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2013년쯤 그래스호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사신 치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팬이 됐지만

이후 계속 아쉬움과 실망감만 맛본 탓에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작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

얼마 전 마왕을 읽곤 아직 안 읽은 책장 속 그의 책들을 정리할 결심까지 한 게 사실입니다.

정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읽기로 한 작품이 골든 슬럼버인데,

한국과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이력을 생각해 보면

그동안 통 적응하기 힘들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세계와는 조금은 다른,

그러니까 궁합 안 맞는 저조차도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에 부응!’70%,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30%정도였습니다.

 

전직 택배기사이자 잘 생긴 것 빼곤 평범한 청년인 아오야기 마사하루.

8년 만에 연락이 닿은 대학동창을 만난 그날도 그에겐 무척 평범한 하루였지만

시내에서 총리 암살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의 인생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암살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입니다.

경찰과 언론의 추격이 시작되자 아오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건 도주극에 나서지만

거미줄 같은 감시 시스템 탓에 수차례 체포의 위기를 겪는 것은 물론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던 인물들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자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긴 아오야기는 이 모든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모티브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암살사건입니다.

암살범으로 체포된 오스월드마저 호송 중 살해당하면서 진실은 미궁에 빠졌는데

아오야기는 자신 역시 오스월드의 운명을 따라가게 될 거란 불안에 몸서리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은 본 시리즈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도망자 코드는 물론

무차별 감시 사회를 그린 ‘1984’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도망자 아오야기와 주변 인물들을 물샐 틈 없이 감시하는 시큐리티 포드라는 시스템은

머잖아 현실이 될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할리우드 식 도망자 누명 벗기스토리란 뜻은 아닙니다.

물론 가장 큰 줄기는 누명을 쓴 도망자 아오야기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어떻게든 자신이 암살범이 아님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특유의 서사와 코드와 캐릭터를 통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낯선 느낌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전하기도 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건 아오야기의 대학 친구들의 캐릭터입니다.

무의미하거나 무모해 보이는, 하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가득한 그들의 20대를 그린 대목들엔

한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지.”라는 비틀즈의 골든 슬럼버가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래선지 도주극과는 어울리지 않는 애틋한 추억과 회고의 느낌을 잔뜩 머금고 있습니다.

아오야기의 암살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그 친구들은

때론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때론 아오야기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아오야기의 친구들 못잖게 이사카 고타로의 독특한 점을 잘 드러내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아오야기의 도주에 도움을 주는 의외의 조력자들입니다.

잔혹한 연쇄살인마, 록큰롤에 미친 택배기사, 암살범을 영웅처럼 보는 양아치들,

그리고 양쪽 발에 깁스를 한 채 장기입원 중인 자칭 뒷골목 전설이라는 수상쩍은 노인 등

도무지 총리 암살범 도주극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연극적이고 과장된 캐릭터들이

아오야기를 물심양면으로 돕기 위해 사방팔방에서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무척이나 긴박한 이야기인데도 수시로 블랙 코미디의 느낌이 든 건 순전히 이들 때문입니다.

 

영미권 스릴러에서 아오야기의 도주극을 그렸다면 아무래도 영웅적 엔딩이 등장했겠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그만의 방식으로 무척 현실적인 엔딩을 이끌어냅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대목이지만 개인적으론 꽤 마음에 드는 엔딩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장을 앞으로 넘겨 초반에 실린 사건 20년 뒤라는 챕터를 다시 한 번 읽었을 땐

할리우드 식 영웅 스토리보다 훨씬 더 깊은 여운과 인상을 만끽할 수 있었는데,

그 역시 이사카 고타로이기에 가능했던 매력적인 설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초반에 “‘기대에 부응!’70%, ‘역시나~’라는 아쉬움이 30%정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어느 부분이 딱히 아쉬웠다고 꼬집어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비틀즈라든가 아오야기의 친구들과 그들의 추억 이야기처럼

중간중간 책읽기를 덜컥 막아 세우는 뜬금없는 샛길들이 조금은 불편했던 게 사실이고,

재미있긴 해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조력자들의 존재도 이물감이 강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연이은 실망과 아쉬움만 느낀 것에 비하면

이사카 고타로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 골든 슬럼버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에 이어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장 속에 방치된 그의 작품들을 냉큼 집어 읽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정리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두려고 합니다.

