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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스 라이크 어스
크리스티나 앨저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3월
평점 :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10년 만에 고향 롱아일랜드 서퍽 카운티에 온 FBI 요원 넬 플린은
본의 아니게 현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에 비공식 자문역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사를 할수록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사건에 어른거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빈부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롱아일랜드의 현실,
정재계 고위직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엄청난 파티와 거기에 동원되는 매춘부들,
그리고 강압적이고 부적절한 수사를 관행처럼 여기는 서퍽 카운티의 경찰들까지
넬 플린은 다신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고향에서 충격적인 사실들과 연이어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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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속 주요 캐릭터들은 다분히 의도적인 제목에서 예감할 수 있듯 주로 여성들입니다.
다부지고 올곧은 FBI 행동분석요원 넬 플린,
경찰의 부당한 일처리에 반발하는 초짜 검시관 제이미,
넬을 돕는 FBI 인신매매팀장 세라, 그리고 진실을 밝히려는 기자 앤 마리까지...
또한 부당한 공권력과 가부장적인 권력층의 희생양 역시 대부분 여성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페미니즘 계열이거나 남성혐오 소설이란 얘긴 아닙니다.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남녀 캐릭터를 이분법적으로 배치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여성범죄를 다루는 여성수사관’인 건 사실입니다.
얼굴 정면에서 총을 맞은 뒤 사지가 잘린 채 발견된 희생자들은 모두 매춘부들입니다.
넬은 어릴 적 친구인 신참 경찰 리의 부탁으로 비공식 자문에 나서지만
몸과 마음 모두 단단하고 정직하게 단련된 그녀는
서퍽 카운티 경찰들보다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사에 임합니다.
문제는 그 덕분에 아버지와 서퍽 카운티 경찰들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 바라보게 됐고,
어린 시절 참혹한 범죄에 희생된 어머니의 죽음까지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는 점입니다.
넬의 수사는 독자로 하여금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데,
서퍽 카운티 안팎의 그 누구도 확실히 넬의 아군이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FBI 본부는 그녀의 휴직과 복직을 놓고 압박을 가하는 중이고,
아버지의 친구들이자 어릴 적부터 친근하게 따랐던 서퍽 카운티의 경찰들은 어딘가 수상쩍고,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넬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범인의 불온한 기운은
넬은 물론 독자들마저 쉽게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실상은 꽤나 복잡한 사건과 인물들을 설정했음에도
작가는 무척 잘 짜인 설계도 위에서 큰 그림은 물론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공 넬 플린은 슈퍼우먼이나 극강의 히로인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인간적인 캐릭터 때문에 감정이입도 쉽고 응원하고픈 마음도 절로 들게 만듭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조연들의 존재감도 생생하고 소소한 반전들도 재미있게 읽힙니다.
하지만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4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담으려다 보니
간혹 스킵하듯, 또는 요점 정리하듯 지나가는 대목들이 종종 보인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과도한 분량 때문에 작품의 미덕이 휘발된 경우는 적잖이 봤어도
이렇듯 ‘한 100페이지만 더 썼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독자에 따라 저와 생각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분량의 아쉬움이 별 0.5개를 뺀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론 ‘넬 플린 시리즈’가 이어졌으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인데,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딱히 그런 설명은 없어서 다시금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족 같지만 사소한 지적 하나만 부연하자면,
도무지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또 뭘 표현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지 디자인의 문제입니다.
안 그래도 낯선 작가라 고를까 말까 망설인 게 사실인데,
그보다 더 망설이게 만든 건 꽤나 ‘저렴하고 경박해 보이는’ 표지 디자인이었습니다.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어쩌면 표지 때문에 외면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