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짓말 마틴 베너 시리즈
크리스티나 올손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다소 직설적인 의견이 포함돼있으니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틴 베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꼬여낼 수 있는 바람둥이 변호사.

하지만 가족 모두 책임을 회피한, 죽은 여동생의 딸을 키우는 가슴 따뜻한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마틴 베너가 피의자의 자살로 이미 종결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자신까지 용의자로 몰리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드는 하드보일드 드라마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스웨덴 작품이지만 지금까지 읽은 북유럽 스릴러와는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수시로 내리는 비 외에는 딱히 북유럽의 풍광을 느끼기도 어려운데다

서사 역시 대중성과 오락성이 강한 영미권 작품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인 변호사 마틴 베너의 캐릭터가 이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데,

다분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데다 물질과 욕망에 충실한 할리우드 주인공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 애인이자 현재는 친구이며 언제든 잠자리를 함께 하는 변호사 루시와 동업 중입니다.

두 사람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서로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를 허용하는 이상한 관계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언제든 애정과 긴장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마틴 베너가 의뢰받은 사건은 좀 특이합니다.

다섯 건의 연쇄살인을 자백한 것은 물론 범인만 아는 단서들까지 진술했던 여자가

공판 하루 전날 갑자기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그 오빠라는 남자가 찾아와 동생의 무고함을 밝히고 사라진 조카를 찾아달라고 한 것입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자살한 여자라면 더는 사건성도, 파헤칠 것도 없다고 마틴은 판단했지만

자료들을 훑어보던 중 미심쩍은 부분들을 발견하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조사를 시작합니다.

마틴의 조사는 스웨덴은 물론 여자가 첫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미국 텍사스까지 확대되는데,

그 과정에서 마틴은 오히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엄청난 범죄조직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의 초반 1/3은 별 5개가 충분한 매력적인 전개를 보이지만,

그 뒤로 점점 매력이 떨어지면서 엔딩에서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반전의 가능성이 낮은 어려운 사건을 맡은 마틴이 의욕적인 출발을 하는 지점까지는

마틴 베너 시리즈가 새로운 필독 목록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왠지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는 느낌과 함께,

작가가 꼬아놓은 복잡한 설정들이 점점 억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클라이맥스 이후에 설명되는 사건의 실체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고,

스케일과 볼륨감을 키우기 위해 동원된 거대 범죄조직은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으며,

범행을 고백하고 자살한 여자의 사연 역시 예상치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뭐랄까.. 알고 보면 단순한 구도인데 복잡하게 보이게끔 억지로 꼬아놓은 느낌이랄까요?

, 함께 조사에 나선 마틴과 루시는 탐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는 환경에 갇혀 있었고,

나름 예리한 추리를 하긴 해도 특별한 반전을 끌어낼 정도는 아닙니다.

기대했던 주인공이 무력한 모습 끝에 다소 애매하게 엔딩을 맞은 대목은 가장 아쉬웠습니다.

 

마틴 베너 시리즈 2탄을 기대하게 하는 열린 결말이라고 출판사가 공개적으로 소개했으니

이 작품의 엔딩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고 언급해도 스포일러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2을 기대하게 만드는 긴장감 넘치는 결말이라기보다는

좀 허무하고 약간은 찜찜함까지 느껴지는 결말이라 과연 후속작을 읽게 될지 의문입니다.

오랜만에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났지만 허술한 서사 탓에 그 매력을 만끽하지 못한 셈인데,

말 그대로 용두사미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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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부인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아날로그와 에로틱이 뒤섞인 듯한 묘한 뉘앙스의 제목과 표지에 끌려 집어든 작품입니다.

기대한대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무척 클래식한 만연체의 문장과 함께

‘19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성적 담론으로 꽉 찬 작품입니다.

