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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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연이어 읽다보면 살짝 지치거나 피로도가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나카야마 시치리가 딱 그런 경우였고, 그래서 얼마 전, 1년은 쉬자는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그 결심을 너무 쉽게 무너뜨린 게 이 작품의 전작인 비웃는 숙녀였고,

너무 재미있게 읽은 나머지 후속작인 이 작품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집어 들게 됐습니다.

 

자신의 손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은 채 상대를 헤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절망에 빠뜨리거나

또는 누군가를 살해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희대의 악녀 가오루 미치루.

그녀의 목적은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닙니다.

그냥 툭 하고 머릿속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 순간 상대를 으스러뜨리겠다는 욕망이 불붙고

누구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정교하고 확실한 계획을 세운 뒤 그대로 실천할 뿐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모으기도 어려운 돈을 손쉽게 손에 넣지만

딱히 그 돈으로 화려한 삶을 영위하거나 사치스럽게 자신을 가꾸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물욕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먼 특이한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전작 비웃는 숙녀가 각기 다른 인물들을 상대로 한 가모우 미치루의 폭주 악녀극이었다면,

다시 비웃는 숙녀는 마지막 사냥감을 처치하기 위한 사전 작업들,

즉 사냥감의 주변부터 차례차례 제거해가는 연작 스타일의 단편들로 구성돼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냥감의 사지 또는 수족을 제거함으로써 극단적인 압박감을 주는 셈인데,

이것만 보면 이번에는 가모우 미치루가 확실한 목표와 동기가 있는 심판자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스스로 밝히는 이 거사의 계기는 원래 그녀답게 무척이나 쿨하고 건조할 뿐입니다.

만일 이 세상의 소시오패스가 가모우 미치루처럼 활동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악몽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나카야마 시치리의 매력인 끝내주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마지막 반전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는데,

분명히 알고 읽는데도 그 서늘함과 짜릿함은 조금도 밋밋해지지 않았습니다.

(‘비웃는 숙녀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다 읽은 뒤 스스로에게 들었던 의문은

과연 가모우 미치루는 악녀인가?”라는 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조종하고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없는 악녀 같아 보이지만

읽는 내내 한 번도 그녀를 악녀라고 여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악녀인 듯, 악녀 아닌 악녀 같은 그녀라는 옮긴이의 말의 부제는

저의 의문을 그대로 풀어 써놓은 듯 해서 눈에 쏙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전작인 비웃는 숙녀를 워낙 재미있게 읽은 탓에 살짝 신선함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팽팽한 긴장감과 오락성은 여전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전작인 비웃는 숙녀말미의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과 함께 출간이 예고됐던 작품은

가모우 미치루가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한 인물과 2인조로 활약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 설정만으로도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인데

과연 어떤 인물과 듀엣이 될지, 그들의 목표물은 무엇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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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의 망령들
스튜어트 네빌 지음, 이훈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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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IRA(아일랜드공화국군)의 전설적인 행동요원 제리 피건은

12년의 복역이 끝나갈 때쯤부터 자신에게 보이기 시작한 열두 유령 때문에

7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괴로워하며 술독에 빠져 지낸다.

피건을 쫓아다니며 밤마다 비명을 지르는 열두 유령은 모두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자들이다.

어느 날, 유력정치인이 된 오랜 친구가 피건 앞에 나타나자 소년 유령은 처형의 몸짓을 한다.

실제로 소년을 죽인 건 피건이었지만, 그렇게 만든 최초의 계기는 그 친구였기 때문.

부패한 정치인이자 자신을 협박하는 그 친구를 죽이자마자 소년 유령은 사라진다.

이제 피건은 확실히 알게 된다.

유령들에게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원하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꽤 오래 전에 본 단편적인 해외뉴스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요구, 끔찍한 유혈폭력사태, 신구교 간의 지독한 증오 정도가 전부인데,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 북아일랜드가 등장하면 무척 호기심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최근 읽은 작품 중엔 이언 랜킨의 치명적 이유’(존 리버스 시리즈)가 그런 경우였는데,

북아일랜드가 잠깐 지나가는 무대로만 등장했기도 하지만 기대에 비해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언 랜킨이 스코틀랜드 작가여서 그랬겠지만) 불친절한 정보 탓이었습니다.

