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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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도진기의 합리적 의심을 읽었는데,

그 작품이 판사들이 겪는 여러 딜레마 중 하나인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각색한) 미스터리 픽션을 통해 그렸다면,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의 판결 논리에 대한 도진기의 재해석을 담은 논픽션 작품입니다.

 

듀스 김성재의 사망, 이태원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등

일반인들이 많이 들어본 30여개의 실제 사건들의 판결문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문화와 예술에 있어 법의 잣대라든가 상고법원을 비롯한 판사 조직 내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때 판사였으며 이젠 변호사로서 외부에서 판사 조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도진기가

그만의 비판적인 논리와 시각으로 속 시원하고 통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판결 결과에 대한 설명 또는 비판이라면 도진기 개인의 취향수준에 그쳤겠지만,

이 작품은 판결이 아니라 판결 논리를 분석하고 따지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판결 안의 추론 과정마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늘 옳다는 보장이 없고, 얼마든지 헤집어볼 수 있다.

그래야 판결이 졸지 않고, 외곬 논리는 도태된다.

 

한 건을 제외하곤 모든 사건의 1, 2, 3심 판결문을 다 구해 읽어보았다.”는 말대로,

도진기는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없었던 판결들의 이면을 꼼꼼히 설명합니다.

어떤 이유로 하급심과 상급심이 다른 판결을 내린 건지,

다른 판결의 근거는 무엇이며 과연 절차와 원칙에 충실한 판결이었는지,

그것이 국민의 법 감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데,

간혹 여기서 소설적인 상상을 더해본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다소 못마땅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 판결에 대해 자신만의 추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분량의 제한 때문에 한 사건 당 할애된 페이지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새삼 하나의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판사들이 겪는 여러 가지 딜레마,

, 심신상실(미약), 정당방위, 합리적 의심, 양날의 검과 같은 엄격한 절차등과 함께

일사부재리, 배심원제, 상고법원 문제, 태부족한 판사 수 등

판사 조직의 현실적인 문제까지 친절하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서

지금까지는 다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판사 조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심정적으로는 유죄라고 생각하지만, 절차와 원칙을 따르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 ‘생활인으로서의 자아와 판사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는 상황이 제법 자주 등장하는데,

결국 그들 역시 사람이고, 일반인들과 똑같은 딜레마를 겪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100% 명확한 증거와 단서 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박살낼 수도 있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를 수반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역시 절차와 원칙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판사 조직 안에도 게으르거나 부정하거나 영달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목소리가 크거나, 트러블 없이 무리 없이 사건을 처리하거나,

일보다는 인간관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혜택과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 작품이 판사 조직 안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켕기는 데가 하나라도 있는 자에게는 서늘한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부록처럼 실린 가벼운 글들도 눈에 띄었는데,

특히 최인훈의 광장’, 오츠이치의 ‘GOTH’,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

도진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들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고,

자신의 데뷔작 홍보카피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를 제안했었다는 고백은

비록 농담이었다고는 해도 도진기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였습니다.

 

논픽션이긴 해도 미스터리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도진기의 팬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재미와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변호사로 변신한 이후 오히려 신작 소식이 뜸한 게 무척 아쉬웠는데,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든 그의 픽션 소식이 얼른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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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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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후한 컬러와 얌전한 디자인의 표지에 새겨진 미묘한 뉘앙스의 제목 호텔 로열에 끌려

사쿠라기 시노와 처음 만난 이후로 벌써 다섯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예전에 읽은 작품들이 대부분 훗카이도 동부의 소도시 구시로를 배경으로 했다면,

별이 총총은 삿포로, 아사히카와, 오비히로, 구시로, 네무로, 루모이, 오타루 등

거의 훗카이도 전역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여년이란 길고 묵직한 외양을 지니고 있고,

그 위로 사키코-지하루-야야코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수록작 9편 가운데 어머니 사키코가 첫 챕터를, 딸 야야코가 마지막 챕터를 장식할 뿐

나머지 이야기의 몸통은 쓰카모토 지하루의 일생입니다.

더구나 지하루는 어머니 사키코, 딸 야야코와는 아주 미미한 분량을 통해서만 만날 뿐이라,

모녀 3대 이야기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운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지하루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시점에서 서술된 수록작은 단 한 편도 없다는 점입니다.

지하루는 매 작품마다 나이를 먹어가며 크고 작은 조연 정도로만 등장합니다.

, 길든 짧든, 깊든 얕든 지하루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는 물론 그들이 지하루에게, 지하루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들려줍니다.

