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엄마 케이스릴러
이지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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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출간된 장르물 가운데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비행엄마입니다.

제목은 분명 본 적 있는데 실은 뒤늦게 비행(非行) 맛에 빠져든 엄마들 이야기로 오해하곤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 여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줌마들의 코믹한 좌충우돌 스토리가 떠오르는 제목이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케이스릴러 시리즈중 한 편인 행복배틀을 읽고 쓴 서평의 댓글을 통해

이 작품은 엄마들의 악인전이라는 걸 알게 된 뒤 불쑥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엄마들의 숙명적인 대결이라는 출판사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는 수십 년 동안 증오, 복수심, 업보를 가슴에 새겨온 엄마들이 등장합니다.

소중한 딸을 잃은 뒤 그 복수를 위해 험난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엄마,

살인범 누명을 쓴 것은 물론 그로 인해 딸까지 빼앗겨야 했던 엄마,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이 품게 된 남의 딸을 20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엄마 등이 그들인데,

현재에 이르러 이들은 서로를 향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년 동안 등을 지고 살았던 엄마 청옥으로부터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영도,

20년 동안 소식을 모르던 친모 준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놀라는 영도의 딸 호연,

그리고 이들 사이에 공통분모처럼 존재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미셸 등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만

그 외에도 적잖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270페이지에 불과한 내용임에도 등장인물만 보면 거의 500~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지점부터는 메모가 필요해 보일 정도로 무척이나 복잡한 구도를 이룹니다.

거기다가 이 모든 참극의 출발점과 그것의 증식 과정을 그린 과거 이야기들 역시

우연과 필연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겹치고 또 겹쳐 뒤얽힌 실타래마냥 구성돼있는데

덕분에 짧은 분량임에도 꽤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해는 말할 것도 없고 타협의 여지라곤 조금도 없이

상대를 죽여야만 가슴에 얹힌 무거운 돌덩이를 덜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엄마들의 폭주는

때론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론 서릿발처럼 소름을 돋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과 소명에 충실하게 살육전에 임하다 보니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고 확실히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제목분량이었는데,

이토록 무겁고 잔혹한 서사에 어울리는 제목이 붙었다면

좀더 스릴러 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었을 것 같아 무척 아쉬웠고,

등장인물이나 스토리에 어울리는 좀더 두툼한 분량이었다면

읽는 동안 느낀 혼란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역시 아쉬웠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인 걸로 보이는데,

이만큼 탄탄한 필력이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음 이야기 역시 이만한 서사라면 좀더 분량에 욕심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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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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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장르물만 편식하던 제가 이 작품에 눈길을 빼앗긴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2020년 서점대상 수상작이란 점인데,

그동안 읽은 수상작들을 떠올려보면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나오키 상과 함께 믿음이 가는 보증수표로 여긴 덕분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제목과 표지에서 사쿠라기 시노의 향기가 느껴졌기 때문인데,

미스터리 일본 작가 가운데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그녀 작품의 분위기가

(아무 근거도 없지만) 왠지 이 작품의 제목과 표지에서 물씬 풍겼다는 뜻입니다.

한없이 쓸쓸하고 애틋하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이야기가 예지(?)됐다고 할까요?

 

아홉 살의 가나이 사라사는 부모와의 이별로 인해 세상의 붕괴를 맞이합니다.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사라사의 심신은 나날이 피폐해져만 갑니다.

그런 사라사 앞에 또래들로부터 소아성애자로 의심받는 대학생 사에키 후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라사와 후미는 두 달 가까이 행복한 동거를 만끽합니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사라사와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힌 생활이 몸에 밴 후미는

물과 기름 같으면서도 묘하게 잘 섞였고,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일상을 구가합니다.

그러나 기어이 그들을 찾아낸 세상은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이란 낙인을 찍은 뒤

각각 보육시설과 소년원으로 보냄으로써 그 행복을 산산조각 냅니다.

그리고 15년 후, 24살이 된 사라사가 극적으로 후미와 재회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으로만 기억할 뿐이며,

그들의 재회는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로에게 또다시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뼈대는 치유 불가능한 잔인한 상처를 지닌 남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출판사는 세상의 편견 속에서 서로를 구원하고 자아를 되찾은 두 사람의 이야기.”라고

조금은 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사랑 이야기로 포장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사라사와 후미의 사랑도, 그들의 자아, 구원 과정도 전혀 고상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상처는 세상을 등지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 짝이 없으며,

서로가 만나고 헤어지고 구원을 주고받는 과정 역시 험난한 가시밭길에 다름 아닙니다.