IRA, UVF, 로열리스트, 얼스터의 붉은 손, 오렌지로열여단 등 적잖은 조직들이 등장하는데

정확히 누가 누구와 대립하거나 연대하거나 전략적 제휴를 맺는 건지 불분명한데다

북아일랜드의 갈등의 시발점과 현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조차 너무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북아일랜드의 근현대사가 주된 배경이다 보니

그런 정보에 대한 갈증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 본인이 아일랜드 출신이라 그런지 독자들에게 더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인색한 편이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의 극렬 행동대원이었던 제리 피건은

자신에게 들러붙은 유령들을 위로하고 사라지게 하기 위해

자신이 살해했던 그 유령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합니다.

살인범은 피건 자신이었지만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들을 제거해야만 되는데,

문제는 이 진짜 범인들이 한때 피건과 한 배를 탔던 동지들이란 점,

하지만 현재는 북아일랜드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잇속을 챙기는 권력자거나

피건 입장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쉽게 제거하기 힘든 인물들이란 점입니다.

 

어쨌든 피건은 하나둘씩 자신의 목표물들을 제거하며 유령들의 숫자를 줄여나갑니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난감한 점은 북아일랜드의 불안정한 정치 지형도가

미스터리의 주 무대이자 핵심적인 비밀을 가진 듯 꽤 장황하고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지만

정작 진짜 범인들이 그 정치 지형도 가운데 어느 쪽에 서있는 건지,

누구와 대립하는 건지,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한데다

주인공 피건의 복수극은 실제로는 정치적 상황과는 별로 관계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작가는 중간중간 이야기를 쉬어가며, 또는 몇몇 인물의 대사를 통해

큰 판이 어떻게 생긴 건지 나름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곤 있지만 저의 이해력 부족 탓인지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책장은 속절없이 넘어갔고,

결국 끝에 가면 알게 되겠지라는 체념으로 피건의 복수극에만 전념하게 된 책읽기였습니다.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서평을 쓰는 지금도

주요 인물들의 정치적 포지션과 대립 구도와 목표가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지는 잘 모릅니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꽤 호평도 받고 상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저의 무지몽매함이 만족스럽지 못한 책읽기의 가장 큰 이유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에 도전하고 싶은 독자라면 북아일랜드의 근현대사에 대해

인터넷으로라도 간단히 예습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서라도 제 부족한 이해력이 보충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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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스틸
린지 페이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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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의 출판사 홍보카피였습니다.

 

“‘제인 에어를 매혹적으로 변주한 로맨틱 서스펜스!”

순종과 헌신을 강요하는 빅토리아 시대, 매혹적인 여성 연쇄살인범이 나타났다!”

 

두 번째 카피는 더없이 저의 호기심을 이끈 반면, 첫 번째 카피는 꽤나 주저하게 만들었는데,

살짝 삐딱한데다 애매모호하고 불친절한 영국 고전문학의 냄새가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제목만 숱하게 들어봤을 뿐 읽은 적 없는) ‘제인 에어에 대한 오마주라는 점도 불길(?)했는데

그래선지 딱 100p까지만 읽고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접자는 생각으로 첫 장을 펼쳤습니다.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1837년부터 대략 15년 정도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9살에 자신이 살던 저택에서 첫 살인을 시작한 이래 기숙학교를 거쳐 런던으로 도망친 뒤

쓰레기만도 못한 자들을 (고의적 또는 우발적으로) 살해하며 밑바닥 삶을 전전하던 제인은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어릴 적 자신이 살았던 저택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제인은 오랫동안 (어머니의 유품을 통해) 그 저택의 상속자가 자신이라고 믿어왔던 탓에

느닷없이 나타난 저택의 새 주인에 대해 증오심과 살의마저 지니게 됐고,

저택 되찾기라는 목적을 갖고 신분을 위조하여 가정교사로 들어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택의 새 주인 찰스 손필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초반에는 저택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제인의 밑바닥 삶이 그려지고,

이후로는 저택에 들어온 제인이 찰스 손필드 때문에 휘말리게 되는 미스터리가 전개됩니다.

자신이 물려받을 저택인데도 별채로 내몰린 채 숙모와 사촌의 눈치를 봐야했던 유년기,

반강제로 들어간 기숙학교에서 터무니없는 횡포와 억압을 겪어야 했던 청소년기,

그리고 런던의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야만 했던 20대 초반 등

제인의 성장과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이 기간 중에 (홍보카피대로) 제인이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도 맞고

자신의 살인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보여준 것도 맞지만,

사실 제인은 일반적인 흉악한 연쇄살인범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자 잭 더 리퍼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몸통은 제인과 저택의 주인 찰스 사이의 아슬아슬한 로맨스와 함께

과거 전쟁 상황 하의 인도에 머물던 찰스의 과거사와 그 속에 도사린 미스터리입니다.

