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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배심원 ㅣ 스토리콜렉터 72
스티브 캐버나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할리우드의 톱스타 로버트 솔로몬이 아내와 경호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전 미국이 발칵 뒤집혔고 이 역대급 형사재판에 모두의 눈과 귀가 쏠립니다.
그런 와중에 조슈아 케인은 이 재판의 배심원이 되기 위해 기상천외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한편, 한때 알코올중독자에 사기꾼이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변호사가 된 에디 플린은
대형 로펌으로부터 솔로몬의 재판에 차석 변호인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 받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에디는 솔로몬의 변호를 전담하게 되고
전직 FBI 요원 하퍼를 비롯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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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다 동명의 일본 미스터리(아시베 다쿠 作)도 재미있게 읽어서
배심원 제도가 확고히 시행되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 관심이 갔습니다.
원제인 ‘Thirteen’은 엄밀히 말하면 ‘열세 번째 배심원’이라는 번역 제목의 의미보다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희대의 연쇄살인마의 살인행각 자체와 더 연관 있습니다.
하지만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이 된다는 설정을 생각해보면
나름 센스 있는 번역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조슈아 케인이라는 악당의 정체를 바로 공개합니다.
그리고 그가 로버트 솔로몬의 재판에 배심원이 되기 위해
애초 배심원 소환장을 받은 평범한 시민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곤 주인공 에디 플린이 솔로몬의 재판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과 함께
그가 어떤 변호사인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등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범죄를 완성하기 위해 배심원단이 된다는 설정부터 무척 파격적입니다.
“악마의 가장 위대한 속임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믿도록 한 거요.”라는 서문은
단순히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겠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완전범죄가 아니라
명백한 단서와 정황을 꾸민 뒤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경찰에 넘김으로써
자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게 만든 케인의 범행 패턴을 단적으로 설명해줍니다.
한편, 주인공 에디 플린의 캐릭터는 여기저기 할리우드 히어로의 캐릭터를 조합한 느낌인데,
한때 알코올중독에 사기꾼이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멘토를 만나 변호사로 변신했지만,
결국 자신이 맡은 사건 때문에 수차례 위험에 처한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인물입니다.
변호사로서 에디 플린은 유죄가 분명해 보이는 의뢰인은 절대 맡지 않는,
그러니까 돈이나 명예보다는 반골 기질이 적절히 믹스된 정의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솔로몬을 진범으로 추정했던 에디는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그의 무죄를 믿게 됐고
이어 적절히 배치된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끝내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밝혀냅니다.
‘법정 안에 범인이 있다’는 확신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라서 크게 시비를 걸 만한 전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할리우드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지능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로 중무장한 완벽한 연쇄살인마와
선하고 정의롭고 똑똑한데다 가족에 얽힌 상처를 품에 안고 있는 변호사의 대결은
법정은 물론 법정 밖에서도 치열한 수 싸움과 강도 높은 폭력을 통해 벌어집니다.
주인공의 분노를 유발하는 저열하고 치명적인 적들도,
또,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매력적인 조연들도 잘 배치돼있어서
단순히 연쇄살인마와 변호사만의 투맨 쇼처럼 단선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독자에게만 정체를 드러낸 범인을 현실감 있게 또 개연성 있게 찾아내야 하는 주인공은
여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주인공보다 훨씬 고될 수밖에 없는데,
반면, 그만큼 독자 입장에선 쫄깃한 긴장감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거기에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 반전을 거듭하는 증인심문, 수상한 배심원단의 동태 등
법정물 특유의 서사들까지 더해진 덕분에 페이지는 정말 순식간에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재판이 열리기까지의 사전 설명이 다소 지루하고 설명적으로 읽혔다는 점인데,
그 대목의 분량을 조금만 줄였다면 더 임팩트 있는 전개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재판이 시작된 뒤부터는 이야기는 초고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는, 에디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료들이 그를 구하는 장면들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되지만, 조금은 과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야기 외적인 아쉬움은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딱히 오타나 비문이 눈에 띈 건 아닌데, 문장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이 번역가의 작품 중 디온 메이어의 ‘페닉스’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썼던 서평에도 “거듭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했다.”라며,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놓았더군요.
별 0.5개가 빠진 큰 이유 중 하나가 번역 때문인 건 분명합니다.
원작 자체가 매력이 없다면 몰라도 이 작품의 경우 좀더 충실한 번역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에디 플린이라는 매력적인 변호사 캐릭터가 이 한 작품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후속작이 나온다면 정말 큰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조슈아 케인에 맞먹는 엄청난 악당이 등장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구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에디 플린의 새 이야기가 빨리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