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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평점 :
연인 사이인 남녀가 모텔에 체크인했다.
얼마 후, 여자는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며 119 신고를 요청한다.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죽었고, 여자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검찰은 계획적인 보험 살인으로 보고 사형을 구형했다.
사건 정황과 법의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좌우 배석판사들은 합의과정에서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을 거친 판결이냐?”고...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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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국민들의 법 감정’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 선고됐을 때나
명백히 유죄라고 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판결이 나올 때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판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라며 공분하고,
언론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달곤 합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입니다.
요점은 “피고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인데
말하자면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이 원칙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합니다.
주인공인 부장판사 현민우는 설령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더라도
정황과 추론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히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배석판사 정남희는 피고가 명백히 범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또 다른 배석판사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피고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있는 사건만 존재한다면 판사는 참 편한 ‘직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판사라면 절대 맡고 싶지 않은 골칫덩어리입니다.
사건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모텔방에서 벌어졌고,
애초 사고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검 없이 시신이 화장된 뒤였고,
시간도 많이 흘러서 관련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몸에 ‘살인의 흔적’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 때문에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혼란을 겪던 부장판사 현민우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보인 모습이나 피해자 가족의 진술 등 정서적인 면에 더 끌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배석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사실, 판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이런 사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소위 몇 가지 원칙이란 게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 판사에게는 곤란함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회피의 도구로,
흉악범에게는 극적인 면죄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거꾸로 무고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도구이기도 하죠.
결국 이 원칙을 누가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인 판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피고는 유죄? 무죄?”, “진범은 따로 있나?” 등의 미스터리 대신
오히려 ‘판사論’에 가까울 정도로 판사들의 고뇌와 다양한 모습들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진기의 극적인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놀라운 반전들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엔딩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는데,
‘젤리 살인사건’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겪은 부장판사 현민우가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재판에서 보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마지막에 그가 받은 편지 속 사연(스포일러라 이 정도만^^)은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가 아닌 현실감 있는 판사의 이야기는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진기의 매력은 역시 꼴통(?) 캐릭터와 독한 미스터리의 조합인 게 분명합니다.
꽤 오래 소식이 없는 ‘고진 시리즈’와 ‘진구 시리즈’를 올해는 꼭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