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2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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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됐던 마약수사팀장 칼렉시코 무어가 모텔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비리 혐의가 의심되던 무어의 죽음을 덮기 위해 경찰국은 신속하게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지만

해리 보슈는 사건 현장의 모습과 여러 단서들 때문에 자살 자체를 의심합니다.

한편, 수사 성과에 광분하던 파운즈 과장은 보슈에게 미결 사건의 조기해결을 독촉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맡게 된 사건 중에 자살한 무어와 연관된 것들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특히, 무어의 불행했던 과거와 최근 행적이 멕시코에 집중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슈는

정직(停職) 이상의 처분을 감내하고 모든 연락을 끊은 채 홀로 국경선을 넘어갑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블랙 아이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메인 사건에 등장하는 강력한 신종 마약이고,

또 하나는 겨울철이면 수많은 사고를 일으키는 도로 위의 결빙 상태,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위험을 뜻합니다.

보슈는 무어의 죽음 이전부터 신종 마약인 블랙 아이스의 유통 경로를 조사하고 있었고,

무어는 마약수사팀장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블랙 아이스와 연관돼있습니다.

또 무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위험때문에 인생 최악의 위기를 겪었다면,

보슈는 무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역시 그 치명적인 위험과 맞닥뜨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보슈와 무어는 불행한 어린 시절비정한 아버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래선지 보슈는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무어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끝에

다소 무모해 보일 정도로 수사 과정에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물론

상관과 충돌해가면서까지 무어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슈의 과거사의 단면이 소개되는데,

임종 순간에야 처음 만난 아버지 할러’ (보슈의 이복형제인 미키 할러의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그리고 보호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했던 씁쓸한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어떤 작품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슈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다른 작품에서 좀더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보슈가 무어의 미망인인 실비아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 역시

보슈와 무어 사이의 불가해한 동질감을 그리기 위한 장치로 설정됐는데,

이렇게 여러 겹으로 포장된 보슈와 무어의 교집합덕분에

이 작품의 엔딩은 독자들의 예상과 기대를 벗어난,

하지만 동시에 비극성이 강하고 그만큼 여운도 길게 남는 서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아이스는 전작인 블랙 에코에 비해 다소 건조해 보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멕시코로 달려간 보슈가 거의 단독행동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다

사건 자체가 비교적 단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멕시코에서 임시 파트너를 만나기도 하고, 마약단속국과 갈등 섞인 협업도 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방불케하는 대규모 액션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LA와 멀리 떨어진 멕시코에서의 단독행동은 긴장감을 떨어뜨린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소한 단서를 통해 무어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짓는 막판 반전은 매력적입니다.

, 자신을 시궁창 밑바닥으로 내치려는 LA경찰국 상부를 엿 먹이는대목 역시

이 시리즈의 최고의 재미 중 하나답게 멋지고 속 시원한 통쾌함을 전해줍니다.

바람둥이는 아니지만 외로운 여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이란 소리까지 듣는 보슈가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거듭하는 장면은 오히려 쓸쓸하고 처연하게 읽히기도 합니다.

 

보슈의 미래(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은 시리즈 1~2편은

희미해진 기억 덕분에 마치 새 이야기를 읽는 듯한 감흥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사람은 젊은 날부터 평생 블랙 아이스속에서 살았구나.”라는,

미래를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안타까움도 함께 전해줬습니다.

이런 느낌은 앞으로 해리 보슈 다시 읽기내내 계속 될 텐데,

그런 와중에도 보슈가 잠깐이나마 행복을 맛보는 순간들이 찾아온다면

그 못잖게 저 역시 기뻐하고 안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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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술래잡기 스토리콜렉터 1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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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명의 전화상담원 누마타 야에는 어느 날 중년남자 다몬 에이스케의 전화를 받는다.

자살을 앞두고 지난 며칠간 어릴 적 친구들과 통화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야에는

관계기관에 연락하여 그를 구하려 하지만 절벽에서 투신한 흔적만 남긴 채 그는 종적을 감춘다.

한편, 다몬이 통화했다는 어릴 적 친구 중 한 명인 호러 미스터리 작가 하야미 고이치는

옛 친구의 기묘한 증발에 의문을 느끼고 독자적으로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몬의 실종 이후 연이어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이 자신과 친구들의 30년 전 봉인된 기억과 연관 있음을 깨달은 하야미 고이치는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를 보낸 마다테 의 다루마 신사를 찾아간다.

 

● ● ●

 

비록 작품마다 편차는 있지만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은 늘 즐겨 찾는 애독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도조 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처럼 호러와 미스터리가 잘 결합된 작품들은

적절한 수준의 공포심과 짜릿한 반전을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곱 명의 술래잡기역시 그런 매력이 잘 배어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호러와 미스터리가 ‘3 7’ 정도로 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똑같은 놀이인 다레마가 죽였다가 등장합니다.

