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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7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에도시대 기타간토의 작은 번(藩) 기타미의 청년 번주 시게오키는
실성과 착란을 거듭한 끝에 실각당한 뒤 호수 근처의 별저 고코인(五香苑)에 유폐된다.
고코인의 저택 관리인 이시노 오리베의 지휘 하에 주치의 시로타 노보루,
무가의 딸 가가미 다키, 하인 스즈, 고, 간키치 등이 성심과 충의를 다하지만
시게오키는 앳된 소년인 듯, 중년 여인인 듯, 상스러운 사내인 듯
또 하나의 자아를 내세울 뿐 좀처럼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를 가둔 엄청난 어둠의 심연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한편, 이혼 후 아버지까지 잃은 가가미 다키는 운명적으로 시게오키의 시중을 들게 되는데,
마음을 다해 모시는 사이, 다키의 마음속엔 시게오키에 대한 존경 이상의 애틋함이 생겨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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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권 합쳐 9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대작입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미미 여사의 ‘방대한 분량’은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 등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서 익숙해졌지만,
역시 눈과 손으로 느껴지는 중압감은 매번 고민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봄’은 처음부터 분량의 압박 따윈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미미 여사의 에도시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애정하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2막’,
즉,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괴담 미스터리 시리즈인데,
‘세상의 봄’은 어찌 보면 ‘미야베 월드 2막’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괴담과 미스터리가 적절히 배합된 작품입니다.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진 불행한 청년 번주 시게오키,
미타마쿠리라는 강령술을 구사할 줄 아는 무가의 후손인 다키,
주술과 검술을 함께 지닌 위험천만한 조직,
한 마을을 몰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증오심을 가진 세력,
오랜 기간에 걸쳐 벌어진 의문의 소년 실종사건 등
그야말로 에도시대 미스터리의 대가인 미미 여사의 필살기(?)가 모두 녹아든 작품이라
900페이지가 넘는 상하권을 한 번에 끝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크게 보면, 실성한 듯한 청년 번주 시게오키의 비밀과 상처를 탐색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로,
무엇이 그를 수치와 공포심에 빠진 끝에 실성한 듯 보이게 만들었는가,
그 와중에 벌어진 한 마을의 몰살사건과 연쇄소년실종사건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현재도 진행 중인 시게오키에 대한 위협은 과연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것인가, 등
미스터리 자체가 주된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강령술과 주술 등 에도시대 특유의 괴담 서사가 잘 배합돼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유폐된 시게오키를 진심으로 돌보는 다키의 충심과 애정,
유폐장소인 고코인의 하인들이 시게오키와 다키와 주고받는 끈끈하고 다정다감한 인연,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시게오키와 다키를 돕는 여러 사람들의 진심 등
그 시대만이 발산할 수 있는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들도 충만해서
간혹 페이지를 넘기다가 울컥하는 느낌을 수시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야베 월드 2막’ 중 수작으로 꼽히는 ‘외딴집’이 자주 떠올랐는데,
광인(狂人)으로 소문난 에도의 고위관리가 작은 번의 고립된 장소에 유폐된다는 설정,
그 관리의 광기가 실은 소문과는 달리 너무나도 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점,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관리를 진심으로 돕는 자가 연약한 어린 소녀라는 점,
또, 수시로 내리치는 천둥번개가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점 등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사건도 다양해서 할 말이 참 많은 작품인데,
인물이든 사건이든 조금만 상세하게 소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서평을 쓰는 입장에선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편집(오타)이라든가 결말부의 약간의 느슨함 등 아쉬운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월드 2막’의 팬이라면 무조건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잔혹하면서도 심금을 울리고, 괴이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론 애틋한
미미 여사의 롤러코스터 같은 에도시대 이야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