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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중후한 컬러와 얌전한 디자인의 표지에 새겨진 미묘한 뉘앙스의 제목 ‘호텔 로열’에 끌려
사쿠라기 시노와 처음 만난 이후로 벌써 다섯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예전에 읽은 작품들이 대부분 훗카이도 동부의 소도시 구시로를 배경으로 했다면,
‘별이 총총’은 삿포로, 아사히카와, 오비히로, 구시로, 네무로, 루모이, 오타루 등
거의 훗카이도 전역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여년이란 길고 묵직한 외양을 지니고 있고,
그 위로 사키코-지하루-야야코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수록작 9편 가운데 어머니 사키코가 첫 챕터를, 딸 야야코가 마지막 챕터를 장식할 뿐
나머지 이야기의 몸통은 쓰카모토 지하루의 일생입니다.
더구나 지하루는 어머니 사키코, 딸 야야코와는 아주 미미한 분량을 통해서만 만날 뿐이라,
‘모녀 3대 이야기’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운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지하루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시점에서 서술된 수록작은 단 한 편도 없다는 점입니다.
지하루는 매 작품마다 나이를 먹어가며 크고 작은 조연 정도로만 등장합니다.
즉, 길든 짧든, 깊든 얕든 지하루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는 물론 그들이 지하루에게, 지하루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들려줍니다.
이런 방식의 주인공 묘사는 오히려 궁금증과 몰입감을 더 고양시키는 효과를 내는데,
독자 입장에서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와 감정을 추정해야 하는 것도,
행간 그리고 챕터와 챕터 사이의 공백에 숨은 그녀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도,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것보다 더 깊고 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어린 딸 지하루를 친정에 맡긴 채 방치한 친엄마,
이웃의 여고생 지하루를 임신시킨 철없는 대학생 아들 때문에 멘탈이 붕괴된 어머니,
스트립댄서가 되겠다는 지하루에게 자신의 물건들을 물려주는 스트립클럽의 간판 댄서,
자존심도 명예욕도 없이 살다가 자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지하루와 결혼한 남자,
지하루의 두 번째 결혼상대인 연하남과 지하루가 낳은 딸 야야코를 키우게 된 시어머니,
30대가 된 지하루의 시(詩) 스승이자 지하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공무원 출신 시인,
지하루의 친엄마의 마지막을 지키는 인물로 40대가 된 지하루와 비극적인 만남을 가진 남자,
지하루에게서 소설적 영감을 받아 하룻밤동안 그녀의 과거를 듣게 된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작품 속 지하루는 13살 중학교 1년생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인생을 보여줍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주기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인물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대체로 ‘고립’ 또는 ‘단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하루가 만난 사람들뿐 아니라 사키코-지하루-야야코 3대 모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 문장들 가운데 일부를 뽑아내 이 모호한 ‘고립, 단절’의 개념을 설명해보면,
‘도리를 일탈하고, 정이 희박하고, 서로가 서로를 순순히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이며,
애정이라는 저주 같은 강요는 원치 않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끈끈함이나 질척거림이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 따위는 주고받기도 싫고, 버리거나 버림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지독히도 이기적이거나 냉정하거나 관계 부적응자처럼 같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외롭고 안쓰러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또, 모녀 3대는 물론 지하루가 만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악인’은 없습니다.
다들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중에는 오히려 지하루에게 상처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그 관계들로부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받은 지하루의 일생은
곁에서 지켜만 보기에도 너무 힘들고 지난해 보여서,
예전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애틋함과 연민의 감정이 담긴
안쓰러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막장에 가까운 일그러진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홍보카피로도 활용된) “일그러졌어도 너무 슬퍼도 인간은 살아간다.”는,
다소 낙관적이고 희망이 깃든 문장이 도무지 이입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문장 - “다 잘 됐다는 마음이 들었어.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각자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서 원하는대로 살다가 죽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 역시
같은 맥락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번역가 양윤옥은 “모든 관계의 끈을 놓쳤거나 놓아버린 사람이 깊은 상처를 긍정하고
그 속을 마음대로 훨훨 걸어간 이야기다.”라고 요약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역시 ‘긍정’도 ‘마음대로 훨훨’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일본 드라마를 본 뒤의 안타까움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고, 읽기 힘든 소설이란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 면에서만 보자면 정반대로 사쿠라기 시노의 여느 작품보다 뛰어납니다.
전작들이 소도시 구시로를 뒤엎은 안개 속 풍경처럼 애잔하고 먹먹한 느낌을 전해줬다면,
‘별이 총총’은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통속적이거나 사건성이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지하루의 삶을 지켜보는 와중에 너무 심난한 여운을 느낀 나머지
‘긍정’과 ‘희망’이란 정리와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 불평을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매번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작가 중 한 명이 사쿠라기 시노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두 편 남아있지만,
아까워서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 특별한 음식처럼 마냥 뒤로만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18년 12월에 일본에서 ‘빛까지 5분’이란 신작이 나왔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오키나와가 배경이란 소식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에선지 삿포로에서 오키나와로 옮겨간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과연 훗카이도를 벗어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이 어떤 ‘빛’을 발할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