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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미션 - 죽어야 하는 남자들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에만 벌써 4번째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야쿠마루 가쿠입니다.
2017년엔 두 편만, 2018년엔 아예 한 편도 소개되지 않았는데,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네 편, 그것도 출판사가 모두 제각각인 걸 보면
한국에서 야쿠마루 가쿠의 진가가 이제야 발휘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부터 구원(舊怨)과 악연, 아물지 않을 상처를 지닌 개인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구사해온 야쿠마루 가쿠가 이번엔 ‘불치병에 걸린 범인과 형사의 대결’이라는,
사뭇 특이한 구도를 들고 독자를 찾았습니다.
‘경시청 5계의 사냥개’라는 별명을 지닌 아오이 류는 승진 따윈 관심 없는 타고난 형사입니다.
하지만 3년 전 발병했던 위암이 재발되면서 말기 판정을 받자 그는 절망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도쿄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교살사건 해결을 위해 그는 고군분투합니다.
한편, 사카키 신이치는 주식으로 번 돈을 기반으로 호화맨션에 사는 데이트레이더입니다.
그는 어릴 적 첫사랑인 스미노와 오랜만에 재회하면서 마음이 들뜨지만
자기도 모르게 불쑥불쑥 폭발하는 살인 욕구 때문에 스미노를 대하기가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어릴 적 뭉텅이로 사라진 기억 속에 그 살인 욕구의 근원이 숨겨져 있다고 추정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그 사라진 기억은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의사인 선배로부터 말기암 선고를 받은 사카키는
가까스로 억눌러 온 살인 욕구를 남은 시간 동안 마음껏 터뜨리기로 결심합니다.
사카키의 첫사랑이자 그의 ‘사라진 기억’을 온전히 알고 있는 스미노는
사카키가 말기암에 걸린 사실을 알곤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켜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스미노는 알아선 안 될 진실을 발견한 탓에 패닉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사명’입니다.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지만 ‘使命’이 아니라 ‘죽게 된 목숨’이란 뜻의 ‘死命’입니다.
부제인 ‘죽어야 하는 남자들’은 언뜻 보면 살인마에 의한 희생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기암에 걸린 두 주인공 아오이와 사카키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음껏 살인을 저지르려는 자이고,
한 사람은 역시 죽기 전까지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형사의 안쓰러운 가족사와 범인의 유년기의 비극이 끼어들면서
단순히 ‘시한부 형사 대 시한부 범인’이란 구도를 넘어 꽤 깊고 두터운 서사를 구축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처음부터 범인을 노출시키고 출발한다는 점인데,
반면, 범인의 살인 욕구의 뿌리인 유년기의 비극을 마지막 미스터리로 배치해놓았습니다.
범인은 자신만의 욕구 해소를 위해 무자비하게 여성들을 살해하는 흉악한 인물이지만,
독자는 그가 단순한 쾌락살인마가 아니라는 점을 조금씩 알게 되는 탓에
마냥 그를 혐오하거나 악인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대체 유년기의 어떤 사건이 이 남자를 이렇게 망가뜨렸나?’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그가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또 병마에 목숨을 잃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게 되는, 아이러니한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막판에 드러나는 유년기 사건의 진상은 너무도 참혹하고 충격적이라 멍해지기도 했는데,
진상 자체도 그렇고 그 사건이 범인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서도 의견이 꽤 갈릴 것 같습니다.)
말기암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분투하는 아오이는
경찰로서의 캐릭터도, 가족들과 불화에 빠진 가장으로서의 캐릭터도 다소 상투적이긴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진정성 있는 묘사 덕분에 주인공다운 매력을 담뿍 지닌 인물입니다.
누가 “왜?”냐고 물을 때마다 “형사의 감이다!”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아오이는
어쩌면 한물 간 옛날 경찰의 마지막 세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감’은 결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게 아니라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작동하고 있어서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와타세 경부 같은 매력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소개해주니 독자로서는 반가운 일입니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니 아직 미출간된 작품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선 하반기에도 여러 작품이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한편으론 맛난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느 작품이 됐든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은 늘 반갑고 또 반가울 따름입니다.
(사족 한마디만 붙이자면, 신생 출판사 같은데 편집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아서 실망했습니다.
오타도 제법 있었고, 잘못된 띄어쓰기도 곳곳에 보이더군요.
제가 읽은 건 가제본이었는데, 정식출간 때는 모두 수정돼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