 

사라사와 후미의 인생을 붕괴시켜버린 세상의 편견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잔인하지만,

실은 그 편견이란 것이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두 사람에겐 더더욱 바닥 모를 막장처럼 절망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아니라 한들 소아성애 납치범과 피해아동의 딱지는 지울 수 없는 일이고,

결국, 세상 어디에도 그들이 마음 편히 안식을 취할 곳은 없었다는 뜻입니다.

 

나와 후미의 관계를 표현할 적당한 말, 세상이 납득할 말은 없다.

거꾸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많다. 우리가 이상한 걸까.” (p356)

 

누구도 후미는 좋은 사람이며, 난 아무 피해도 안 입었다.”는 사라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늘 그녀를 배려하려 애쓰거나 아니면 그녀가 입은 피해를 상상하며 몸서리치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사라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두 달의 진실은 오로지 두 사람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마음 무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 주위에 실제로 사라사와 후미 같은 경우가 있다면

저 역시 작품 속 타인들과 마찬가지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 분명하단 생각에

더더욱 그들을 애틋한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다분히 플라토닉한 것이어서 기껏 손잡는 게 최선의 애정표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소박한 세상과 미래를 꿈꿉니다.

설령 그것이 도망자처럼 평생을 안주하지 못하는 불편하고 힘든 여정이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안주할 수 있는 땅이, 과연 있을까.

설령 그런 곳이 없다 해도, 어디든 가자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어디로 흘러가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p366)

 

제목과 표지만 보고 품은 아무 근거 없는 바람과 예지였지만

기대 이상으로 사쿠라기 시노와 닮은꼴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이런 관계도 있구나,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데뷔 이후 꾸준히 BL소설에 주력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는데,

그쪽은 분명 제 취향이 아니지만, 사라사와 후미의 이야기를 닮은 후속작 소식이 들려온다면

언제라도 머뭇거림 없이 그녀의 작품에 흠뻑 취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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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파크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2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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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클로저부터 LA경찰국 미해결 사건 전담반 요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해리 보슈가

이번에는 13년 전인 1993,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고 미제로 남긴 실종 사건에 뛰어듭니다.

아무래도 남들이 남긴 미제 사건에 비해 수사에 임하는 태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수사의 물꼬가 트이는 바람에

보슈로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과 의심을 지닌 채 수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13년 전, 보슈는 실종된 마리 게스토의 시신은 물론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했고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사건 파일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놓친 것들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심지어 범인이라 확신한 한 남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종종 그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그런 보슈에게 어느 날 갑자기 진범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진범이 최근 화제가 된 에코 파크 토막살인범레이너드 웨이츠란 걸 알게 된 보슈는

스타 검사 릭 오셔의 중재로 웨이츠의 심문에 참여하게 됩니다.

웨이츠는 마리 게스토 외에 여러 건의 살인을 자백하고 시신들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대가로

사형을 면제해줄 것을 요구하며 태연히 마리 게스토를 살해한 정황을 늘어놓습니다.

외운 걸 읊듯 청산유수처럼 내뱉는 그의 자백에 보슈는 오히려 의심이 치솟았고

검사장 선거를 앞두고 뉴스의 중심에 서려는 검사 릭 오셔의 의도도 불순하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터지면서 보슈와 그의 파트너 키즈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13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낸 뒤에야 나타난 진범,

그것도 자신이 미제로 남긴 사건의 범인이라면 보슈 입장에선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엔 그만의 범인이 따로 있는 상태인데다

스타 검사 릭 오셔가 모셔온레이너드 웨이츠라는 진범은

아무리 봐도 동기나 수법 면에서 마리 게스토 사건과는 거리가 먼 소시오패스라

보슈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유족들에게 13년 만에 진실을 알릴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 같은 건 아예 들지도 않았고,

오히려 보슈의 은 이 이상한 형량 거래 이면에 숨은 그 뭔가를 향해 들끓기 시작합니다.

 

보슈는 이번에도 역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아 재택근무라는 족쇄를 차게 됩니다.

그동안 여러 번 수사에서 배제되거나 징계를 맞곤 했던 탓에 그 족쇄가 새삼스럽진 않지만

스스로 매듭지어야만 하는 미결 사건 수사 중의 족쇄는 그에게 꽤 큰 분노를 자아냅니다.

더구나 제대로 수사했더라면 13년 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이후에 발생한 끔찍한 연쇄살인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뒤 보슈는 자책에 빠집니다.