언제쯤 그의 작품들을 책장에서 구제하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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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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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댐 위에서 처형당하듯 살해당한 남자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미해결 사건 전담반에서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자리를 옮긴 해리 보슈가 출동하지만

현장에서 한때 열정에 빠졌던 상대인 FBI요원 레이철 월링과 마주치곤 깜짝 놀랍니다.

레이철은 희생자가 방사능물질 접근권한을 가진 의학 물리학자이며

그 때문에 이 사건이 테러와 연관됐을 수 있기에 자신이 출동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대량의 세슘이 사라진 게 드러나자 FBI뿐 아니라 연방기관 전체에 비상이 걸립니다.

FBI는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사건을 독점하려 하지만

보슈는 살인 현장과 희생자의 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시리즈 전작들과 비교하여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너무 슬림해진 책의 두께입니다.

보너스로 실린 에필로그까지 포함해도 마지막 장이 276페이지에서 마무리되는데,

보통 500페이지 안팎이던 전작들에 비하면 2/3 또는 절반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사건 역시 발생부터 종결까지 채 12시간이 안 걸리는 것으로 설정돼있는데,

이런 분량과 속도감은 애초 이 작품이 신문 주말판에 연재됐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작인 에코 파크에서 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던 보슈는

결국 몇 개월의 정직 끝에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행히 보슈에게 호의적인 국장 덕분에 더 큰 시련을 겪진 않은 걸로 보입니다.

56살 보슈의 새 파트너는 그보다 스무살 이상 어린 쿠바계 신참 이그나시오 페라스입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경력 탓에 그는 보슈의 폭주에 여러 번 놀라곤 하는데

특히 경찰조직과 FBI에 정면으로 맞서는 보슈 때문에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한편 보슈의 숙적인 전직 부국장 어빙은 시의원이 되어 보슈와 LA경찰국과 각을 세우는데

그의 야욕과 악행이 언제쯤 보슈에게 응징당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정열적인 만남과 씁쓸한 이별을 반복해온 레이철 월링과의 재회가 가장 반가웠는데

에코 파크이후 보슈를 떠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한 레이철이었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또 다시 같은 사건에서 보슈와 마주치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게 됩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로운 파트너와 새 출발을 하게 된 보슈가 마주한 사건은 꽤 심각합니다.

방사능물질이 사라지고 테러의 위협이 대두되면서 살인사건은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되는데

그로 인해 보슈는 수사 시작과 동시에 사건에서 내쳐질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국가안보가 대두되고 테러의 기운이 감도는 사건을 놓고

일개 형사가 살인 자체에만 신경 쓰는 건 상식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보슈로서는 테러와는 무관한 뭔가 수상쩍은 것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 탓에

레이철은 물론 국장과 새 파트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수사를 고집합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보슈의 똘끼는 충만합니다.

레이철과의 재회는 계속 궁금증을 일으키고, 새 파트너와의 삐걱거림 역시 흥미롭습니다.

사건 역시 정말 보슈가 테러리스트와 한판 붙나?”라는 의문을 놓을 수 없게끔 만들어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막판에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마냥 궁금해질 뿐입니다.

 

다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알찬 뼈대만 읽는 것 같은 건조함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신문 구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연재물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고독한 코요테같은 보슈의 고뇌나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 같은 사족이 끼어들 틈이 없었고

오로지 당면한 사건 해결을 위한 돌직구 스타일의 전개에만 충실했다는 뜻입니다.

재미 면에선 뛰어났지만 기름기 없는 닭가슴살처럼 퍽퍽한 느낌만 강했다고 할까요?

 

이후 마이클 코넬리는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두 번째 이야기인 허수아비를 거쳐

홍콩을 무대로 해리 보슈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찍을 나인 드래곤을 집필합니다.

