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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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 오치카가 주인공인 세 번째 작품입니다.

흑백안주에 이어 이번에도 오치카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그래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할 기이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사랑하는 남녀를 헤어지게 만드는 연못(다마토리 연못),

앞일을 예고하는 능력을 가진 신비한 산장(기치장치 저택)

사람이 감추고 있는 악행을 꿰뚫어 보는 아기(우는 아기),

사람들의 원한으로 빚어진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자(피리술사),

오치카가 청자(聽者)로 참석한 연말의 괴담 모임(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

그리고 절기 날이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뒤바뀌는 운명을 받아들인 탕아(절기 얼굴)

모두 개성 강한 괴담 단편 여섯 편이 수록돼있습니다.

 

처음 두 수록작(‘다마토리 연못’, ‘기치장치 저택’)을 읽었을 때만 해도

피리술사는 전작들과 달리 다소 훈훈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괴담을 들려주는 사람은 마음 속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괴담을 듣는 오치카 역시 사건에 개입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본분에 충실한,

그러니까 긴장감이나 무서움보다 따뜻함과 안도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뭇 으스스한 호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아쉬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괴담 듣는 소녀 오치카의 원래 미션에 가장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일본판 표제작인 우는 아기’(童子)에서 작가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의를 지닌 자만 나타나면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기는

무서운 인형이나 아기가 등장하는 영미권 호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섬뜩한 이야기인데,

엔딩마저 씁쓸해서 오치카에게 꽤 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오치카가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괴담을 듣는 이야기인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

극중극 형태처럼 엽편(葉片)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작품인데,

따뜻한 이야기와 소름 돋는 이야기가 골고루 섞여 있어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한편, 표제작 피리술사는 미야베 월드 2막의 한 작품인 괴수전을 연상시키는 작품인데,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의 원한이 빚어낸 식인 괴물의 등장이란 점도 그렇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에 의해 괴물을 퇴치하는 상황도 아주 비슷한 구도로 그려집니다.

피리술사2011, ‘괴수전2014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걸 보면,

아무래도 피리술사이후 미야베 미유키가 본격적인 장편 괴수물을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슷한 서사이긴 해도 장편과 단편의 고유의 매력을 나눠 가진 작품들이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읽은 작품은 마지막 수록작인 절기 얼굴인데,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죽은 자의 얼굴을 갖기로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는 만남들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그림자도 없는 신비한 존재인 상인은 오치카도 잘 아는 인물이라 더욱 반가웠는데,

그는 오치카 시리즈의 첫 작품인 흑백의 수록작 흉가에도 등장했던 자로

그 작품에서는 꽤 사악한 캐릭터로 묘사된 탓에 오치카 역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에선 망자와 산 자의 절실함을 거래로 연결시켜주는 선의를 가진 존재로 그려져서

오치카로 하여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소 아쉬웠던 건 편집자 후기에 적힌 대로 오치카의 연애가 제자리를 맴돈 점입니다.

전작인 안주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오치카의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예고한 바 있지만,

오치카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낭인무사 아오노 리이치로의 이야기는

분량도 적은데다 연애에 관한 진도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치카 시리즈는 이후 삼귀한 편만 남았는데,

과연 오치카와 아오노가 그 작품에서 제대로 인연을 맺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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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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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의 삶은 그의 형 츠요시가 살인을 저지른 고교 3학년 때부터 만신창이가 됩니다.

츠요시의 범행은 나오키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한 방편이었고 살인은 우발적인 사태였지만,

결국 그 사건은 츠요시에겐 15년의 징역살이를, 나오키에겐 진창 같은 악몽만 남기게 됩니다.

졸업을 앞둔 고교에서는 나오키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치고 맙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의 츠요시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매달 편지를 보내옵니다.

어느 순간부터 형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리기 시작한 나오키는 겨우 안정된 삶을 찾지만,

그 안정은 얼마 가지도 못해 너무나도 쉽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 ● ●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참에

모처럼 감동 서사 작품이 재출간됐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음에도 아직까지 읽지 못한 작품이었는데,

내심 비밀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억처럼 눈물을 쏙 빼주기를 기대한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은 차별과 속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이한 건 주인공이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나 그 유족도 아닌 가해자의 동생이란 점입니다.