당연히 미스터리의 해결사로 제인이 활약을 하게 되는데,

목숨을 건 위기와 사랑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애절한 갈등 등 숱한 고비를 넘긴 끝에

제인과 찰스는 그들만의 특별하고 애틋한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고전문학의 냄새가 진하게 밴 570여 페이지라는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린지 페이의 문장은 (위에서 정리한 줄거리처럼) 단순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살짝 삐딱한데다 애매모호하고 불친절한 느낌이 무척 강했는데,

제인의 성장기를 그린 대목까지는 이런 느낌이 그리 거북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제인이 저택에 들어가고 미스터리 서사가 시작된 뒤로는 좀 힘든 책읽기가 된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의 발단인 인도에서 찰스가 겪은 사건들은 복잡하고 모호하게 설명되는데다

누가 악당이고 누가 아군이고 누가 비밀을 가진 자인지조차 확실히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소 반골적이고 불친절한 영국식 장르물에 덜 우호적인 독자라면 추천하기 어렵겠지만,

반대로, 그 맛에 익숙하거나 관심 있는 독자라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린지 페이의 작품 중 뉴욕경찰국 출범 전후를 그린 고담의 신에 관심이 가긴 하지만,

일단 초반부만이라도 맛보기를 한 뒤 제 취향에 맞는 작품인지 판단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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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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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의학 컨퍼런스 참석 차 와이오밍에 온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일행과 함께 계획에 없던 스키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눈보라로 인해 사고를 당한 그들은 사투 끝에 외부와 단절된 외진 마을에 도착한다.

똑같이 생긴 열두 채의 집만 덩그러니 있을 뿐 인적 하나 없는 그곳에서

죽은 동물들과 알 수 없는 핏자국들을 발견한 아일스 일행은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외부와 연락할 길이 없는 상태에서 기약 없는 고립의 시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한편 리졸리는 아일스의 갑작스러운 실종 소식을 접하곤 와이오밍으로 급히 달려가지만

그곳에서 들은 비극적인 소식에 사색이 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보스턴경찰서 강력반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콤비의 여덟 번째 작품이자

한국에 소개된 시리즈 마지막 작품입니다.

2013년에 이 작품이 출간됐으니 7년 동안 신작 소식이 없었던 셈인데,

미국에서는 이후 네 작품이 더, 즉 시리즈 열두 번째 작품까지 출간됐다고 합니다.

테스 게리첸의 팬 입장에선 너무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뒤늦게라도 남은 작품들이 한국에도 소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작품의 주 무대는 두 사람의 홈그라운드인 보스턴이 아니라 와이오밍입니다.

그것도 평범한 살인사건 현장이 아니라 수상쩍기 짝이 없는 인적 없는 외진 마을과

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한겨울의 산악 지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외진 마을의 정체는 프롤로그에서 바로 공개되는데,

그곳은 모음교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자급자족 마을이며,

신격화된 그곳의 리더는 주민들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물론

13살 소녀까지 신부로 맞이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입니다.

하지만 아일스 일행이 도착했을 때에는 인적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고,

방금 전까지 일상을 영위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만 기괴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조난자들의 사투사이비 종교의 폐해가 믹스된 작품입니다.

시리즈 초기의 의사 3부작을 비롯 역대급으로 끔찍한 사건들을 해결하던 두 콤비가

조난사이비 종교라는 다소 이색적인 이야기에 뛰어든 셈입니다.

앞부분이 조난당한 아일스 일행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서바이벌 스토리라면,

중반 이후는 아일스를 찾던 리졸리가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파헤치는 스릴러 스토리입니다.

 

매력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희대의 연쇄살인마와 마주했던 두 콤비의 이전 이야기에 비하면

다소 단선적이고 싱겁게 읽힌 것이 솔직한 느낌입니다.

물론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이다 보니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괜찮은 변화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와 강력반 형사 제인 리졸리의 진면목이 덜 보인 탓에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못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마지막 장을 얼마 안 남기고 예상치 못한 반전들을 배치시켰는데,

덕분에 상투적인 용두사미로 그치지 않고 적절한 수준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됐습니다.

이 작품의 말미에 다음 작품을 위한 꽤 매력적인 떡밥이 투척돼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후속작이 나오지 않아 궁금증과 아쉬움만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10여 년 전, ‘외과의사를 시작으로 몇 년 동안 탐닉했던 시리즈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시리즈 전체를 다시 읽었는데도 그 감흥은 여전했습니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무슨 계기로든 이 시리즈의 남은 작품들이 출간됐으면 하는 건데,

요원한 일이란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그 바람을 놓지 않고 있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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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 불야성 시리즈 3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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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불야성’, ‘진혼가에 이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마지막 작품입니다.

