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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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는 새 이웃인 매슈 부부 집에서 펜싱 대회 트로피를 보곤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거 이웃이던 더스틴 밀러가 살해당한 뒤 똑같은 트로피가 사라졌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

헨은 고민 끝에 매슈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조울증을 앓았던 헨의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헨은 학창시절 무고한 친구를 비난하다가 공격까지 한 전과(?)가 있었던 것.

하지만 헨은 자신의 판단을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실제로 매슈는 살인범이며, 그것을 헨에게만은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는 점.

자신의 실체를 털어놓는 매슈, 하지만 자신을 안 믿는 경찰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는 헨.

어느새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가 되지만, 그로 인해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푹 빠져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된 후로

아낌없이 뺏는 사랑’,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까지 연이어 읽었지만,

왠지 점점 만족감보다 아쉬움이 커졌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 대한 기대감을 버릴 수는 없어서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를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중후반부까지 이야기는 무척 빠르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조울증의 여파로 뭔가에 집착하기만 하면 도무지 헤어날 줄 모르는 판화작가 헨,

새로 둥지를 튼 동네에서 헨과 함께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남편 로이드,

괴물 아버지와 그의 희생양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돼버린 매슈,

그리고 그런 매슈의 실체를 모른 채 커리어우먼으로 삶을 이어가는 아내 미라 등

이웃한 두 부부의 삶은 헨이 매슈를 고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헨이 경찰을 끌어들인 이후로, 또 헨이 매슈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로

그들의 삶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사방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읽는 독자도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게,

분명 이웃집 남자 매슈가 살인범 같은데 경찰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도 않고

오히려 헨의 과거를 들먹이며 정신병자 취급을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인 로이드 역시 조심스럽긴 해도 아내 헨의 추리에 의심스런 눈길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매슈는 자신의 실체를 고백해오니 헨이나 독자나 모두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런 답답함과 긴장감은 이내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런대로 균형을 잡으며 지내온 헨과 로이드 부부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매슈의 아내 미라 역시 조금씩 불온한 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가끔씩 매슈의 집에 들르곤 하는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는 동생 리처드의 존재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거나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듯한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과연 연쇄살인범 매슈의 정체는 제대로 폭로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헨은 어떤 방식으로 매슈를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할 것인가?

헨의 남편과 매슈의 아내는 이 폭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언제라도 사람을 죽일 듯한 매슈의 동생 리처드는 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의문들을 가득 담은 채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는데,

피터 스완슨이라면 차라리 돌직구 같은 엔딩이 더 어울렸을 거란 아쉬움과 함께

왠지 도망치듯 서둘러, 그것도 뻔한 수법으로 막을 내린 듯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도 막판에 갑자기 허물어진 듯 보였고,

사건 역시 앞에 쌓아왔던 것들에 비해 다소 싱겁게 마무리됐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와는 달리 이 결말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는 독자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갈수록 아쉬움이 만족감보다 더 커져왔다고 언급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312호에서는~’보다는 분명히 매력적인 이야기인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기대치에 못 미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언젠가 피터 스완슨이 자신의 장점을 확실히 담아낸 작품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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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여자의 일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김도일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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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기미코와의 만남은 2011년 출간된 변호 측 증인이후 오랜만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뒤 구매를 고려했던 걸 기억하는데

무척 흥미롭고 새로운 설정의 이야기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1934년생이며 1985년에 이미 작고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 역시 1973~1982년의 작품들을 모아 1984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고전까지는 아니어도 세미 고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살인은 여자의 일8편 가운데 첫 번째로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목 자체가 나머지 작품들의 성향을 잘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여자의 살의 또는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죽음 또는 살인이 끼어드는데,

한두 작품을 제외하곤 대부분 어둡고 무겁고 비극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서

5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호감을 느낀 남자의 천박한아내에게 강한 시기심과 살의를 느끼는 베테랑 여자 편집자,

한때 동거했던 남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낡은 아파트에 사는 50살 목전의 전직 매춘부,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남편과의 불륜을 자랑하는 유한부인에게 살의를 품는 평범한 주부 등

그야말로 부적절한 욕망으로 똘똘 뭉친 여성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지식한 남편 몰래 1년에 한두 번 하룻밤의 화려한 외도를 저지르는 여자,

딸에 이어 손녀까지 똑같은 운명에 빠지자 기가 막힐 뿐인 노파,

도둑질하던 자신을 체포한 보안요원에게 연정을 품은 끝에 새 출발을 결심하는 여자 등

이런저런 특별한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집필 시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나 사건 모두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드는데

빠르고 복잡한 이야기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기교나 작위적인 설정 없이 돌직구처럼 살의와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말초적 흥미만 노리는 듯한 요즘의 일부 작품들보다 훨씬 더 품격 있어 보입니다.

