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금색기계’, ‘야시’, ‘멸망의 정원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쓰네카와 고타로입니다.

각각 에도시대, 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이하고 오묘한 판타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온 몸이 금색으로 뒤덮인 신비한 존재(‘금색기계’),

내밀한 연결통로로 드나들 수 있는, 요괴와 죽은 자들이 활개 치는 이계(‘야시’),

지구를 감싼 해파리 모양의 공포의 미지의 존재속에 자리한 평온한 마을(‘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시공간과 캐릭터는

단순한 판타지 이상의 특별하고 고혹적인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을의 감옥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이런 마력을 담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무한 반복되는 117일이란 날짜에 갇혀버린 여대생 아이짱(‘117’),

오래전부터 신역(神域)으로 불리며 스스로 일본 전역을 옮겨다니는 기괴한 초가집(‘신의 집’),

환술(마법) 능력을 타고난 소녀가 스스로 그 능력에서 도망치는 이야기(‘환술을 쓰는 소녀’)

역시 쓰네카와 고타로다운 독특하고 신비한 판타지가 펼쳐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수록된 세 편의 일관된 주제는 감옥’, 갇힘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각 시간, 공간, 환상에 갇히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한 반복되는 117일에 갇힌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난 뒤 어떻게든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 기괴한 초가집에 갇힌

다른 희생양을 끌어들여서라도 초가집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한때 자신이 지닌 엄청난 환술 능력에 집착했던 소녀는 스스로 그 능력을 버리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하며 감금당한 채 억지로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세 편에 대한 느낌은 조금씩 달랐는데,

‘117은 타임루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건을 맛볼 수 있었지만

깜짝 스토리나 반전보다는 존재론적 메시지가 강조돼서 조금은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환술을 쓰는 소녀는 읽는 내내 환상 속에 빠진 듯 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단편보다는 중편 정도로 확장됐다면 좀더 친절한이야기가 됐을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너무 많은 생략과 비약 때문에 줄거리, 캐릭터,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난감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신의 집은 쓰네카와 고타로 특유의 호러판타지 서사가 반짝반짝 빛난 작품인데,

3일마다 스스로 일본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신비한 초가집 설정도 매력적이고,

그 안에 갇힌 뒤 분노-체념-순응으로 이어지는 의 변화 과정이라든가

초가집과 연관된 실종과 살인 등 강력사건의 발생이란 설정도 흥미롭게 읽혔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실과 연결돼있는 이계를 다룬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야시와도 일맥상통하는 설정이라

개인적으로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좀더 끌렸습니다.

 

솔직하게 총평을 하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인데,

아무래도 판타지의 농도나 깊이가 금색기계야시에 비해 얕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 세 편 모두 공통적으로 단편보다는 좀더 긴 분량의 중편에 어울리는 소재들인데

실제로는 요약된 이야기처럼 생략과 비약이 많았다는 점도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입니다.

어쩌면 분량 자체가 판타지의 농도와 깊이를 얕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색기계야시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작품을 읽고 쓰네카와 고타로에 대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텐데,

부디 두 작품을 통해 쓰네카와 고타로의 진면목을 만끽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이 좋은 성과를 얻어서 절판된 초제천둥의 계절도 재출간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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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7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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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설정 가운데 출판사 소개글에는 없는 한 가지가 포함돼있는 서평입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그 설정 없이는 서평이 불가능해서 포함시킨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이지만,

실은 테리 매케일렙 시리즈’ 2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투톱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6년 전 보슈가 담당한 매춘부 살인사건의 용의자였지만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 한 남자가

기이하고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맡은 LA보안관서의 제이 윈스턴은 수사가 벽에 부딪히자

전직 FBI요원이지만 지금은 새로 꾸민 가족과 섬에서 지내고 있는 매케일렙을 찾아갑니다.

블러드 워크이후 3년 동안 평범한 시민이 되어 낚싯배를 운영해온 매케일렙은

오랜만에 접한 살인사건에 흥분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온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블러드 워크의 비극이 맺어준 아내 그래시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케일렙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지만 이내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자신이 쫓은 단서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은 다름 아닌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슈는 여배우 교살 혐의로 체포된 영화감독의 재판에 검사팀 일원으로 참여중입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데다 피고인인 영화감독의 또 다른 살인혐의까지 밝혀내려는 상황이라

보슈는 재판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형국이지만,

매케일렙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심각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습니다.

