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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눈빛 ㅣ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3월
평점 :
나츠메 노부히토는 젊은 날의 소신에 따라 법무부 소속 소년분류심사원에서 근무했지만,
어린 딸 에미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인물.
그가 형사로서 마주하는 인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불행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다.
짐승만도 못한 남편이나 삼촌을 뒀거나, 한창 나이에 노숙자가 됐거나,
아내와 사별 후 엇나간 중2 아들과 갈등을 빚거나, 전과자란 과거에 발목을 잡힌 사람 등...
그들은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절규한다.
나츠메는 때로 그들을 꾸짖고 때로 그들을 보듬으며 비극적인 사건을 해결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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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의 작품 중 연작단편집으로는 ‘악당’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작품입니다.
아무래도 그의 매력은 깊은 서사와 무게감을 지닌 장편들을 통해 만끽했던 터라
한 명의 주인공이 끌고 가는 연작이라 해도 역시 단편집은 아쉬움이 남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은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소속 38세 형사 나츠메 노부히토입니다.
나츠메 노부히토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노부히토(信人)라는 이름대로 사람을 믿고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사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동보호시설 현장실습에서 만났던 청소년이 죄를 짓고 체포되는 사건을 겪은 뒤로
평범한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대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죄를 지은 청소년들을 면접하는 일을 하던 그는
어린 딸 에미가 청소년으로 보이는 자가 저지른 연쇄테러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뒤로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했고 지금은 관할서 형사가 된 상태입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누군가를 의심할 줄 모르는 그가 형사가 됐다는 사실에 크게 놀랍니다.
하지만 그의 딸 에미의 사연을 떠올리면 착잡한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고 안쓰럽게 여깁니다.
테러사건 당시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딸을 해친 범인이 청소년으로 밝혀지자 나츠메는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만나는) 소년이 내 딸을 공격한 범인이 아닐까 싶어 분노가 끓어올랐어.
그러다 보니 다른 마음(범죄자에 대한 증오)이 내 안에 생겨난 거야.”라며
형사가 된 계기와 당시의 감정을 옛 동료에게 담담히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앞의 여섯 편은 ‘형사 나츠메의 사건해결’을 다루고 있고,
마지막 수록작 ‘형사의 눈빛’은 딸 에미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과거의 테러사건을 다룹니다.
나츠메는 형사답지 않은 외모와 화법으로 용의자 또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들의 진술 속의 아주 작은 모순이나 거짓을 절대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면모를 보입니다.
특히 꽤 여러 작품 속에 ‘위장 자수’가 설정돼있는데,
(실제 범행을 저지른)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경우도 있고,
누군가를 증오한 나머지 더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거짓 자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츠메는 그 ‘위장 자수’ 속에 숨은 진짜 사연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진실을 끌어냅니다.
캐릭터나 디테일 모두 다르지만 읽다 보면 ‘신참자’의 주인공 가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이나 날카롭긴 해도 부드러움으로 포장된 탐문 기법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나츠메가 지닌 딸로 인한 상처가 더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이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 역시
독자로 하여금 나츠메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데,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충분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짧은 분량의 단편 속에 꽤 참혹한 사건들을 함축적으로 다룬 건 매력적이지만,
역시 분량의 한계 때문에 느껴지는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나츠메의 수사는 명백한 단서를 근거로 개연성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지만,
아무래도 깊이감은 부족한 탓에 매편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물론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기질은 여전했고, 반전 역시 소소해도 명쾌하게 설정돼서
읽는 내내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야쿠마루 가쿠가 나츠메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을 출간할지 알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사답지 않은 형사 나츠메 시리즈’도 꽤 매력적일 거란 생각입니다.
작품 속 나츠메의 옛 친구인 쿠미코 역시 그런 바람을 갖고 있는 듯 한데,
“쿠미코는 지금도 나츠메가 경찰이라는 직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런 형사가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다만, 나츠메가 주인공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번에는 꼭 장편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진면목은 역시 장편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