시리즈 4편인 라스트 코요테가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면

14편인 나인 드래곤은 보슈의 또 다른 가족들에 관한 깊은 비극을 그린 작품인데,

그래서인지 시리즈에 큰 획을 긋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허수아비로 잠시 숨을 돌리면서 나인 드래곤과 다시 만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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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찾는 아이들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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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무라 아쓰시는 2019년 출간된 생환자’(피니스아프리카에)로 처음 만났습니다.

열려 있는 폐쇄 공간인 거대 설산을 배경으로 한 산악 미스터리라는 독특한 장르인데다

누가 범인?”이란 미스터리와 함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또는 죄책감도 함께 다룬 작품이라

꽤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체 찾는 아이들생환자와는 결도, 느낌도 전혀 다른 작품이라 살짝 놀랐습니다.

끔찍한 연쇄살인범, 그가 어딘가 감춰놓은 시체, 시체 찾기에 나선 중고생 유튜버 등

등장인물과 사건 설정만 봐도 전작과는 서사의 무게감이나 톤 모두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불면 훌훌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문장들 때문에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말초적인 재미 면에서는 강한 조미료가 뿌려진 듯 흥미진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8명의 여성을 잔혹하게 살해한 22살 아사누마 쇼고가 법정에서 충격적인 진술을 합니다.

7명은 자신이 죽인 게 맞지만 미즈모토를 살해한 진범들은 따로 있다면서

추억의 장소에 진범 한 명의 시신을 숨겼다. , 이제 시체 찾기의 시작이다!”라고 말입니다.

미즈모토 살해범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강제 휴직을 당한 여형사 오리카사 노조미는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며 애초 용의자로 꼽은 3인조에 대한 독자적인 수사에 나섭니다.

한편, 등교 거부중인 중학생 유튜버 소타는 같은 또래의 인기 유튜버 니시얀으로부터

여름방학을 맞아 우는 아이의 숲으로 시체 찾기에 나서자는 제안을 받곤 흥분합니다.

또 한 명의 인기 유튜버 고교생 세이, 숲 인근에 사는 소녀 카호가 가세한 가운데

들뜬 기분으로 시체 찾기에 나섰던 소타는 얼마 안 가 끔찍한 악몽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경찰과 전문가들이 아사누마의 폭탄발언을 연쇄살인마의 헛소리라며 무시하는 상황에서

수사 초기부터 미즈모토만은 아사누마의 희생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던 노조미가

탐문과 압박을 통해 재수사를 하며 갖은 위기를 겪다가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가 한 축이고,

우는 아이의 숲으로 시체 찾기에 나선 중고생 유튜버들의 이야기가 나머지 한 축입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에선 아사누마가 언급한 추억의 장소가 어디인지 찾아내려는 움직임과 함께

이른바 시체 찾기의 광풍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말하자면, 한쪽에선 진범 찾기가, 한쪽에선 시체 찾기가 벌어지는 형국인 셈입니다.

 

어디에서 접점을 이룰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던 두 축의 이야기는

(약간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막판에 이르러 교묘한 트릭과 함께 하나로 합쳐집니다.

다소 가볍고 쉬워 보이는 노조미의 수사도 아쉬웠고,

시체 찾기라는 미션과 달리 10대 성장통에 주력한 듯한 유튜버들의 이야기도 아쉬웠지만

두 축의 이야기가 합쳐지는 대목에서는 제법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밝혀진 아사누마 폭탄발언의 진위와 미즈모토 사건의 진실 역시

사뭇 놀라운 전개와 엔딩으로 이어진 덕분에

일반적인 연쇄살인마 미스터리와는 차별화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 정도만 꼽자면,

우선은 서사와 이야기의 두께가 분량에 비해 많이 가볍게 느껴진 점입니다.

노조미의 수사는 너무 쉬워 보였고 그녀가 겪는 위기도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튜버들의 시체 찾기는 캐릭터 소개를 위한 기초공사에 과도한 분량을 할애한 나머지

지루하거나 사족 같은 내용이 많아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툭하면 등장하는 작가의 열정적인 주제 강의입니다.