 

일일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매케일렙의 수사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보슈는 오히려 ‘Also featuring’에 가까운 역할로 등장합니다.

물론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보슈와 매케일렙의 사건은 접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의 수사는 짜릿한 반전과 함께 일심동체 같은 활약상을 펼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정에 매어있는 보슈가 동분서주하며 활약하기에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이 작품은 사건만 놓고 보면 전작들에 비해 꽤 단순한 편입니다.

보슈를 범인으로 여겼던 매케일렙이 다시 제대로 된 수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슈 역시 매케일렙을 도와 자신의 혐의를 푸는 것은 물론

진범과 진실 찾기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대로 어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보슈에 대한 프로파일링 서류에 매케일렙은 밤보다 짙은 어둠 = 보슈라고 적습니다.

함께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적이 있는데다

보슈의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안으로 감춘 내면을 파악한 매케일렙은

보슈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의 어둠이 법망을 빠져나간 용의자를 직접 응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그리고 그 어둠의 근원 중 하나는 매춘부였던 어머니가 살해당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그의 어둠이 더 짙고 깊어지기 전에 자신이 그를 체포해야 되는 것 아닐까, 라는,

한편으론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싶지 않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엔 유독 어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모든 악이 집결해있는 듯한 LA어둠과 함께

보슈의 이름의 기원인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 속 어둠도 자주 언급되고,

보슈의 어둠을 뒤쫓는 매케일렙 본인 마음속의 어둠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래서인지, 속도감과 긴장감으로 충만한 스릴러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와 내면 묘사에 충실한 느리고 어두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도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매케일렙의 고뇌는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와 같은 맥락인데

이 두 문장은 이번 작품 속 보슈와 매케일렙의 내면을 잘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매케일렙이 보슈를 용의자로 꼽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입니다.

이미 그의 그림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탓에 그저 잔혹, 엽기, 흉포함이라는 속된 느낌밖엔 못 받았지만,

지상 세계의 방탕함과 폭력을 끔찍한 디테일로 표현한 그의 그림에 대해

한번쯤은 책으로든 강의로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가 몇몇 장면에 등장하는 점인데,

그는 보슈가 참여한 여배우 교살사건 재판을 취재하면서

보슈는 물론 과거 시인에서 잠깐 만난(것으로 설정된) 매케일렙과도 재회하게 됩니다.

아쉬운 건, 매커보이의 캐릭터가 특종에 목을 맨 삼류 잡지 기자처럼 설정된 탓에

읽는 내내 깐족대고 얄미운, 그래서 한 대 패주고 싶은 나쁜 기자처럼 보인 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만 보면 전작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오다 보니

보슈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던 보슈의 고뇌가 라스트 코요테로 일단락된 뒤

이어진 트렁크 뮤직앤젤스 플라이트가 사건에 집중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은데,

모든 건 제 멋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그런 면에서 제겐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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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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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무 정보도 없이 띠지나 뒷표지도 안 보고 본문부터 읽어가던 중에

1/3쯤 된 지점에서 갑자기 !”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이 작품의 주인공 나츠메 노부히토가

작년에 출간된 단편집 형사의 눈빛의 주인공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작품이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설명은 없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음에도 왜 그에 관한 카피가 한 줄도 없을까, 무척 궁금했고,

본문에서도 나츠메에 대한 좀더 상세한 소개가 없어서 한편으로 아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다소 특이한 제목이라 다 읽고 확인해봤는데 원제 그대로 번역된 제목이었습니다.

묘한 제목의 뉘앙스 때문에 처음엔 밀실 트릭이나 본격미스터리가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주력하는 야쿠마루 가쿠가 갑자기 작풍을 틀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대학병원 외과의사인 스가 쿠니하루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됩니다.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그가 수치심과 좌절감에 자살했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그의 성추행혐의를 조사했던 검사 키요마사는 타살 가능성을 엿보고 재조사에 나섭니다.

