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드는 엔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깔끔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좀 답답하게 읽힐 것이고,

심리묘사가 강조된 묵직한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인상적인 책읽기가 될 작품입니다.

또 독자에 따라 아버지를 죽인 칸나의 이야기에 이입될 수도,

칸나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직시하게 된 유키와 가쇼의 이야기에 이입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 됐든 사건보다는 심리에 집중해야 진가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행간까지 꼼꼼히 읽어가며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겨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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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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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버려진 연립에서 부패한 시신 한 구가 발견된다.

희생자는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는 보건복지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는 사지가 묶인 채 굶주림과 탈수증상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명백히 원한에 의한 살인 사건이라 여겨졌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 피해자는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던 중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된 현직 지방의회 의원의 시체가 추가로 발견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최근 1년 반 동안(20177~) 무려 13편의 나카야마 시치리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북로드와 블루홀6가 독점한 나카야마 시치리 출간에 북플라자까지 (이 작품으로) 가세했네요.

봇물처럼 출간되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가운데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입니다.

미코시바’, ‘와타세’, ‘고테가와등 그의 주요 시리즈가 사이타마 현과 도쿄가 무대였다면,

이번 작품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이 남아있는 센다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과거 보건복지사무소에 근무했던 두 남자가 아사(餓死)라는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하자

미야기 현경의 도마시노는 피해자들의 과거를 추적하던 중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 일본의 보건복지, 특히 기초생활수급이라든가 생활보호대상자의 실태가 얼마나 참혹한지,

담당 공무원과 극빈층 사이에 얼마나 큰 갈등과 대립이 있는지,

,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가 몰고 온 예상치 못한 보건복지의 사각지대가 얼마나 큰지 등,

연쇄살인의 배후에 자리 한 일본의 그늘진 곳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 유능한 형사가 아니더라도 이 사건의 용의자는 쉽게 특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카야마 시치리답게 막판에 반전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역시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 시점쯤엔 쉽게 추리가 가능한 대목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미스터리보다는 메시지에 더 주력한,

즉 사회파 미스터리이긴 해도 일종의 사회고발성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말하자면, 나카야마 시치리는 누가 범인?’ ‘?’라는 미스터리의 기본적 질문보다는

이런 참극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급격하게 늙어가는 일본 사회, 그중에서도 대지진의 여파로 극빈층이 급증한 센다이에서는

한정된 재원, 폭주하는 복지신청, 늘어나는 부정수급, 공무원의 자의에 의한 대상자 선정 등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만한 요소가 나날이 늘어가는 상태였고,

그런 와중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씨앗 역시 이곳저곳에 흩뿌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씨앗 중 특별히 위험하고도 강렬한 것 하나가 오랜 시간 동안 증오심을 키운 끝에

탈수와 아사라는,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방법을 동원한 살인으로 발전했다는 설정은

비단 일본이나 센다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역시 곧 마주칠, 아니 이미 마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다룬 사건 자체는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잔혹한 미스터리와 놀라운 반전을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해도 메시지가 좀 과하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대로 사회고발성 다큐멘터리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그 나름대로 미덕과 의미를 갖췄다는 점 역시 사실입니다.

아쉬움도 분명 있지만 생각하고 고민해봐야 할 숙제를 남긴 작품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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