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눈의 고양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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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칭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개인적으로도 미야베 월드 2가운데 가장 애정하는 괴담 시리즈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고 마음의 상처를 안은 채 숙부가 사는 에도로 온 소녀 오치카가

흑백의 방이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특히 기이하거나 가슴 아픈 괴담)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단절했던 바깥세상과 화해한다는 것이 시리즈의 큰 틀입니다.

 

이 작품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데,

그만큼 작품 속 시간도 많이 흘러서 어느덧 오치카는 스무살의 처녀로 성장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오치카는 무섭거나 애틋하거나 감동적인 괴담들을 들으면서

육체적인 성장과 변화는 물론 마음까지도 제법 단단하게 다잡을 줄 아는 인물이 됐습니다.

여전히 외출을 기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조심스러워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오치카에게도 이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호기심과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시점에 이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는 바로 그런 호기심과 의문을 해소시켜주고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다섯 편의 다채로운 괴담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마음이 꺾이고 약해진 여자에게 스며든 악령이

목숨을 건 거래를 요구한 끝에 결국 일가족을 몰살시킨 이야기를 그린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요괴를 부르는 목소리를 타고난 저주받은 처지였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를 이용하여

구천을 떠도는 원령과 목소리를 잃은 소녀를 구해낸 한 여자의 삶을 그린 벙어리 아씨’,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오는 가면들을 봉인해둔 집을 무대로 한 가면의 집’,

오치카와 특별한 인연인 세책방 주인 간이치의 애틋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 기이한 이야기책’,

그리고 오치카와 함께 괴담을 듣게 된 사촌오빠 도미지로의 과거를 그린 금빛 눈의 고양이

예전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공포-감동-애틋함 등 버라이어티한 괴담들을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 출간제목이기도 한 네 번째 수록작 기이한 이야기책’(あやかし草紙)

오치카의 삶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과 괴담을 담고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소름 돋는 서늘함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함께 담고 있는 최고의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 유일하게 오치카가 등장하지 않는 표제작 금빛 눈의 고양이

이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향배를 가늠케 해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의 일본 원제는 三島屋變調百物語’(미시마야 변조 백물어)입니다.

일본 괴담에 익숙한 독자라면 일본 전통놀이인 백물어(百物語)’에 대해 잘 알겠지만,

소설 시리즈명으로 이용될 때 반드시 액면 그대로 ‘100가지 이야기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시리즈가 그 예인데, 언젠가는 100개를 채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를 진짜 100화까지 쓸 작정인가 봅니다.

편집자에게 백물어(百物語)니까 100화까지 쓸게요.”라고 했다니 말이죠.

더구나 다 쓰기 전에 죽는다면 죄송한 일. 후반은 수명과의 전쟁이 될 것 같다.”라고 했으니,

정말 앞서 언급한대로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는 게 맞는 듯 합니다.

이 시리즈를 애정하는 독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소리는 없겠지요.

 

일본에서는 이 작품의 후속작이 20188월부터 이미 연재되기 시작했고,

(편집후기에 따르면) 곧 연재가 끝나 한국 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원제가 黑式御神火御殿이라는데,

새카만 불을 뿜어내는 화산의 그림이 걸린 어느 저택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아마 수록작 중 한 편의 제목인 듯 싶은데, 제목만으로도 사뭇 기대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삼귀이후 1년 만에 이 작품이 나왔으니 내년 이맘때쯤이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큰 변곡점을 맞이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어떤 이야기로 독자를 찾을지

벌써부터 궁금증을 참아내기가 힘들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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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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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흑백에 이어 괴담을 들어주는 여자 오치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에 연루됐던 오치카가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던 중

다른 사람들의 괴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남들의 비극을 듣고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장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오치카의 첫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흑백이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괴담을 담았다면,

모두 네 편이 수록된 안주는 따뜻한 괴담과 비극적 괴담을 골고루 섞어 놓았습니다.

주변의 물을 고갈시키는 신()과 일심동체가 된 소년의 애틋한 사연을 다룬 달아나는 물

사람을 그리워하는 폐가의 혼이 끝내 요물로 변한 이야기를 다룬 안주가 따뜻한 괴담이라면,

쌍둥이에게 내린 저주와 비극을 다룬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는 해피엔딩임에도 섬뜩했고,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폐쇄된 마을에서 벌어진 참혹한 복수극을 다룬 전형적인 괴담입니다.

긴장감이나 괴담 자체의 흥미에 있어선 흑백이 다소 매력적인 게 사실이지만,

안주는 오치카와 미시마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아서 좀더 정감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순서도 그렇고, 오치카가 듣는 괴담의 성격도 그렇고,

아무래도 앞서 출간된 흑백을 먼저 읽은 후에 안주를 읽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인데,

오치카가 고향을 떠나 에도에 있는 숙부의 가게 미시마야에 머물게 된 사연이라든가,

흑백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타인의 괴담을 듣게 된 사연을 모르면

안주에 실린 수록작들의 맛을 제대로 만끽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별도의 단편들이라 읽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흑백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지닌 오하쓰, 정의로운 오캇피키(말단 수사관)인 모시치 등

미야베 월드 2막의 다른 주인공들에 비하면 오치카는 딱히 능력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굳이 정리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들어주는 공감 능력이랄까요?