한편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나츠메는 막내 여형사 아다치 료코와 함께

행방불명된 의대 입시학원생 아사카와 미키오의 행방을 찾던 중

키요마사 검사의 호출을 받곤 두 사건이 한 가닥으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가가 혹시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를 뒤집어쓴 것인지, 또 정말 타살된 게 맞는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스가를 그토록 증오했던 것인지,

, 행방불명된 미키오는 스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돼있는 것인지,

검사 키요마사와 형사 나츠메는 각 의문에 대해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은 채 수사에 임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면 출판사가 워낙 인색하게(?) 작품 소개를 하고 있는데,

400페이지 안팎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나 서사가 꽤 방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있는 대목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줄거리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이 작품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심과 추리를 100% 확신하며 돌직구처럼 용의자를 밀어붙이는 검사 키요마사와 달리

형사 나츠메는 어딘가 한량 같기도 하고,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검사와 형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사를 펼치다 보니

가끔은 이 두 인물의 선의의 대결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어쩌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츠메 & 키요마사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검사 키요마사는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진 나머지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고,

형사 나츠메는 천재 스타일의 과도한 비약적 추리를 펼친 탓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 일본에선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검사가 아랫사람 부리듯 관할서 형사를 다루는 대목이나

바쁜 와중에 상관의 지시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사건을 골라 수사를 하는 나츠메의 태도는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치곤 어딘가 현실감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강했습니다.

 

, 기름기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마치 줄거리 요약처럼 읽힌 건조하고 단편적인 문장들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여러 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속도감은 엄청나게 빨라졌지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여지가 너무 부족했던 나머지

다 읽고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이라든가 비극의 여운을 맛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형사의 눈빛에서 설정된 나츠메의 캐릭터가 일관성 없어 보인 점도 아쉬웠는데

묻지마 범죄로 딸을 잃은 뒤 남들보다 한참 많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비극적 이력도,

그런 탓에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사연도,

그래서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고 고백하던 그의 애잔한 내면도

이 작품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야쿠마루 가쿠의 팬임에도 중반까지만 해도 별 세 개만 줄 생각이었지만,

중후반부터 몰아친 그의 특유의 반전과 설계 덕분에 가까스로(?) 별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사실, 서평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용 소개는 별로 없고, 안 읽은 독자에게 의문만 잔뜩 던진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영 아니라고 비추하기도 애매한 작품이라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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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배틀 케이스릴러
주영하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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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7청계산장의 재판’(박은우)을 시작으로 곤충’(장민혜), ‘붉은 열대어’(김나영),

그리고 현장검증’(이종관)까지 네 편의 케이스릴러를 읽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을 찾아보니 11월에 출간될 언노운 피플’(김나영)19번째 케이스릴러인데,

5년도 안 된 시점에 낸 기대 이상의 파이팅에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론 행복배틀이 겨우 다섯 번째 만난 케이스릴러라 민망하지만,

한국 장르물에 이처럼 꾸준히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배틀은 기대 이상의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엔 “SNS에서 행복배틀을 겨루던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 살인사건이라는 카피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며 살짝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SNS를 하지 않는데다 스릴러 소재로서 SNS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살인사건 피해자가 부유한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란 점도 호기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게 돼있는 책은 어떻게든 인연이 닿게 되는 건지 어찌어찌 행복배틀을 읽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하게 됐습니다.

 

행복배틀은 독자에 따라 무척 가벼운 이야기가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는 제목이지만

사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오랜 상처와 악몽에 시달려 온 불행한 사람들이거나

그 불행을 잊거나 보상받기 위해 실재하지도 않는 행복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행복을 파괴함으로써 희열을 맛보는 칼만 안 든 사이코패스들입니다.

강남 부유층들의 얄팍한 SNS 놀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예상했던 탓에

초반부터 묵직하게 전개되는 비극에 사뭇 놀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17년 전 3총사처럼 어울려 지냈던 미호, 유진, 세경이 겪은 참혹한 비극이고,

또 하나는 현재 강남 부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 사건 미스터리입니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유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미호는 스스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그와 함께 17년 전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3총사의 비극은 실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낼 수도 있었던 작은 사건에서 잉태됐습니다.

