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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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 브르타뉴 해변의 호텔 128호실에서 소설 원고를 발견한 안느 리즈는

원고 안에 적힌 주소로 원고와 발견 정황을 담은 편지를 발송한다.

이를 받은 회사원 실베스트르는 그 원고가 자신이 33년 전 캐나다에서 잃어버린 것이며,

뒷부분의 내용은 자기가 쓴 게 아니라는 답장을 보낸다.

독특한 사연에 호기심이 생긴 안느 리즈는 128호실의 이전 숙박객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해

원고가 어쩌다 캐나다에서 한적한 프랑스의 해변 호텔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과 편지로, 또 직접 만나 원고를 얻게 된 사연을 들으며

안느 리즈는 이 원고가 잠시라도 그걸 소유했던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어쩌면 제가 이 작품을 읽게 된 계기 자체가 이 작품 속 사연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1년 내내 장르물만 찾는 제가 낯선 프랑스 작가의 순문학을 읽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인데,

(무슨 책을 선물로 받을지 알 수 없었던) 한스미디어 카페의 소소한 이벤트 덕분에

(안 그랬다면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던)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느 리즈의 조사에 따르면 원고는 우연과 운명처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됐는데,

특이한 건, 크고 작은 상처로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그 원고 덕분에 기운을 내거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33년이란 시간이 말해주듯 그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이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주고받는 지금은 과거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50대 이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 우연히 또는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온 그 원고 덕분에...”라는 말과 함께

안느 리즈의 조사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도움을 줍니다.

 

‘128호실의 원고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서간체로 쓰인 작품입니다.

원고를 찾아낸 안느 리주와 원고의 원작자인 실베스트르가 주고받은 편지뿐 아니라

이 원고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포함돼있습니다.

그 편지들 속엔 원고의 이력에 관한 미스터리만 실린 게 아닙니다.

이 원고로 인해 새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의 두렵지만 심장을 뛰게 하는 흥분과 감정,

이 원고 때문에 잊고 있던 과거의 상처, 또는 새롭게 알게 된 진실과 직면한 사람들의 충격,

또 이 원고 덕분에 세상 또는 사람들을 향한 철벽을 거두게 된 사람들의 크고 작은 변화 등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매력적인 편지들 속에 담겨있습니다.

 

원작자가 쓰지 않은 후반부를 채워 넣은 또 다른 작가를 찾는 여정은

예상 밖의 반전과 함께 ‘33년간의 우연과 운명이 낳은 따뜻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하는 훈훈함은 말할 것도 없고

미스터리의 엔딩 못잖은 짜릿함까지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편의 원고가, 그것도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무명작가가 쓴 소설 원고 한 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는다는 건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비현실성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원고를 소유했던 사람들,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사연에 훈기와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설계와 그에 걸맞은 인물들의 풍부한 사연과 감정들은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내가 그 편지들을 주고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느껴지게끔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생생한 리얼리티와 감동을 남겨줬습니다.

 

고백하자면, 받고 보니 미스터리가 아니네, 라는 생각에 책장에 고이 묻어두려 한 게 사실인데

장르물 독자 손에 우연히 들어온 낯선 프랑스 순문학 한 편의 여운은 꽤 오래 갈 듯 합니다.

300페이지를 갓 넘기는 분량인데다 매력적이고 빠른 템포의 편지체라 금세 읽을 수 있으니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이 나있거나 사람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심신이 지쳐있다면

‘128호실의 원고를 통해 조금이나마 따뜻함과 힘과 위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첫 페이지에 등장인물 소개가 나오는데, 앞의 세 사람 정도까지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원고를 소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소개인데

자칫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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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3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3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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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경찰서 강력반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가 이끄는

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 외과의사견습의사가 상하권처럼 연결된 이야기 속에서

메스와 칼로 희생자를 난도질하는 희대의 소시오패스를 다뤘다면

파견의사는 제목에 의사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전혀 다른 사건,

즉 보다 현실적인 소재와 평범한(?) 캐릭터의 범인을 앞세운 작품입니다.

