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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평점 :
상하권을 합쳐 1,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작품입니다.
‘얼간이’, ‘하루살이’에 이은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얼간이’와 ‘하루살이’가 실은 한 작품이라 할 만큼 사건과 에피소드가 이어진 작품들이라면,
‘진상’은 전혀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 색다른 기대감을 갖고 읽었습니다.
이즈쓰 헤이시로는 혼조 후카가와 일대를 순시하는 임무를 맡은 하급무사 도신인데,
만사에 태평하고, 게으름이나 의욕상실에선 따라 잡을 사람이 없는 느긋한 인물입니다.
유미노스케는 헤이시로의 외조카이자 거상의 아들인 13살의 초특급 미소년으로,
측량과 지도 만들기에 관심이 많고 추리력에 관한 한 헤이시로보다 100배는 앞선 인물입니다.
이 콤비가 마주한 사건은 그 뿌리가 20년 전에 위치한 구원(舊怨)과 관련 있습니다.
20년 전,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우발적이긴 해도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 오늘날, 참혹한 복수극이 펼쳐지면서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맙니다.
연이어 발견된 피살자들의 관계를 추적하던 헤이시로는 20년 전의 구원을 알아내게 됐고,
유미노스케는 특유의 추리력을 발휘하여 오늘날 벌어진 복수극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다소 평범한 사건인데 1,100여 페이지라니?’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는데,
사실, 본 사건을 다룬 분량은 그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돋보이는데,
‘진상’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에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이 작품을 ‘농도 짙은 연애소설’이라 칭한 점이나
원제 자체가 ‘おまえさん’(오마에상=‘당신’, ‘그이’)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작 20년 전의 구원과 오늘날의 복수극은 부차적인 서사로 보일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꽤 많은 인물들이 다양한 ‘연애’를 겪습니다.
세상을 등질 각오로 손에 피를 묻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적 사랑, 목숨을 건 짝사랑,
혹시나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애틋한 사랑, 10대 초반에 찾아온 달뜬 첫사랑,
고백은커녕 상대의 서늘한 반응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랑 등이 그것입니다.
‘농도 짙은 연애소설’이란 작가의 말은 무척 다의적인 표현이란 걸 알 수 있는데,
그 끝이 행복한 경우보다는 비극적이거나 애틋하거나 안쓰러운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한 ‘연애’는 본 사건과 직결되는 경우도 있고, 별개의 이야기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에도 시대의 살인극을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연애소설’은
다른 여느 작품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알싸한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애’ 못잖게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가족의 문제’입니다.
그중에서도 소위 ‘곁가지로 태어난 목숨’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무렵에는 (딸은 말할 것도 없고) 장남 외에는 모두 ‘군식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차남 이하 아들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을 장남 외에는 잘 해야 데릴사위, 아니면 스스로 독립을 해야 했는데,
몇몇 등장인물들은 이 비참한 신세로 인해 인생행로가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또, 아이를 버린 부모,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비극도 꽤 비중 있게 그려지는데,
그들의 이야기 역시 에도 시대라는 배경 덕분에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녀 캐릭터는 사뭇 편향적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남자들이 대체로 한량이거나 무기력하거나 덜 떨어져 보인다면,
여자들은 주관과 고집은 뚜렷하고 생활력은 무척 강한 적극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여자들이 살기 힘든 시대였다는 반증일 수도 있는데,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에 못잖은 주연급 인물인 반찬가게 주인 오토쿠는
거칠고 다부진 면모와 바닥 모를 동정심을 겸비한 여걸 중의 여걸로서
에도 시대의 여자들의 고달팠던 삶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독자에 따라 메인 사건에 치중하지 않는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연애, 가족, 성장, 남녀문제 등 소재도 다채로운데다,
미야베 미유키 말대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이입할 수만 있다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는 이후로 더는 나오지 않아 무척 아쉬운데,
무엇보다 천재적인 미소년 유미노스케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너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맥이 끊겼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최근 신작이 나온 걸 보면,
언젠가는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 역시 새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데,
과연 유미노스케가 어떤 청년으로 성장했을지, 헤이시로는 여전히 게으르고 만사태평일지,
또 오토쿠의 반찬가게는 어떤 군식구들을 받아들였을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피어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