처음엔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형에 대한 미안함이 들기도 했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란 낙인 때문에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된 나오키는

어느 순간부터 애초 내게 형 따윈 없었다는 분노와 원망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아내는 살인자의 제수씨’, 딸은 살인자의 조카로 손가락질 받기에 이릅니다.

 

독자는 학교, 사랑, , 직장에서 매번 낙오하는 나오키를 보면서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단지 살인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차별과 편견을 날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살인자의 가족이 있다면 나는 그()를 평범하게 대할 수 있을까?

과연 속죄란 징역살이 몇 년과 진심 어린 참회를 했다면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등장인물 가운데 나오키의 좌절과 분노에 대해 충고해주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사실 그의 충고라는 것 역시 정답일 수도 없고, 명쾌하지도 않습니다.

작가 역시 작품 내내 위의 질문들에 대해 이것이 정답이란 걸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조차도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들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가 다소 힘을 얻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승전결을 따라간다기보다 이런저런 상황들의 나열이란 느낌이랄까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괴담집 흑백에 수록된 만주사화라는 작품에는

살인을 저지르고 섬에 유배된 형이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 돌아오더라도 우리와는 전혀 모르는 남남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 동생이 등장합니다.

나오키 역시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겠지만,

힘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만 보이다가 자포자기한 탓에,

또 다소 억지스럽게 눈물을 쥐어짜는 클라이맥스와 엔딩 탓에

나오키의 감정에 이입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픽션인데도 마치 감동을 목적으로 한 다큐멘터리처럼 읽힌 작품인데,

눈물 한 번 제대로 쏟아내고 싶었던 기대감은 절반도 충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최근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거의 관심 밖의 일이 된 게 사실입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소 황당한 과학 미스터리이거나 재출간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인데,

오히려 오래 전에 읽어서 줄거리조차 가물거리는 명작들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린의 날개이후 2년 동안 소식이 없는 가가 형사 시리즈가 기다려지는데,

일본에서도 출간이 안 된 건지, 국내출간이 늦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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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눈빛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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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노부히토는 젊은 날의 소신에 따라 법무부 소속 소년분류심사원에서 근무했지만,

어린 딸 에미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인물.

그가 형사로서 마주하는 인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행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다.

짐승만도 못한 남편이나 삼촌을 뒀거나, 한창 나이에 노숙자가 됐거나,

아내와 사별 후 엇나간 중2 아들과 갈등을 빚거나, 전과자란 과거에 발목을 잡힌 사람 등...

그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절규한다.

나츠메는 때로 그들을 꾸짖고 때로 그들을 보듬으며 비극적인 사건을 해결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중 연작단편집으로는 악당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그의 매력은 깊은 서사와 무게감을 지닌 장편들을 통해 만끽했던 터라

한 명의 주인공이 끌고 가는 연작이라 해도 역시 단편집은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은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소속 38세 형사 나츠메 노부히토입니다.

나츠메 노부히토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노부히토(信人)라는 이름대로 사람을 믿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동보호시설 현장실습에서 만났던 청소년이 죄를 짓고 체포되는 사건을 겪은 뒤로

평범한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대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죄를 지은 청소년들을 면접하는 일을 하던 그는

어린 딸 에미가 청소년으로 보이는 자가 저지른 연쇄테러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뒤로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했고 지금은 관할서 형사가 된 상태입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누군가를 의심할 줄 모르는 그가 형사가 됐다는 사실에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그의 딸 에미의 사연을 떠올리면 착잡한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고 안쓰럽게 여깁니다.

테러사건 당시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딸을 해친 범인이 청소년으로 밝혀지자 나츠메는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만나는) 소년이 내 딸을 공격한 범인이 아닐까 싶어 분노가 끓어올랐어.