하야미 고이치와 그의 친구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30년 전 하나 같이 아웃사이더들이었고,

그들은 다른 아이들이나 마을사람들은 찾아오지 않는 표주박산에 자리 한 낡은 신사 마당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즐겁게 이 놀이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 모두의 기억을 휘발시키고 봉인할 만큼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하야미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그날 자신들이 목격한 일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살을 예고한 다몬 에이스케가 바로 그 신사 마당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어 벌어진 유년기 친구들의 참혹한 죽음마다 어린 시절 술래가 외쳤던

다레마가 죽였다라는 메시지가 개입된 걸 알게 된 하야미는

어떻게든 봉인된 기억을 해제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30년 만에 문제의 그 장소를 찾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설정만 보면 호러 성향이 굉장히 강한 작품일 것 같은데,

진실 찾기에 나선 주인공 하야미 고이치가 호러 미스터리 작가로 설정된데다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표주박 모양의 산(미쓰다 신조가 즐겨 설정하는 공간이죠)

그보다 더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폐허 같은 신사가 주 무대이다 보니

역시 이번에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호러 서사가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실체가 있는 살인사건이 분명해 보이기에

과연 물과 기름 같은 호러와 미스터리가 어떤 식으로 결합될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겨놓고 벌어지는 하야미의 추리의 향연과 반전은

호러와 미스터리는 물론 치유될 수 없는 오랜 상처가 낳은 비극의 서사까지 담아냅니다.

미스터리는 예상 밖의 범인을 지목하면서 깔끔하고 선명한 엔딩을 장식하지만,

미쓰다 신조는 진실의 일부만큼은 설명 불가능한 호러의 영역에 남겨놓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그게 말이 돼?”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점이 미쓰다 신조 표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덧붙여, 우연과 운명이 조화를 부린 끝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하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엔딩이 기다립니다.

 

하야미 고이치의 추리와 수사는 미쓰다 신조의 대표 주인공 도조 겐야와 많이 닮았습니다.

홀로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고 들쑤시며 천천히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도 그렇고,

갖가지 추리를 늘어놓으며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다가 막판에 정답을 내놓은 방식도 그런데,

실제로 본문 속에서 하야미는 자신이 도조 겐야를 좋아해서 따라하는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니 한국에 오랫동안 소개되지 않고 있는 도조 겐야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7년 동안 무소식이라 이젠 기대를 접을 때가 된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소식에 대한 헛된 희망을 아주 내버리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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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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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타인의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모는 선의든 악의든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재료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인격의 일부인 외모를 비하하거나 희롱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외모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며 고민하거나 더 나아가 집착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조각들의 주인공은 미스 월드 일본 대표에 뽑힐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지닌 것은 물론

뷰티클리닉 원장으로서 큰 유명세까지 얻은 미용외과 의사 다치바나 히사노입니다.

히사노는 지방흡입술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초중고 동창인 유키 시호를 비롯

비만, 단신, 못생긴 코 등으로 인해 고민하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외모강박증이라는 꽤 민감한 주제를 직설적으로 다루는 것과 함께,

한 소녀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한 조심스러운 여정을 동시에 풀어놓습니다.

 

재미있는 건, 정작 히사노의 대사는 한마디도 없이 모두 상대방의 대사로만 구성된 점인데,

덕분에 독자는 매 챕터마다 히사노의 외모강박증 비판을 반복해서 읽을 필요가 없었고,

동시에 히사노가 마주하게 된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강하게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등장인물들은 크게 보면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히사노와 초중고 동창인 부모세대가 한 축이고 그들의 자식세대가 나머지 한 축인데,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만 모녀인 요코아미 야에코-기라 유우와 모두 연결돼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64kg의 몸무게 때문에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던 요코아미 야에코 주위에는

완벽한 외모의 히사노, 깡마른 언니와 뚱뚱한 동생 자매, 땅꼬마로 불린 단신 소년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포진돼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된 지금도 그들에게 있어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과거는

대부분 어린 시절 외모와 관련된 에피소드나 해프닝들입니다.

자식세대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뚱뚱하지만 밝고 쾌활한 성격의 기라 유우 주위에는

코 콤플렉스를 가진 조연 배우, 비만 때문에 학생들에게까지 모욕당하는 교사,

소녀의 비만을 죄악 또는 부모의 학대라고 여기는 어른 등

하나 같이 외모를 너무 중시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외모에 대한 독설과 직설은 때론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가혹하면서도 흥미를 자극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도넛에 파묻혀 자살한 소녀의 미스터리도 끝까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다만, ‘외모자살이라는 두 개의 화두가 제대로 잘 섞이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소녀의 죽음의 진실은 두 개의 화두를 잇기 위해 다소 억지를 부린 듯 했고

외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완벽한 미모의 미용외과 의사 히사노

정확히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도 명확히 전달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칫 뻔해질 수 있는 소재를 색다르게 직조한 노력은 분명히 눈에 띄었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히사노가 만난 인물들이 늘어놓은 없어도 무방한 장황한 개인사도 눈에 거슬렸는데

굳이 주제와 무관한 사족 같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이 필요했나,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몰입하거나 집착하는 요즘의 시대에

나름 여러 가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독자마다 미나토 가나에의 메시지에 대해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작품입니다.

