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 대 살인귀 스토리콜렉터 88
하야사카 야부사카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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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들이 육지로 나간 사이 폭풍으로 고립된 외딴섬의 아동보호시설.

아바시리는 어른들이 없는 사이 그동안 또래 여학생을 괴롭혀온 일당들을 살해하려 하지만

누군가 자기보다 먼저 일당 중 한 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현장을 목격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섬 안에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살인귀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아바시리는 초조해지는데,

문제는 첫 살인을 성공시킨 뒤에도 여전히 정체불명 살인귀의 엽기적 살인이 이어진다는 점.

아바시리는 살인귀에게 촉각을 곤두세운 가운데 남은 살인계획을 수정하는 것은 물론

부모가 탐정이었다는 탄자와 자로와 함께 학생 중 한 명임이 분명한 살인귀 찾기에 나섭니다.

당연히 자신의 살인 행각이 드러나지 않게 나름 몇 겹의 방책을 마련해놓고 말이죠.

 

나를 늘 앞질러 살인하는 살인귀가 있다.”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진수라는 카피는

사실 조금 과장되거나 오류가 있는 홍보 카피입니다.

작은 섬 안에 살인범인 아바시리 외에 또 다른 엽기살인귀가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고,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는 맞지만 진수라고 하기엔 설정과 장치가 다소 약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폭풍 때문에 어른들이 섬에 들어올 수 없고 외부와의 통신마저 두절됐기에

살인범과 살인귀가 활개를 칠 수 있게 됐다는 정도의 고립수준이라고 할까요?

 

섬에서 벌어지는 살인극 사이사이에 살인귀의 과거가 막간극처럼 소개됩니다.

그가 살인귀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참극들이 주된 내용인데,

어쩌면 그 과거 스토리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호러 코드가 다분한 이 챕터들로 인해 독자는 누가 살인귀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이 작품의 장르적 정체성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섬에 고립된 인물 가운데 거울을 통해 인격을 바꾸는 인물도 있는데,

어쩌면 이 작가는 그런 코드에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살인범과 살인귀의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미스터리들이 풀리는 대목에서는 여러 차례 아쉬움을 느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게 뒷북 또는 변명처럼 읽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딱 떨어지는 반전은 보통 뒤통수를 맞은 듯한 짜릿함을 만끽하게 만드는데,

이 작품에서 막판에 밝혀지는 진상과 진실들은 어딘가 짜맞춘 듯한 인상이 강한데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그리 개운한 기분이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 흥미롭긴 했지만 호러 코드로 포장된 살인귀의 정체와 살인동기에 대한 설명은

다소 난데없어 보이기 했고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와도 잘 안 섞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점은 독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그것이 이야기 속에 잘 안 녹았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워낙 다양하고 특이한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게 일본 미스터리의 특징이라서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 역시 눈에 띌 정도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인 건 분명하지만,

홍보카피만 보고 배틀로열류의 작품을 기대한 저로서는 아쉬움이 더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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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옛날이야기 × 본격 미스터리 트릭
아오야기 아이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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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동화의 원전이 실은 잔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라는 건 더는 놀라운 사실이 아니고

익숙한 동화를 이리저리 변주한 독특한 미스터리 작품 역시 이젠 그리 낯설지 않지만,

옛날이야기와 본격 미스터리 트릭의 화려한 합주라는 홍보카피가 달린 이 작품은

읽기 전엔 좀 생경했고, 읽으면서는 동화다운 가벼움과 미스터리의 기교의 합주가 신기했고,

다 읽은 뒤엔 웬만한 판타지 스타일의 미스터리보다 깊은 인상을 얻은 별난 작품이었습니다.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은 유명한 전래동화를 제각각의 방식으로 비틀었는데,

익히 아는 해피엔딩이 실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며 그 뒤에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거나

익히 아는 줄거리 한복판에 살인사건을 배치하여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

발상의 천재라는 별명을 지닌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엄지동자와 명문가 아가씨의 행복한 결혼 뒤엔 끔찍한 살인사건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타심 강하고 선하기만 한 할아버지의 죽음은 가증스러운 탐욕이 초래한 비극이었으며,

두루미의 선한 마음을 악용한 인간의 사악한 욕망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거북이를 구해준 대가로 용궁에 간 어부는 그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에 경악하며,

