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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 ㅣ 불야성 시리즈 3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불야성’, ‘진혼가’에 이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3부작’ 마지막 작품입니다.
일본 작가가 환락의 도시 신주쿠 가부키초를 무대로 쓴 작품들이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중국(계)인들, 그것도 대부분 ‘조폭들’입니다.
돈과 권력을 위한 피비린내 진동하는 충돌이 주된 이야기이고,
거기에 비극적인 사랑,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 늪과 같은 가부키초의 마력이 곁들여집니다.
어느 시리즈나 마찬가지겠지만, ‘불야성 3부작’은 특히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시리즈입니다.
세 작품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류젠이(일본명 타카하시 켄이치)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야만
이 시리즈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만인과 일본인의 혼혈, 일명 반반(半半)인 류젠이는 가부키초의 초라한 장물아비로 출발하여
이 작품에선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로 가부키초의 정보를 손에 쥔 인물로 진화합니다.
첫 작품인 ‘불야성’에서 가부키초의 항쟁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피를 뒤집어썼던 류젠이는
이어진 ‘진혼가’에선 적은 비중임에도 여전히 가부키초를 뒤흔드는 배후조종자로 변신했지만
‘장한가’에서는 모든 정보를 장악한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과 폭력을 설계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어둠의 악귀로서 그 마력을 떨칩니다.
이 작품의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은 ‘가짜 일본인’ 리지, 일본명 타케 모토히로입니다.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온 그는
몇 겹이나 되는 변신과 위장 끝에 완벽한 일본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직장을 구했지만,
거품의 붕괴와 함께 가부키초에서 마약을 다루는 조직의 말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느 날, 조직의 보스와 일본 야쿠자가 밀담 도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타케의 삶은 엄청난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야쿠자와 일본 경찰로부터 암살범의 정체를 밝혀내라는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단서 하나 없는 타케가 선택한 것은 가부키초의 정보상 류켄이치(=류젠이)입니다.
그의 엄청난 정보력에 힘입어 타케는 조금씩 암살범의 정체에 다가가는가 싶지만,
그때마다 예상치 못한 살인극이 벌어지면서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져가기만 합니다.
그 와중에 중국에 남겨놓고 왔던 첫사랑 샤오원과 재회한 타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회한과 함께 호스티스로 전락한 샤오원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하고도 무모한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580여 페이지의 꽤 두툼한 분량이지만 사건 자체는 단선적입니다.
오히려 사건 못잖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한가(長恨歌)’라는 제목 자체가 의미하듯
자신의 과거를 향한 타케의 길고도 깊은 회한에 대한 묘사입니다.
타케는 자신이 버리고 온 중국의 고향산천, 가족, 연인을 백지처럼 지운 채 살아왔지만,
첫사랑인 샤오원과 재회하면서 아무 의미 없던 가짜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어디로도 도망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무력감과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에너지원은 샤오원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열망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타케의 후회, 회한, 한탄, 열망이 지나치게 강조된 탓에
‘장한가’는 전작들에 비해 다소 느슨하게, 또 다분히 작위적으로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한두 번은 몰라도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오히려 연민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타케가 딱 그런 캐릭터라는 얘깁니다.
동시에, 마성의 정보력을 지닌 시리즈 주인공 류켄이치 역시 끝까지 모호함 속에 갇혀있는데,
그가 궁극적으로 노린 목표가 무엇인지, 왜 진작 그 목표를 쟁취하지 않은 건지,
자신과 닮은꼴인 타케에게 최종적으로 바랐던 것은 무엇인지,
또, 모두에게 악귀 소리를 들어가며 그가 가부키초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불야성’과 ‘진혼가’ 이후 몇 년이 흐른 뒤의 류켄이치의 존재감을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리하면, 앞선 두 작품이 사건 속에 캐릭터들의 감정이 진하게 잘 녹아들었다면,
‘장한가’는 쉽게 이입하기 힘든 감정들 때문에 사건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불야성’이 1996년에, ‘진혼가’가 1997년에 출간된 반면, ‘장한가’는 2004년에 출간됐습니다.
또 하세 세이슈는 애초 시리즈가 아니라 ‘불야성’ 한 편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는데,
개인적으로 ‘진혼가’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은 반면,
‘장한가’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그만큼 실망감도 적지 않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7년의 공백 끝에 나온 시리즈 마지막 편의 부담감이 작가에게도 너무 컸던 탓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새겨진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라면
‘불야성’과 ‘진혼가’만큼은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품절 상태라 중고로만 구할 수 있는데,
구하기 어려운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겨줄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