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주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평점 :
‘안주’는 ‘흑백’에 이어 ‘괴담을 들어주는 여자 오치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에 연루됐던 오치카가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던 중
다른 사람들의 괴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남들의 비극을 듣고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장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오치카의 첫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흑백’이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괴담을 담았다면,
모두 네 편이 수록된 ‘안주’는 따뜻한 괴담과 비극적 괴담을 골고루 섞어 놓았습니다.
주변의 물을 고갈시키는 신(神)과 일심동체가 된 소년의 애틋한 사연을 다룬 ‘달아나는 물’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폐가의 혼이 끝내 요물로 변한 이야기를 다룬 ‘안주’가 따뜻한 괴담이라면,
쌍둥이에게 내린 저주와 비극을 다룬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는 해피엔딩임에도 섬뜩했고,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폐쇄된 마을에서 벌어진 참혹한 복수극을 다룬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긴장감이나 괴담 자체의 흥미에 있어선 ‘흑백’이 다소 매력적인 게 사실이지만,
‘안주’는 오치카와 미시마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서 좀더 정감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순서도 그렇고, 오치카가 듣는 괴담의 성격도 그렇고,
아무래도 앞서 출간된 ‘흑백’을 먼저 읽은 후에 ‘안주’를 읽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인데,
오치카가 고향을 떠나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사연이라든가,
‘흑백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타인의 괴담을 듣게 된 사연을 모르면
‘안주’에 실린 수록작들의 맛을 제대로 만끽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별도의 단편들이라 읽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흑백’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 정의로운 오캇피키(말단 수사관)인 모시치 등
미야베 월드 2막의 다른 주인공들에 비하면 오치카는 딱히 능력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굳이 정리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들어주는 공감 능력’이랄까요?
오치카의 숙부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오치카의 치유를 위해 섣부른 위로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남들의 끔찍하거나, 기이하거나, 애틋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오치카 스스로 본인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치카는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듯한 황당한 이야기든 참혹한 이야기든
찬찬히 듣고 생각하고 적절한 질문과 조언을 해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에 필요한 자양분들을 부지불식간에 얻곤 합니다.
그녀가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 중에는
절대 안 변할 것 같은 사람이 요물과의 만남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경우도 있고,
시간만이 유일한 치유의 방법이란 걸 보여준 이도 있고,
사람의 일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자책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가르쳐 준 이도 있습니다.
오치카는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곤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여긴 것은 물론,
과연 나는 제대로 변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에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오치카에게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새로운 상처가 아니라 약이 돼줍니다.
이야기란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건성으로 듣기만 해도 안 되고, 말하는 이가 곤란할 정도로 과한 관심을 보여도 안 됩니다.
실제로 ‘아, 이 사람에겐 편하게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한편으론 홀가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조금은 큰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치카는 요즘 세상에선 찾기 드문 ‘속을 털어놓아도 좋을 사람’ 캐릭터인데,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일방적이고 한없이 가벼운 소통만 이뤄지는 이즈음을 생각해보면
어디엔가 오치카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흑백’과 ‘안주’ 두 편을 통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오치카는 꽤 많이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또, 말미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보면 이후 오치카는 이어지는 작품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오치카가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가 어떤 내용일지,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일지 궁금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치카가 어른이 돼가는 이야기 역시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음 작품인 ‘피리술사’에서 오치카는 과연 어디까지 성장하고 변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