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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립트 ㅣ 스토리콜렉터 15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박계수 옮김 / 북로드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아르노 슈트로벨은 2015년 ‘관’이라는 작품으로 먼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을 관에 가둔 채 생매장시키는 범인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인데,
‘스크립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훨씬 더 잔혹한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극단적인 소시오패스에 의한 예측불허의 범죄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관’이 심리 스릴러의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 반해
‘스크립트’는 사건 중심의 정통 스릴러로서 확연히 다른 색깔을 지닌 작품입니다.
여자를 살해하고 피부를 벗겨낸 뒤 소설을 새겨 소포로 보내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문제는 범인이 한 스릴러 작가의 소설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소설에 따르면 앞으로도 숱한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경찰은 경악합니다.
이 사건을 맡은 함부르크 경찰서 안드레아 마티센과 슈테판 에르트만은
유력 신문사 사장의 딸을 포함 최소 두 명 이상이 납치된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에 나서는데,
소설을 쓴 작가, 담당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소설가의 광팬이자 서점주인 등
이 사건으로 인해 이익을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수사는 혼선을 겪게 됩니다.
사건 자체도 끔찍하지만 잔혹한 범죄를 다룬 소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또,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도 이 소설가의 소설을 모방한 잔혹범죄가 벌어진 적이 있었고
그 사건이 현재까지도 미제 상태라는 설정 때문에 독자는 더더욱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소설가의 광팬인 불특정 소시오패스의 미친 범죄인지,
소설이 화제가 되면서 물질적 이익을 볼 소설 관계자의 계획범죄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수사를 맡은 마티센과 에르트만의 초동 수사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그에 덧붙여 두 형사의 특별한 관계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에르트만은 매사에 교과서적인 태도만 보이는 상관 마티센이 사사건건 못마땅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을 수도 있던 수사본부장 대리 자리를 그녀가 차지한 게 결정타였는데,
그런 마티센이 실은 상부로부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점차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물론 상부에 함께 저항하는 파트너로 발전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케미가 메인 사건 못잖게 흥미진진한 덕분에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장점도 많은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많았는데,
가장 큰 건 이야기의 몸통, 그러니까 마티센과 에르트만의 수사 과정입니다.
요점만 이야기하면, 이들의 수사는 소설 관계자들에 대한 반복적인 탐문이 전부입니다.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됩니다.
물론 ‘누구도 범인이 될 수 있다’는 독자의 의혹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솔직히 좀 지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막판에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고 예상외의 진범을 특정하는 대목은 나름 스릴감이 높지만
중간 과정의 느슨함은 예전에 읽은 ‘관’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점이라
아무래도 작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것 두 가지만 더 얘기하면,
마티센과 에르트만은 범죄의 ‘원작’인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남에게 떠맡기듯 하는데,
그 소설은 범행 과정과 동기는 물론 다음 범행을 예측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도 있지만
정작 수사를 맡은 두 주인공은 그다지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치 그 소설을 읽어버리면 수사가 너무 빨리 끝날 수도 있어서 일부러 회피한 느낌이랄까요?
또 하나는 ‘이름’까지 부여되고도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일부 조연들의 문제인데,
심지어 주요 용의자이자 납치된 여성의 남자친구는 중반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독일 또는 북유럽 특유의 잔혹한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 도전해볼만한 작품이고,
제 서평이나 출판사 소개글만 보고도 속이 불편한 독자라면 피하는 게 좋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무척 좋아하는 장르지만 이야기 몸통의 느슨함 때문에 별 하나를 뺐는데,
이 점은 독자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