그러다 보니 다른 마음(범죄자에 대한 증오)이 내 안에 생겨난 거야.”라며

형사가 된 계기와 당시의 감정을 옛 동료에게 담담히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앞의 여섯 편은 형사 나츠메의 사건해결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 수록작 형사의 눈빛은 딸 에미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과거의 테러사건을 다룹니다.

나츠메는 형사답지 않은 외모와 화법으로 용의자 또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들의 진술 속의 아주 작은 모순이나 거짓을 절대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꽤 여러 작품 속에 위장 자수가 설정돼있는데,

(실제 범행을 저지른)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증오한 나머지 더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거짓 자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츠메는 그 위장 자수속에 숨은 진짜 사연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진실을 끌어냅니다.

 

캐릭터나 디테일 모두 다르지만 읽다 보면 신참자의 주인공 가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이나 날카롭긴 해도 부드러움으로 포장된 탐문 기법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나츠메가 지닌 딸로 인한 상처가 더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 역시

독자로 하여금 나츠메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데,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충분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짧은 분량의 단편 속에 꽤 참혹한 사건들을 함축적으로 다룬 건 매력적이지만,

역시 분량의 한계 때문에 느껴지는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나츠메의 수사는 명백한 단서를 근거로 개연성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아무래도 깊이감은 부족한 탓에 매편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물론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기질은 여전했고, 반전 역시 소소해도 명쾌하게 설정돼서

읽는 내내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가 나츠메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을 출간할지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사답지 않은 형사 나츠메 시리즈도 꽤 매력적일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속 나츠메의 옛 친구인 쿠미코 역시 그런 바람을 갖고 있는 듯 한데,

쿠미코는 지금도 나츠메가 경찰이라는 직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런 형사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다만, 나츠메가 주인공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번에는 꼭 장편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진면목은 역시 장편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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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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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신과 의사 엠마 슈타인은 호텔에서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뒤 다시는 집 밖으로 못 나간다.

엠마는 여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소위 이발사로 불린 연쇄살인마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

엠마는 이발사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만 같아 고통스러운 편집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에게 우편배달부가 찾아와 이웃의 소포를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갈색 종이에 싸인 평범한 소포. 이상한 점은 없었다. 소포에 적힌 이름만 제외하면...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제바스티안 피체크와는 세 번째 만남입니다.

영혼파괴자’,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을 먼저 읽었는데,

대표작인 눈알~’시리즈나 테라피를 못 읽어서 아직 그의 진가를 맛봤다곤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의 서평을 보니 대표작 외엔 더는 읽을 생각이 없다.”는 투로 써놨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신간소식을 들으면 뭔가 나쁜(?) 기운과 함께 호기심이 이는 게 사실입니다.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라는 별명처럼 사건 자체보다 일그러진 심리에 치중하는 작가인데,

분명 그쪽으로도 취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을 받거나

도무지 씻기지 않을 것 같은 개운치 않은 뒷맛 때문에 더는 읽고 싶지 않다가도,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이유로 다른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라는 호기심이 든다는 뜻입니다.

 

비교적 초기작인 영혼파괴자’(2008)가 사이코스릴러의 교과서적 작품이라면

(독일 기준으로) 최신간인 내가 죽어야 하는 밤’(2017)은 액션스릴러에 가까웠기 때문에

소포는 어떤 스타일의 작품일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장르가 아주 잘 녹아있는, 흥미로우면서도 불쾌한(?) 이야기입니다.

 

엠마는 꽤 유능한 정신과 의사지만 그녀 스스로 중증의 편집증을 앓는 환자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겪은 끔찍한 사건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가 겪은 사건을 실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건에 관한 그녀의 진술은 전부 허황된 거짓말이거나 꾸며낸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어릴 때 겪은 정신과 치료의 낙인까지 더해져서 결국 공상허언증으로 결론나고 맙니다.

