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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부유한 노파의 의뢰로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고즈넉한 마을에 온 ‘나’는
박물관의 용도가 사망한 마을사람들의 유품을 전시하기 위함이란 걸 알고 당황합니다.
더구나 그 유품들은 기증받거나 부탁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 ‘불법적으로’ 훔친 것들이며,
심지어 악의가 깃들었거나 고인의 비참한 삶이 녹아든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괴팍한 노파와 그녀의 양딸인 소녀, 그리고 저택을 관리하는 정원사 부부와 함께
‘나’는 이내 세상에 둘도 없을 특별한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폭탄 테러와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유품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완성시키려는 ‘나’의 노력은 흔들림 없이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잊었지만 오래 전에 읽은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 ‘미나의 행진’은
설정 자체가 특별하긴 했어도 대체로 따뜻한 여운을 남겼던 작품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력이 80분만 지속되는 천재 수학자로부터
수식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미혼모 파출부인 '나’의 이야기이고,
‘미나의 행진’은 엄마와 떨어져 이모집에 살게 된 소녀 토모코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덕분에 오가와 요코는 주로 그런 톤의 작품을 쓰는 작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척 오랜만에 그녀를 만나게 해준 ‘침묵 박물관’은
앞선 두 작품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은 물론 기괴함마저 풍기고 있어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목만 보면 고요한 ‘침묵’과 정갈한 ‘박물관’이라는 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할 것 같지만,
띠지에 적힌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이란 표현대로
실은 이 작품의 밑바탕엔 다소 비현실적인 시공간과 심하게 뒤틀린 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애초 유족 몰래 훔친 유품을 전시할 박물관을 세우려는 괴짜 노파의 의지부터 서늘합니다.
노파는 결코 고인의 삶을 추모하려는 것도 아니고 존경심을 보존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노파에겐 고인이 소중히 여긴 물건이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물건 따윈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비밀리에 불법시술을 저질렀던 의사의 ‘메스’라든가,
위작 사기를 벌였던 무명화가가 죽기 직전 배고픔을 모면하려 먹었던 ‘36색 물감’ 같은 것이
노파에게는 박물관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품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수상쩍은(?) 박물관 건립을 위해 박물관 기사인 ‘나’와 노파의 양녀인 소녀가 앞장서고
증조부 시절부터 노파의 저택을 관리해온 정원사 부부가 힘을 보탭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박물관 세우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갑니다.
폭탄테러는 물론 사체를 끔찍한 방법으로 훼손하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고,
‘나’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유품을 탈취하기 위해 고인의 집에 침입하기도 합니다.
또 깊은 숲속의 수도원에 머물며 오로지 침묵으로 세상을 대하는 전도사들이 등장하여
노파가 세우려는 박물관이라는 이미지와 묘하게 병치 또는 대립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인물명은 물론 지역에 관한 고유명사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본문만 봤다면 일본 작품이라고 할 만한 특징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물들 역시 ‘나’, 소녀, 노파, 정원사, 가정부, 형 등으로만 지칭됩니다.
또, 노파의 저택, 수도원, 마을중심가 등 주요 공간은 유럽의 소박한 소도시를 연상시키는데,
이런 설정들 덕분에 현실 속 이야기임에도 오히려 비현실성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목표라든가 가치관이 모호하거나 난해했던 점 역시
이 시공간의 비현실성과 함께 책읽기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요소인데,
상식적이지 않은 박물관 건립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꺼이 동참한 ‘나’의 목표도 그렇고,
이런 박물관을 큰돈을 들여 굳이 지으려는 ‘노파’의 가치관도 그렇고,
노파의 양녀이자 ‘나’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듯한 소녀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선명하지도 않고 이입하기도 쉽지 않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결국 이 인물들이 전력을 다해 건립하려는 박물관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하게 또는 에둘러서라도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내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지만,
특히 몇 번을 되읽어도 공감과 이해가 불가능했던 클라이맥스부터 엔딩까지의 전개 때문에
고백하자면,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지?”라는 의문에 둘러싸인 게 사실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가와 요코만을 떠올리며 다소 뻔하고 상투적이더라도
삶과 죽음에 관한 따뜻하고 깊은 여운의 이야기였기를 바랐는데,
설령 독특하고 그로테스크하더라도 납득 가능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서평 쓰는 것 자체가 주저될 정도로 저와는 맞지 않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독히도 이질적이면서 쉽게 섞이기 어려운 난해한 요소들을 잔뜩 버무려놓긴 했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특별한 이야기’의 정체는 제겐 너무 불분명하고 모호할 따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