 

제국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풋내기 고교생 지로가

자신의 집 별채에 머물고 있는 백작부인과 함께 보낸 기기묘묘한 하루를 다루고 있고,

거기에 덧붙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끼어듭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한 가지 줄거리만으로 요약해낼 수 없는 압도적인 스펙트럼을 지녔고,

옮긴이의 말의 부제는 이상한 나라의 지로라고 할 만큼 줄거리 소개가 곤란한 작품입니다.

 

상하이에서 온 고급 창부’, ‘전쟁 스파이’, ‘지로 할아버지의 첩의 소생

다양하지만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괴소문에 휩싸인 정체불명의 백작부인은

지로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자신이 겪은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들려줍니다.

그녀는 남자의 고환을 짓바수는특기를 습득하게 된 사연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 특기를 직접 실행했던 화려한 전력을 들려주기도 하고,

여자를 안기만 해도 사정해버리는 지로를 실컷 놀리거나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백작부인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지닌 고교생 지로 역시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집니다.

곧 전쟁터로 끌려갈 자신의 운명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세상의 균형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는 역시 미성년자인 사촌여동생 호코와 이상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백작부인에 대한 호기심 중 성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호색한처럼 망동을 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 작품에서 내내 성기에 테러(?)를 당하는 참사를 겪는데,

이 언밸런스한 캐릭터 설정 때문에 독자는 수시로 예상치 못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이 작품에는 성과 성기에 관한 꽤나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의 성기는 아주 폭력적이거나 거꾸로 무기력하게 파괴 또는 거세당하는 양면성을 보이고,

여자의 성기는 관찰의 대상 또는 성숙미라는 약간은 소극적인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지로의 성기가 야구공이나 백작부인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테러를 당한 뒤

하녀, 사촌여동생, 친구의 엄마 등에게 간호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장면에선

혹시 이 작품이 (출판사 소개대로) 남근 조롱 또는 권력 전복의 메시지를 시사하는가 싶지만,

사실 딱히 그렇게만 읽힌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 연합군과의 대결을 앞둔 일본의 불안한 정세, 곧 전쟁터로 끌려갈 운명인 지로의 불안감,

백작부인의 과거사에 등장하는 유럽에서의 참혹한 전쟁 상황 등을 보면

이 작품이 언뜻 반전(反戰)을 다룬 것 같아 보이지만 역시 그렇다고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성애 소설도, 페미니즘 소설도, 반전(反戰) 소설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기승전결 구성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명확히 그리는 방식이 싫다.

독자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재미있게 읽어주면 좋겠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전쟁이나 성적 담론에서 굳이 어떤 메시지를 찾는 건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 설정도 이 작품의 판타지적 매력을 더하는데,

특히 백작부인과 지로가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호텔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공간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발산합니다.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옮긴이의 말의 부제가 이상한 나라의 지로!’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한 줄로 함축한 가장 적절한 부제라는 생각입니다.

 

무척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남들에게 적극 추천하기도 애매한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흥미를 느낄 수도, (성적인)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다,

장황하게 쓴 서평대로 이 작품의 미덕이나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요구대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재미있게 읽는것이 적절한 책읽기 방법이라면

이 작품의 미덕과 주제는 읽는 사람마다 전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독자들의 느낌과 해석이 무척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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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봄의 제사 - 무녀주의 살인사건
루추차 지음, 한수희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한무제 원년, 옛 초나라 땅 운몽의 관씨 집안을 찾은 장안 호족의 딸이자 무녀 오릉규는

초나라의 대부라 불리던 굴원이 실은 무녀였으며 일생 남장여자였다.”라는 대담한 학설로

한때 초나라 국가 제사를 맡았던 관씨 일가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안 그래도 제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 오릉규와 관씨 집안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그런데 다음 날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만다.

