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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살인사건 기획기사 전문기자인 잭 매커보이는 경찰인 쌍둥이 형 션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충격에 빠진 가운데 잭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경찰 자살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형의 사인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물론
다른 경찰관의 죽음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되자 연쇄살인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자료를 모으던 잭은
갑자기 끼어든 FBI로부터 자료조사는 물론 취재와 보도마저 중지하라는 요구를 받지만,
‘피해자의 동생’이자 ‘첫 단서를 잡은 기자’라는 입장을 앞세워 끝내 FBI 수사팀에 합류한 뒤
수석요원 레이첼 월링과 파트너가 되어 ‘시인’으로 불리는 연쇄살인범 체포와 함께
형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길고 고통스런 여정을 시작합니다.
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첫 번째 “+@”인 ‘시인’입니다.
(이어질 “+@”는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들이 들어간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의 몇몇 작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인’의 경우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와 레이철 월링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잭 맥커보이는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과
(이 작품의 후속편이자)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합니다.
레이철 월링은 나중에 보슈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외형만 놓고 보면 ‘잭 매커보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지만
동시에 ‘해리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링크?)
형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잭의 여정은 실은 형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인사건 전문기자라는 캐릭터 덕분에 잭은 자료조사는 물론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갖췄고,
FBI에 합류한 뒤로도 그들의 고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행보를 고집스레 이어갑니다.
말싸움으론 으뜸이고, 적당한 반골 기질과 함께 적절한 타협 타이밍도 아는 인물입니다.
다행히도(?) 뛰어난 몸싸움 능력까지 지닌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스릴러 주인공들이 그렇듯) 잭은 이런저런 기구한 사연들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든 누이의 죽음과 그 이후 벽을 친 듯 소원해진 가족 관계,
예나 지금이나 상처받을 일이 두려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괴감 어린 소심함,
형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면 특종을 포기해야만 하는 기자로서의 딜레마 등이 그것인데,
굳이 마이클 코넬리의 캐릭터들로 비교하면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요?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도 않고, 어딘가 뺀질뺀질 날라리(?) 같지도 않은 게 잭의 특징입니다.
FBI에 합류하긴 했어도 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잭은 대놓고 수사를 할 수는 없는 처지인데,
그래선지 파트너인 레이철 월링의 역할이 잭 못잖게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액션에도 능하고 당차면서도 매력적인 FBI 행동과학국 요원 레이철의 카리스마는
‘남성미’라는 면에서는 다소 약해 보이는 잭의 캐릭터와 희한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데,
마치 ‘좌충우돌 후 로맨스’라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을 위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이철이 잭과의 로맨스에 방점을 둔 인물이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FBI 특수팀장이 수석요원으로 삼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대단한 수준입니다.
‘속이 텅 빈 여자’라는 전 남편의 비난대로 인간미만 놓고 보면 다소 딱딱해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FBI 요원이 갖춰야 할 미덕은 모두 갖춘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합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동성애자로 보이는 위험한 인물이 도피극을 벌이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네트워크 속에서 끔찍한 거래를 하는 모습이 초반부터 그려집니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범인’을 독자에게 노출시킨다는 건
누가 봐도 작가에게 자신만만하고 든든한 ‘히든카드’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막판 100여 페이지에 걸쳐 거듭되는 반전은
(다소 복잡해 보이긴 해도) 조금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끔 폭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미 ‘범인’이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누군가 숨어있다는 긴장감을 떨칠 수 없는 덕분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이 작품엔 시리즈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무엇보다 도주 중인 ‘범인’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한 LA타임스의 기사가 눈에 먼저 띄었는데,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직전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에서 보슈와 인연을 맺은 케이샤 러셀입니다.
또, 막판에 등장하는 LA의 ‘지진 주택’ 역시 ‘라스트 코요테’에서 지진으로 큰 손상을 입은 뒤
결국 철거되고 만 보슈의 집을 연상시켜서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보슈가 근무하는 할리우드 경찰서가 잠깐 등장해서 반가웠는데
혹시나 보슈가(또는 그의 동료라도) 잠깐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마이클 코넬리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중반부쯤 살짝 분량이 과했다는 느낌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 외엔 (오랜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매력덩어리인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후속편인 ‘시인의 계곡’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그 욕심을 꾹 참고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다음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강렬하게 등장했던 ‘보슈의 여인’ 엘리노어 위시가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시리즈 5편 ‘트렁크 뮤직’입니다.
과연 엘리노어가 어떤 모습으로 보슈 앞에 다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