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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 남자 ㅣ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9년 10월
평점 :
등굣길에 납치됐다가 어느 날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사만타.
사건 당시 거액의 조사비만 챙겼던 탐정 브루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납치범을 찾아 나선다.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납치범은 하트 모양 눈이 달린 토끼 가면을 쓴 남자로, 일명 ‘버니’다.
하지만 경찰은 비협조적일 뿐이고, 브루노의 조사는 막다른 곳에 다다른다.
결국 실마리를 잡기 위해 사건이 시작된 곳을 찾아간 브루노는
버니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큰 위기에 빠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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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 ‘이름 없는 자’, ‘안개 속 소녀’까지 매번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또 읽어야 되나?” 고민하곤 했는데,
언제나처럼 신간 소식에 마음이 흔들린 끝에 또다시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살의를 부추기는 내면의 끔찍한 그 무엇(또는 그 누군가)’가 핵심이다 보니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들은 줄거리나 주인공 캐릭터보다는
음습하고 끈적끈적한, 아주 기분 나쁜 ‘분위기’를 뇌리에 더 깊이 박아놓곤 합니다.
또, 추악한 욕망이나 일그러진 정신에 기반한 일반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도무지 그 목적도 속내도 짐작할 수 없는 ‘정신조종자’들이 범죄를 사주하는 이야기들이라
읽고 있다 보면 머릿속이 한없이 오염되는 듯한 불쾌한 느낌까지 받게 되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이 불쾌한 느낌이 그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게 만드는 이상한 마력이기도 합니다.
‘자위적 사이코패스’는 도나토 카리시의 특징을 응축한 개념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이들은 육체보다 정신적인 폭력을 가할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끼며,
나아가 피해자들이 직접 ‘몹쓸 짓’을 하게 만든다.
이런 경험 때문에 피해자들 중 일부는 성장하여 자신이 가해자가 되고 만다.”
즉, 정신을 속박하고 학대한 끝에 자신의 승계자로 만드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앞선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들 속 악마들이 대체로 이런 범주의 인간들이었는데,
‘미로 속 남자’의 악마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진화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악마의 진화’가 역설적이게도 작품에 대한 호감을 절하시켰다는 점입니다.
앞선 작품들 속 악마 역시 100% 따라가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막판에 이르러 미스터리가 밝혀지면서 나름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미로 속 남자’의 악마는 왠지 인공미가 너무 가해진 나머지 현실감이 떨어진 것은 물론
이야기를 독하게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게 아닌가, 라는 불편함까지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끔찍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도록 타인을 세뇌하고 마음을 조종한다는 설정은
미스터리와 잘 결합되기만 한다면 엄청난 매력을 지닌 게 맞지만,
‘미로 속 남자’는 전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설정 자체의 매력이 휘발됐습니다.
다분히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서평이란 게 원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쓰고 보니, 줄거리나 주인공 얘긴 없고 인상비평 같은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느 대목을 소개하든 자칫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서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막판에 후속작을 염두에 둔 듯한 꽤 큰 떡밥이 제시되긴 했지만,
도나토 카리시의 다음 작품이 또다시 ‘속삭이는 자’ 시리즈라면
그땐 정말 읽어야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