그런 탓에 보슈는 그 어느 때보다 다분히 감정적인 상태에서 수사에 임하게 됐고

파트너인 키즈는 물론 FBI요원 레이철 월링에 의해 수차례 제동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의도했든 아니든 악을 벌하기 위해 스스로 악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보슈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우여곡절과 위기를 겪긴 하지만

사건 자체도 흥미롭고, 크고 작은 반전들이 곳곳에 배치돼있어서

재미 면에선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 보슈의 파트너 키즈 라이더와 FBI요원 레이철 월링의 활약도 매력적이었는데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거나 족쇄에 묶인 보슈를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동시에 걱정과 고뇌를 떠안겨 보슈를 안절부절 못하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 자세한 건 스포일러라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지만

키즈와 레이철의 이야기가 사건 못잖게 눈길을 끌었던 점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보슈가 계속 미해결 사건 전담반에 남아있을지 궁금해졌는데,

다음 작품인 혼돈의 도시를 오래 전에 읽긴 했지만 거의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탓에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처음 읽듯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다음 작품이 홍콩을 무대로 보슈가 인생 전환점을 맞는 나인 드래곤이다 보니

그 전에 보슈에게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혼돈의 도시라는 제목부터 심난해 보여서

벌써부터 기대보다는 우려가 살짝 앞서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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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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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 나가던 건축사였던 아오세 미노루는 버블 붕괴의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걸 잃었는데,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직장과 가족의 붕괴는 깊은 후유증을 남길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건축에 대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열망을 다시 품게 만든 건 바로 ‘Y주택입니다.

요시노라는 의뢰인으로부터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 달라.”는 주문을 받은 아오세는

자신의 능력과 열정은 물론 오랜 꿈과 염원을 담아 설계에 임했고

끝내 스스로 인생작이라 자부할 정도로 가슴 설레는 ‘Y주택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헤이세이 주택 200에 선정될 정도로 미적 가치, 빛의 활용도, 기능성이 뛰어난 ‘Y주택

그런 의미에서 아오세 미노루에겐 재생의 계기나 다름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집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설렘과 기쁨은 불과 넉 달 만에 산산조각이 납니다.

아오세가 찾아간 ‘Y주택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문과 분노에 잠긴 아오세는 의뢰인인 요시노를 찾아 나서지만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결국 의지할 수 있는 단서라곤 2층 창가에 놓여 있던 독특한 의자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64’ 이후 7년 만에 경찰소설의 대가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지만

이내 건축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는 걸 알곤 놀람, 당황, 아쉬움 등이 순식간에 교차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심신의 슬럼프를 겪은 작가가 난산 끝에 세상에 내보낸 작품이란 소개글을 보고

그를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독자로서 조금은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게 사실입니다.

건축, 특히 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지만, 실종된 의뢰인을 찾는 미스터리와 함께

건축사들의 열정, 가족 간의 애증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혼재돼있어서

제목과 표지에서 연상되는 단조롭고 따뜻하기만 한 휴먼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의 행보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Y주택을 방치한 채 사라져버린 의뢰인 요시노 도타와 그 가족을 찾는 일,

건축사무소의 미래와 명운이 달린 한 화가의 기념관 설계 수주를 위한 동료들과의 분투,

그리고 이혼으로 인해 해체된 자기 가족에 대한 회한과 미련과 애증 등이 그것입니다.

세 갈래라고 했지만, 실은 이 이야기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있습니다.

물론 그 접점은 건축입니다. 미스터리의 해법도, 건축사들의 열정도, 가족의 애증도

모두 건축에서 출발하고, 건축으로 전개되며, 건축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 특별한 조연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실존인물로) 1930년대 일본에 머물렀던 독일의 건축거장 브루노 타우트이며,

또 한 명은 기념관의 주인공이자 파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70대 노화가입니다.

이들은 아오세로 하여금 건축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과 함께

건축을 소재로 삼은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브루노 타우트는 사라진 의뢰인을 찾는 미스터리 해법의 열쇠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

살짝 지루할 수 있는 건축학 개론대목에서조차 계속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입니다.

 

미스터리는 다소 고전적인 엔딩을 맞이합니다.

