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수법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와카타케 나나미는 꽤 오래 전 읽은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이후 오랜만에 만난 작가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 기대어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렸는데

흥미롭고 신선한 설정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2019년 이후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두 작품이나 출간됐음에도 제 눈길을 끌지 못했던 건

곰 그림이 들어간 귀여운 표지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뒤늦게라도 이벤트를 통해 이별의 수법을 만나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와카타케 나나미가 창조한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는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소속 탐정사무소가 폐업한 뒤 미스터리 서점 살인곰 서점의 알바생인 된 하무라 아키라는

어이없는 부상으로 입원한 뒤 왕년의 스타 배우 아시하라 후부키와 한 병실을 쓰게 됩니다.

하무라가 전직 탐정임을 알게 된 후부키는 20년 전 가출한 딸 시오리의 조사를 의뢰합니다.

하지만 20년이란 시간의 공백은 하무라의 발걸음을 무겁게만 만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무라는 20년 전 시오리의 행방을 쫓던 탐정도 실종됐으며,

후부키의 조카는 교살당했고, 저택의 가정부들마저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정계와 연예계의 거물들부터 매니저에 이르기까지 후부키 주위의 인물들을 조사하던 하무라는

20년 만에 드러난 충격적인 비밀은 물론 각종 살인과 실종의 진실까지 파헤칩니다.

 

다 읽은 뒤의 첫 소감은 하무라에겐 하루 48시간도 모자라!”였습니다.

사실, 메인 사건은 실종된 후부키의 딸 시오리를 찾은 일이지만,

하무라는 20년 전 시오리를 쫓다가 사라진 탐정의 행방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다,

자신이 셰어하우스에 소개한 미스터리한 여성의 감시(?)까지 본의 아니게 떠맡게 된 탓에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만큼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처지입니다.

더구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수차례나 온몸에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데,

덕분에 하드보일드 탐정이 아니라 오지랖 넓은 좌충우돌 캐릭터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무라의 이런 저돌적인 맹활약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을 금세 마무리짓게 만드는데

때론 읽는 독자마저 숨이 가쁠 정도로 이야기는 빠르고 쉴 틈 없이 전개됩니다.

탐문이 거듭될수록 예상치 못한 곳에서 20년 전의 단서와 목격자들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의뢰인인 후부키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하무라의 조급증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결국 하무라는 휴식이란 걸 잊은 듯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조사에 매진하는데,

이런 하무라를 뒤쫓느라 독자마저 마치 전력으로 100m를 달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진실은 충격적이고, 거듭된 반전도 마지막까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작가 스스로 헷갈릴 수 있을 만큼 사방에 뿌려진 크고 작은 사건과 해프닝도 잘 수습됩니다.

특이한 경험이지만, 열심히 일한 하무라가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안도감도 느꼈는데

덕분에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처음부터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됐습니다.

 

재밌는 건 이 작품 바로 앞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13년 전에 출간됐다는 점입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20였던 하무라가 직전 작품인 나쁜 토끼에서 31살까지 성장한 뒤,

무려 13년 만에 사십견과 노안에 시달리는 40대 아줌마가 되어 독자 앞에 나타난 셈인데,

그 사연에 관해서는 작가 후기에 실린 작가의 솔직한(?) 고백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 한국에서 먼저 출간된 두 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조용한 무더위’, ‘녹슨 도르래’)

실은 이별의 수법뒤에 출간된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두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마치 프리퀄처럼 읽을 수 있을 텐데,

그 나름의 흥미로운 책읽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품절, 절판 상태인데

기회가 될 때마다 중고서점을 탐색해서라도 한 편씩 모아보려고 합니다.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금까지 몰랐다는 게 너무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이제라도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는 기분 좋은 기대감을 전해준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 출간연도는 일본/한국>

 

- 시즌 1

01 ‘네 탓이야’ (1996/2008, 북폴리오, 단편, 원제 프레젠트’)

02 ‘의뢰인은 죽었다’ (2000/2009, 단편, 북폴리오)

03 ‘나쁜 토끼’ (2001/미출간, 장편)

 

- 인터미션

03-1 ‘어두운 범람’ (2014/2017, 엘릭시르, 단편, 두 작품에 하무라 등장)

 

- 시즌 2

04 ‘이별의 수법’ (2014/2020, 장편, 내친구의서재)

05 ‘조용한 무더위’ (2016/2019, 단편, 내친구의서재)

06 ‘녹슨 도르래’ (2018/2020, 장편, 내친구의서재)

07 ‘불온한 잠’ (2019/미출간, 단편)

 

* 시즌 구분은 역자 후기에 따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비현실세계를 무대로 애틋함과 공포심을 잘 버무린 야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공존하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그린 금색기계에 매료된 터라

쓰네카와 고타로의 신작 소식은 반가움 이상의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제목과 함께 역시나 이계(異界)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가 행복해질수록 인류는 멸망을 향해 치닫는다.”라는 띠지 카피는

어딘가 암울한 디스토피아 판타지의 냄새까지 풍겨서 묘하게 고혹적인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절망뿐인 현실에 암울해하던 스즈가미 세이치는 어느 날 낯선 전철역에 내린 뒤

자신이 전혀 다른 세상 속에 내던져졌음을 깨닫습니다.

