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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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제니와 딸 이지가 괴한에게 살해당한 후 장례식까지 마친지 벌써 3.

하지만 게이브는 여전히 전단지를 들고 딸 이지를 찾아다닙니다.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간, 낯선 차에 타고 있던 살아있는 이지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지가 타고 있었던 낯선 차를 발견한 게이브는

트렁크 속 부패한 시신과 함께 디 아더 피플이라는 글씨의 흔적이 남은 수첩을 발견합니다.

디 아더 피플이 사적 복수를 주고받는 은밀한 조직이란 걸 알게 된 게이브는

어쩌면 아내와 딸의 죽음이 자신의 과거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습니다.

 

● ● ●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범죄자가 넘쳐나는 세상. ‘디 아더 피플이 대신 처리해드립니다.

의뢰한 모든 요청은 반드시 실행됩니다.”

 

디 아더 피플은 다크 웹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은밀한 조직입니다.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대로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법망을 빠져나간 죄인을 처단합니다.

그들은 처단에 관해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다른 처단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걸 거부하는 자에겐 디 아더 피플의 잔혹하고 끔찍한 응징이 기다릴 뿐입니다.

 

사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봤을 때는 그렉 허위츠의 살인위원회가 떠올랐습니다.

사적 복수를 위해 모인 그룹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복수가 주된 내용일 거라 추측한 거죠.

하지만 초크맨C. J. 튜더라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적 복수를 다룰 것 같았고,

역시 기대한대로 전혀 새로운 서사가 450여 페이지의 분량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타이틀 롤인 (사적 복수를 위한 다크 웹 상의 조직) ‘디 아더 피플

이야기의 뒷면 혹은 행간에만 등장할 뿐 복수극의 전면에 나서지 않습니다.

,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조직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통쾌한 사적 복수를 기대한 독자들에게 의외의 설정으로 보이겠지만,

개인적으론 상투적일 수도 있는 사적 복수를 이렇게 다룰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겪은 작품이었습니다.

 

초크맨서평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디 아더 피플역시 초반부 이상의 줄거리를 소개하기가 난감한 작품입니다.

중요한 설정이나 변곡점들이 꽤 많다 보니 그 어느 것을 소개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고,

그 부분들을 소개하지 않으면 두루뭉술한 인상 비평 이상의 서평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수를 의뢰했다면 반드시 그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디 아더 피플의 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참혹한 비극을 겪는다는 설정만으로도

스릴러 마니아의 기대와 관심을 얻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건 분명합니다.

 

사적 복수를 다룬 스릴러 서사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만큼 눈길을 끈 건 유려하면서도 적확한 언어들로 만들어진 맛있는 문장들입니다.

C. J. 튜더의 국내 출간작은 물론 스티븐 킹의 작품을 주로 번역한 이은선 님 덕분이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런 문장들을 구사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저절로 들 정도로

C. J. 튜더의 필력은 스릴러 서사 못잖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별 다섯 개도 모자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0.5개를 뺀 이유는 딱 한 가지인데,

왠지 작가가 욕심을 부린 것만 같은 사족 같은 호러 판타지 코드 때문입니다.

이 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하게 소개할 순 없지만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현실 속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작품에

왜 굳이 낯설고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호러 판타지 코드를 넣은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사실 초크맨서평에도 곳곳에서 스티븐 킹의 호러 판타지의 느낌을 받았다.”라고 썼는데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작가의 강력한 취향 중 하나가 스티븐 킹과 동류항인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질감이 너무 심한 나머지 막판에 살짝 어이없게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초크맨디 아더 피플중간에 출간된 애니가 돌아왔다는 아직 못 읽었는데,

옮긴이의 글을 보니 내년에도 C. J. 튜더의 신작이 나올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바빠집니다.

잉글랜드 남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음습하고 불길한 일들을 다룬다고 하니

아무래도 스티븐 킹을 연상시키는 호러 판타지 성향이 강한 작품일 것 같은데

초크맨디 아더 피플에서 살짝 맛배기(?)만 보여줬던 작가가

어쩌면 자신의 진짜 취향과 진면목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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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링 룸 스토리콜렉터 80
딘 쿤츠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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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FBI 요원이었지만 뇌 임플란트를 통해 인간을 조종하려는 거대 조직에 맞서 싸우다가

오히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수배령이 떨어진 제인 호크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사일런트 코너에서 전도유망한 군인이던 남편 닉의 갑작스런 자살 이후

그 의혹을 쫓던 제인은 거대 조직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물론 그들과 정면대결을 시작했는데

위스퍼링 룸은 거대 조직의 최상층을 향한 제인의 분투를 그린 작품입니다.

