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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블론드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4년 전, 거리의 여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곤 진하게 화장(化粧)을 시킨 기행 때문에
‘인형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연쇄살인마를 사살한 해리 보슈.
하지만 지원요청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방비 상태의 용의자를 사살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슈는 LA의 시궁창이라 불리는 할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됐습니다.
그리고 현재, ‘인형사’의 미망인이 제기한 민사소송의 피고인이 된 보슈는
잘 해야 과잉진압, 잘못하면 엉뚱한 시민을 살해한 혐의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합니다.
문제는, ‘인형사’와 동일한 수법에 의해 살해된 시신이 재판 도중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즉, 4년 전 보슈가 사살한 건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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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보슈의 ‘추락 전 과거’와 ‘추락중인 현재’가 동시에 등장하는데다,
치열한 법정 대결, 모방살인범 찾기, 보슈의 애틋한 로맨스까지
세 가지 서사가 함께 전개되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제목인 ‘콘크리트 블론드’는 ‘인형사’와 동일한 수법에 의해 살해된 뒤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발견된 새로운 희생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금발과 큰 가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시신이 콘크리트 아래 매장됐다는 뜻인데,
자신이 사살한 ‘인형사’가 되살아났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한 보슈는
100% ‘인형사’의 수법을 잘 아는 모방범의 범행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이 사건은 “‘인형사’는 원고 측 주장대로 무고한 시민이었으며
진범은 아직도 LA를 무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보슈는 법정과 사건현장을 오가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에 이르는데,
이 와중에 전작 ‘블랙 아이스’를 통해 연인이 된 실비아 무어와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집니다.
“살인사건 수사도 그것을 사명으로 아는 형사에겐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보슈는
지독한 워커홀릭에 고독한 코요테를 닮은, 소위 ‘철벽을 친 남자’입니다.
그런 보슈의 사랑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처럼 순탄하고 열정적으로 흘러갈 수는 없다 보니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에 빠져 몸뿐 아니라 마음과 일상까지 나눈 실비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바칠 수 없는 것이 보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보슈의 ‘모방범 이론’을 받아들인 LA경찰국은 특수팀을 꾸리는 한편
특정된 용의자들의 행태를 물샐 틈 없이 추적하지만 좀처럼 단서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주포(主砲)인 보슈가 법정에 매인 상태라 더더욱 난감한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슈는 경찰 조직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지독한 독설을 날립니다.
“정치성 박테리아에 감염된 조직의 상부에는 관리자들이 넘치는 반면,
하부는 인원이 모자라고 허약하여, 거리로 나간 말단 경찰들은
자신들이 봉사하는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에서 내릴 겨를도 없었다.”
재미있는 건, 늘 보슈를 잡아먹을 기회만 엿보던 부국장 어빈 S. 어빙이
이 작품에서는 꽤 보슈를 챙겨주고 지원한다는 점인데,
그는 과거 ‘인형사 사건’을 핑계로 보슈를 할리우드 경찰서로 내친 주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슈가 소송에서 지거나 ‘모방범의 범행’이란 점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자신이 입게 될 치명적인 상처 때문에 어빙은 전에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전작인 ‘블랙 아이스’에서 보슈에게 잡힌 결정적인 약점 탓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밝혀지는 (보슈와 관련된) 그의 ‘과거’ 역시 태도 변화의 한 원인이기도합니다.
이 작품에서 보슈 못잖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원고 측 변호인 허니 챈들러입니다.
지독한데다 능력과 욕망까지 갖춰서 ‘머니 챈들러’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녀는
보슈로 하여금 증오와 존경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데,
거리의 여자들을 사냥했던 ‘인형사’를 어떤 이유에서든 기어이 사살한 보슈의 행동을
매춘부였던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결부시킬 정도로 잔인하고 지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고 냉정한 논리를 갖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독자로 하여금 이후에도 보슈와 악연을 이어가길 바라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는데,
그녀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 자체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스토리와 관련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진범의 정체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보슈는 예상외의 진범을 지목하고 체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왠지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끝내준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좀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스토리 외적으로는 ‘번역의 아쉬움’을 언급하고 싶은데,
시리즈 초반 세 작품의 번역가가 전부 다른 탓에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들,
즉, 직책과 부서명, 또는 인물들간의 관계나 대화체가 제각각인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이 세 분의 번역가가 이후에도 번갈아 시리즈를 맡은 것으로 아는데,
1년에 한두 편 정도 띄엄띄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연이어 ‘다시 읽기’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의 ‘교통정리’를 위해 편집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제가 읽은 구판만 그런 건지 새 표지의 개정판도 그대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