평화롭고 안온하며 모든 것이 따뜻하게 보이는 그곳은 오오마츠리라는 곳인데,

문제는 아무도 도쿄뿐 아니라 일본의 어느 지명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이방인인 자신을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줬고,

세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서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세이치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이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무렵,

지구는 그야말로 멸망을 불러오고도 남을 것 같은 엄청난 재앙에 휩싸입니다.

해파리 같은 미지의 존재가 지구를 감싼 채 미확인 에너지를 내뿜고 있고

지상에선 푸니라 불리는 괴물체가 인간의 목숨을 들불처럼 거둬들이는 중입니다.

일본을 비롯한 전 지구는 지상의 괴물체를 제거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물론

그 괴물체의 에너지의 원천으로 보이는 미지의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들은 고도의 관측 장비를 통해 지구를 감싼 미지의 존재한 가운데에

명백히 인간으로 보이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제법 길게 줄거리를 정리했는데, 사실 이 내용은 이 작품의 초반 설정 소개에 불과합니다.

끔찍한 현실과 정반대로 유토피아를 구현한 듯한 오오마츠리에서 새 삶을 시작한 세이치가

안착-가족 만들기-평화로운 삶을 거쳐 외부에서 다가오는 위기와 직면하는 것이 한 축이라면,

(‘인디펜던스 데이를 연상시키는) 지구멸망을 초래할 우주적 재앙에 맞서는 초인들의 노력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비극과 지독한 아이러니가 나머지 한 축입니다.

이 두 개의 축은 꽤나 복잡한 구조를 지닌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들을 풀어놓는데,

덕분에 깔끔하고 선명한 줄거리 정리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그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다,

지구를 감싼 해파리 모양의 미지의 존재를 보면 디스토피아를 그린 SF물 같기도 하고,

세이치의 새 터전인 동화 속 세계 같은 오오마츠리를 보면 이계를 다룬 판타지 같기도 하고,

지구를 구하기 위한 초인들의 노력을 보면 할리우드의 영웅 이야기같기도 한 이 작품은

어쩌면 이런 복잡미묘한 장르와 서사 때문에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뭐랄까... 과학과 신화가 공존하고 있는 탓에 어느 쪽에 몰입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란함,

아니면 이건 말이 안 돼.”라며 이야기에서 자꾸만 물러서게 되는 불편한 이질감이랄까요?

 

혼란함과 이질감 속에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에 몰입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앞의 이야기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 엔딩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내용 자체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나름 기대하고 바랐던 쓰네카와 고타로 특유의 여운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꽤 중요한 인물들 대부분 제대로 된 마무리를 맞이하지 못했고,

사건 역시 왠지 흐지부지 또는 다소 억지스럽게 결말지어졌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누구도 쉽게 떠올리지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와 그에 걸맞은 인물과 스토리 설정은

과연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감탄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멀리 나갔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작품보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 궁금해졌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모든 독자들의 독후감을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착한 소녀의 거짓말 - 구드 학교 살인 사건
J.T. 엘리슨 지음, 민지현 옮김 / 위북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통의 명문 기숙학교 구드(Goode)는 권력층과 억만장자의 똑똑한 딸들만 입학이 가능하고,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입학은 물론 그 이후의 찬란한 미래까지 보장해주는 곳이다.

오래된 건물과 역사만큼이나 기괴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구드 학교에

영국 옥스퍼드 출신의 아름다운 소녀 애쉬가 전학을 온다.

그리고 그날 이후 구드 학교에는 의문의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데,

문제는 모든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애쉬가 연루돼있다는 점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원제인 ‘Good Girls Lie’는 직역하면 착한 소녀들이 거짓말을 한다지만,

실은 ‘Goode Girls Lie’, 구드 학교의 소녀들은 거짓말을 한다라는,

다소 아이러니하고도 역설적인 의미를 담았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래 전 구드 학교는 “Good Girl이 될 수 없는 거리의 소녀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됐고,

시간이 지나 Good Girl을 살짝 비튼 듯한 Goode School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또 이 학교의 가장 엄격한 규율이자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

거짓말과 남을 속이는 것이란 점 역시 원제의 아이러니함을 강조하는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이야기는 영국 옥스퍼드 출신의 애쉬가 어마어마한 명문 기숙학교에 전학 오면서 시작됩니다.