 

거대 조직의 뇌 임플란트와 나노테크놀러지는 인간성이 말살된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 채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입력된 인물도 있고,

멀쩡해 보이지만 분명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듯 성질자체가 변해버린 인물도 있고

단 한 줄의 지시어로 순식간에 수동적인 로봇처럼 순종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가장 최악은 슈퍼컴퓨터가 지목한 더 나은 세상에 방해가 되는 불순물로 하여금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소위 자살 유도 메커니즘입니다.

 

제인은 전작에서 확보한 거대 조직의 물증을 언론을 통해 폭로하려 하다 실패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인 데이비드 마이클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 그녀가 향하는 곳은 켄터키 주의 외딴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입니다.

한편, 오랜 지인이던 평범한 교사 코라가 일으킨 폭탄테러 때문에 충격을 받은 보안관 루서는

사건을 어물쩍 왜곡하려는 FBI에 의심을 품고 코라의 일기장을 통해 그녀의 행적을 쫓던 중

(제인이 향하고 있는 켄터기의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확신을 갖곤

FBI 모르게 개인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뇌 임플란트와 나노테크놀러지를 통해 인간의 뇌를 장악하여 마음껏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순물로 추정되는 인간을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는 설정은

다소 황당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 벌어질 법한 SF 스토리를 연상하게 만들지만

작가는 이 소재를 독자의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는 지극히 현실적인 스릴러로 전개시킵니다.

현실적 스릴러의 가장 큰 기반은 홀로 거대조직과 맞서 싸우는 제인 호크라는 캐릭터인데

독자에 따라 너무 심한 슈퍼우먼 아니냐?”라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투쟁의 출발점을 그린 시리즈 첫 편 사일런트 코너를 읽어보면

그런 우려는 대체로 불식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크게 보면 제인과 루서가 켄터키 시골마을 아이언 퍼니스에서 만나게 되기까지가 전반전,

이후 그곳에서의 탈출극과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 데이비드 마이클을 향한 공격이 후반전인데

사일런트 코너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독자의 호기심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데 반해

이 작품은 핵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나 디테일한 묘사 등 사족이 좀 과해 보였고,

그로 인해 이야기가 단선적이면서 느슨해졌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인의 비중에 맞먹는 루서라는 인물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기도 했고,

인물의 심리나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잖은 지면을 할애한 게 큰 이유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560p에 달하는 분량에서 조금만 덜어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직 FBI 요원 제인과 보안관 루서의 투쟁은 후속작에서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인간성을 말살하고 삶과 죽음까지 제멋대로 조종하려는 거대 조직과의 싸움에서

과연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이겨낼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특히 제인마저 자신들의 조종을 받게 만들겠다는 거대 조직의 암시는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녀의 싸움이 훨씬 더 지난해질 거라는 예고처럼 들려서

벌써부터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자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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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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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차별 연쇄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이치로이 고즈에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후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절망스러웠던 고즈에는 살인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결국 미제 사건으로 묻히면서 그녀의 희망도 그대로 꺾이고 말았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의 의뢰로 추리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미스터리 작가, 전직 형사 등이 멤버인 추리 집단 연미회

각자의 가설과 추론을 바탕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진상은 물론 범인의 동기를 파악하려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일곱 번 죽은 남자’, ‘닷쿠&다카치 시리즈로 잘 알려진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입니다.

최근 전작이 2016인격전이의 살인이었으니 무려 3년 만에 신작이 출간된 건데,

2013~14년에 걸쳐 봇물처럼 신작이 쏟아져 나왔던 것에 비하면 공백이 꽤 길었던 셈입니다.

특히 북로드와 한스미디어에서만 나왔던 그의 작품이 아프로스미디어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어쩌면 무척 독특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진 게 사실입니다.

