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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교활한 원숭이가 착한 게를 속여서 재산을 갈취한 후에 죽인다.
이에 증오심에 가득 찬 게의 새끼들이 계략을 꾸며 원숭이를 죽여 복수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바로 이 일본의 전래 동화에서 따온 것이다.
힘없는 약자들이 힘을 합쳐 강자를 쓰러뜨린다는 동화의 뼈대가 소설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나이, 직업, 처한 상황, 미래의 꿈 등이 천차만별인 8명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현재 사회에서 소위 '약자'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거나 한때 그랬다는 것.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들은 기묘하게 엮이게 되고 운명처럼 모이게 된다.
그리고 서로 도와 거대한 사회 권력, 기득권층에 맞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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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희망이나 꿈도 없이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아가는 가부키초의 변변찮은 바텐더,
아기를 업고 남편을 찾아 상경한 시골 호스티스와 인기 없는 호스트로 살아가는 그녀의 남편,
정치계에 입문하는 게 꿈인 매니저와 그녀의 관리를 받는 어딘가 수상쩍은 첼리스트,
신주쿠의 베테랑 술집 여주인, 수감된 아빠를 둔 여대생, 시골에서 혼자 사는 90대 할머니 등
모두 8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550여 페이지의 두툼한 장편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의 출처인 일본 전래동화를 봐도 그렇고,
“바텐더 출신 정치신인 對 5선 의원의 대결, 축제의 승리자가 미래를 바꾼다.”는 띠지 카피나
“정의가 무시당하는 뒤틀린 세상을 향한 보통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란 홍보 카피만 보면
정치판과 선거를 배경으로 약자들이 벌이는 속 시원한 쿠데타 이야기로 짐작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의 적잖은 분량은 위의 8명의 주인공들이
이 쿠데타를 위해 한자리에 집결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결’을 이끌어낸 신호탄은 바텐더 준페이가 목격한 한밤중의 뺑소니 사건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것과는 다른 뺑소니 사건의 진상을 무기로 한몫 챙기려던 바텐더 준페이는
협박 상대의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인해 한몫은커녕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그 탈출구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치판 입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리고 중반부까지 (뺑소니 사건과 관련 있든 없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오던 주요인물들이
인구 8만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윗과 골리앗의 선거판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어지간해선 인터넷 서점의 홍보글이나 띠지와 뒷표지의 카피도 안 보고 책을 읽는 편인데,
일부러 보려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봐버린 덕분에
‘선거판을 배경으로 한 약자들의 속 시원한 쿠데타’라는 짐작과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소시민이라면 모를까, 딱히 약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은 안 보였고,
약한 게의 새끼들이 교활하고 강한 원숭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는 조짐도 안 보였습니다.
또, 준페이가 목격한 뺑소니 사건은 이 방대한 분량을 끌고 가기엔 너무 왜소해 보였고,
나머지 인물들의 스토리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눈에 확 띄는 호기심을 자아내진 못했습니다.
물론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준페이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빨라지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건가?”, 의아하기만 했습니다.
또 정치판 이야기가 시작된 뒤로는 왠지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이야기가 너무 착해졌고,
덕분에 엔딩을 읽으면서도 특별한 감동이나 여운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분노’,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다’인데,
그의 매력이 한껏 살아있던 2015년의 ‘분노’ 외에는 대체로 보통 또는 실망 수준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악인’, ‘퍼레이드’, ‘첫사랑 온천’, ‘나가사키’ 등
요시다 슈이치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던 작품들에 비하면 타율이 너무 낮다고 할까요?
(이 작품 역시 2012년에 국내에 출간됐으니 제가 반했던 작품들에 비하면 신작에 속합니다.)
개인적으론 스토리, 소재, 캐릭터가 간결하거나 소박했던 과거의 요시다 슈이치가 그립습니다.
‘악인’이나 ‘분노’처럼 평범한 문장 속에 녹아있던 인간의 민낯과 밑바닥 감정도 그립고,
‘퍼레이드’, ‘첫사랑 온천’, ‘나가사키’의 작지만 깊은 여운들도 그립습니다.
부디 다음엔 제가 좋아하고 기억하는 요시다 슈이치의 글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