 

리졸리는 낡고 쇠락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을 맡습니다.

또 같은 강력반 소속의 크로와 슬리퍼는 손목과 발목이 잘리고 얼굴가죽이 사라진 채

폐쇄된 음식점 화장실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여인의 죽음을 조사합니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던 두 사건은 중반부를 넘어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지는데,

이 과정에서 두 번째 주인공인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마우라 아일스는 시리즈 첫 편인 외과의사에는 아예 등장도 하지 않았고,

두 번째 작품인 견습의사에서도 중요한 조연 정도로만 데뷔한 게 사실입니다.

번역자의 추정에 따르면 이 시리즈는 애초 외과의사한 편으로 끝날 뻔했다가

(기대 이상의 성과 덕분인지) 예상치 못하게 시리즈로 확장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두 번째 작품인 견습의사에서는 중요 인물들이 대거 물갈이됐습니다.

그중 한 명이 법의관 아일스이고, 또 한 명은 FBI요원 게이브리얼 딘입니다.

강철 갑옷을 두른 듯한 여전사 리졸리와 갈등 끝에 멜로 라인을 타게 된 딘과 달리

아일스는 견습의사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는데,

그 때문인지 작가는 파견의사에서는 아일스를 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수녀원 살인사건 피해자의 부검 도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아일스는

미궁에 빠졌던 리졸리의 수사가 한걸음 나아가게끔 큰 도움을 줬고,

신원미상의 여인의 손목과 발목과 얼굴가죽이 사라진 이유도 파악하는 활약을 펼칩니다.

무엇보다 두 사건의 접점은 물론 이 끔찍한 사건들의 배후까지 추정하는 공을 세우는데,

그로 인해 아일스느 평생 겪어보지 못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탐문이나 현장 증거보다는 죽은 자의 몸에 남은 단서가 더 중요한 사건들로 설정된 탓에

형사인 리졸리보다 법의관인 아일스가 활약할 여지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일스의 진실 찾기 과정이 억지스러운 영웅 만들기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법의관만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보여준 매력적인 설정이었는데,

앞으로 아일스가 어떤 활약을 펼칠지 무척 기대감을 갖게 만든 대목이기도 합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에 이르자 작가가 두 주인공의 사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나 봅니다.

전작에서 FBI요원 딘과 잠시 뜨거운 관계까지 이르렀던 리졸리는

자신의 격한 감정은 물론 딘 때문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습니다.

아일스 역시 이혼 후 3년 만에 재회한 전 남편 빅터로 인해 꽤 큰 심리적 동요를 겪는데

이성적으로는 여전히 서로 맞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자꾸만 빅터에게 끌리자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자신을 비난하고 질책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다혈질 폭주 스타일 형사 리졸리도,

죽은 자들의 여왕이라 불리며 얼음장 같은 냉철함을 견지해온 법의관 아일스도

이번 작품에서는 때론 연약한, 때론 열정적인 사람의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는 셈인데

그런 대목들의 분량이 적잖아서 살짝 느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몇 군데 오타와 함께 별 0.5개를 빼게 만든 원인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시리즈를 감안하면

주인공들의 캐릭터 구축을 위한 이 정도 바닥공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의사 3부작을 통해 강렬한 데뷔전과 함께 주변인물과의 관계까지 정립한 두 주인공이

앞으로 마주할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어떤 멋진 콤비플레이로 대처할지 기대됩니다.

이 시리즈를 짧게는 7, 길게는 10여 년 전에 읽은 탓에 다음 이야기가 가물가물하지만

오히려 아무 기억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두 주인공을 만나게 된 게 더 반갑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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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2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2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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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경찰서 강력반의 제인 리졸리가 엽기적인 연쇄살인범 외과의사를 체포한지 1.

다시 찾아온 여름은 리졸리에게 새로운 연쇄살인사건과 함께 외과의사의 악몽을 일깨웁니다.

