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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ㅣ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평점 :
전현직 킬러들이 각자의 미션과 사연을 가진 채 모리오카 행 신칸센에 오른다.
아들을 중태에 빠뜨린 소년 ‘왕자’에게 복수하려는 왕년의 킬러 ‘기무라’.
납치됐던 보스의 아들을 구하고 몸값이 든 트렁크를 운반하려는 콤비 킬러 ‘밀감’과 ‘레몬’.
파트너인 ‘마리아’의 지시로 ‘밀감’과 ‘레몬’이 운반 중인 몸값 트렁크를 탈취하려는 ‘나나오’.
그 외에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신칸센 안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인명을 ‘놀잇감’으로 여기는 14살 사이코패스 ‘왕자’의 잔혹하고도 교활한 잔꾀로 인해
시속 200km로 달리는 신칸센은 말 그대로 피범벅인 된 채 시체열차가 되고 만다.
종착역인 모리오카에 이르기 전에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을 것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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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 3부작’은 ‘그래스호퍼’-‘마리아비틀’-‘악스’로 이어집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10년 전쯤 ‘그래스호퍼’를 읽었고,
두 번째 작품인 ‘마리아비틀’을 건너뛰고 세 번째 작품인 ‘악스’를 2년 전에 먼저 읽었는데,
사실 어느 작품을 먼저 읽든 큰 관계는 없습니다.
물론 (기억은 거의 안 나지만) ‘그래스호퍼’에 등장했던 전설적인 킬러들의 이름이
‘마리아비틀’ 곳곳에서 종종 언급되곤 하지만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져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각자의 사연과 미션을 위해 신칸센에 오른 인물들은 마치 리그전처럼 충돌합니다.
거액의 몸값이 든 트렁크를 놓고 거친 숨바꼭질을 벌이던 그들은
상대가 동종업종에 종사하는 킬러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잔혹하기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4살 사이코패스 ‘왕자’의 농간 덕분에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킬러들은 속절없이 피비린내를 자초하게 되는데,
예상치 못한 새 인물들까지 가세하면서 신칸센에서 벌어지는 킬러들의 대충돌은
종착역인 모리오카에 이를 때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킬러들마다 제각각 독특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 점이 내내 눈길을 끌었는데,
한때 잘 나가는 킬러였지만 지금은 알코올중독에 부모에게 어른 취급도 못 받는 기무라,
꼬마기차 토마스의 광팬이자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분위기 파악 잘 못하는 레몬,
킬러의 교과서 같은 예리함과 촉을 지닌 밀감,
머피의 법칙의 최대 피해자이자 사사건건 불운을 몰고 다니는 나나오 등
잔혹한 킬러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풀린 듯한 친근한(?) 매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희미하긴 하지만 시리즈 첫 작품인 ‘그래스호퍼’의 인상은 “정말 재미있다!”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라서 ‘재미’라는 표현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설픈 주제의식이나 철학 같은 사족 없이 거침없이 폭주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비틀’보다 먼저 읽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악스’는 중도에 포기했는데,
‘아내에게 구박 받고 쩔쩔 매는 경력 20년의 살인청부업자’라는 주인공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읽을거리가 너무 없던 나머지 도중에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마리아비틀’은 굳이 비교하자면 두 작품의 딱 중간쯤 되는 작품입니다.
휘몰아치는 재미와 긴장감은 ‘그래스호퍼’와 맞먹지만
왠지 ‘재미있는 이야기’ 그 이상의 뭔가를 담으려 했던 작가의 의도가 너무 도드라진 나머지
사족 같은 주제의식의 과잉이 눈에 거슬렸고 그 결과 분량도 지나쳤다는 생각입니다.
본편 뒤에 실린 일본 평론가의 해설이나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면,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돼있는데,
사실 일반적인 폭력과 선악의 개념이 (킬러들이 주인공인) 이 작품에서 통용될 리 없으니
이런 소개 자체가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14살 사이코패스 ‘왕자’를 통해 ‘용서 받을 수 없는 악’에 대해 거듭 설파한 대목도
이야기의 본 흐름과 동떨어진 채 강요처럼 느껴져서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물론 킬러가 주인공인 이야기니까 단지 말초적인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뜻도 아니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죽이는 킬러가 미화돼야 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거기에다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포장을 씌우는 건
안 어울려도 한참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카 고타로에게 흠뻑 빠진 건 처음 읽은 작품이 ‘사신 치바’와 ‘그래스호퍼’였기 때문인데
(아직 몇몇 대표작을 못 읽었지만) 고백하자면 제겐 이 두 작품이 그의 베스트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 뒤로 계속 아쉬움과 실망을 느껴왔다는 얘긴데,
아직 못 읽은 그의 대표작 중 한두 편 정도만이라도
‘사신 치바’와 ‘그래스호퍼’의 감흥을 다시 한 번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