 

책 후반에 실린 해설을 보다가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P.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번역을 고이즈미 기미코가 맡았다는 점인데,

어쩌면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인 탐정을 그린 작품을 번역하던 그녀가

역설적이게도 살인은 여자의 일이라는 제목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니 고이즈미 기미코의 작품은 모두 세 작품뿐입니다.

변호 측 증인과 이 작품 외에 여러 작가가 참여한 기묘한 신혼여행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10년도 전에 읽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새삼 고이즈미 기미코가 집필한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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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뮤직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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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뮤직해리 보슈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코넬리는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출간 이후

잭 매커보이가 주인공인 시인을 먼저 발표하면서 해리 보슈에게 휴식시간을 줬습니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순전히 제 멋대로의 상상일 뿐이지만,

라스트 코요테에서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33년 전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냈지만

보슈는 조금도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회한에 빠졌는데,

그런 상태에서 또 다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드는 보슈를 보는 일은

쓰는 작가나 읽는 독자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18개월만에 다시 할리우드 경찰서로 돌아온 보슈는

(전직 상관 파운즈와는 180도 다른) 새로운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

미워할 수 없는 파트너 제리 에드거, 그리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키즈민 라이더와 함께

의욕적으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듭니다. 그것도 팀장이라는 직책을 떠안고 말이죠.

 

보슈의 복귀작은 롤스로이스 트렁크에서 발견된 한 백인의 피살 사건입니다.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도 발견되고 사건 정황도 금세 밝혀져 쉽게 해결될 듯 보였지만

보슈는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위화감을 연이어 느낍니다.

조직폭력단이 개입됐음이 분명한데 정작 조직범죄수사계에서는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자마자 FBI와 감찰계가 보슈의 부적절한 수사를 조사하고 나섭니다.

피살된 남자의 행적을 쫓아 라스베이거스까지 갔지만 관할서의 태도도 어딘가 의심스럽고,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는 기색이 역력한 피살자의 아내 역시 수상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보슈가 다뤄온 사건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으로 보였던 초반부를 넘어가면서

사건은 점점 규모와 깊이가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보슈는 내부의 적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위협의 단초를 제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5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 엘리노어 위시입니다.

(엘리노어는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의 연인이자 악연이었던 인물입니다.)

경찰 규정상 중죄인과의 교제가 금지된 탓에 엘리노어와의 만남은 보슈의 발목을 잡습니다.

문제는 이 발목잡기가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는 듯한 타이밍에 딱 맞춰 벌어졌다는 점인데,

그 때문에 보슈는 또 다시 수사를 중지당하고 내근을 지시받는 처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엘리노어는 이 작품에서 단지 오랜만에 재회한 보슈의 연인이상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녀는 보슈가 맡은 사건의 배후 또는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그녀 자신과 보슈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로맨스 역시 눈요깃거리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건 못잖게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끕니다.

 

해리 보슈를 규정하는 세 가지 중요한 코드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 ‘베트남전쟁’, 그리고 내부의 적들입니다.

트렁크 뮤직을 읽는 내내 전작들에 비해 꽤 건조하고 하드보일드 냄새가 진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세 가지 코드 중 어머니베트남전쟁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두 코드는 보슈를 고뇌와 악몽에 빠뜨리곤 해서 매 작품마다 그에 관한 묘사가 많았는데

내부의 적들만 강조된 이번 작품에선 그런 묘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라스트 코요테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보슈의 고뇌와 악몽이 사라진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살과 기름기 없이 뼈대만 튼튼한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건에 충실한 유능한 형사 보슈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내부의 적들을 향한 보슈의 통쾌한 보복은 언제나처럼 짜릿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엘리노어뿐 아니라 보슈 주변에 등장한 두 명의 여성 캐릭터도 눈길을 끕니다.

꽉 막힌 관료였던 파운즈와 달리 합리적이고 융통성 풍부한 새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와

그녀가 점찍어 할리우드 경찰서로 데려온 유망한 신예 형사 키즈민 라이더가 그들인데,

보슈를 향한 내부의 적들의 공격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거세진 와중에도

두 사람은 보슈를 지키고 돕기 위해 자신들만의 소신을 갖고 수사에 임합니다.

