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 사냥꾼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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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평화로운 영국 노섬벌랜드의 계곡에서 젊은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베라 스탠호프 경감은 피해자가 하우스시터, 즉 빈 저택을 돌보던 패트릭 랜들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현장에서 컴퓨터 전문가 마틴 벤튼의 사체까지 발견되자 베라와 형사들은 당황한다.

두 피해자 랜들과 벤튼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나방에 대한 마니아에 가까운 관심뿐이다.

한편, 베라는 사건현장인 계곡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만끽 중인 세 쌍의 은퇴부부에 주목한다.

자칭 은퇴한 쾌락주의자 클럽에 속한 이들에게 수상한 낌새가 계속 풍기기 때문.

베라는 그들이 가진 남모를 비밀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하버 스트리트’(한국 출간 2017)에 이어 2년 만에 출간된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입니다.

영국에서 모두 8편이 출간됐는데, ‘하버 스트리트6번째, ‘나방사냥꾼7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베라2020년에는 10번째 시즌을 맞이한다고 하니

주인공인 베라 스탠호프가 꽤 매력적인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기에 비해 소설 속 베라 스탠호프의 비주얼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무릎이 어떻게 저 몸무게를 견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덩치가 정말 컸다.

예쁘지도 않았다. 피부는 형편없었고 옷차림도 마찬가지였지만...”

 

비주얼을 이렇게 설정한 탓인지 베라의 수사방식은 민첩함이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버 스트리트의 서평에도 썼지만, 무대가 영국이긴 해도 다소 현대적이지 못하다고 할까요?

 

스마트폰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라와 그녀의 부하들은

어딘가 시대극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탐문형 수사팀의 모습입니다.

지시하고 지시받고, 수사하고 보고하고, 회의하고 계획 짜고식의 루틴이 반복되는데다

이야기 전체에서 올드함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나방사냥꾼하버 스트리트의 아쉬움이 거의 판박이처럼 느껴진 작품입니다.

시대극 같은 분위기나 올드함은 여전했고 베라와 부하들의 캐릭터 플레이는 단조롭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점은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는데,

일찌감치 주요 등장인물의 과거만 조사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사건이었고,

그런 단선적인 구조 탓에 적잖은 등장인물들이 병풍처럼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으스스한 외진 계곡, 그곳에 모여 사는 은퇴부부들의 비밀과 거짓말,

이곳에 나타날 이유도, 이곳에서 살해될 이유도 없는 변사체들의 발견 등

폐쇄적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쫄깃한 스릴러로서의 요소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이야기를 떠받치는 결정적 역할들은 전혀 해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인물이든 사건이든 과거든 비밀이든 꽤 많이 설정됐지만 다 읽고 보면 굳이 없었어도 될,

좀 심하게 말하면, 분량 채우기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하버 스트리트를 읽지 않았다면 중반쯤 포기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때 서평에서 베라의 매력이나 부하들의 캐릭터가 궁금해서라도

한 편 정도는 더 읽을 것 같다.”고 다짐했으니 어떻게든 끝까지 달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더는 베라 스탠호프의 활약을 찾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유소영의 번역은 주로 제프리 디버의 작품을 통해 많이 접했던 편인데,

한 번도 번역의 문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깔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나방사냥꾼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았는데,

인명이나 지명이 틀린 경우도 종종 있었고, 줄바꿈이 잘못된 경우도 1~2군데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꽤 실망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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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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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책읽기의 가장 큰 목표는 미야베 월드 2막 완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마지막 작품인 외딴집을 해를 넘겨서야 읽게 됐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한번 읽었던 작품이긴 하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그런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마치 처음 읽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아쉽게도 한번에 쭉 달리지 못하고 시간 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은 탓에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상하권으로 분권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긴 하지만 큰 틀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에도에서 큰 사건을 일으킨 한 고위관리가 작은 번 마루미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마루미 사람들은 큰 혼란과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광인 혹은 귀신이라는 소문 때문에

쇼군조차 후환이 두려워 그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고 산 채로 유배를 보낸 것인데,

만일 마루미 사람들이 그를 너무잘 모시면 쇼군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가 되고,

혹시 그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역시 불충이 되어 번 전체가 위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마루미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더니,

그가 도착해서 유배생활에 들어간 후론 살인과 화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찍이 본적 없는 큰 벼락이 몰아치는 등 끊임없는 재앙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에도에 돌았던 소문대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루미 번 전체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와중에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보기 드문 여자 히키테(마을 치안을 담당하는 가장 밑바닥 직책?) 우사,

마루미 번의 유력 의사 집안의 후계자인 이노우에 게이치로,

성미 급한 말단 관리 와타베 가즈마,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루미로 흘러든 어린 소녀 호 등이

마루미 번을 덮친 크고 작은 재앙의 한복판에서 각자의 운명을 걸고 맞서 싸웁니다.

