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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플라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2019년 초, ‘마스야마 초능력사 사무소’가 한국에 출간됐을 때
어딘가 라노벨 같은 표지에 초능력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정말 혼다 데쓰야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일본 출간이 2013년이니 그의 작품 경향이 최근 들어 바뀐 건 아니라는 뜻이지만
이어서 출간된 작품의 제목이 ‘셰어하우스 플라주’(일본 출간 2015년)인 탓에
아무래도 그의 독하고 센 작품들은 이미 한국에서 전부 출간된 건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혼다 테쓰야가 셰어하우스를 무대로 끔찍한 연쇄살인 이야기라도 풀어낸 게 아니라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담아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이었는데,
띠지에 적힌 홍보카피를 봤을 땐 솔직히 ‘우려’가 조금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월세 5만엔, 청소는 교대, 세 끼 식사 제공. 단, 전과자일 것.
어딘지 독특하고 어딘지 수상쩍은 셰어하우스.“
‘우려’의 원인은, 전과자만 수용하는 셰어하우스라고는 해도 역시 그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밝진 않아도 왠지 상당히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려’는 예상한 대로였지만 다 읽은 후의 느낌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전과자들만 모여 사는 곳임에도 시트콤의 무대 같은 시끌벅적한 셰어하우스 플라주에
각성제 복용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은 요시무라 다카오가 신입으로 들어옵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외유내강형 집주인 준코를 시작으로
어딘가 사연 많아 보이는 분위기메이커 기타리스트, 사기꾼 기질이 농후해 보이는 중년남,
시도 때도 없이 성적 농담을 날리는 30대 여자, 도무지 속내를 알아챌 수 없는 사이코패스 등
다카오는 이름과 외양만큼이나 독특한 셰어하우스 멤버들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셰어하우스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 챕터씩을 맡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전과자로 전락한 각자의 과거 사연과 함께 셰어하우스에서의 현재의 삶이 함께 소개됩니다.
살인, 폭력, 약물 등 전과자가 된 죄목과 사연은 다양하지만
셰어하우스에서의 현재의 그들의 삶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쾌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그들이 전과자임을 드러내게 만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들을 다시금 과거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꾸리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도 묘사됩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진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고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순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p145)
작가는 ‘전과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리셋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교훈과 계몽을 목적으로 한 뻔한 이야기로 읽히진 않습니다.
분명 셰어하우스 멤버들이 현실 속 전과자와 달리 다소 판타지처럼 그려진 게 사실이고,
그들이 삶을 리셋하는 과정 역시 조금은 이상적으로 묘사된 것 역시 사실이지만,
작가는 어떤 주장을 한다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생각입니다.
다소 교훈적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중간중간 끼어든 ‘모종의 목적을 가진 음험한 기자의 시각’으로 묘사된 챕터들 덕분입니다.
셰어하우스 멤버 중 한 명을 먹잇감으로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자의 행동은
마지막까지 미스터리의 힘을 발휘하며 예상치 못한 반전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 대목에 이르면 “과연 혼다 데쓰야!”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어쩌면 이상주의자들이나 떠올릴 법한 판타지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작품 속에서 전과자인 셰어하우스 멤버들을 차별하는 인물들을 얄밉게 여겼으면서도
정작 “내 옆집에 이런 셰어하우스가 있다면?”이란 생각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조금은 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좋은 느낌으로 책을 마무리했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픽션과 다소 이상적인 다큐멘터리의 미덕이 잘 섞인 이 작품이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무척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