키즈민 라이더가 이후 작품에서도 간간이 이름을 본 기억이 나는 반면,

그레이스 빌리츠의 이름은 다소 생소하게 들렸는데 이후의 행보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정작 보슈가 맡은 살인사건 수사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못했는데,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얽힌데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순 살인사건에서 시작됐지만 복잡미묘하게 확장되는 이야기의 참맛은 직접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연인 엘리노어와의 애틋하고 위태로운 로맨스의 향방도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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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하이츠의 신 1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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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작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에 영향을 받은 집단 자살사건이 벌어지고, 이 사건으로 언론과 여론은 고키와 고키의 소설에 비난을 쏟아 붇는다. 절망감에 빠져 펜을 놓았던 고키는 한 신문에 실린 독자의 편지를 계기로 부활에 성공한다. 그 편지를 보낸 건 고키의 천사로 불린 익명의 소녀로, 그에 대한 유일한 옹호의 메시지였다.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후, 한때 도쿄의 전통여관이었던 낡은 3층 건물 슬로하이츠에는 집주인인 각본가 아카바네 다마키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지요다 고키가 모여 살고 있다. 어느 날, 미소녀 가가미 리리아가 나타나자 모두 그녀를 10년 전 고키의 천사라 추측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일본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인데다 인터넷서점에서 그렇게 장르를 구분해놓았고, 첫눈에 띈 카피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그날의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소노미야 쇼고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자살 게임. 참가자 열다섯 명은 전원 사망했다.”라서 아무런 의심(?)없이 제가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탓에, 1권 중반부까지만 해도 도대체 미스터리는 언제 시작되는 거지?”라며, 슬로하이츠 멤버들의 크고 작은 일상만을 다루는 이야기에 살짝 의구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권까지 모두 읽고 난 지금, 그 어느 매력적인 미스터리 이상의 충족감을 느낍니다.

 

엄밀히 말하면, ‘슬로하이츠의 신은 미스터리 장르로 구분하긴 어려운 작품입니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완성하려는 젊은 창작가들의, 치열하기 때문에 더없이 눈부신 날들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가 이 작품의 진짜 화두이자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부화조차 못한, 아니, 부화할 가능성조차 불투명한 지망생들이 서로에게 때론 따끔한 채찍을, 때론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러면서 밝음과 어두움을 번갈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는 이야기, 또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과거 때문에 아프기도 웃기도 사랑하게 되기도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 이것이 슬로하이츠의 신의 진면목입니다.

 

25살의 나이에 일본에서 각광받는 각본가가 된 집주인 아카바네 다마키와 엄청난 사건을 딛고 다시 인기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지요다 고키를 제외하곤 슬로하이츠의 멤버들은 아직 채 무엇이 되지 못한 20대 중반 지망생들에 불과합니다. 아동만화가를 꿈꾸지만 너무 착한 이야기만 만드는 탓에 늘 편집자에게 퇴짜 맞는 가노 소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주장감정도 없는 기획만 내놓는다고 비판 받는 나가노 마사요시, 화가를 꿈꾸지만 의존적인 성격 탓에 그림도, 일상도 엉망이 된 모리나가 스미레, 누구보다 다마키를 존중하지만 그녀의 성공을 견디다 못해 슬로하이츠를 뛰쳐나간 엔야 등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앞에 툭 던져진 다양한 군상의 20대들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지 치열하고 눈부신 청춘들의 이야기란 뜻은 아닙니다. 앞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누가? ?’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현실적인 미스터리들이 있는가 하면, 막판에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덩치는 작지만 폭발력은 엄청난 미스터리도 포함돼있습니다.

 

사실, 이 미스터리들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독자는 그보다 어떻게그 미스터리의 진실들이 풀리게 될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츠지무라 미즈키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데 통쾌했으면 좋겠다, 싶은 지점에선 여지없이 속 시원한 장면들이 등장하고, 안쓰러워 죽겠다, 싶은 지점에선 그에 어울리는 따뜻한 해법이 등장하는가 하면, 예측 가능하고 신파 스타일로 이야기가 풀리는 대목에서조차 눈가를 뜨끈하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작품이 많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고, 이 작품을 인생작이라고 말한 일본 독자들의 평가에도 저절로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장황하게 호의적인 서평을 쓰고도 기어이 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분량때문입니다. 일본 작품들 가운데 연재물인 경우 단행본으로 묶으면 분량이 과해지곤 하는데, ‘슬로하이츠의 신도 그런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2권 합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이야기의 규모나 서사에 비해 다소 길고 넘쳐 보인 게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판타지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슬로하이츠 멤버들은 시고 떫고 씁쓸한 여정을 거쳐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의 지망생들이 이들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픽션 대신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란 말밖엔 해줄 수가 없습니다. 판타지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힘과 미덕을 지녔다면, 또 그 힘과 미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힘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정성껏, 천천히, 시간을 들여란 뜻을 담아 집 이름을 슬로하이츠로 삼은 다마키의 마음 역시 그 힘과 미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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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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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 기획기사 전문기자인 잭 매커보이는 경찰인 쌍둥이 형 션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충격에 빠진 가운데 잭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경찰 자살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형의 사인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물론