이런 방식의 주인공 묘사는 오히려 궁금증과 몰입감을 더 고양시키는 효과를 내는데,

독자 입장에서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와 감정을 추정해야 하는 것도,

행간 그리고 챕터와 챕터 사이의 공백에 숨은 그녀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도,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것보다 더 깊고 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어린 딸 지하루를 친정에 맡긴 채 방치한 친엄마,

이웃의 여고생 지하루를 임신시킨 철없는 대학생 아들 때문에 멘탈이 붕괴된 어머니,

스트립댄서가 되겠다는 지하루에게 자신의 물건들을 물려주는 스트립클럽의 간판 댄서,

자존심도 명예욕도 없이 살다가 자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지하루와 결혼한 남자,

지하루의 두 번째 결혼상대인 연하남과 지하루가 낳은 딸 야야코를 키우게 된 시어머니,

30대가 된 지하루의 시() 스승이자 지하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공무원 출신 시인,

지하루의 친엄마의 마지막을 지키는 인물로 40대가 된 지하루와 비극적인 만남을 가진 남자,

지하루에게서 소설적 영감을 받아 하룻밤동안 그녀의 과거를 듣게 된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작품 속 지하루는 13살 중학교 1년생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인생을 보여줍니다.

짧게는 5, 길게는 10년 주기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인물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대체로 고립또는 단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하루가 만난 사람들뿐 아니라 사키코-지하루-야야코 3대 모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 문장들 가운데 일부를 뽑아내 이 모호한 고립, 단절의 개념을 설명해보면,

도리를 일탈하고, 정이 희박하고, 서로가 서로를 순순히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이며,

애정이라는 저주 같은 강요는 원치 않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끈끈함이나 질척거림이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 따위는 주고받기도 싫고, 버리거나 버림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지독히도 이기적이거나 냉정하거나 관계 부적응자처럼 같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외롭고 안쓰러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 모녀 3대는 물론 지하루가 만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악인은 없습니다.

다들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중에는 오히려 지하루에게 상처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그 관계들로부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받은 지하루의 일생은

곁에서 지켜만 보기에도 너무 힘들고 지난해 보여서,

예전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애틋함과 연민의 감정이 담긴

안쓰러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막장에 가까운 일그러진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홍보카피로도 활용된) “일그러졌어도 너무 슬퍼도 인간은 살아간다.”,

다소 낙관적이고 희망이 깃든 문장이 도무지 이입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문장 - “다 잘 됐다는 마음이 들었어.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각자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서 원하는대로 살다가 죽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 역시

같은 맥락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번역가 양윤옥은 모든 관계의 끈을 놓쳤거나 놓아버린 사람이 깊은 상처를 긍정하고

그 속을 마음대로 훨훨 걸어간 이야기다.”라고 요약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역시 긍정마음대로 훨훨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일본 드라마를 본 뒤의 안타까움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고, 읽기 힘든 소설이란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면에서만 보자면 정반대로 사쿠라기 시노의 여느 작품보다 뛰어납니다.

전작들이 소도시 구시로를 뒤엎은 안개 속 풍경처럼 애잔하고 먹먹한 느낌을 전해줬다면,

별이 총총은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통속적이거나 사건성이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지하루의 삶을 지켜보는 와중에 너무 심난한 여운을 느낀 나머지

긍정희망이란 정리와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 불평을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매번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작가 중 한 명이 사쿠라기 시노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두 편 남아있지만,

아까워서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 특별한 음식처럼 마냥 뒤로만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1812월에 일본에서 빛까지 5이란 신작이 나왔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오키나와가 배경이란 소식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에선지 삿포로에서 오키나와로 옮겨간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과연 훗카이도를 벗어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이 어떤 을 발할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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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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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형진은 늦은 밤 집 앞에서 수상한 사내와 마주친다.

사내는 갑자기 형진에게 불을 뿜고, 형진 가족이 살던 원룸 건물까지 송두리째 태워버린다.

흉측한 몰골이 된 채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진은 경찰과 언론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 하나 입에서 불을 뿜는방화범의 존재를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형진은 화상을 입은 몸으로 노숙 생활을 전전하며 홀로 범인을 뒤쫓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진실 찾기를 돕겠다는 기자 김정혜와 함께

정체불명의 방화범은 물론 악랄한 모방범을 잡기 위한 사투에 돌입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방화범을 소재로 한 스릴러 작품입니다.

멀쩡한 청년이 졸지에 방화로 인해 집과 동생을 잃고 괴물 같은 화상 자국만 얻게 됐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홀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끝에

8년 만에 진범의 단서를 잡아내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형진은 방화사건 이후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갑니다.