반항기 섞인 불장난, 엉겁결의 거짓말 한마디, 그리고 사악한 악의 등

어디선가 분명 끊어낼 수 있었던 작은 사건들이 탄탄한 고리에 연결된 듯 연이어 벌어졌고

그로 인해 3총사의 짧았던 행복한 시간들은 17년 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행복배틀이라는, 유치하지만 악의로 가득 차있는 부유층들의 SNS 놀이는

더 이상 물질적인 자랑거리가 무의미해진 자들이 벌인 행복 자랑질이 그 실체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타인에게 무한한 시기와 질투심을 느낀 자들은

타인의 삶을 흠집 내거나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더 큰 희열을 만끽했고,

그것은 더 이상 장난 같은 배틀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살상극을 초래하고 맙니다.

유진의 죽음을 조사하던 미호가 발견한 부유층의 시궁창 같은 SNS 놀이 속에는

행복 따위와는 무관한,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살의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살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경찰이나 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17년에 걸친 불행에 마음 아파하면서, 또 사악한 자들의 악의에 분노하면서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설계했는지 여러 번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에서 별 0.5개를 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종 반전 때문입니다.

 

이 반전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없었더라면, 아니, 없었어야 이 작품의 여운을 길게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 사족과도 같은 최종 반전을 설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억지스러웠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작가의 과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주영하라는 한국 장르물 작가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읽는 내내 페이지는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술술 넘어갔고,

설계와 문장 모두 탄탄함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속작 소식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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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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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제키 다이의 데뷔작이자 에도가와 란포상 수장작인 재회는 꽤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후속작을 기다렸는데,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가 출간되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는 같은 해(2019) 출간된 루팡의 딸과 함께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만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중도 포기할 정도로 아쉬움이 많았고,

그런 탓에 데뷔작=최고작?’이라는 의구심과 함께 인연을 끊어야 할지 고민한 게 사실인데,

주위에서 그녀들의 범죄에 대한 호평을 듣곤 딱 한 번만 더!”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심하게 훼손된 30대 여자의 사체가 이토 시 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내 그녀의 신원은 진노 유카리로 밝혀지는데,

그녀의 남편은 부자에, 미남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인 진노 도모아키입니다.

자살로 종결된 뒤 장례와 화장까지 마친 직후 타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남편인 도모아키는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대학 후배와 불륜 중이던 도모아키가 유카리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데다

그를 궁지에 빠뜨릴 목격자와 단서가 연이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사의 종결을 앞두고 위화감을 느낀 도쿄의 형사 우에하라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지점에서부터 재조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 속의 범죄는 그녀들의 몫입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금수저 진노 도모아키의 주변을 맴돌던 인물들입니다.

그의 아내 또는 불륜녀 또는 연인이()그녀들

때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살의를 느끼기도 하는 묘한 관계로 묶여있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과연 합심해서 도모아키를 향한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녀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도모아키를 놓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서로를 향해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 범죄를 통해 얻는 이익은 뭘까요?

 

이야기의 배경은 1988~1989년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으며

이왕이면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조건 좋은 남자를 잡으려는욕망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선택한 여자는 하녀취급만 받게 되는 불행에 빠지고,

그런 하녀에게 식상한 남자는 당연한 듯 불륜의 상대를 찾아 나섭니다.

불륜녀는 그 남자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 남자가 가진 부와 명예에 탐닉한 나머지

남자의 아내가 불행해지기만을 바라거나 직접 손을 쓰고 싶어 합니다.

요약하면, 20세기의 전형적인 통속극 속 가족관계와 남녀관계가 총출동했다고 할까요?

이런 배경 속에서 도모아키 주변을 맴돌던 그녀들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인상은 가볍고, 쉽고, 얕고, 무미건조하다.”입니다.

그녀들하나하나는 모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채워지기 어려운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 상처와 욕망들은 몇 번씩 거듭 강조되긴 하지만 통 이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뻔한 설정과 기계적인 강조 때문에 정작 감정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미스터리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다음 전개가 쉽게 엿보인 탓에

긴장감도, 반전의 맛도, 씁쓸한 여운이나 속 시원한 마무리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작품을 딱히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에 통용됐던 가부장적, 여성비하 인식에 대한 비판 역시 흐지부지된 듯 해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덧붙이면, 수사를 맡은 형사들에게서도 특별한 사명감이나 운명같은 걸 전혀 못 느꼈는데,

이 역시 그들에게 부여된 미션 대부분이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루팡의 딸의 아쉬움은 극복한 셈인데

데뷔작인 재회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작가에 대한 기대감은 충족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읽은 터라 책을 덮은 지금 뭔가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정도가 지금의 진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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