거대한 서사와 적잖은 등장인물들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직조의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대단한 반전이나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고 급한 서사를 갖추진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는 엄청난 재앙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어떻게든 이웃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고 분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딱히 누가 주인공이다, 라고 할 수 없는,

말하자면 주요 등장인물들이 1/N 씩 주인공 역할을 하는 작품에 더 가깝습니다.

독자들 가운데 이 작품을 미야베 월드 2막의 베스트로 꼽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개인적으로는 미야베 월드 2’ 20편 가운데 중상위 정도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2020년 봄 현재까지 국내에 출간된 미야베 월드 2은 모두 읽은 셈인데,

일본에서 2018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했다는 최신작(일본 원제 黑式御神火御殿’)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소개되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새카만 불을 뿜어내는 화산의 그림이 걸린 저택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란 뜻의 제목인데

미시마야 괴담 시리즈 중 한 작품인 피리술사의 수록작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처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신이 겪은 괴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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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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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릿집 후네야의 외동딸 오린은 고열을 앓고 난 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귀신들을 보게 된다.

오린만 보면 메롱~ 하며 놀려대는 얄미운 오우메, 언제나 태평한 미남 무사 겐노스케,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 오미쓰, 무뚝뚝하지만 솜씨 좋은 안마사 와라이보,

후네야의 첫 연회에서 난동을 피운 칼잡이 귀신 덥수룩이가 그들.

겐노스케는 오린에게 30년 전 이 일대에서 일어난 처참한 살인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

겐노스케를 포함한 5명의 귀신들이 이승을 헤매는 사연 역시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오린은 귀신들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성불시켜주기 위해 30년 전의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후네야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고 만다.

 

● ● ●

 

12살 소녀 오린이 만난 5명의 귀신은 괴담에 등장하는 보통 귀신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무섭지도 않고, 이승의 사람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다정한 축에 속합니다.

물론 오린만 보면 메롱~하고 놀리거나 뺨을 때리거나 얄미운 짓만 하는 오우메도 있고,

무시무시한 외모에 연회장에서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다치게 한 덥수룩이도 있지만,

그들 역시 공포를 일으키는 귀신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사연을 가진 애틋한(?) 귀신들입니다.

 

이 귀신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이승에 남아있는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라는 오린의 질문에 대해

우리도 몰라. 왜냐하면 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귀신이 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아예 모르지.”라고 답합니다.

어떤 사연으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기억 못한 탓에 이승을 떠돌게 된 이들의 성불을 위해

오린은 (이들의 죽음과 관련 있어 보이는) 30년 전의 희대의 살인극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귀신들 중엔 지금의 에 딱히 불만 같은 것도 없으니 자족하는 자도 있고,

심지어 성불을 통해 이승을 떠나는 걸 원치 않는 자도 있어서 오린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언뜻 귀신들의 캐릭터만 보면 약간 라이트하거나 귀여운 느낌의 괴담이 아닐까 여겨지지만,

12살 소녀 오린이 점차 알게 되는 귀신들의 사연은 너무나 끔찍하고 서늘할 뿐입니다.

30년 전 지금의 후네야 일대에서 벌어진 희대의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오린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인 귀신들과 마주치기도 하고,

목숨이 경각에 매달리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메롱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중요한 설정은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린은 5명의 귀신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분은 특정한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오린은 크게 놀랍니다.

나중에야 오린은 비슷한 종류의 응어리나 슬픔이란 공통점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가령, 형제자매에 얽힌 증오와 슬픔을 지닌 자는 그런 사연을 지닌 귀신을 볼 수 있고,

남녀문제 때문에 악업을 쌓은 자는 역시 그런 사연을 지닌 귀신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설정 덕분에 오린은 홀로 외롭게 귀신과 소통하는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린의 특별한 능력과 사연을 이해해주는 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클라이맥스에 후네야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난투극(?)은 그야말로 압권인데,

모든 귀신을 볼 수 있는 오린과 특정 귀신만 볼 수 있는 소수의 인물들에다

귀신 따윈 안 보이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뒤엉키면서 대혼란을 일으킵니다.