도깨비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은 수십 년의 업보에 기인한 참혹한 비극이라는 점 등

아름답거나 훈훈한 동화 속 사건과 인물들을 피투성이 참극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특히 각 작품마다 알리바이 트릭, 다잉 메시지, 도서(倒敍) 추리, 밀실 살인, 후더닛 등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코드들을 적절히 녹여 넣은 점이 눈길을 끌었고,

판타지 캐릭터(엄지동자, 도깨비) 또는 동물들(, 두루미, 거북이, 갈매기)

미스터리의 중심에서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거나 비판하는 역할을 맡은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아무래도 동화 또는 고전이라고 하면 권선징악이나 보편적인 교훈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그 미덕들을 미스터리를 통해 전복시킨 설정들은 위화감 대신 묘한 공감을 끌어냅니다.

 

일본 전래동화라서 쉽게 이입할 수 있을까, 살짝 우려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편적인 정서나 캐릭터 덕분인지 그리 낯설거나 생소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 제목이나 설정 때문에 다소 가볍게 읽힐 미스터리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작품에 따라 그런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체로 그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고,

오히려 현실의 사건을 다룬 일반 미스터리보다 더 오싹하거나 깊은 여운을 남기곤 했습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이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둔 덕분에

서양 전래동화를 소재로 한 빨간 망토, 여행길에서 시체를 만나다라는 후속작이 나왔다는데

한국에서도 그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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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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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은 좀 복잡한 족보(?)를 가진 작품입니다.

, 이 족보를 어느 정도 알고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족보 설명을 겸한 서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 10

전작인 9로스트 라이트10시인의 계곡에서 보슈의 신분은 사립탑정입니다.

이것저것 구속 받을 일도 없고 사건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분이긴 하지만,

역으로 그만큼 경찰이나 FBI 등 외부의 공격과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시인의 후속작

시인은 덴버 출신 기자 잭 매커보이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시인의 사건과 주요인물들이 시인의 계곡에 연결되므로 선행필수인 작품입니다.

8년 만에 다시 나타나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이는 연쇄살인마 시인

8년 전 그 시인을 끝까지 추격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그 사건의 후유증 때문에 험지로 좌천됐던 FBI요원 레이철 월링이 그들입니다.

시인의 계곡은 말하자면 보슈와 레이철이 함께 연쇄살인마 시인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시인의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는 이 작품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블러드 워크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의 연장선상의 작품

블러드 워크는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은퇴한 FBI요원 테리 매케일렙이 주인공인 작품이고,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는 보슈와 매케일렙이 투톱으로 활약하는 작품입니다.

시인의 계곡이 이 두 작품의 연장선상인 이유는 매케일렙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다만, 매케일렙은 보슈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만 할뿐 실제로 등장하진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매케일렙의 미망인이 보슈에게 남편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달라고 요청을 했고,

보슈는 매케일렙이 남긴 시인에 관한 메모를 토대로 그의 죽음의 진실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수사를 시작한 보슈가 8년 만에 다시 시인을 쫓는 레이철과 마주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드 문의 주인공 캐시 블랙의 카메오 출연

보이드 문역시 보슈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얼론입니다.

다만 보이드 문의 주인공인 캐시 블랙이 시인의 계곡에 깜짝 카메오로 등장하는데,

큰 역할이나 비중을 지닌 건 아니지만 보슈와 잠시 애틋한 인연을 나누는 그녀를

숨은 그림 찾듯 찾아보는 것도 시인의 계곡의 소소한 재미 중 하나입니다.

 

정리하면,

시인의 계곡보슈 시리즈를 포함 그동안 출간된 마이클 코넬리 작품의 인물과 스토리가

이런저런 복잡한 인연과 족보로 얽혀있는 작품이란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언급한 모든 작품들을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굳이 선행필수가 필요하다면 시인한 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보슈와 매케일렙의 인연이 궁금하다면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도 미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립탐정인 보슈와 좌천된 FBI요원 레이철의 협업은 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입니다.

매케일렙이 남긴 시인에 관한 메모만으로 FBI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한 보슈지만

일개 사립탐정인 그의 활약이 못마땅한 FBI는 자신들의 명예 지키기에 더 급급할 뿐입니다.