남편을 무기력하게 만든 뒤 그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고 납치하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이

사건 현장에 명백한 외과의사서명을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1년 전 리졸리에게 체포된 외과의사는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이지만

리졸리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이 분명 외과의사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있다고 확신합니다.

 

● ● ●

 

견습의사는 전작인 외과의사에 이은 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속작인 파견의사까지 포함하여 의사 3부작이라고 부릅니다.)

연쇄살인범의 엽기성에 관한 한 역대 어느 스릴러보다 잔혹하고 끔찍한 디테일이 눈에 띄는데

적잖은 작품들이 엽기와 잔혹에만 매달리다가 정작 중요한 서사는 허당인 경우가 많은데 반해

테스 게리첸은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그 깊이와 두께가 만만치 않은 작가입니다.

 

외과의사가 교도소에 갇힌 사이 새로 등장한 견습의사는 처음엔 지배자라 불립니다.

부와 명예를 갖춘 매력적인 부부만을 골라 그들을 완벽히 지배한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인데,

남편 앞에서 아내를 폭행한 범인은 남편을 살해하곤 아내를 납치한 뒤

시간(屍姦)이라는 최악의 모욕까지 준 뒤 그 시체를 숲에 내다버리는 극악한 모습을 보입니다.

리졸리는 관할 지역이 아닌 곳에서 벌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외과의사서명으로 보이는 현장 단서 때문에 적극적으로 사건에 뛰어듭니다.

 

전작에서 함께 외과의사를 추격했던 동료 토마스 무어가 피해자였던 캐서린과 결혼한 탓에

작가는 리졸리 곁에 새로운 인물을 설정해줬는데

문제는 그가 리졸리와는 정반대로 냉철하고 합리적인데다 재수 없는 FBI요원이란 점입니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그에 어울리는 고급 슈트로 철갑을 두른 듯한 게이브리얼 딘은

조용히, 하지만 언제나 냉정한 관리자의 모습으로 리졸리의 수사에 끼어듭니다.

다혈질의 폭주 캐릭터인데다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무리수까지 두는 리졸리에게

외부에서, 그것도 재수 없는 FBI’가 자신의 사건에 끼어드는 건 절대 용납 못할 일입니다.

더구나 이 끔찍한 사건들에 대해 뭔가 자신만의 정보를 갖고 있는 듯한 딘의 행태는

리졸리에게 분노 이상의 감정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연쇄살인범 수사 못잖게 이 둘만의 기승전결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첫 페이지는 물론 중간중간 교도소에 수감 중인 외과의사1인칭 챕터가 등장하는데,

이것만 봐도 외과의사가 새로운 연쇄살인에 적극 개입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식으로 교도소 밖의 새 파트너와 연대하고 있는 것인지,

또 그의 궁극적인 타깃인 리졸리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시종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한 시도 마음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없게 됩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애초 외과의사한 편으로 끝날 상황에서 시리즈로 발전한 덕분에

두 번째 주인공인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가 견습의사에서 뒤늦게 등장했다고 (추정)합니다.

외과의사에서 리졸리보다 메인 주인공으로 보였던 토마스 무어 형사가 사라진 것도 그렇고,

리졸리와 평범한 관계 이상으로 발전할 것 같아 보이는 FBI요원 게이브리얼 딘의 등장 역시

앞으로의 시리즈를 염두에 둔 포석이란 얘깁니다.

시리즈 이름 자체가 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인만큼 아일스의 역할은 점점 커지겠지만

FBI요원 게이브리얼 딘의 비중 역시 궁금함과 기대감을 자아내는 대목입니다.

(10여 년 전에 읽었던 탓에 지금으로선 이후 그의 활약상은 전혀 가물가물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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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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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여자를 폭행하고 배를 갈라 자궁을 꺼냈던 살인마 앤드루 캐프라.