오치카의 숙부는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오치카의 치유를 위해 섣부른 위로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남들의 끔찍하거나, 기이하거나, 애틋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오치카 스스로 본인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실제로 오치카는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듯한 황당한 이야기든 참혹한 이야기든

찬찬히 듣고 생각하고 적절한 질문과 조언을 해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변화에 필요한 자양분들을 부지불식간에 얻곤 합니다.

 

그녀가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 중에는

절대 안 변할 것 같은 사람이 요물과의 만남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경우도 있고,

시간만이 유일한 치유의 방법이란 걸 보여준 이도 있고,

사람의 일이란 운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자책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가르쳐 준 이도 있습니다.

오치카는 고향에서 참혹한 사건을 겪곤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여긴 것은 물론,

과연 나는 제대로 변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에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오치카에게 흑백의 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새로운 상처가 아니라 약이 돼줍니다.

 

이야기란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건성으로 듣기만 해도 안 되고, 말하는 이가 곤란할 정도로 과한 관심을 보여도 안 됩니다.

실제로 , 이 사람에겐 편하게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한편으론 홀가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조금은 큰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치카는 요즘 세상에선 찾기 드문 속을 털어놓아도 좋을 사람캐릭터인데,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일방적이고 한없이 가벼운 소통만 이뤄지는 이즈음을 생각해보면

어디엔가 오치카 같은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흑백안주두 편을 통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오치카는 꽤 많이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 말미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보면 이후 오치카는 이어지는 작품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오치카가 앞으로 듣게 될 이야기가 어떤 내용일지,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일지 궁금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치카가 어른이 돼가는 이야기 역시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음 작품인 피리술사에서 오치카는 과연 어디까지 성장하고 변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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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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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8월에서 9월 사이의 오클라호마시티.

15살 소년 와이엇은 극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살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12살 소녀 줄리애나는 박람회장에서 언니 제네비에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2012,

사립탐정이 된 와이엇은 의뢰받은 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클라호마시티로 돌아오게 되고,

사건 수사와 함께 왜 당시 나만 살아남았는가? 당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실은 오랫동안 스스로 봉인해뒀던 26년 전의 참혹한 기억에 대해 재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간호사가 된 줄리애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니에 대해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SNS 등을 통해 그날의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애매한 알리바이로 빠져나갔던 남자가

오클라호마시티로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곤 위험천만한 만남을 시도하기로 결심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참혹한 비극을 겪은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물론 지인에게 의뢰받은 사건을 조사하는 와이엇의 현재 미션도 함께 병행되지만,

아무래도 독자의 주된 관심은 26년 전 사건에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26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든 것을 풍화시킬 만한 엄청난 시간이지만

와이엇과 줄리애나에겐 어제나 1주일 전과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과거입니다.

무슨 일이든 기억에서 사라지려면 납득할 수 없는 명쾌한 마무리가 있어야 하지만

두 사람이 겪은 사건은 그런 마무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 앞에 그날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고,

각자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진실에 다가갑니다.

 

26년 동안 알아내지 못한 진실이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리는 없습니다.

와이엇과 줄리애나의 진실 찾기는 그래서 무척 느린 속도로 전개됩니다.

와이엇의 경우 26년 전 참혹하게 살해된 극장 동료들에 대한 회상이 적잖이 설명되고 있고,

이제는 나이 든 관련자들을 만나거나 자료조사를 벌이는 대목도 꽤 완만하게 전개됩니다.

평범한 간호사인 줄리애나 역시 당시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긴장감이나 속도감을 맛보긴 어려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와이엇이 벌이는 의뢰받은 현재 사건이 이런 느린 서사를 보완해주고 있는데,

단순한 협박공갈범을 찾는 일이긴 해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와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서

5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의 진실과 결론을 얻긴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스릴러의 엔딩처럼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기분을 전해주진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26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고 고통스러웠으며

이제 와서 진실을 알아냈다 한들 딱딱하게 말라붙은 상처들이 완치될 순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을 박제시켰던 ‘26년 전과 헤어질 힘을 얻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독자에 따라 서사의 규모나 깊이에 비해 분량이 과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두 주인공의 깨달음과 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두께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제목(원제와 번역제목 모두) 역시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스토리가 아님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이런 외형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과 인연이 닿은 독자라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질 오락물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주인공이 진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지나친 비약처럼 보여서 별 1개가 빠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주위에 추천할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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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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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년째 미제 상태인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은 살인현장에 자신의 뚜렷한 지문과 함께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겨 경찰 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새롭게 특별수사팀을 맡은 자오톄민은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편, 8년 전 실종된 아내와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전직 법의학자 뤄원은

선량한 두 남녀가 우발적으로 불량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곤

고민 끝에 이들의 행위를 무증거 범죄로 완벽하게 포장해주기로 결심한다.

무관해 보이던 두 사건이 연결되면서 최고 법의학자와 천재 범죄논리학자의 대결이 시작되고,

마침내 상상하기 힘든 연쇄살인범의 동기가 드러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쯔진천은 동트기 힘든 긴 밤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작품으로 처음 만난 중국 작가입니다.

