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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월
평점 :
‘얼간이’에 이은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즈쓰 헤이시로는 후카가와 일대를 순시하는 임무를 맡은 하급무사 도신인데,
만사에 태평하고, 게으름이나 의욕상실에선 따라 잡을 사람이 없는 느긋한 인물입니다.
유미노스케는 헤이시로의 외조카이자 거상의 아들인 13살의 초특급 미소년으로,
측량과 지도 만들기에 관심이 많고 추리력에 관한 한 헤이시로보다 100배는 앞선 인물입니다.
사실 이런 콤비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 미스터리에서 무슨 역할을 할까 의아하겠지만,
이 시리즈는 미스터리 자체보다 에도 시대를 살았던 각계각층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가깝고,
그런 면에서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나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멀티 주인공들이 펼치는 버라이어티한 서사’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역자는 후기를 통해 ‘하루살이’의 이런 특징을 비빔밥에 비유하고 있는데,
각각의 재료 자체도 의미가 있고, 그 재료들이 한데 섞인 비빔밥에도 의미가 있다는 뜻으로,
다 읽고 생각해보니 이 작품의 성격을 적확하게 압축한 적절한 비유 같았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에 대해 고민하는 13살 소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몰라서 혼담을 주저하는 처녀,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어 하는 달뜬 여자,
오지랖과 동정심으로 똘똘 뭉친 젊은 요리사,
돌직구 같은 언사와 거친 행동만 일삼지만 실은 누구보다 속이 여린 조림가게 여주인,
성인이 돼서야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가 아님을 깨닫곤 절망하는 거상의 후계자 등
이야기의 축인 미스터리와 살짝 연관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때론 미스터리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감동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이야기 중 가장 큰 덩치는 미스터리가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얼간이’에 등장했던 주요인물의 죽음이 밑바탕에 깔려있고,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는 애초 범인으로 지목된 자의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찾으려 애씁니다.
동시에, 그 죽음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때론 희극처럼, 때론 비극처럼 그려집니다.
사실 이 작품은 ‘얼간이 2’라고 제목을 붙여도 괜찮을 만큼
‘얼간이’에서 펼쳐졌던 이야기와 그 안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고스란히 다시 등장합니다.
그래서 ‘얼간이’를 읽지 않은 독자들로서는 제 맛을 느끼기가 좀 어려운 작품인데,
가능하다면 ‘얼간이’를 꼭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日暮らし’(히구라시)로 ‘쓰르라미’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팍팍한 생활’을 뜻하는 ‘其の日暮らし(소노히구라시)’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중의적 단어이기도 합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번역 제목을 ‘쓰르라미’로 하면 그 중의를 제대로 살릴 수 없어서
부득이 ‘하루살이’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하루살이’는 우리가 보통 아는 약간은 부정적 의미,
즉, 절박하고 위태로운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13살 소년 짱구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존재감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헤이시로의 도움을 받고 자신의 능력을 살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각오를 글자로 표현한 것이 ‘하루살이’였습니다.
즉, ‘힘겹겠지만 하루하루 내 몫을 해내며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의미란 얘깁니다.
아마 이 대목에서 번역자가 번역 제목을 떠올린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제만큼이나 중의적인 효과를 잘 살렸다는 생각입니다.
이 ‘하루살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는 헤이시로의 독백이 있는데 잠깐 인용해보면..
모든 사람이 매일을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올리듯이 차근차근.
제 발로 걸어가야 한다. 밥벌이를 찾아서. 모두들 그렇게 하루살이로 산다.
쌓아올려 가면 되는 일이니까 아주 쉬운 일일 터인데 종종 탈이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제가 쌓은 것은 제 손으로 허물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너진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은 어째서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것이 분명하지만,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채로운 시대극을 기대한다면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상권에 비해 하권의 템포가 다소 처지고 긴장감도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다양한 희비극을 맛보면서 엄청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의 다음 작품은 ‘진상’입니다.
역시 상하권으로 분권된 작품인데 한 작품 당 거의 600페이지의 분량을 과시합니다.
하지만 분량의 압도감보다 ‘진상’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란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최근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최신간이 나온 걸 보면
어쩌면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 역시 갑작스런 신간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