관씨 집안은 천재에 가까운 해박함을 지닌 오릉규에게 사건 조사를 부탁하지만,

관씨 집안의 막내딸이자 오릉규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노신은 오릉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 ● ●

 

기원전 100년 한나라 무제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독특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고대 중국의 다양한 시문과 경전, 예법과 문화가

방대한 분량에 걸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작품이지만 다소 낯설고 복잡한 설명들이 곁들여진 탓에

독자에 따라 꽤 골치 아프거나 혼란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중국에서도 현학 기서’ ‘현학 추리서라는 별칭이 붙었다는데,

작가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임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10대 소녀라는 점도 눈에 띄는데,

호족의 딸이지만 장녀란 이유로 결혼도 못하고 무녀가 되어 제사를 주재해야 하는 오릉규,

옛 귀족 집안의 막내딸로 고향인 운몽을 벗어나 본 적 없이 소극적 삶을 살아온 관노신,

하인 신분이지만 주인인 오릉규보다 더 보수적이고 원론적인 가치관을 지닌 소휴,

4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뒤 피폐해진 채 목숨을 이어가는 관약영 등

기원전 100년이라는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소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무녀, 제사, 권력, 여성의 지위, 살인사건 등 다양한 코드들과 연관돼있는데,

막판에 밝혀지는 각각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캐릭터 이상으로 놀라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4년의 시차를 두고 관씨 집안에서 벌어진 두 개의 연쇄살인사건이 미스터리의 핵심인데,

기본적으로 오릉규와 관노신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며 진범 찾기에 나서는 구조입니다.

대부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와 단서, 알리바이나 목격담 등에 의존하긴 하지만,

이들의 추론은 비단 물질적인 증거나 단서에 국한되지 않고,

난해한 시문과 경전, 복잡다단한 제사예법과 문화, 무녀의 역할 등

꽤 고차원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까지 동원하곤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인데,

안 그래도 복잡한 고대 중국의 명멸의 역사는 물론 각종 시문과 경전까지 끌어들인데다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알 수 없는 제사무녀가 꽤 중요한 소재로 설정돼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미스터리만 쫓아다니기 급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 굴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

마치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도의 시험문제를 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밀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여러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미스터리의 외연이 확대된 건 맞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 역시 앞서 언급한 난해한 소재들을 이해 못한 채 페이지를 넘겨왔다면

다소 난감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왕성한 지식욕을 자랑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다.”고 언급했지만,

역시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모르고선 제 맛을 만끽하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는 접할 때마다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무척 인상 깊게 남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전례도 없고 다시 만나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를 한 뒤 다시 읽어본다면

어쩌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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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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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인 남녀가 모텔에 체크인했다.

얼마 후, 여자는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며 119 신고를 요청한다.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죽었고, 여자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검찰은 계획적인 보험 살인으로 보고 사형을 구형했다.

사건 정황과 법의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좌우 배석판사들은 합의과정에서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을 거친 판결이냐?”...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위 국민들의 법 감정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 선고됐을 때나

명백히 유죄라고 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판결이 나올 때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판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라며 공분하고,

언론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달곤 합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입니다.

요점은 피고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인데

말하자면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이 원칙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합니다.

주인공인 부장판사 현민우는 설령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더라도

정황과 추론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히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배석판사 정남희는 피고가 명백히 범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또 다른 배석판사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피고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있는 사건만 존재한다면 판사는 참 편한 직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판사라면 절대 맡고 싶지 않은 골칫덩어리입니다.

사건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모텔방에서 벌어졌고,

애초 사고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검 없이 시신이 화장된 뒤였고,

시간도 많이 흘러서 관련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몸에 살인의 흔적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 때문에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혼란을 겪던 부장판사 현민우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보인 모습이나 피해자 가족의 진술 등 정서적인 면에 더 끌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배석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사실, 판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이런 사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소위 몇 가지 원칙이란 게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 판사에게는 곤란함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회피의 도구로,

흉악범에게는 극적인 면죄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거꾸로 무고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도구이기도 하죠.