그 와중에 여러 인물들의 비밀과 거짓말이 폭로되거나 기막힌 오해가 풀리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이 영상으로 제작된다면 호러판타지의 명장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30년 전의 대규모 살인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오린과 5명의 귀신들은 엔딩을 맞이합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진상이 너무 참혹하고 안타까워서 해피엔딩이란 말이 무색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5명의 귀신들이 친절하고 다정하거나 또는 겉모습과 달리 애틋한 캐릭터였던 탓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알게 되는 과정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두에게 나름 행복한 엔딩이 펼쳐졌는데도 꽤 긴 여운이 남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메롱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시리즈 미야베 월드 2

괴수전’, ‘외딴집과 함께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 장편입니다.

개인적으론 모시치, 오하쓰, 오치카, 헤이시로 등 특정주인공이 이끄는 여러 시리즈들 못잖게

이 세 편의 장편은 엄청난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미야베 월드 2의 주된 형식인 단편 또는 연작 형태의 짧은 분량이 아쉬운 독자라면

이 장편들을 통해 미야베 미유키의 진면목을 꼭 맛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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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는 달 - 환색에도력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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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色江戶暦’(신비한 또는 기괴한 에도 달력?)이라는 원 제목답게

에도 시대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12달을 상징하는) 12개의 이야기가 수록된 연작소설입니다.

사실 다 읽은 뒤에도 딱히 사계절이나 그에 걸맞은 풍물이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섣달, 백중절, 칠월칠석, 신무월(神無月=음력10)

몇몇 작품에서 다룬 특징적인 시점들은 꽤 기억에 남기도 했습니다.

 

신이 없는 달미야베 월드 2중에서도 꽤 초기작에 속합니다.

일본에서 1994년에 출간됐으니 이보다 앞서 나온 작품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91), ‘말하는 검’(92), 그리고 흔들리는 바위’(93)뿐입니다.

말하자면 미야베 월드 2의 토대이자 시발점에 속하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수록작마다 분량도 미니단편이라 할 만큼 꽤 짧고 이야기 사이즈도 소소합니다.

수록된 작품들 역시 기담이나 괴담이 아닌 사회파 미스터리 같은 작품도 있고,

가족의 비극이나 애끓는 짝사랑을 그린 다소 평범한 옛날이야기도 있고,

너무 단선적인데다 작은 반전조차 없어서 미야베 월드 2치곤 의외였던 작품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역시 매력적인 건 귀신이나 원령이 등장하는 괴담들이었는데,

신전의 금줄 안에 내밀하게 숨겨진 머리카락이 일으킨 의문의 화재의 비밀(귀자모화),

밤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방등에 얽힌 괴담(춘화추등),

외모 때문에 원한에 사로잡힌 원령이 퍼부은 기괴한 저주를 다룬 이야기(얼굴 바라기),

100살 넘은 고양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비한 두건의 복수극(다루마 고양이),

옷에 스며든 원령이 사람의 외로움을 파고든 끝에 비극을 일으키는 이야기(고소데의 손),

목맨 시체의 형상이지만 웃는 낯으로 반갑게 사람을 맞이하는 섬뜩한 귀신(목맨 본존님)

짧은 분량에 딱 어울리는 소소한 괴담들이 그것들입니다.

 

이 가운데 춘화추등’, ‘얼굴 바라기’, ‘다루마 고양이등은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소재였다면 잘 어울렸을 것 같고,

표제작인 신이 없는 달은 장편으로 확대해도 손색이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작품 내용과는 관련 없지만 한가지 아쉬움을 사족처럼 달자면...

미야베 월드 2에 대해 지독한 편애(?)에 빠진 저야 당연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미 미야베 월드 2의 매력에 푹 빠졌던 다른 독자 가운데에는

2017년에야 국내 출간된 이 작품을 다소 심심하고 김빠지게 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이 작품으로 미야베 월드 2을 처음 접했거나

이 작품의 일본 출간시기를 모르고 읽은 독자라면 실망감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열혈독자라면 미야베 월드 2의 초기 성향을 맛본다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늦게 국내에 소개됐다는 아쉬움은 역시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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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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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권을 합쳐 1,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작품입니다.