연쇄살인마의 탄생과 범행심리,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10대의 불안정한 내면 등

작가는 적잖은 분량을 통해 주제와 메시지를 설파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대목들은 공감보다는 강요처럼 읽힐 때가 더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꽤 독특한 재미를 지닌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 이야기 자체보다 설정의 힘이 더 매력적인 작품이란 생각인데,

이런 인상은 전작인 생환자에서도 비슷하게 받았던 터라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다음에는 어디로 튈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한국에는 생환자와 이 작품밖에 소개가 안 된 상황인데

일단은 관심을 두고 신작 소식을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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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해둔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을 큰맘 먹고 꺼내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을 큰맘 먹고읽는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소리인 건 분명하지만

사신 치바그래스호퍼이후로 절망(?)하거나 중도 포기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던 탓에

이 사람은 나하곤 안 맞는구나.”라는 생각에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올해 출간됐지만 아직 못 읽은 작품들을 허겁지겁 읽다가 예기치 않게 잠시 짬이 난 덕분에

어찌어찌 책장을 뒤적거렸는데 하필 눈에 밟힌 게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선문답이나 화두를 읽은 느낌이었습니다.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줄거리도 있고, 엔딩도 있지만 무엇 하나 선명하게 남은 것 없이

내가 지금 뭘 읽은 건가?”라는, 스스로 위축감이 드는 자문만 잔뜩 남았습니다.

 

무능한 정치판에 대한 혐오,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에 대한 비굴한 열패감,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청춘과 비겁한 기성세대만 존재하는 암담한 현실 등

그야말로 정체된 채 미래라곤 보이지 않는 일본의 현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깔립니다.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주인공 안도와 준야, 두 형제는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형 안도는 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이 의도하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복화술의 능력을,

동생 준야는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매사에 생각이 너무 많아 고찰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안도는

최근 정치판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파시즘 경향에 공포를 느낍니다.

특히 급진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정치인 이누카이는

안도에겐 경계해야 할 파시즘의 화신이며 어떻게 해서라도 저지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신의 초능력으로 이누카이의 폭주를 막아보려던 안도가 급작스럽게 사망한지 5년 후.

형 안도와 달리 생각이나 사색보다는 직감과 감성에 의존하던 준야는

어느 날 자신이 1/10 확률 안에선 절대 지지 않는 초능력을 갖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총리가 된 이누카이가 자위대의 무력 보유를 포함한 개헌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준야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나름의 싸움을 준비하기로 결심합니다.

 

정리 자체가 어려운 내용이라 줄거리가 주절주절 한없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문제는 실제 내용은 (위의 줄거리와 달리) 초능력 형제의 파시즘 투쟁 이야기도 아니고

(어떤 형태가 됐든) 정치나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와는 무관한 소소한 일상들이나 신기한 초능력 해프닝이 더 눈에 띄고

가끔은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툭툭 튀어나와 책읽기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조연이든, 소품이든, 단순 해프닝이든 뭐라도 사소한 게 등장하기만 하면

주제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잔뜩 노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형 안도는 엉터리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한다면 세상은 바뀐다.”라며

자신의 소신과 함께 파시즘에 대한 공포나 반감이라도 드러내지만,

동생 준야는 도무지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고

내재된 꿈이나 희망, 목표가 뭔지도 통 알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누구라도 이 작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면서

출판사의 소개글과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두루 훑어봤지만

역시 알 수 없다.”는 제 나름의 결론을 바꿀 만큼 특별한 정보를 얻진 못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라는 설명도,

황야일지 푸른 하늘일지 모르는 미래를 꿈꾼다는 엔딩 부근의 묘사도,

결국 마왕은 이누카이일까, 군중일까, 아니면 안도나 준야 자신일까?”라는 소개글도

어느 하나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언급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작가의 변(),