 

연쇄살인마의 손아귀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고통과 함께

왜 자신이 공격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이치로이 고즈에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의 소개로 연미회라는 이름의 추리 전문가들과 만납니다.

하지만 형사가 제공한 자료 외에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들은

나름 전문가들이라고는 해도 고즈에가 듣기에 엉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추론만 내놓습니다.

미씽링크, 밀실트릭, 12, 3자 범인설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고즈에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라고 할 정도로 대책 없는 난상토론만 벌어집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일곱 번 죽은 남자그녀가 죽은 밤처럼

이 작품 역시 예상치 못한 막판 반전 덕분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 쾌감을 느낀 건 맞지만

정작 이야기의 몸통이 연미회멤버들의 엉뚱한 추리로 채워진 탓에

읽는 내내 고즈에와 똑같은 답답함과 분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연미회멤버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을 못 살게 구는 덜 떨어진 조연들 캐릭터와 흡사했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물론 조금 전의 주장까지 쉽게 뒤집는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친 덕분에 막판에 폭로되는 진실의 무게가 육중해진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배보다 배꼽이 과도하게 커진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시점부터 이 궤변들을 계속 읽어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기도 했는데,

그래도 뭔가 중요한 단서가 소개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건너뛰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400p가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연미회분량을 100p 이상 들어냈어도 충분했을 것 같고,

오히려 막판 반전에 조금 더 비중과 분량을 할애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제 면에서 보면 옮긴이의 글에서도 강조했듯 이 작품의 핵심 소재는 동기입니다.

주인공 고즈에가 연미회를 찾아온 것도 자신을 죽이려 한 자의 동기를 알고 싶어서였고,

연미회의 추론 가운데 상당 부분도 연쇄살인범의 동기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 막판 반전의 저변에 흐르는 중요한 서사도 바로 동기에 의해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강조한 동기는 일반 미스터리 속 동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진짜 그런 동기를 지닌 살인마가 존재할까?

이런 의문이 절로 들게끔 만드는 진실 속 동기는 그래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한편으론 연미회의 찌질한 추리 때문에 분량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 짧아 아쉽기만 했던 막판 반전은 과연 니시자와 야스히코!”라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다소 갈릴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팬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품은 분명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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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검은 그림자의 진실
나혁진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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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불의의 사고로 가족이 붕괴된 뒤 경찰을 그만두곤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 이호진.

그런 그에게 10년 동안 상사였던 백과장이 찾아와 실종된 딸 은애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백과장이 공식 수사 대신 호진에게 은밀한 조사를 부탁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억하던 범생이은애와 음란물 속 은애의 엄청난 간극 때문에 충격을 받은 호진은

단서 하나 없이 음란물이 담긴 USB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불가능해 보이는 수사에 나섭니다.

 

● ● ●

 

2014교도섬’, 2017낙원남녀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나혁진의 작품입니다.

교도섬은 강력범죄자의 영원한 격리를 위해 정부가 임대한 필리핀의 작은 섬이 무대였고,

낙원남녀는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상큼하고 발랄한 로맨틱 추리극이었는데,

이번에 나혁진은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n번방, 야동, 벗방 등

성을 매개로 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소재 면에서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상처는 작가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지만 워낙 민감한 소재라 주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하고 폭발력 강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가족을 잃은 뒤 형사라는 직업을 택한 자신을 혐오하며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호진이

백과장의 딸 은애의 실종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 10년 동안 모셨던 백과장에 대한 의리가 먼저 작동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 등장했다는 점,

그것도 강요받았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보인 그녀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시절의 모범적인은애를 기억하는 호진에게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분명 이면에 뭔가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호진의 수사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한 기승전결로 이어집니다.

마무리됐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큰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이어진 수사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은애에 관한 사실들은 호진을 무자비하게 뒤흔듭니다.