얼간이’, ‘하루살이에 이은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얼간이하루살이가 실은 한 작품이라 할 만큼 사건과 에피소드가 이어진 작품들이라면,

진상은 전혀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 색다른 기대감을 갖고 읽었습니다.

 

이즈쓰 헤이시로는 혼조 후카가와 일대를 순시하는 임무를 맡은 하급무사 도신인데,

만사에 태평하고, 게으름이나 의욕상실에선 따라 잡을 사람이 없는 느긋한 인물입니다.

유미노스케는 헤이시로의 외조카이자 거상의 아들인 13살의 초특급 미소년으로,

측량과 지도 만들기에 관심이 많고 추리력에 관한 한 헤이시로보다 100배는 앞선 인물입니다.

 

이 콤비가 마주한 사건은 그 뿌리가 20년 전에 위치한 구원(舊怨)과 관련 있습니다.

20년 전,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우발적이긴 해도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고,

그로 인해 오늘날, 참혹한 복수극이 펼쳐지면서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맙니다.

연이어 발견된 피살자들의 관계를 추적하던 헤이시로는 20년 전의 구원을 알아내게 됐고,

유미노스케는 특유의 추리력을 발휘하여 오늘날 벌어진 복수극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다소 평범한 사건인데 1,100여 페이지라니?’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는데,

사실, 본 사건을 다룬 분량은 그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돋보이는데,

진상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에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이 작품을 농도 짙은 연애소설이라 칭한 점이나

원제 자체가 おまえさん’(오마에상=‘당신’, ‘그이’)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작 20년 전의 구원과 오늘날의 복수극은 부차적인 서사로 보일 정도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꽤 많은 인물들이 다양한 연애를 겪습니다.

세상을 등질 각오로 손에 피를 묻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적 사랑, 목숨을 건 짝사랑,

혹시나 깨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애틋한 사랑, 10대 초반에 찾아온 달뜬 첫사랑,

고백은커녕 상대의 서늘한 반응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랑 등이 그것입니다.

농도 짙은 연애소설이란 작가의 말은 무척 다의적인 표현이란 걸 알 수 있는데,

그 끝이 행복한 경우보다는 비극적이거나 애틋하거나 안쓰러운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 다양한 연애는 본 사건과 직결되는 경우도 있고, 별개의 이야기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에도 시대의 살인극을 배경으로 한 미야베 미유키의 연애소설

다른 여느 작품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알싸한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애못잖게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가족의 문제입니다.

그중에서도 소위 곁가지로 태어난 목숨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무렵에는 (딸은 말할 것도 없고) 장남 외에는 모두 군식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차남 이하 아들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을 장남 외에는 잘 해야 데릴사위, 아니면 스스로 독립을 해야 했는데,

몇몇 등장인물들은 이 비참한 신세로 인해 인생행로가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 아이를 버린 부모,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의 비극도 꽤 비중 있게 그려지는데,

그들의 이야기 역시 에도 시대라는 배경 덕분에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한편,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녀 캐릭터는 사뭇 편향적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남자들이 대체로 한량이거나 무기력하거나 덜 떨어져 보인다면,

여자들은 주관과 고집은 뚜렷하고 생활력은 무척 강한 적극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여자들이 살기 힘든 시대였다는 반증일 수도 있는데,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에 못잖은 주연급 인물인 반찬가게 주인 오토쿠는

거칠고 다부진 면모와 바닥 모를 동정심을 겸비한 여걸 중의 여걸로서

에도 시대의 여자들의 고달팠던 삶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독자에 따라 메인 사건에 치중하지 않는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연애, 가족, 성장, 남녀문제 등 소재도 다채로운데다,

미야베 미유키 말대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이입할 수만 있다면

적잖은 분량임에도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는 이후로 더는 나오지 않아 무척 아쉬운데,

무엇보다 천재적인 미소년 유미노스케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너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맥이 끊겼던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가 최근 신작이 나온 걸 보면,

언젠가는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역시 새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데,

과연 유미노스케가 어떤 청년으로 성장했을지, 헤이시로는 여전히 게으르고 만사태평일지,

또 오토쿠의 반찬가게는 어떤 군식구들을 받아들였을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피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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