외국에서 온 전학생을 까칠하게 대하는 동급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의 권력과 부에 익숙해진 나머지 끔찍한 갑질마저 태연히 자행하는 졸업반 선배들,

그리고 엄격한 규율과 부담감 백배의 학업 성취에 열 올리는 학장과 교수들에 이르기까지

전학 초기 애쉬의 일상은 숨 막힘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애쉬에겐 하버드 진학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어떻게든 구드 학교에 연착륙하고자 모든 고난을 지혜롭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연이은 학내 사망사고가 벌어지고 경찰까지 개입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애쉬의 평정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리고 애쉬가 가까스로 감춰온 엄청난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그녀를 감싸온 학장은 물론 경찰들마저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애쉬가 구드 학교에 전학 온 이후로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꽁꽁 싸맨 비밀의 실체는

여느 스릴러에서 보기 어려운 신선하고 충격적인 설정입니다.

, 그 외에도 540여 페이지의 분량에 담긴 이야기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서

줄거리 소개만으로도 A4 2~3장은 너끈히 넘길만한 방대한 서사의 작품입니다.

요약한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미스터리 작품 같지만

실은 미국판 여고괴담이라고 해도 될 만큼 흥미로운 호러 코드와 함께

여학생 기숙학교를 무대로 비밀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다양한 인간관계도 다루고 있어서

팔색조 같은 매력을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지는 연이은 반전이 눈길을 끌었고,

주인공인 애쉬, 그녀를 아끼고 감싸는 학장 포드,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물 등

여러 사람이 번갈아 챕터의 화자를 맡아 긴장감과 밀도를 높인 덕분에

자칫 단선적일 수 있는 이야기 구조가 무척 풍성하고 알차게 설계된 인상을 받았는데,

정치경영 석사, 백악관 근무, 재무분석가를 거쳐 법의학과 범죄학을 공부한 끝에

‘FBI 시리즈라는 베스트셀러를 냈다는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반영된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초반의 지루함입니다. (1개가 빠진 결정적 이유입니다.)

구드 학교에 도착한 후 애쉬가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고 안착하는 과정이 꽤 길게 설명되는데

본격적인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고 경찰이 개입하기까지의 초중반은

성미 급한 장르물 독자라면 견디기 쉽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고 느리게 전개됩니다.

반면, 그 직후부터는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거의 3~4배속으로 빨라지긴 하지만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지 못하고 초반부터 고민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슨이란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J.T. 엘리슨의 한국 출간작은 이 작품이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 작품이 선전한다면 그녀의 대표작인 ‘FBI 시리즈테일러 잭슨 시리즈역시

머잖아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마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은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더는 낯선 경험이 아니지만,

역시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꽤 마음의 부담(?)을 안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보다는 깊고 묵직하고 비장한 서사와 마주해야 하는 탓에

읽기 전부터 여느 작품을 대할 때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폴리스에서 경찰만 노리는 최악의 살인범과 사투를 벌였던 해리 홀레는

복직 대신 경찰대학의 교수로서, 라켈의 남편으로서, 올레그의 아버지로서 살기를 택했지만,

쇠이빨로 여자의 목을 물어뜯어 살해하는, 이른바 뱀파이어연쇄살인마가 등장하면서

또 다시 심연과도 같은 살인사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꾸린 비공식 수사팀에는 뱀파이어전문가인 심리학자와 갓 2년차인 신참 경찰 등

어딘가 엉성해 보이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멤버들이 포진하게 되지만,

이들은 공식 수사팀 못잖은 열정과 노력으로 해리의 조력자로 활약합니다.

 

사실, 엽기적인 범행수법과 함께 뱀파이어전문가인 심리학자까지 등장한 덕분에

가끔 해리가 정말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는 건가?’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동시에, 극도로 감정적인데다 피에 대한 갈망에 좌지우지되는 듯한 범행수법에 비해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산되고 계획된 듯한 사건 정황으로 인해

(해리와 경찰이 그랬듯이) 독자는 범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됩니다.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연쇄살인범 수사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바라면서도 술과 살인사건의 유혹에 시달리는 해리의 갈등이

그에 못잖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라켈과 함께 하는 작고 소중한 행복에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술과 살인사건을 향한 해리의 목마름은 도무지 사라질 줄 모릅니다.

