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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평점 :
한때 잘 나가던 건축사였던 아오세 미노루는 버블 붕괴의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걸 잃었는데,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직장과 가족의 붕괴는 깊은 후유증을 남길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건축에 대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열망을 다시 품게 만든 건 바로 ‘Y주택’입니다.
요시노라는 의뢰인으로부터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 달라.”는 주문을 받은 아오세는
자신의 능력과 열정은 물론 오랜 꿈과 염원을 담아 설계에 임했고
끝내 스스로 인생작이라 자부할 정도로 가슴 설레는 ‘Y주택’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헤이세이 주택 2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미적 가치, 빛의 활용도, 기능성이 뛰어난 ‘Y주택’은
그런 의미에서 아오세 미노루에겐 ‘재생’의 계기나 다름없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집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설렘과 기쁨은 불과 넉 달 만에 산산조각이 납니다.
아오세가 찾아간 ‘Y주택’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문과 분노에 잠긴 아오세는 의뢰인인 요시노를 찾아 나서지만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결국 의지할 수 있는 단서라곤 2층 창가에 놓여 있던 독특한 의자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64’ 이후 7년 만에 경찰소설의 대가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신작 소식이 들려 너무 반가웠지만
이내 건축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는 걸 알곤 놀람, 당황, 아쉬움 등이 순식간에 교차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심신의 슬럼프를 겪은 작가가 난산 끝에 세상에 내보낸 작품이란 소개글을 보고
그를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독자로서 조금은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게 사실입니다.
건축, 특히 ‘집’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지만, 실종된 의뢰인을 찾는 미스터리와 함께
건축사들의 열정, 가족 간의 애증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혼재돼있어서
제목과 표지에서 연상되는 단조롭고 따뜻하기만 한 휴먼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주인공 아오세 미노루의 행보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Y주택’을 방치한 채 사라져버린 의뢰인 요시노 도타와 그 가족을 찾는 일,
건축사무소의 미래와 명운이 달린 한 화가의 기념관 설계 수주를 위한 동료들과의 분투,
그리고 이혼으로 인해 해체된 자기 가족에 대한 회한과 미련과 애증 등이 그것입니다.
세 갈래라고 했지만, 실은 이 이야기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있습니다.
물론 그 접점은 ‘건축’입니다. 미스터리의 해법도, 건축사들의 열정도, 가족의 애증도
모두 건축에서 출발하고, 건축으로 전개되며, 건축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 특별한 조연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실존인물로) 1930년대 일본에 머물렀던 독일의 건축거장 브루노 타우트이며,
또 한 명은 기념관의 주인공이자 파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70대 노화가입니다.
이들은 아오세로 하여금 건축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과 함께
‘건축’을 소재로 삼은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브루노 타우트는 사라진 의뢰인을 찾는 미스터리 해법의 열쇠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
살짝 지루할 수 있는 ‘건축학 개론’ 대목에서조차 계속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입니다.
미스터리는 다소 고전적인 엔딩을 맞이합니다.
개인적으론 “딱 요코야마 히데오 스타일!”이란 소리가 저절로 나왔지만
뭔가 엄청난 반전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복기해보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엔딩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아오세가 소중히 여겼던 ‘빛 한 조각’이 마음 한편에 들어차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500페이지에 살짝 못 미치는 분량이지만 서사의 두께는 그보다 훨씬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서사 못잖게 매력적이었던 건 요코야마 히데오의 가장 큰 미덕인 현실감과 진정성이었는데,
건축에 관한 생생하고 심도 있는 묘사, 조연들조차 빛나게 만든 현실감 있는 캐릭터,
그리고 문장과 행간에 짙게 깔려있는 성실함과 진정성은
그가 아니었다면 자칫 겉멋에 치중한 졸작이 됐을 수도 있는 어렵고 난해한 ‘건축 이야기’를
매력 만점의 휴먼 미스터리로 태어나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고작으로 꼽는 ‘클라이머즈 하이’가 자주 떠올랐는데,
주제도, 이야기도 전혀 다른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여운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를 열거할 순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현실감과 진정성’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눈물까지 쏙 빼놨던 ‘클라이머즈 하이’에 비해 ‘빛의 현관’은 끝까지 진중함을 지킨 편이지만
그 진중함은 지루함이나 고루함 대신 좀더 묵직해진 요코야마 히데오의 매력의 산물입니다.
그의 좀더 대중적인 진중함을 맛보고 싶다면 ‘클라이머즈 하이’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족 1.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다분히 작위적인 우연인 것 같지만 바로 내일(2020년 12월 12일),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드라마가 일본 NHK에서 첫 방송된다고 합니다.
아오세의 ‘Y주택’이 드라마에서 어떤 식으로 묘사될지 너무 궁금합니다.
사족 2.
일본 원작과 한국 번역판의 표지를 비교해보곤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원작의 표지가 작품 속 ‘Y주택’의 빛과 공간과 가구를 잘 반영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번역판은 작품과는 전혀 무관한, 세련된 따뜻함과 모던함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오세의 ‘Y주택’의 향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번역판 표지는 옥의 티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