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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7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 중요한 설정 가운데 출판사 소개글에는 없는 한 가지가 포함돼있는 서평입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그 설정 없이는 서평이 불가능해서 포함시킨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 작품은 공식적으로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이지만,
실은 ‘테리 매케일렙 시리즈’ 2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투톱 주인공이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6년 전 보슈가 담당한 매춘부 살인사건의 용의자였지만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 한 남자가
기이하고 끔찍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사건을 맡은 LA보안관서의 제이 윈스턴은 수사가 벽에 부딪히자
전직 FBI요원이지만 지금은 새로 꾸민 가족과 섬에서 지내고 있는 매케일렙을 찾아갑니다.
‘블러드 워크’ 이후 3년 동안 평범한 시민이 되어 낚싯배를 운영해온 매케일렙은
오랜만에 접한 살인사건에 흥분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온 본능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블러드 워크’의 비극이 맺어준 아내 그래시엘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케일렙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지만 이내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자신이 쫓은 단서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은 다름 아닌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슈는 여배우 교살 혐의로 체포된 영화감독의 재판에 검사팀 일원으로 참여중입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데다 피고인인 영화감독의 또 다른 살인혐의까지 밝혀내려는 상황이라
보슈는 재판에만 몰두해도 모자란 형국이지만,
매케일렙과의 만남으로 인해 자신이 심각할 만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습니다.
일일이 따져보진 않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매케일렙의 수사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보슈는 오히려 ‘Also featuring’에 가까운 역할로 등장합니다.
물론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보슈와 매케일렙의 사건은 접점을 갖게 되고
두 사람의 수사는 짜릿한 반전과 함께 일심동체 같은 활약상을 펼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법정에 매어있는 보슈가 동분서주하며 활약하기에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합니다.
사실, 다 읽고 복기해보면 이 작품은 사건만 놓고 보면 전작들에 비해 꽤 단순한 편입니다.
보슈를 범인으로 여겼던 매케일렙이 다시 제대로 된 수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보슈 역시 매케일렙을 도와 자신의 혐의를 푸는 것은 물론
진범과 진실 찾기에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대로 ‘어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보슈에 대한 프로파일링 서류에 매케일렙은 “밤보다 짙은 어둠 = 보슈”라고 적습니다.
함께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적이 있는데다
보슈의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과 ‘안으로 감춘 내면’을 파악한 매케일렙은
보슈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어쩌면 그의 ‘어둠’이 법망을 빠져나간 용의자를 직접 응징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그리고 그 ‘어둠’의 근원 중 하나는 매춘부였던 어머니가 살해당한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 그의 ‘어둠’이 더 짙고 깊어지기 전에 자신이 그를 체포해야 되는 것 아닐까, 라는,
한편으론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싶지 않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입니다.
덕분에 이 작품엔 유독 ‘어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마치 모든 악이 집결해있는 듯한 LA의 ‘어둠’과 함께
보슈의 이름의 기원인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 속 ‘어둠’도 자주 언급되고,
보슈의 ‘어둠’을 뒤쫓는 매케일렙 본인 마음속의 ‘어둠’도 수시로 눈에 띕니다.
그래서인지, 속도감과 긴장감으로 충만한 스릴러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와 내면 묘사에 충실한 느리고 어두운 스릴러에 더 가깝게 보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도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매케일렙의 고뇌는
니체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와 같은 맥락인데
이 두 문장은 이번 작품 속 보슈와 매케일렙의 내면을 잘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매케일렙이 보슈를 용의자로 꼽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에 관한 묘사들입니다.
이미 그의 그림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탓에 그저 잔혹, 엽기, 흉포함이라는 속된 느낌밖엔 못 받았지만,
지상 세계의 방탕함과 폭력을 끔찍한 디테일로 표현한 그의 그림에 대해
한번쯤은 책으로든 강의로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가 몇몇 장면에 등장하는 점인데,
그는 보슈가 참여한 여배우 교살사건 재판을 취재하면서
보슈는 물론 과거 ‘시인’에서 잠깐 만난(것으로 설정된) 매케일렙과도 재회하게 됩니다.
아쉬운 건, 매커보이의 캐릭터가 특종에 목을 맨 삼류 잡지 기자처럼 설정된 탓에
읽는 내내 ‘깐족대고 얄미운, 그래서 한 대 패주고 싶은 나쁜 기자’처럼 보인 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만 보면 전작들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오다 보니
보슈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던 보슈의 고뇌가 ‘라스트 코요테’로 일단락된 뒤
이어진 ‘트렁크 뮤직’과 ‘앤젤스 플라이트’가 사건에 집중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었기에,
그 다음 작품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은데,
모든 건 제 멋대로 추정일 뿐이지만 그런 면에서 제겐 흥미롭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