목마름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해리가 겪는 내면의 갈등과 고뇌는 지독하고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목마름이 피와 살인을 갈망하는 연쇄살인마의 그것과 겹쳐 보이는 걸 깨달은 해리는

라켈과 올레그를 떠나는 것이 그들을 위한 길이 아닐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해리의 천적이자 차기 법무장관을 노리는 미카엘 벨만의 정치적 행보,

부패경찰이지만 미카엘 벨만의 약점을 쥔 채 강력반의 한 자리를 틀어쥔 트룰스의 야욕,

새로 살인사건 수사책임자가 된 카트리네 브라트의 좌충우돌,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직업의식에 사로잡혀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는 언론,

학계의 주변부만 맴돌다가 쇠이빨의 연쇄살인마 덕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심리학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버지해리를 따라 경찰대학생이 된 올레그의 활약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700페이지의 분량을 꽉꽉 채워주고 있습니다.

 

전작인 폴리스를 읽어야 목마름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게 사실인데,

주요 등장인물의 행동과 상황이 폴리스에서 다뤄졌던 사건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 요 네스뵈가 작품 이곳저곳에서 부연설명을 많이 해줘서 필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서 폴리스의 서평이라도 읽어보길 권합니다.

 

읽기 전에 마지막 장의 페이지 수를 확인하곤 대략 이런 예상을 했습니다.

500페이지 정도는 사건에 충실한 내용이겠지만,

나머지 200페이지는 해리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뇌와 갈등의 묘사를 위해,

,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풍경이나 소품에 대한 묘사로 채워질 게 분명하다고.

예상과 크게 틀리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 묘사들이 때로 묵직한 두통을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서 11편의 시리즈 중 한 편을 제외하곤 모두 읽었지만,

매번 똑같이 겪게 되는 곤혹스러움은 목마름에서도 여전했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축약된 표현과 문장들이 그것인데,

대세(?)에 지장 없는 경우에는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하지만,

캐릭터나 사건과 직결된 상황에서 그런 표현과 문장들을 만나면 참 난감해집니다.

물론, 그런 난감함이 어쩌면 해리 홀레 시리즈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요.

 

요 네스뵈는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말미에 또 다시 대형 떡밥을 투척합니다.

말하자면, 다음 작품에서 해리 홀레가 마주해야 할 더 잔혹하고 끔찍한 범인을 예고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경계선까지 내몰렸던 해리 홀레가

목마름의 범인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로 보이는 그 자와 어떻게 사투를 벌일지

벌써부터 궁금증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이한 제목에 눈길이 끌렸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한참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제법 미스터리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던 앨리스 죽이기조차 별 3개를 줬고,

장난감 수리공은 수록된 두 작품 중 표제작만 읽은 뒤 서평도 쓰지 않았으며

기억파단자는 절반도 못 가서 포기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재도전하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일단, 흡혈귀와 인간의 대결이란 설정 때문에 꽤 잔혹한 장면들이 많으리라 예상했는데

초반부터 그 예상을 백배는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묘사들이 등장합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몸이 찢겨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그런데 역겹다기보다는 19금 괴수 애니메이션이나 팔다리가 툭툭 잘리는 B급 코믹영화처럼

뭔가 경쾌한 리듬을 탄 듯한 흥미진진한 살육 쇼를 읽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초반부터 독자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 작가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짧게 요약하면...

흡혈귀 사냥꾼들이 서커스단으로 위장한 채 암약 중이라는 정보를 들은 흡혈귀 조직은

때마침 인근에서 공연준비 중인 한 영세 서커스단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이 영세 서커스단은 10명 남짓한 멤버로 겨우 버티고 있는 진짜서커스단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 서커스단의 멤버 한 명이 전설적인 흡혈귀 사냥꾼과 이름이 비슷했던 탓에

흡혈귀 조직은 이들을 사냥꾼으로 규정하곤 총공격을 진행합니다.

 

남녀노소 골고루 포진한 흡혈귀 조직의 공격력은 막강 그 자체입니다.

쉽게 죽지도 않고, 치명상을 입어도 금세 회복되며, 잔인함은 극에 달할 정도입니다.

그에 비해 서커스단 멤버들은 자신의 주특기 외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평범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의외의 전개를 보이기 시작하고,

전설적인 흡혈귀 사냥꾼과 이름이 비슷한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히어로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출판사에서는 잔혹 배틀 스릴러라는 장르명을 붙였지만

나름 미스터리와 반전의 품격도 곁들이고 있어서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뭔가 모호하고 애매했던 앨리스 죽이기에 비해 비교적 선명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고,

호러와 잔혹함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순 있어도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제나 의미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는 제격인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흡혈귀라는, 개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설정과 배틀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서

조금은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과 또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해선 홍보글이나 소개글은 물론 띠지나 표지의 카피조차 안 읽고 책을 읽는 편이지만,

혹시라도 들여다본 그의 신작 홍보글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끄는 설정이 있다면

이 작품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결국엔 집어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