결국 이 원칙을 누가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인 판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피고는 유죄? 무죄?”, “진범은 따로 있나?” 등의 미스터리 대신

오히려 판사에 가까울 정도로 판사들의 고뇌와 다양한 모습들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진기의 극적인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놀라운 반전들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엔딩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는데,

젤리 살인사건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겪은 부장판사 현민우가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재판에서 보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마지막에 그가 받은 편지 속 사연(스포일러라 이 정도만^^)은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닌 현실감 있는 판사의 이야기는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진기의 매력은 역시 꼴통(?) 캐릭터와 독한 미스터리의 조합인 게 분명합니다.

꽤 오래 소식이 없는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를 올해는 꼭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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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살인사건 봉제인형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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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아파트에서 서로 다른 여섯 사람의 신체 부위를 꿰매서 이어 붙인 시신이 발견된다.

희생자들의 정체도, 그들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미궁에 빠질 무렵,

런던 경시청의 울프 형사에게 편지 한 통이 전달된다.

그 편지는 또 다른 여섯 명의 이름과 날짜가 적힌 살인예고장.

울프는 희생자들의 신원을 찾으면서 동시에 살인예고장 속 인물들을 보호하려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희생자만 늘어날 뿐 범인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작은 단서에서 찾아낸 희생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울프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언뜻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물론 사건의 성격이나 범인의 캐릭터 등 서사는 전혀 다르지만,

여섯 명의 사체를 훼손하여 봉제인형처럼 만든 범인의 광기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에서 느낀 으스스함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울프는 본명인 윌리엄 폭스 대신 약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런던 경시청 형사입니다.

유능한 경찰이긴 하지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매몰되는 캐릭터인데,

4년 전에는 자신이 체포한 연쇄 방화살인범이 무죄판결을 받자 법정에서 그를 폭행했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 감금과 강등까지 감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봉제인형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울프의 강박증이 또다시 도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봉제인형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맞은 편 건물에서 발견된데다

봉제인형의 손가락이 자신의 아파트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파트너였던 백스터와 풋내기 형사인 에드워즈의 집요한 탐문은

봉제인형이 된 희생자들이 과거 울프가 다뤘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밝혀내는데,

문제는 그 시점부터 울프 본인마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진범의 정체와 사건의 경위가 모두 밝혀지는 2/3지점까지는 대체로 재미있게 읽힙니다.

봉제인형처럼 끔찍하게 꿰매어진 시체, 그 봉제인형을 구성하는 희생자들의 신원 찾기,

살인예고장 속에 거론된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을 놓고 대치하는 범인과 경찰의 대결,

주인공 울프를 둘러싼 런던 경시청 내의 정치적 갈등과 부당한 압력,

그리고 다채로운 경찰 캐릭터에 더해 선정적으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 등

다소 고전적이면서도 잔혹성과 속도감을 겸비한 설정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 3개라는 제법 짠 평점을 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울프라는 주인공이 있지만 정작 그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중요한 탐문과 단서는 울프보다 조연들이 더 열심히 다니고 찾아낸다는 얘깁니다.

울프와는 연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에 있는 다혈질 형사 백스터를 비롯

어리바리한 듯 보이지만 나름 집요함과 추리력을 지닌 신참 형사 에드워즈,

울프와 함께 현장을 뛰었던 관리직 시몬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핀레이 등이 그들인데,

그렇다고 올프가 그 시간에 좀더 중요한 미션을 수행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엔딩을 보면 울프가 왜 그리 안 보였는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납득하긴 어렵네요.)

 

잘 보이지도 않던 주인공이 갑작스레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면

아무래도 그 대목은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그 점이 짠 평점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막판에 드러난 봉제인형 살인사건의 실체와 거기에 울프가 연루된 정황에 대한 설명은

아무리 되읽고 다시 생각해봐도 반전을 위한 반전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가장 기피해야 할 방식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이란 느낌이었고,

결국 울프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2016년 런던도서전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후한 평점을 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에 비해 마무리가 허술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알라딘 평균 평점이 별 4개인 걸 보면 재미있게 읽은 독자도 있다는 뜻이니

저의 짠 평점 때문에 미리 실망하지 말고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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