4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했던 그는 다음 목표였던 캐서린 코델 박사의 총에 맞아 숨진다.

그리고 3년 후, 보스턴에서는 또다시 자궁이 없어진 여자들의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앤드루 캐프라가 되살아난 듯 동일한 수법으로 여자를 살해하는 이 살인마에게

언론과 경찰은 외과의사라는 별명을 붙인다.

보스턴 경찰서 강력반의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캐서린 코델을 열쇠 삼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려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최고로 꼽는 스릴러 3부작이 몇 편 있는데, 그중 하나가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입니다.

사실 의사 3부작이란 건 제가 임의로 지은 이름이고,

실제로 이 작품들은 리졸리&아일스 시리즈1~3편인데,

각각의 제목이 외과의사’, ‘견습의사’, ‘파견의사라서 재미삼아 붙여본 이름입니다.

세 작품 모두 2006~2007년 사이에 출간됐고 매번 신작이 나오자마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엔 서평 같은 건 남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때라 짧은 메모조차 남겨놓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1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외과의사는 마치 처음 읽는 작품처럼 생소했습니다.

 

외과의사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소개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제인 리졸리는 세컨드 주인공으로만 등장할 뿐이고,

법의관인 마우라 아일스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 토마스라는 별명을 가진 젠틀한 중년 형사 토마스 무어가 원톱으로 활약하는데,

그가 견습의사파견의사에도 등장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서평에 옮겨 쓰기조차 거북할 정도로 끔찍하고 엽기적인 살해수법이 등장하는데

의사 출신 작가인 테스 게리첸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한 문장들로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런 묘사는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는데,

독자에 따라 (내용과 관계없이) 호불호가 갈리는 경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초반에 연이어 참혹한 사체들이 발견된 이후로

이야기는 범인의 다음 목표로 확실해 보이는 캐서린 코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범인이 생각보다 캐서린 가까이에 있다는 단서를 수차례 알아내고도

경찰의 수사가 제자리를 맴돌자 캐서린의 공포는 극에 달합니다.

그 와중에 젠틀한 중년 형사 토마스 무어는 사적인 감정을 개입하기 시작하고,

돌직구 같은 성격의 리졸리는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바라봅니다.

 

사건의 잔혹함과 작가가 설정한 미궁의 깊이에 비해 범인 찾기는 다소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450여 페이지를 읽는 내내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독자를 상대로 한 작가의 최적의 밀고 당기기전략 덕분이었습니다.

사건뿐 아니라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갈등이 재미와 함께 적절히 배치됐고,

그 때문에 어느 한곳에서도 느슨하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이후 시리즈의 메인 주인공이 된) 제인 리졸리는

말 그대로 몸과 마음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날것같은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는데,

강력반의 유일한 여자형사인 그녀는 성장기부터 겪은 남녀차별에 분노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든 정글 같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24시간 날이 서있는 인물입니다.

불같은 성격과 무모한 추진력과 남성사회에 대한 혐오는

때론 부메랑처럼 그녀에게 되돌아와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타협이나 후퇴 없이 종횡무진 좌충우돌할 뿐입니다.

 

1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외과의사는 제 기억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해줬는데,

이어서 읽을 견습의사파견의사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리졸리&아일스 시리즈의사 3부작이후에도 한국에서 모두 여덟 편이 출간됐는데

뒤로 가면서 살짝 힘이 빠지긴 했어도 무척 개성있고 재미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시리즈 다섯 편째 작품인 소멸을 제외하곤 모두 품절상태인데

기회가 된다면 중고서적으로라도 이 시리즈를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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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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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킬러들이 각자의 미션과 사연을 가진 채 모리오카 행 신칸센에 오른다.

아들을 중태에 빠뜨린 소년 왕자에게 복수하려는 왕년의 킬러 기무라’.

납치됐던 보스의 아들을 구하고 몸값이 든 트렁크를 운반하려는 콤비 킬러 밀감레몬’.