적절한 분량과 간결한 문장으로 이뤄진 작품이니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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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에코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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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댐 인근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베트남 참전 동료 메도우스임을 알게 된 보슈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수사를 펼친 끝에 기어이 FBI와의 공조까지 끌어냅니다.

보슈와 호흡을 맞출 FBI의 파트너는 이후 그와 기구한 인연을 이어갈 엘리노어 위시.

보슈와 엘리노어는 메도우스의 죽음이 1년 전 은행 강도사건과 연관된 것은 물론

20년 전 베트남 전쟁 중에 벌어진 추악한 흑막과도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LA경찰국과 FBI의 방해, 도청과 미행에 이은 살해위협까지 받게 되면서

보슈와 엘리노어의 수사는 갈수록 위태로워지기만 할 뿐입니다.

 

● ● ●

 

해리 보슈 시리즈와 이 시리즈에 중요한 조연(Also Featuring)으로 등장했던

매력적인 인물들(잭 매커보이, 테리 매케일럽, 캐시 블랙)이 주연을 맡은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제 마음대로 만들어본 해리 보슈+@ 순서대로 다시 읽기의 첫 작품인 블랙 에코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시리즈 최근작 블랙박스에서 보슈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데

이제 갓(?) 마흔인 팔팔한 보슈의 첫 번째 활약을 다시 읽고 있으니 묘한 반가움과 함께

속절없이 흘러간 보슈의 세월과 나이에 안쓰러움과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리즈의 첫 편이지만 보슈는 어설프지도, 어려 보이지도,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나름의 정의, 이유 있는 반골,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돌직구 기질로 무장한 채

자신의 첫 등장을 독자들에게 뚜렷이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6병 묶음 맥주 팩과 나른한 재즈를 즐기는 고독한 코요테를 닮은 분위기,

하드보일드와 감상적인 로맨티스트를 넘나드는 캐릭터 플레이는

다른 어느 시리즈에서도 맛보기 힘든 매력적인 형사 캐릭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작품들을 대부분 읽은 덕분에 첫 편인 블랙 에코는 마치 프리퀄처럼 읽혔는데,

후일 보슈의 인생에 기쁨과 절망을 모두 안겨줄 엘리노어 위시와의 첫 만남,

타고난 반골 기질과 정의감으로 인해 LA경찰국에서 할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된 사연,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임시가정과 청소년 쉼터를 전전했던 암울한 성장기,

또 그의 오랜 트라우마인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내용 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들은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에서도 보슈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인데,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대목은 물론 베트남 전쟁입니다.

멀홀랜드 댐 굴에서 발견된 시신은 베트남 전쟁 당시 보슈와 함께 땅굴을 수색하던 동료였고,

엘리노어는 아끼고 의지하던 오빠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잃었습니다.

특히 보슈는 베트남에서 땅굴로 들어가는 순간의 공포를 뜻하는 은어 검은 메아리’,

즉 블랙 에코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20년이 지나 희대의 은행강도를 체포하기 위해

오랫동안 잊었던 그 트라우마와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두 번째는 FBILA경찰국 내사과로 대표되는 내부의 적들입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보슈의 성미를 건드리곤 하는데,

그의 반골 기질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더없이 좋은 장치입니다.

조직이 그를 아웃사이더로 밀어붙일수록 보슈의 매력은 급상승하게 되고,

그를 못살게 굴던 조직이 망가질수록 독자들의 쾌감은 치솟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불행한 성장기입니다.

히에로니머스 보슈라는 특이한 이름을 남겨준 어머니는

보슈에겐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이자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고통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블랙 에코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간략하게만 소개될 뿐인데,

어머니와 보슈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에서 좀더 상세히 설명됩니다.

 

베트남’, ‘내부의 적들’, ‘불행한 성장기는 이후 보슈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합니다.

현실에서라면 한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큼 극단적인 설정들이지만,

고독과 반골, 적절한 폭력성을 겸비한 보슈에게는 매력적이고도 완벽한 포장임에 분명합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내용보단 작품의 큰 틀을 소개하는데 주력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초반부터 스포일러 설정들이 워낙 많아서 상세한 내용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여전히 큰 감흥을 전해줬는데,

그동안 뒤죽박죽 또는 군데군데 빼먹은 시리즈들을 순서대로 읽어나갈 생각을 하니

예상치 못한 선물 폭탄을 받고 하나씩 포장을 벗기는 어린 아이마냥 흥분될 따름입니다.

(최근작인) ‘블랙박스까지 19편이 남아있으니 천천히 맛있게 음미해볼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지금까지 해리 보슈가 장신에 한 덩치 하는 인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0여년 만에 다시 읽은 블랙 에코에는 보슈에 대해

키는 180cm에 많이 모자랐고, 몸도 가느다란 편이었다.”라고 묘사돼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상상이 전부 착각이었던 겁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뒤늦게 읽은 시리즈 첫 편 사랑받지 못한 여자에서 그때까지 아담한 체격으로 알고 있던

피아 키르히호프가 실은 180cm의 장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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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하이츠의 신 1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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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1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방식의 자살을 택했을까요? 매번 독특한 세계를 그려냈던 츠지무라 미즈키의 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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