애초 주민의 실화로 판정된데다 경찰과 언론 모두 자신의 진술을 허황된 거짓으로만 여기자

형진은 스스로 소방관이 되어 방화범을 찾을 생각도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곤 합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만 몰아세우는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던 형진은

스스로 방화범이 되어 세상에게 복수하고픈 유혹을 강렬히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형진에게 협업을 제안한 건 한때 잘 나갔던 기자 김정혜입니다.

형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종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그건 곧 바닥까지 추락한 기자로서의 위상을 복구시켜줄 무기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진에겐 상대해야 할 두 명의 악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박살낸 방화범이고, 또 하나는 방화범 못잖게 끔직한 모방범입니다.

방화범이 일련의 목표물을 설정하고 완벽한 준비를 통해 참사를 일으킨다면,

모방범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불쇼를 벌이고 다닙니다.

그 외에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의 형 형문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형문은 철든 이후 단 한 번도 형진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방화사건 이후 거의 의절한 채 홀로 법조인으로 성공의 길을 간 인물입니다.

그런 형문에게 괴물 같은 형상을 한데다 방화범으로까지 몰린 동생 형진은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존재입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주인공이 조력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 끝에 악당을 응징한다는 설정은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이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물이든 사건이든 반전이든 뭔가 한 가지 신선한 설정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독자의 흥미나 만족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개연성의 부족때문입니다.

,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 대목들에서 전혀 혹은 다소 그럴 듯 해보이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작품에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마다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의 허술함이 엿보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몇 가지만 두루뭉술하게라도 뽑아보면...

철근까지 녹일 정도의 특별한 물질을 사용한 방화의 흔적이 있을 텐데

왜 경찰과 소방당국은 형진이 살던 원룸 건물의 화재를 주민의 실화로 단정했을까?

왜 모 방송사는 누구도 믿지 않는 형진을 소재로 개국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아무리 특종이 간절해도 왜 정혜는 아무도 믿지 않는 형진을 특종의 계기로 선택했을까?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서울시장 자리를 노리겠다는 정치인 설정은

과연 2019년이라는 시점에 어느 정도의 현실감이 있는가?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잘 나가는 로펌변호사 형이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모습은 과연 개연성이나 현실감이 있나?

 

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작품이라고 출판사도 소개하고 있고,

한국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때문에 가능하면 격려의 서평을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허술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더 약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문장 하나하나의 디테일은 힘도 있고 매력도 있지만,

보다 거시적인 부분, 즉 이야기의 설계 과정에서 좀더 현실감을 고민해야 될 것 같고,

특히 스릴러라면 인물과 사건 모두 도구적으로, 작위적으로 설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글빨이 느껴지는 작가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계개연성만 탄탄해진다면 얼마든지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서평을 통해 좀더 강하게 단련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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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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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월드 2막 중 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2008년에 출간된 흑백

17세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의 첫 편입니다.

이후 안주’, ‘피리술사’, ‘삼귀까지 모두 네 편이 이어지는데,

미야베 월드 2막의 포문을 연 오하쓰 시리즈가 사이코메트리 소녀 오하쓰를 앞세웠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 오치카는 남의 이야기, 특히 괴담을 경청하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주인공 본인이 직접 나서서 뭔가 해결하는 서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겪은 기괴하거나 참담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동시에 자신도 그를 통해 정화되고 위로를 받는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얼핏 큰 얼개만 보면 다소 심심하지 않을까, 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오치카의 이야기가 네 작품이나 나온 걸 보면

잔잔하고 평이해 보이는 구조 속에 더 극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 때문에 에도에 사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오치카는

우연히 숙부 대신 접대한 손님의 어두운 과거를 들어준 일로 인해 뜻밖의 미션을 맡게 됩니다.

바로 숙부가 손님과 바둑을 두던 흑백의 방에서 낯선 이들의 괴담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숙부 이헤에는 오치카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녀가 고향에서 겪은 상처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저자거리에 괴담 대회를 열겠으니 자신의 가게로 찾아오라.”는 소문을 냈고,

이후 오치카는 몇몇 손님들을 만나 잔혹하거나 기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범죄자가 된 형을 외면하던 동생이 형의 죽음 이후 뒤늦은 회한에 빠지는 이야기(‘만주사화’),

사람의 혼을 끌어들이는 기괴한 저택의 이야기(‘흉가’),

오치카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남긴, 고향에서 겪은 참혹한 죽음의 이야기(‘사련’),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남긴 크나큰 저주에 대한 이야기(‘마경’),

그리고 앞선 이야기들의 종합편이자 오치카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단원(‘이에나리’)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오치카의 미션은 사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전부입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처럼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 원혼을 달래려 나서는 게 아니라

