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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ㅣ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2013년쯤 ‘그래스호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사신 치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팬이 됐지만
이후 계속 아쉬움과 실망감만 맛본 탓에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작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얼마 전 ‘마왕’을 읽곤 아직 안 읽은 책장 속 그의 책들을 정리할 결심까지 한 게 사실입니다.
정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읽기로 한 작품이 ‘골든 슬럼버’인데,
한국과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이력을 생각해 보면
그동안 통 적응하기 힘들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세계와는 조금은 다른,
그러니까 궁합 안 맞는 저조차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에 부응!’이 70%,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30%정도였습니다.
전직 택배기사이자 잘 생긴 것 빼곤 평범한 청년인 아오야기 마사하루.
8년 만에 연락이 닿은 대학동창을 만난 그날도 그에겐 무척 평범한 하루였지만
시내에서 총리 암살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의 인생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암살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입니다.
경찰과 언론의 추격이 시작되자 아오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건 도주극에 나서지만
거미줄 같은 감시 시스템 탓에 수차례 체포의 위기를 겪는 것은 물론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던 인물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자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긴 아오야기는 이 모든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모티브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암살사건입니다.
암살범으로 체포된 오스월드마저 호송 중 살해당하면서 진실은 미궁에 빠졌는데
아오야기는 자신 역시 오스월드의 운명을 따라가게 될 거란 불안에 몸서리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은 ‘본 시리즈’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도망자 코드는 물론
무차별 감시 사회를 그린 ‘1984’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도망자 아오야기와 주변 인물들을 물샐 틈 없이 감시하는 시큐리티 포드라는 시스템은
머잖아 현실이 될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할리우드 식 ‘도망자 누명 벗기’ 스토리란 뜻은 아닙니다.
물론 가장 큰 줄기는 누명을 쓴 도망자 아오야기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암살범이 아님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특유의 서사와 코드와 캐릭터를 통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낯선 느낌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전하기도 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건 아오야기의 대학 친구들의 캐릭터입니다.
무의미하거나 무모해 보이는, 하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가득한 그들의 20대를 그린 대목들엔
“한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지.”라는 비틀즈의 ‘골든 슬럼버’ 가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래선지 ‘도주극’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틋한 추억과 회고의 느낌을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아오야기의 암살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그 친구들은
때론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때론 아오야기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아오야기의 친구들 못잖게 이사카 고타로의 독특한 점을 잘 드러내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아오야기의 도주에 도움을 주는 ‘의외의 조력자들’입니다.
잔혹한 연쇄살인마, 록큰롤에 미친 택배기사, 암살범을 영웅처럼 보는 양아치들,
그리고 양쪽 발에 깁스를 한 채 장기입원 중인 자칭 ‘뒷골목 전설’이라는 수상쩍은 노인 등
도무지 ‘총리 암살범 도주극’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연극적이고 과장된 캐릭터들이
아오야기를 물심양면으로 돕기 위해 사방팔방에서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무척이나 긴박한 이야기인데도 수시로 블랙 코미디의 느낌이 든 건 순전히 이들 때문입니다.
영미권 스릴러에서 아오야기의 도주극을 그렸다면 아무래도 영웅적 엔딩이 등장했겠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그만의 방식으로 무척 현실적인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대목이지만 개인적으론 꽤 마음에 드는 엔딩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장을 앞으로 넘겨 초반에 실린 ‘사건 20년 뒤’라는 챕터를 다시 한 번 읽었을 땐
할리우드 식 영웅 스토리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과 인상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이사카 고타로이기에 가능했던 매력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초반에 “‘기대에 부응!’이 70%,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30%정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어느 부분이 딱히 아쉬웠다고 꼬집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비틀즈라든가 아오야기의 친구들과 그들의 추억 이야기처럼
중간중간 책읽기를 덜컥 막아 세우는 뜬금없는 ‘샛길들’이 조금은 불편했던 게 사실이고,
재미있긴 해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조력자들’의 존재도 이물감이 강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연이은 실망과 아쉬움만 느낀 것에 비하면
이사카 고타로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 ‘골든 슬럼버’는
‘사신 치바’와 ‘그래스호퍼’에 이어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장 속에 방치된 그의 작품들을 냉큼 집어 읽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정리’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려고 합니다.
언제쯤 그의 작품들을 책장에서 구제하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