이사카 고타로의 최고의 소설로 평가했다는 문학평론가들과 편집자들의 호평도

이해력 부족한 독자에겐 전부 궤변으로만 들린 게 사실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돼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게 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이 무지몽매함과 몰이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이사카 고타로에게 연타로 좌절당한 걸 생각하면 그럴 여지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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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이름 없는 마을의 살인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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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마요는 황망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평범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삽시간에 주민들의 일상을 잠식한다. 존경받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마요로 하여금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의 동창생인 중학교 친구들을 용의자로 주시하게끔 만든다. 게다가 마술사로 미국에서 활동하느라 10년간 연락이 끊겼던 삼촌 다케시가 갑자기 나타나 경찰과 별도로 독자적인 조사를 제안하자 마요는 당황한다. 태어난 뒤 단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데다 어딘가 4차원 괴짜 같은 삼촌이 영 미덥지 않지만 발군의 추리력과 능란한 화술, 그리고 마술사다운 신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한 마요는 결국 그와 함께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직 마술사이자 뛰어난 추리력과 사기꾼 같은 화술을 지닌 블랙 쇼맨다케시는 여느 괴짜 탐정을 능가하는 희한한 캐릭터입니다. 어려서부터 초능력에 관심을 가진 끝에 미국으로 가 사무라이 젠이라는 유명 마술사가 됐고, 적어도 두세 수를 내다보는 뛰어난 추리력과 상상력을 지녔으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술 하나만으로 상대의 비밀과 이력을 캐내는 사기꾼 같은 기질도 있고, 심지어 거리낌 없이 도청, 속임수, 위증 등 불법적인 수단으로 경찰을 바보로 만들어가면서 마요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님인 에이치의 죽음을 단독 조사하는 무모함도 지닌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아무도 못 말리는 그의 빈대(?) 캐릭터인데, 상대가 조카든 경찰이든 안면몰수하고 밥값에 커피값까지 덤터기씌우려는 그의 뻔뻔함은 히가시노 특유의 코믹 코드를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자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 입장에선 이런 사악한 삼촌이 마음에 들 리 없지만 무능하고 열의 없어 보이는 경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뜬금없고 맥락 없어 보이던 다케시의 조사가 논리정연하게 정리되는 걸 지켜보면서 마요는 점차 다케시의 괴짜 탐정 노릇에 녹아들게 되고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인 자신의 동창생들을 다케시 못잖게 예의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존경받던 교사의 의문의 죽음, 그를 만났거나 만날 계획이 있던 동창생들의 수상쩍은 행태들, 그리고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지만 동시에 위화감으로 가득한 살인사건 현장 등 이 작품 속의 미스터리는 다소 쉬워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구도를 띠고 있습니다. 모두가 범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범인일 리 없는 애매모호한 정황 속에서 좌충우돌 콤비 캐릭터인 삼촌 다케시와 조카 마요는 경찰을 능가하는 맹활약을 펼칩니다.

 

작품 속 배경인 마요의 고향은 코로나의 충격으로 극심한 침체를 겪는 중으로 설정됐습니다. (코로나 이후 구상된 작품인지, 구상 중인 이야기에 코로나를 끼워넣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창궐한지 만 1년이 안된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순발력으로 집필된 걸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50여 페이지의 분량을 생산한 걸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공장장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스터리의 규모나 깊이로 볼 때 다소 과도한 분량으로 보인 게 사실이고, 다케시와 마요의 분투는 매력적이지만 막판에 밝혀진 진실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아서 앞서 전개된 꽤 많은 분량의 이야기들이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점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에서 아침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삼촌 다케시와 투닥거리는 마요의 모습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살짝 불편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피살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각별한 중학교 은사 정도였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블랙 쇼맨다케시의 캐릭터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앞으로 블랙 쇼맨 시리즈가 이어질 예정이라 그런지 다케시의 모든 전사(前史)가 이 작품에서 소개되진 않아서 아직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잔뜩 남아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케시의 조카인 마요가 앞으로도 계속 콤비 주인공으로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괴짜 탐정 다케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한 편의 우당탕탕 마술쇼를 본 듯한 책읽기였는데 만일 후속작이 나온다면 다케시의 또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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