추억, 상처, 회한 등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내밀한 사연을 지닌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단원인 이에나리에서 오치카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뛰어들어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자들이 연루된 죽음의 진실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오치카의 매력은 이 사람이라면 뭐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믿음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괴담이기도 하지만

출판사 소개글대로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인 오치카 본인 역시 고통스러운 상처를 갖고 있는데,

이 상처가 타인의 참혹한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조금씩 치유된다는 점은

무척 아이러니하면서도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

정체도 모르면서 두렵다고 도망쳐 다니기보다는 그 편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라는,

오치카 본인의 고백은 이런 설정을 잘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영혼이 갇힌 거울, 죽음의 꽃무더기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얼굴 등

흑백에 담긴 판타지는 은근하면서도 동시에 세고 독한 코드들을 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녀 오하쓰 이야기 못잖게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독자에 따라 수록작 전체에 깔려있는 판타지 설정에 대한 호불호가 다를 수도 있지만,

미야베 월드 2은 바로 그런 판타지 때문에 최고의 매력을 지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미스터리나 반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에도 시대라는 특별한 배경 속에서 전개되는 판타지 괴담은

여느 미스터리나 호러물과도 차별화된 서사의 힘과 재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은 오치카가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음 작품인 안주는 오래 전에 읽은 기억대로라면 흑백과는 사뭇 다른 톤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작가가 오치카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좀 가벼운 이야기를 다룬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 기억대로 안주에서는 오치카가 더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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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대어 케이스릴러
김나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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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인 한태현과 그의 아내 이서린은 2년 전 추락사고로 현재 코마 상태.

그 중 이서린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최근 4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경찰로부터 남편이 연쇄살인 용의자라는 말을 들은 서린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시동생이자 오랜 친구인 정호의 도움으로 퇴원한 뒤 남편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달리 남편에겐 또 다른 모습이 있었고 이에 서린은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2년 전 연쇄살인과 똑같은 수법의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부랴부랴 재수사에 나서고,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서린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 ● ●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꽤 여러 겹의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는 작품입니다.

코마상태에 빠져 있는 남편의 진실을 찾아가는 아내,

10여 년 전의 끔찍한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복수의 순간만 기다리는 한 여자,

타고난 기질과 습득된 잔혹함으로 중무장한 사이코패스,

죄책감과 분노와 약물에 찌든 통제 불능의 조현병 환자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전개됩니다.

 

어쩌면 다들 평범하고 무해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인물들이지만

누군가는 추악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타고난 기질에 더해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하필 자신을 찾아온 운명 같은 저주 때문에 본의 아니게 괴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 누군가는 그 괴물들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한 남자 때문에

끔찍한 괴물들이 들끓는 세상으로 끌려들어간 이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찾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10여 년 전의 끔찍한 사건이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제법 풍성해집니다.

무관한 듯 보였던 인물들이 운명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2년 만에 동일한 방식의 새로운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은

우연과 운명이 직조해낸 끔찍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밝혀집니다.

 

일단 이야기도 독하고 캐릭터도 워낙 강렬해서 잘 읽히는 작품입니다.

여러 겹의 사건과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혼란스럽지 않게 잘 설계돼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너무 급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소 무리하거나 개연성 없는 상황을 만든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가령, 2년 만에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서린을 찾아온 형사는

(독자에게 정보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짜고짜 서린을 취조하듯 몰아붙입니다.

, 아직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남편의 동생인 정호는 (서린이 진실찾기에 나서게 하기 위해)

아직 근육에 힘도 붙지 않았고 영양상태도 양호하지 않은 서린을 급하게 퇴원시킵니다.

그래놓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희주를 투입하기 위해) 자신의 여친 희주에게

시동생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묘한 사이인 형수 서린의 간호를 부탁합니다.

, 자해와 폭력성이 위험한 수준인 조현병 환자가 가족의 요청으로 손쉽게 퇴원하는가 하면,

특별한 역할도 없는 형사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가슴 아픈 가족사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인물들을 빨리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체로 상식적이지 못해 보였고,

일부 인물들은 어떻게든 극단적으로, 독하고 세게, 그래서 독자의 관심을 끌도록 그리기 위해

다소 이입하기 어려운 비현실적 캐릭터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수, 기억상실, 연쇄살인, 소시오패스 등 잔혹한 코드들이 독자에게 현실감을 획득하려면

사건이나 상황이나 캐릭터가 정말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데,

작가의 욕심(?)이 과해서였는지 몇몇 대목에서 허술하거나 극단적인 설정이 눈에 띄었고

그 덕분에 수시로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건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신인작가와의 만남은 무척 반가웠고,

다음 작품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포장보다는 현실감과 서사의 깊이에 더 방점을 찍은,

그래서 단단하고 내실 있는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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