일본 작가가 환락의 도시 신주쿠 가부키초를 무대로 쓴 작품들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중국()인들, 그것도 대부분 조폭들입니다.

돈과 권력을 위한 피비린내 진동하는 충돌이 주된 이야기이고,

거기에 비극적인 사랑,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 늪과 같은 가부키초의 마력이 곁들여집니다.

 

어느 시리즈나 마찬가지겠지만, ‘불야성 3부작은 특히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시리즈입니다.

세 작품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류젠이(일본명 타카하시 켄이치)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야만

이 시리즈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만인과 일본인의 혼혈, 일명 반반(半半)인 류젠이는 가부키초의 초라한 장물아비로 출발하여

이 작품에선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가부키초의 정보를 손에 쥔 인물로 진화합니다.

첫 작품인 불야성에서 가부키초의 항쟁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피를 뒤집어썼던 류젠이는

이어진 진혼가에선 적은 비중임에도 여전히 가부키초를 뒤흔드는 배후조종자로 변신했지만

장한가에서는 모든 정보를 장악한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과 폭력을 설계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어둠의 악귀로서 그 마력을 떨칩니다.

 

이 작품의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은 가짜 일본인리지, 일본명 타케 모토히로입니다.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온 그는

몇 겹이나 되는 변신과 위장 끝에 완벽한 일본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직장을 구했지만,

거품의 붕괴와 함께 가부키초에서 마약을 다루는 조직의 말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느 날, 조직의 보스와 일본 야쿠자가 밀담 도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타케의 삶은 엄청난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야쿠자와 일본 경찰로부터 암살범의 정체를 밝혀내라는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단서 하나 없는 타케가 선택한 것은 가부키초의 정보상 류켄이치(=류젠이)입니다.

그의 엄청난 정보력에 힘입어 타케는 조금씩 암살범의 정체에 다가가는가 싶지만,

그때마다 예상치 못한 살인극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져가기만 합니다.

그 와중에 중국에 남겨놓고 왔던 첫사랑 샤오원과 재회한 타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회한과 함께 호스티스로 전락한 샤오원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하고도 무모한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580여 페이지의 꽤 두툼한 분량이지만 사건 자체는 단선적입니다.

오히려 사건 못잖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한가(長恨歌)’라는 제목 자체가 의미하듯

자신의 과거를 향한 타케의 길고도 깊은 회한에 대한 묘사입니다.

타케는 자신이 버리고 온 중국의 고향산천, 가족, 연인을 백지처럼 지운 채 살아왔지만,

첫사랑인 샤오원과 재회하면서 아무 의미 없던 가짜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어디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무력감과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에너지원은 샤오원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열망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타케의 후회, 회한, 한탄, 열망이 지나치게 강조된 탓에

장한가는 전작들에 비해 다소 느슨하게, 또 다분히 작위적으로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한두 번은 몰라도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오히려 연민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타케가 딱 그런 캐릭터라는 얘깁니다.

 

동시에, 마성의 정보력을 지닌 시리즈 주인공 류켄이치 역시 끝까지 모호함 속에 갇혀있는데,

그가 궁극적으로 노린 목표가 무엇인지, 왜 진작 그 목표를 쟁취하지 않은 건지,

자신과 닮은꼴인 타케에게 최종적으로 바랐던 것은 무엇인지,

, 모두에게 악귀 소리를 들어가며 그가 가부키초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불야성진혼가이후 몇 년이 흐른 뒤의 류켄이치의 존재감을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리하면, 앞선 두 작품이 사건 속에 캐릭터들의 감정이 진하게 잘 녹아들었다면,

장한가는 쉽게 이입하기 힘든 감정들 때문에 사건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불야성1996년에, ‘진혼가1997년에 출간된 반면, ‘장한가2004년에 출간됐습니다.

또 하세 세이슈는 애초 시리즈가 아니라 불야성한 편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는데,

개인적으로 진혼가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은 반면,

장한가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그만큼 실망감도 적지 않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의 공백 끝에 나온 시리즈 마지막 편의 부담감이 작가에게도 너무 컸던 탓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새겨진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라면

불야성진혼가만큼은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품절 상태라 중고로만 구할 수 있는데,

구하기 어려운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겨줄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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