8년 전 시인을 끝까지 추격했음에도 사건 외적인 일 때문에 험지로 쫓겨났던 레이철은

자신의 명예회복은 물론 시인을 잡기 위해 수사팀의 정식 멤버가 되려 애쓰지만

FBI는 그녀를 단지 시인을 이끌어내기 위한 미끼나 참고인으로만 대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 덕분에 보슈와 레이철의 콤비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됐고,

위기감 속에 피어난 동지애(?)는 더욱 더 강한 결속력과 신속한 추격전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결국 죽은 매케일렙왕따 커플 보슈&레이철을 통해 시인을 잡는 셈이 되는 것인데,

이런 구도는 정의, 복수, 연대, 쾌감 등 다양한 감정을 자아내기에 최적의 조건은 물론

복잡한 족보의 재미까지 더해져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책읽기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쿨한 탐정과 토머스 해리스의 소름끼치는 살인범이 벌이는 대결.”이란

피플의 평은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을 한 줄로 잘 압축한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스릴러로서의 재미뿐 아니라 보슈 주변의 여인들 덕분에 다양한 멜로의 감성도 잘 살았는데,

전처이자 여전히 애증 관계인 엘리노어 위시와의 충돌은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고,

사연 많아 보이는 모텔 옆방의 여자 제인에 대한 보슈의 호기심과 연민도 눈길을 끌었으며,

불같은 성미의 보슈와 레이철이 온탕-냉탕을 오가며 맺는 공적-사적 관계도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벌여놓은 판에 비해 연쇄살인마 시인의 최후는 살짝 심심했던 게 사실인데

그것 때문에라도 456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 너무 아쉽기도 했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만 더 있었다면, 그러니까 보슈와 레이철이 한번쯤 더 고비를 겪었다면

막판의 긴장과 흥분이 훨씬 더 고조됐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속작인 클로저에서 보슈는 다시 LA경찰국 또는 할리우드 경찰서로 복귀할 듯 합니다.

클로저역시 10여 년 전에 읽긴 했어도 기억이 거의 휘발된 상태라

경찰로의 복귀가 보슈에게 행운이 될지 독이 될지 벌써부터 사뭇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사건이 보슈의 복귀 선물(?)로 기다리고 있을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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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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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공인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종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은 평상시에도 늘 밝고 낙천적이며 웃기는 캐릭터라고 여겨지고,

반듯한 얼굴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나 아나운서는 성격과 인품 자체도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정교한 설계 속에 무자비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직조하는 추리소설가는

꼼꼼하고 똑똑한 것은 물론 일상에서도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갖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요약하면, 미스터리 업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블랙 코미디입니다.

사적으로 구입한 고가품을 취재용 구매품으로 둔갑시켜 세금을 면제받으려는 작가,

자신이 쓰지도 않은 미완성 미스터리의 을 알아내기 위해 쇼를 벌이는 가짜 작가,

여러 출판사에 작품 약속을 해놓곤 무책임한 태도만 보이는 작가,

치매 증세를 보이는 고령의 작가와 편집자가 벌이는 코미디 같은 해프닝,

시류에 편승해 내용과 무관하게 분량 늘리기에만 급급한 출판사와 거기에 끌려 다니는 작가,

알아서 줄거리와 서평을 써주는 독서 기계에 의존하는 작가-출판사-서평가들의 민낯 등

그야말로 미스터리를 둘러싼 웃지 못 할 현실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열악해진 미스터리 출판의 현실이 꽤 많은 작품 속에서 지적되기도 합니다.

판매량이 줄어들다 보니 무리한 기획과 마케팅이 난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책에 대한 지출을 아끼는 독자들이 신인보다는 기성 작가에만 관심을 보이는 탓에

세대교체는커녕 작가-편집자-독자 모두 고령화라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미스터리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구조적 문제를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몇 번씩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도

미스터리 업자들의 안쓰러운 현실에 간혹 씁쓸한 뒷맛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록작 가운데 미스터리의 맛이 가장 풍부한 작품은 예고소설 살인사건인데,

히트작 하나 없던 작가가 본의 아니게 살인예고소설을 쓰게 된 이후 각광을 받게 되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면서 추락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정통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난기가 가득한 이 작품에 대해

갈릴레오 시리즈보다는 이쪽이 진짜 히가시노 게이고다!”라는 평이 달리기도 했다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마다 다소 호불호를 심하게 느낀 저로서도

이 평에 대해서는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스터리의 이면에 대한 그의 블랙 유머와 독설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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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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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유한 노파의 의뢰로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고즈넉한 마을에 온

박물관의 용도가 사망한 마을사람들의 유품을 전시하기 위함이란 걸 알고 당황합니다.