그리고 정말 마무리됐다 싶을 때, 그는 새로운 위화감을 느끼곤 찬찬히 기억을 더듬다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서사 덕분에 35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롤러코스터를 몇 번은 탄 느낌을 받게 되는데

소재 자체가 워낙 민감한데다 다소 잔혹한 장면들도 적잖이 포함돼있어서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과 아찔함은 훨씬 더 배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몇몇 지점에서 아쉬운 점도 느껴졌는데,

무엇보다 호진의 수사가 조금은 쉽고 편하게 전개됐다는 점,

그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를 지닌 조연들이 적재적소에 편리하게 배치됐다는 점,

납득 가능한 반전보다는 강력한 의외성에 방점을 찍은 듯한 막판 진실의 무리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아낸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서사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사회적 이슈로까지 확장되지 못한 소재의 문제인데,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성 문제들을 통렬하게 파헤쳐 드러내고 있는이란 카피는

좀더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그에 걸맞은 마무리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채 조금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뜻입니다.

 

교도섬후기에서 작가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는 표현을 쓴 적 있는데,

낙원남녀에서도 살짝 엿보였던 그 치기는 이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소재나 주제가 치기를 부리기엔 적절치 않았던 점도 있지만

분명 전작들에 비해 좀더 진화되고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좀더 정교한 설계와 묵직한 디테일이 장착된다면 다음 작품에선 그의 치기

오히려 독자의 눈길을 끄는 가장 큰 힘이 될 거란 기대와 바람이 함께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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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밑 두개골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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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탐정사무소의 대표가 된 코델리아 그레이.

연이어 협박 편지를 받고 있는 여배우의 신변을 지키는 것과 함께

협박 편지를 보낸 자를 찾아내라는 의뢰를 받은 그녀는

개인 소유의 섬에서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연극에 출연 예정인 여배우를 따라

갑자기 며칠간 섬으로 외유를 떠나게 되자 사뭇 들뜬 기분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섬에 들어온 이후 사람과 풍경이 일제히 내뿜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코델리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 ● ●

 

P.D. 제임스는 영국의 대표적 미스터리 작가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몇 편 없습니다.

그녀의 대표 캐릭터는 시인이자 경관인 애덤 달글리시지만,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P.D. 제임스의 두 작품은 여성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입니다.

재미있는 건, 시리즈 첫 편인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1972년에 출간됐는데

후속작인 이 작품은 10년 후에야 출간된 것은 물론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됐다는 점입니다.

전작인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덕분에

단 두 편뿐인 시리즈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면서 남은 한 편의 출간을 고대해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작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은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인 오스틴과 애거스 크리스티의 우아한 유령이 공동 작업을 했다면?”이란 카피처럼

이 작품은 서늘한 미스터리와 영국 특유의 유려하고 삐딱한(?) 순문학의 향기가 혼재돼있는데

이런 뉘앙스는 전작에서도 맛깔스럽게 잘 버무려져 특별한 재미를 준 바 있습니다.

하지만 피부 밑 두개골은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제인 오스틴의 유령이 압도적으로 강세였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령은 네이밍 자체가 무안할 정도로 왜소하고 소박할 뿐입니다.

 

고백하자면, 552p 중 제대로 읽은 것은 초반 200p와 마지막 100p 정도였고

중간의 250p 이상의 분량은 등장인물의 대화만 읽은 게 사실입니다.

섬의 잔혹한 역사 및 어딘가 수상쩍은 연극 공연에 대한 사전 설명과

코델리아를 포함, 섬에 들어가기로 돼있는 인물들의 비밀스런 전사(前史)를 설명한 초반부는

제법 긴장감도 넘치고 맛깔난 영국 순문학의 문장들을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목이지만

(초반부의 이 만족감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 분명한 성실한 번역 덕분입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의 지루하고 진전 없는 이야기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지루했습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서평에서도

풍경이나 사람에 대한 지나치게 세밀하고 장황한 묘사가 잦아서

책읽기의 흐름을 뚝뚝 끊게 만드는 경우가 적잖았다.”라고 지적한 적 있는데,

피부 밑 두개골은 그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도저히 미스터리에 몰입할 수 없었습니다.

 

코델리아가 탐정으로서 활약하는 대목은 너무 미미하고 별로 극적이지 않았고,

마지막에 밝혀진 진실은 이 작품이 굳이 552p라는 분량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작가의 그리려던 궁극의 목표와 미덕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섬을 온통 도배하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에 대한 엄청난 설명이라든가

소품과 풍경에 대한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적절한 수준으로만 유지됐다면

훨씬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350p 분량이라면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할까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에 대한 저의 한 줄 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코델리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역할 때문에 그녀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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