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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ㅣ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평점 :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명품인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12년만의 복귀작입니다.
해리 보슈가 등장하진 않지만 ‘시인’은 ‘해리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의 전작이자
그 자체로 마이클 코넬리 월드의 대표작 중 한 편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주인공 잭 매커보이의 ‘귀환’은 해리 보슈의 팬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는 이 작품을 “‘시인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실은 ‘시인’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며, 따라서 ‘잭 매커보이 시리즈 2편’이 맞는 표현입니다.
(매커보이는 ‘해리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에도 잠깐 등장한 적 있는데,
특종에 목을 맨 ‘얄미운 3류 기자’ 캐릭터로 설정돼서 다소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허수아비’는 ‘시인’ 이후 12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인이라는 별명의 연쇄살인마 사건으로 스타덤에 오른 콜로라도의 기자 잭 맥커보이는
자신이 열망하던 LA 타임스에 스카웃되어 사건 담당기자로서 활약해왔지만,
신문 산업의 불황이 몰고 온 해고 열풍은 고액 연봉자인 그에게도 여지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매커보이는 자신을 엿 먹인 LA 타임스에게 더 큰 ‘빅 엿’을 선물하고 퇴사하기로 결심하는데,
마침 그 계획에 딱 맞는 원죄(冤罪) 사건이 그 앞에 툭 던져집니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소년을 조사하던 매커보이는 진범이 따로 존재한다는 단서를 발견하곤
그에 관한 기획기사를 통해 LA 타임스에게 한방 먹이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목숨마저 위태로워지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고
그는 12년 전 ‘시인’에서 씁쓸하게 헤어졌던 FBI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기자로서 해고라는 최후의 벼랑 끝에 몰린 매커보이의 마지막 한방을 위한 분투,
12년 만에 재회한 매커보이와 함께 다시금 연쇄살인마를 쫓게 된 FBI요원 레이철의 활약,
그리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끔찍한 변태성욕자이자 연쇄살인마인 허수아비의 반격 등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설정 덕분에 ‘시인’ 못잖은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사실, 매커보이는 ‘정의를 위해 펜을 치켜든 기자’는 절대 아닙니다.
그는 특종에 집착하고, 그 특종을 소설로 써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는 통속적인 인물입니다.
자신을 내친 LA 타임스에게 복수하려 시작된 취재가 연쇄살인마 추격으로 발전된 것 역시
정의감보다는 기자로서의 본능적인 욕구와 특종에의 열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매력이 반감되거나 얄밉게만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현실감 있는 캐릭터, 즉, 욕심도 많지만 겁도 많은 보통 기자로 그려진 덕분에
독자 입장에선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더 리얼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매커보이가 주인공이지만 개인적으론 레이철 월링에게도 많은 관심이 갔던 게 사실인데,
‘시인의 계곡’, ‘에코 파크’, ‘혼돈의 도시’ 등 ‘허수아비’ 직전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파트너인 해리 보슈와 남녀로서 깊은 관계까지 맺고 끊기를 반복했던 레이철이
12년 만에 다시 만난 매커보이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비친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특히 직전 작품인 ‘혼돈의 도시’ 말미에서 보슈와 꽤 좋은 분위기를 남겼던 탓에
레이철이 매커보이의 12년 만의 대시를 거부하지 않는 장면은 다소 의외였던 게 사실입니다.
매커보이와 레이철은 연쇄살인마는 물론 FBI의 방해까지 극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특히 초반부터 공개된 범인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을 바짝 뒤쫓는 대목에선
분명히 주인공들이 다치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면서도 내내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눈엣가시 같은 레이철을 쳐내기 위한 FBI의 의도적 방해는 격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허수아비가 쳐놓은 덫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그 장면들은 둘의 콤비 플레이가 가장 짜릿하게 빛나는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된 탓에 딱히 큰 반전이 없어서 살짝 맥이 빠진 점과
막판에 진범을 지목하는 장면이 잘 이해되지 않은 점만 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지만
딱 한 가지,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이 있던 건 아니지만) 번역의 아쉬움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해리 보슈+@ 다시 읽기’ 내내 특정 번역가의 작품마다 뭔가 덜컥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조직명이나 인물들의 말투가 다른 번역가의 작품들과 너무 다르게 묘사되기도 했고
두세 번 되읽어도 정확히 의미가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허수아비’의 경우 매커보이가 소속된 LA 타임스의 내부 상황을 디테일하게 그린 장면들이나
범인인 웨슬리 카버가 근무하는 콜로케이션 업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주 멈칫하곤 했는데
원작 자체가 그런 탓일 수도 있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시리즈를 연이어 읽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여러 번역가의 문장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만의 유별난 ‘투정’인지 다른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도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아직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간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해리 보슈+@ 다시 읽기’도 이제 세 편(‘나인 드래곤’, ‘드롭’, ‘블랙 박스’)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쯤 보슈의 새 이야기 소식이 들려올지 그저 난망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