파트너인 마리아의 지시로 밀감레몬이 운반 중인 몸값 트렁크를 탈취하려는 나나오’.

그 외에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신칸센 안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인명을 놀잇감으로 여기는 14살 사이코패스 왕자의 잔혹하고도 교활한 잔꾀로 인해

시속 200km로 달리는 신칸센은 말 그대로 피범벅인 된 채 시체열차가 되고 만다.

종착역인 모리오카에 이르기 전에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을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 3부작그래스호퍼’-‘마리아비틀’-‘악스로 이어집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10년 전쯤 그래스호퍼를 읽었고,

두 번째 작품인 마리아비틀을 건너뛰고 세 번째 작품인 악스2년 전에 먼저 읽었는데,

사실 어느 작품을 먼저 읽든 큰 관계는 없습니다.

물론 (기억은 거의 안 나지만) ‘그래스호퍼에 등장했던 전설적인 킬러들의 이름이

마리아비틀곳곳에서 종종 언급되곤 하지만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져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각자의 사연과 미션을 위해 신칸센에 오른 인물들은 마치 리그전처럼 충돌합니다.

거액의 몸값이 든 트렁크를 놓고 거친 숨바꼭질을 벌이던 그들은

상대가 동종업종에 종사하는 킬러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잔혹하기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4살 사이코패스 왕자의 농간 덕분에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킬러들은 속절없이 피비린내를 자초하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새 인물들까지 가세하면서 신칸센에서 벌어지는 킬러들의 대충돌은

종착역인 모리오카에 이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킬러들마다 제각각 독특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점이 내내 눈길을 끌었는데,

한때 잘 나가는 킬러였지만 지금은 알코올중독에 부모에게 어른 취급도 못 받는 기무라,

꼬마기차 토마스의 광팬이자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분위기 파악 잘 못하는 레몬,

킬러의 교과서 같은 예리함과 촉을 지닌 밀감,

머피의 법칙의 최대 피해자이자 사사건건 불운을 몰고 다니는 나나오 등

잔혹한 킬러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풀린 듯한 친근한(?) 매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희미하긴 하지만 시리즈 첫 작품인 그래스호퍼의 인상은 정말 재미있다!”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라서 재미라는 표현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설픈 주제의식이나 철학 같은 사족 없이 거침없이 폭주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비틀보다 먼저 읽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악스는 중도에 포기했는데,

아내에게 구박 받고 쩔쩔 매는 경력 20년의 살인청부업자라는 주인공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읽을거리가 너무 없던 나머지 도중에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마리아비틀은 굳이 비교하자면 두 작품의 딱 중간쯤 되는 작품입니다.

휘몰아치는 재미와 긴장감은 그래스호퍼와 맞먹지만

왠지 재미있는 이야기그 이상의 뭔가를 담으려 했던 작가의 의도가 너무 도드라진 나머지

사족 같은 주제의식의 과잉이 눈에 거슬렸고 그 결과 분량도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본편 뒤에 실린 일본 평론가의 해설이나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돼있는데,

사실 일반적인 폭력과 선악의 개념이 (킬러들이 주인공인) 이 작품에서 통용될 리 없으니

이런 소개 자체가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14살 사이코패스 왕자를 통해 용서 받을 수 없는 악에 대해 거듭 설파한 대목도

이야기의 본 흐름과 동떨어진 채 강요처럼 느껴져서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물론 킬러가 주인공인 이야기니까 단지 말초적인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니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죽이는 킬러가 미화돼야 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거기에다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포장을 씌우는 건

안 어울려도 한참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카 고타로에게 흠뻑 빠진 건 처음 읽은 작품이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였기 때문인데

(아직 몇몇 대표작을 못 읽었지만) 고백하자면 제겐 이 두 작품이 그의 베스트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 뒤로 계속 아쉬움과 실망을 느껴왔다는 얘긴데,

아직 못 읽은 그의 대표작 중 한두 편 정도만이라도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의 감흥을 다시 한 번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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