다른 경찰관의 죽음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되자 연쇄살인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자료를 모으던 잭은

갑자기 끼어든 FBI로부터 자료조사는 물론 취재와 보도마저 중지하라는 요구를 받지만,

피해자의 동생이자 첫 단서를 잡은 기자라는 입장을 앞세워 끝내 FBI 수사팀에 합류한 뒤

수석요원 레이첼 월링과 파트너가 되어 시인으로 불리는 연쇄살인범 체포와 함께

형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길고 고통스런 여정을 시작합니다.

 

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첫 번째 “+@”시인입니다.

(이어질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들이 들어간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의 몇몇 작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인의 경우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와 레이철 월링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잭 맥커보이는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이 작품의 후속편이자)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합니다.

레이철 월링은 나중에 보슈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외형만 놓고 보면 잭 매커보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지만

동시에 해리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링크?)

 

형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잭의 여정은 실은 형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인사건 전문기자라는 캐릭터 덕분에 잭은 자료조사는 물론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갖췄고,

FBI에 합류한 뒤로도 그들의 고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행보를 고집스레 이어갑니다.

말싸움으론 으뜸이고, 적당한 반골 기질과 함께 적절한 타협 타이밍도 아는 인물입니다.

다행히도(?) 뛰어난 몸싸움 능력까지 지닌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스릴러 주인공들이 그렇듯) 잭은 이런저런 기구한 사연들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든 누이의 죽음과 그 이후 벽을 친 듯 소원해진 가족 관계,

예나 지금이나 상처받을 일이 두려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괴감 어린 소심함,

형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면 특종을 포기해야만 하는 기자로서의 딜레마 등이 그것인데,

굳이 마이클 코넬리의 캐릭터들로 비교하면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요?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도 않고, 어딘가 뺀질뺀질 날라리(?) 같지도 않은 게 잭의 특징입니다.

 

FBI에 합류하긴 했어도 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잭은 대놓고 수사를 할 수는 없는 처지인데,

그래선지 파트너인 레이철 월링의 역할이 잭 못잖게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액션에도 능하고 당차면서도 매력적인 FBI 행동과학국 요원 레이철의 카리스마는

남성미라는 면에서는 다소 약해 보이는 잭의 캐릭터와 희한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데,

마치 좌충우돌 후 로맨스라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을 위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이철이 잭과의 로맨스에 방점을 둔 인물이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FBI 특수팀장이 수석요원으로 삼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대단한 수준입니다.

속이 텅 빈 여자라는 전 남편의 비난대로 인간미만 놓고 보면 다소 딱딱해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FBI 요원이 갖춰야 할 미덕은 모두 갖춘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합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동성애자로 보이는 위험한 인물이 도피극을 벌이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네트워크 속에서 끔찍한 거래를 하는 모습이 초반부터 그려집니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범인을 독자에게 노출시킨다는 건

누가 봐도 작가에게 자신만만하고 든든한 히든카드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막판 100여 페이지에 걸쳐 거듭되는 반전은

(다소 복잡해 보이긴 해도) 조금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끔 폭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미 범인이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누군가 숨어있다는 긴장감을 떨칠 수 없는 덕분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이 작품엔 시리즈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무엇보다 도주 중인 범인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한 LA타임스의 기사가 눈에 먼저 띄었는데,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직전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에서 보슈와 인연을 맺은 케이샤 러셀입니다.

, 막판에 등장하는 LA지진 주택역시 라스트 코요테에서 지진으로 큰 손상을 입은 뒤

결국 철거되고 만 보슈의 집을 연상시켜서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보슈가 근무하는 할리우드 경찰서가 잠깐 등장해서 반가웠는데

혹시나 보슈가(또는 그의 동료라도) 잠깐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시인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마이클 코넬리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중반부쯤 살짝 분량이 과했다는 느낌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 외엔 (오랜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매력덩어리인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후속편인 시인의 계곡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그 욕심을 꾹 참고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다음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강렬하게 등장했던 보슈의 여인엘리노어 위시가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시리즈 5트렁크 뮤직입니다.

과연 엘리노어가 어떤 모습으로 보슈 앞에 다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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