대하드라마 급의 묵직한 서사에 꽤 놀라운 엔딩까지 겸비한 작품이었는데,

1년도 채 안 돼서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작품은 나쁜 아이’(미출간), ‘동트기 힘든 긴 밤과 함께 추리의 왕 시리즈로 불리는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능력자 형사 자오톄민과 천재적인 범죄논리학자 옌량입니다.

두 권밖에 못 읽어서 단정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실질적인 사건 해결은 옌량의 몫이고,

자오톄민은 바쁘게 뛰어다니긴 하지만 그다지 개성 있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증거 범죄에서 실질적으로 대립하는 주인공은 옌량 VS 뤄안입니다.

옌량은 과거 뛰어난 경찰이었지만 불명예 퇴직 후 지금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칩니다.

뤄안 역시 법의학자로서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아내와 딸이 실종된 뒤 경찰을 그만뒀고

지금은 민간기업에 적을 둔 채 여전히 아내와 딸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옌량이 용의자의 진술속의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는 범죄논리학 전문가라면,

뤄안은 사건 현장과 시신이 남긴 단서를 통해 진상을 파악하는 물증 전문가입니다.

두 사람은 한때 절친이자 경찰 동료였지만,

논리로 진상을 밝히려는 경찰 VS 물증을 조작하여 무증거 범죄를 꾸미려는 용의자로 만나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됩니다.

 

한쪽에선 3년째 활개를 치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자오톄민과 옌량의 이야기가,

다른 한쪽에선 선량한 살인자를 위해 무증거 범죄를 만드는 뤄안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두 이야기는 우연히 발견된 단서 하나 때문에 한줄기의 이야기로 합쳐집니다.

그리고 옌량의 집요한 추리와 심문 끝에 연쇄살인범의 정체는 물론

범인이 왜 3년 동안 특이한 방식으로 단서를 남겨가며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밝혀집니다.

 

사회파 미스터리, 사적 복수, 증거의 조작,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천재적 인물 등

꽤 다양하고 묵직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고,

특히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 막판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한숨을 내쉬게 할 정도로

안타까움과 동정심과 비장미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앞서 읽은 동트기 힘든 긴 밤에서도 비슷하게 받았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쯔진천의 신작 소식이 언제쯤 들려오나,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만 꼽자면,

가끔 이게 뭐지?”라는 의아함이 들 정도로 허술한 설명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주로 다혈질 형사 자오톄민의 수사 부분에서 이런 대목들이 발견됩니다.)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서 크게 흠 잡을 약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실질적 주인공인 옌량의 추리가 너무 비약적으로 점프하는 점은 많이 아쉬웠는데,

그가 진범에게 심증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고,

용의자를 먼저 특정해놓고 논리를 통해 혐의를 입증한다는 그만의 고차방정식 이론역시

설득력이 좀 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얼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유사하다는 논란이 많았다는데,

워낙 오래 전에 읽은 작품이라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큰 틀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도 논란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용의자 X의 헌신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캐릭터나 사건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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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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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여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비극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삶이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 작품은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며

삶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그동안 읽은 여러 문학상 수상집에서 한번쯤은 만나봤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렇게 단독 장편소설로 권여선을 만난 건 처음입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깔려 있긴 해도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게 사실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쯤은 만족, 반쯤은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지척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엉망진창이 됐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몇몇 사람들의 오랜, 그리고 고통스런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누가 범인?’이라는 미스터리가 내내 독자의 궁금증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작가의 방점은 살아남은 자들의 혼란과 방황과 죄책감 또는 무력감에 찍혀 있습니다.

 

딸이 살해된 뒤 엄마는 굳이 딸의 이름을 태명으로 바꾸려 애쓰지만 무위로 돌아갑니다.

언니가 살해된 뒤 동생은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언니의 모습으로 성형을 합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갑자기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어 관련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용의자였던 또래 고교생은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사건과는 무관하게 비참한 삶을 삽니다.

또 다른 용의자였던 고교생과 결혼한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며 자기도 모를 소리를 횡설수설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누구에게도 후련하고 깔끔한 엔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투적인 비극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보다는

앞으로 이 인물들은 언제까지든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다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소설속에서 계속 살아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끔직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p190)

 

사적 복수나 무한정 무거운 참회록에 비해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억지스러운 엔딩이 아니어서 더 좋기도 했습니다.

다만, 좀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별히 멋을 부린 건 아닌데, 각 인물마다 어떤 감정으로 이입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고,

특히 살해된 자의 동생인 다언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는 난해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을 얼른 펼쳐봤는데,

거기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들만 실려 있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할 확실한 여지를 남겼다면 꽤 긴 여운을 만끽했을 작품인데,

결국엔 ‘So what?’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함만 남았고,

다 읽고도 화자 가운데 (시간이 흘러도 다들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은 들어도)

어느 누구의 소설 뒤의 삶도 딱히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은 기대를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무리 과정이 너무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 무척 궁금해지는데,

조만간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를 통해 레몬에 대한 후기를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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