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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단 ㅣ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평점 :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정식 사무실 하나 없이 링컨 차 뒷좌석에서 업무를 보는가 하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수임료는 수임료다.”라며
명백히 유죄로 보이는 ‘나쁜 사람들’을 위한 변호에 전력을 다하지만,
실은 정의감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미키 할러입니다.
이번에 미키가 맡은 사건은 여러 가지로 심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자신이 변호해 석방시킨 의뢰인이 음주운전으로 시민을 사망하게 한 사건 이후
죄책감은 물론 딸 헤일리에게 절연 선언까지 당해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던 미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살인사건 용의자인 디지털 포주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문제는 그에게 살해당한 여자가 한때 사랑했던 콜걸 글로리아라는 점입니다.
용의자가 “글로리아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미키를 찾아가라.”라고 했다며
자신의 무죄를 진심으로 주장하는데다 정황 상 범인이 따로 있다고 판단한 미키는
글로리아를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렇게 출발한 이야기에 또 하나의 사건이 끼어듭니다.
8년 전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중범죄자가 새삼 무고를 주장하며
당시 사건에 개입했던 미키에게 소환장을 보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특히 그 사건에 글로리아 역시 개입된 사실을 떠올린 미키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두 사건이 실은 한 갈래의 사건이라는 점을 깨닫고
8년 전 사건과 글로리아 피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 중 200여 페이지가 법정 공방 장면입니다.
물론 사이사이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사건이 끼어들긴 하지만
역시 법정 스릴러답게 검찰과 판사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하지만 모호한 접점을 가진 두 개의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도 매력적이고,
‘나쁜 사람을 변호하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 헤일리와의 갈등도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재미있는 건, 지금은 요양병원에 있는 미키의 ‘멘토’ 리걸 시걸의 역할인데,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법정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혜안을 갖고 있는 건 물론
궁지에 빠진 미키에게 인생 선배로서, 변호사 선배로서 진지한 조언을 건네는 인물입니다.
그 외에 ‘두 번째 전처’이자 사무장을 맡은 로나, 그 로나와 결혼한 전천후 조사관 시스코,
링컨 차를 운전하는 얼 브릭스, 새내기 변호사 제니퍼 애런슨 등
미키의 든든한 아군들이 펼치는 활약도 스릴러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요소들입니다.
작품 곳곳에서 눈에 띄는 ‘단죄의 신들’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이 작품의 원제목인 ‘The Gods of Guilt’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직설적으로는 12명의 배심원단을 뜻하기도 하지만 미키에게는 좀 특별한 의미로 해석됩니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상처 준 사람들. 나를 축복하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들.”
즉 삶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들 하나하나가 미키에게는 배심원이자 단죄의 신이며,
미키는 늘 그들 앞에 서서 자신을 위한 변론을 펼쳐간다는 뜻으로 설정된 개념입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 묘사된 미키의 여러 가지 심란한 상황들로 볼 때
다소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 개념이 적절해 보일 때도 있지만,
조금은 이야기 자체와 동떨어진, 그러니까 어딘가 ‘폼’을 위한 설정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100% 동감하기에는 미키의 고뇌가 그리 강렬하게 그려진 것 같지 않았고,
글로리아 살인사건 자체에 몰두한 전형적인 스릴러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느닷없이 등장한, 엔딩을 위한 멋부림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배심원단’이라는 번역 제목도 참 모호하게 느껴졌는데,
실제로 이 작품에서 법정의 배심원단은 특별한 역할을 맡은 게 없고,
그렇다고 ‘미키의 인생 배심원단’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제대로 그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직역에 가깝게 ‘단죄의 신들’이란 제목이 적절하지 않았을까요?
언제나처럼 마이클 코널리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재미와 긴장감을 갖추고 있습니다.
‘배심원단’ 역시 첫 페이지를 펼치면 한 호흡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기대했던 반전이나 막판의 짜릿함은 전작들에 비해 약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다만, 미키의 캐릭터가 왠지 자꾸 이복 형 해리 보슈를 따라가는 것 같다는 점이 아쉬웠고,
그래서인지 미키 할러 시리즈만큼은 ‘재미 만점의 법정 스릴러’로 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애정 섞인 조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거지만, 전편 ‘다섯 번째 증인’도 한정아 님이 번역하셨는데,
로나의 남편 이름은 ‘데니스 뵈치에호프스키(일명 시스코)’에서 ‘시스코 보이체홉스키’로,
새내기 변호사 제니퍼 애런슨의 별명은 ‘불락스’에서 ‘송아지’로 바뀌었네요.
필요해서 수정한 부분이겠지만 시리즈를 계속 읽는 독자 입장에선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