사건 이후 집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던 엠마에게 의문의 소포가 전해졌고,

그 소포로 인해 엠마의 편집증은 극에 이른 끝에 또다시 끔찍한 사건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정신이상 환자이자 살인용의자가 된 엠마는 어릴 때부터 의지해 온 아버지의 친구이자

유능한 변호사 겸 법학교수인 콘라트의 사무실에서 최후 진술을 시작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독자마저 엠마가 겪은 사건이 현실인지 망상인지 헷갈리게 되고,

어느 새 엠마의 편집증에 강하게 전염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와중에 엠마의 주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프로파일러인 남편, 오랜 친구, 낯선 이웃, 자신을 흠모하는 남자, 친절한 우편배달부 등

그녀 주변의 인물들 역시 엠마를 끊임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바람에

독자는 엠마를 응원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집니다.

 

앞서 읽은 두 작품 모두 반전과 결말부분에서 아쉬움을 강하게 느꼈는데,

그에 비해 소포의 반전과 결말은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물론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동기와 범행과정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사이코스릴러와 미스터리스릴러가 잘 버무려진 서사의 힘은 전작에 비해 압도적이었습니다.

400페이지에 못 미치는 분량도 적절하고 웬만해선 중간에 멈추기 힘든 이야기의 힘도 있어서

주말 한나절이면 충분히 만끽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혹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전작에 만족하지 못했던 독자라도

소포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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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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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국적이 나이지리아라는 점도 특이하지만, 스토리나 캐릭터도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코레드와 아율라는 모든 면이 정반대인 자매입니다.

언니 코레드는 유능한 간호사지만 외모와 몸집에 관한 한 늘 핸디캡으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반면 동생 아율라는 누구의 시선이든 단번에 사로잡고 마는 특별한 외모의 소유자로

자매의 어머니로부터 지나칠 정도의 편애를 독차지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두 자매만의 특별하고도 내밀한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 동생은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 언니는 소위 시체 처리 및 현장 청소부란 점입니다.

동생 아율라의 살해 대상은 모두 사귀던 남자들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교미 후 어슬렁거리는 수컷을 잡아먹는 거미 블랙위도우를 닮은 아율라는

말 그대로 그냥사귀던 남자들을 살해합니다.

아율라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코레드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현장을 완벽히 청소하는 건 물론

거대한 물살 속으로 시체를 내던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코레드는 동생 아율라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막으려고 갖가지 충고와 조언을 합니다만

아율라는 살인을 저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SNS에 음식과 패션을 자랑질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기질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매의 갈등은 아율라가 언니의 짝사랑 상대인 의사 타데 오투무를 유혹하면서 시작됩니다.

외모에 관한 열등감과 살인현장을 뒤처리해야 하는 짜증과 공포에 사로잡힌 코레드 입장에서

아율라가 자신의 짝사랑에게 접근하는 상황은 여러 모로 격분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타데는 아율라에게 넘어갈 게 뻔하고, 분명 아율라의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지키고 싶고 새로운 희생자를 막고 싶지만 코레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중환자에게 자신의 답답한 처지를 독백으로 내뱉거나

타데에게 아율라와 사귀지 말라고 조심스럽고 우회적으로 충고하거나

아율라에게 타데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과연 두 자매와 타데의 관계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은 누가 범인? 동기는 무엇?’ 등 일반적인 스릴러의 공식과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오히려 유쾌한 소시오패스와 발만 동동 구를 뿐인 공범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가볍거나 코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딘가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도 들고, 동시에 긴장감도 놓치고 있지 않아서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사뭇 다른 특별한 간식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연쇄살인자체보다 특별한 자매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어서

순도 높고 피비린내 나는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겐 꽤 심심하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연쇄살인사건을 가장한 가족 이야기라고 할까요?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 한 남자를 놓고 벌이는 자매의 연애전쟁,

거기에 동기도 없는 연쇄살인과 완벽한 뒤처리를 분담한 특이한 자매 캐릭터 등

꽤 다채롭고 흥미로운 소재들이 짧은 분량 속에 뒤범벅된 덕분에

독특한 제목에 눈길을 빼앗긴 독자라면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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