개인적으론 딱 요코야마 히데오 스타일!”이란 소리가 저절로 나왔지만

뭔가 엄청난 반전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복기해보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엔딩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아오세가 소중히 여겼던 빛 한 조각이 마음 한편에 들어차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500페이지에 살짝 못 미치는 분량이지만 서사의 두께는 그보다 훨씬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서사 못잖게 매력적이었던 건 요코야마 히데오의 가장 큰 미덕인 현실감과 진정성이었는데,

건축에 관한 생생하고 심도 있는 묘사, 조연들조차 빛나게 만든 현실감 있는 캐릭터,

그리고 문장과 행간에 짙게 깔려있는 성실함과 진정성은

그가 아니었다면 자칫 겉멋에 치중한 졸작이 됐을 수도 있는 어렵고 난해한 건축 이야기

매력 만점의 휴먼 미스터리로 태어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고작으로 꼽는 클라이머즈 하이가 자주 떠올랐는데,

주제도, 이야기도 전혀 다른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여운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를 열거할 순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현실감과 진정성덕분이란 생각입니다.

눈물까지 쏙 빼놨던 클라이머즈 하이에 비해 빛의 현관은 끝까지 진중함을 지킨 편이지만

그 진중함은 지루함이나 고루함 대신 좀더 묵직해진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의 산물입니다.

그의 좀더 대중적인 진중함을 맛보고 싶다면 클라이머즈 하이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족 1.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다분히 작위적인 우연인 것 같지만 바로 내일(20201212),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드라마가 일본 NHK에서 첫 방송된다고 합니다.

아오세의 ‘Y주택이 드라마에서 어떤 식으로 묘사될지 너무 궁금합니다.

 

사족 2.

일본 원작과 한국 번역판의 표지를 비교해보곤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원작의 표지가 작품 속 ‘Y주택의 빛과 공간과 가구를 잘 반영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번역판은 작품과는 전혀 무관한, 세련된 따뜻함과 모던함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오세의 ‘Y주택의 향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번역판 표지는 옥의 티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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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발소
사와무라 고스케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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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단편이 수록됐지만, 실은 3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이라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앞의 3편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다룬 전형적인 단편인데 반해

뒤의 4편은 화자가 바뀌거나 형식만 바뀔 뿐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조난당한 두 대학생이 깊은 밤 폐가 같은 거리에서 발견한 뜬금없는 심야 이발소를 무대로

수수께끼를 풀 듯 미스터리를 하나하나 파헤치는 이야기 (표제작 밤의 이발소’),

한밤중 해무(海霧)가 잠식한 마을에서 벌어진 기이한 만남과

그 만남으로 인해 벌어진 끔찍한 죽음의 비밀과 진실을 다룬 이야기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플갱어를 찾아달라는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소년들의 음모(?)에 말려든 주인공이

그들과 함께 폐공장을 뒤지다가 도플갱어의 진실과 마주치는 이야기 (‘도플갱어를 찾아서’)

앞의 3편은 각각 일상 미스터리, 판타지가 살짝 섞인 살인극,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독특하고도 개성 있는 단편들입니다.

 

그에 반해 뒤의 4편은 편집자의 말대로 살짝 동공이 흔들릴 정도로기괴한 연작 단편인데,

100년도 넘은 대저택에서 시작된 보물찾기가 괴담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덕분에

이른바 기괴 환상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싹하고 기이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어떤 소재가 괴담에 차용됐는지까지는 밝힐 수 없지만,

연작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작품 제목이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라는 걸 생각해보면

대략 어떤 분위기의 괴담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작가가 밤의 이발소‘2007년 미스터리즈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바로 전 해인 2006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로 응모했다가 탈락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사위원인 아야츠지 유키토는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에 대해 불만과 혹평을 남겼지만

1년 후에 같은 작가가 쓴 밤의 이발소를 수상작으로 꼽은 뒤에는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를 쓴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의 작품으로, 이런 놀라움은 아주 마음에 든다. 다채로운 글쓰기 역량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라며

전혀 상반되는 호평과 극찬을 날렸다고 합니다.

 

앞쪽의 수록작들을 읽으며 꽤 독특한 단편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다가

갑작스레 기괴 환상소설로 분위기가 확 달라져서 다소 아쉽긴 했지만,

분명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하고도 향이 무척 강한 간식처럼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앞의 3편은 그 나름대로의 개성과 의외의 결말들을 갖고 있어서 매력적이었고,

뒤의 4편은 마치 20세기 초반 일본의 괴담 스타일 미스터리 같은 자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이야기를 한 곳으로 수렴시키는 마지막 수록작 에필로그

반전과 함께 이야기가 끝났어도 전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특별한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다만, 독자에 따라 앞의 3편은 좀 싱겁게 느낄 수도 있고,

뒤의 4편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이야기에 당혹감만 느낄 수도 있는데,

편집 후기의 부제가 몽환적이고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그런 느낌들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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