더구나 그 유품들은 기증받거나 부탁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 불법적으로훔친 것들이며,

심지어 악의가 깃들었거나 고인의 비참한 삶이 녹아든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괴팍한 노파와 그녀의 양딸인 소녀, 그리고 저택을 관리하는 정원사 부부와 함께

는 이내 세상에 둘도 없을 특별한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폭탄 테러와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유품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완성시키려는 의 노력은 흔들림 없이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잊었지만 오래 전에 읽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 ‘미나의 행진

설정 자체가 특별하긴 했어도 대체로 따뜻한 여운을 남겼던 작품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력이 80분만 지속되는 천재 수학자로부터

수식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미혼모 파출부인 '의 이야기이고,

미나의 행진은 엄마와 떨어져 이모집에 살게 된 소녀 토모코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덕분에 오가와 요코는 주로 그런 톤의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척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게 해준 침묵 박물관

앞선 두 작품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은 물론 기괴함마저 풍기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목만 보면 고요한 침묵과 정갈한 박물관이라는 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할 것 같지만,

띠지에 적힌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이란 표현대로

실은 이 작품의 밑바탕엔 다소 비현실적인 시공간과 심하게 뒤틀린 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애초 유족 몰래 훔친 유품을 전시할 박물관을 세우려는 괴짜 노파의 의지부터 서늘합니다.

노파는 결코 고인의 삶을 추모하려는 것도 아니고 존경심을 보존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노파에겐 고인이 소중히 여긴 물건이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물건 따윈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비밀리에 불법시술을 저질렀던 의사의 메스라든가,

위작 사기를 벌였던 무명화가가 죽기 직전 배고픔을 모면하려 먹었던 ‘36색 물감같은 것이

노파에게는 박물관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품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수상쩍은(?) 박물관 건립을 위해 박물관 기사인 와 노파의 양녀인 소녀가 앞장서고

증조부 시절부터 노파의 저택을 관리해온 정원사 부부가 힘을 보탭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박물관 세우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갑니다.

폭탄테러는 물론 사체를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하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고,

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품을 탈취하기 위해 고인의 집에 침입하기도 합니다.

또 깊은 숲속의 수도원에 머물며 오로지 침묵으로 세상을 대하는 전도사들이 등장하여

노파가 세우려는 박물관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병치 또는 대립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인물명은 물론 지역에 관한 고유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문만 봤다면 일본 작품이라고 할 만한 특징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물들 역시 ’, 소녀, 노파, 정원사, 가정부, 형 등으로만 지칭됩니다.

, 노파의 저택, 수도원, 마을중심가 등 주요 공간은 유럽의 소박한 소도시를 연상시키는데,

이런 설정들 덕분에 현실 속 이야기임에도 오히려 비현실성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목표라든가 가치관이 모호하거나 난해했던 점 역시

이 시공간의 비현실성과 함께 책읽기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요소인데,

상식적이지 않은 박물관 건립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꺼이 동참한 의 목표도 그렇고,

이런 박물관을 큰돈을 들여 굳이 지으려는 노파의 가치관도 그렇고,

노파의 양녀이자 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듯한 소녀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선명하지도 않고 이입하기도 쉽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결국 이 인물들이 전력을 다해 건립하려는 박물관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하게 또는 에둘러서라도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내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지만,

특히 몇 번을 되읽어도 공감과 이해가 불가능했던 클라이맥스부터 엔딩까지의 전개 때문에

고백하자면,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라는 의문에 둘러싸인 게 사실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가와 요코만을 떠올리며 다소 뻔하고 상투적이더라도

삶과 죽음에 관한 따뜻하고 깊은 여운의 이야기였기를 바랐는데,

설령 독특하고 그로테스크하더라도 납득 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서평 쓰는 것 자체가 주저될 정도로 저와는 맞지 않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독히도 이질적이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난해한 요소들을 잔뜩 버무려놓긴 했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특별한 이야기의 정체는 제겐 너무 불분명하고 모호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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