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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사쿠라기 시노의 한국 출간작 8편 중 장편은 ‘유리갈대’,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2021년),
그리고 ‘순수의 영역’까지 단 3편뿐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매력은 주로 연작단편집과 단편집에서 만끽한 편이지만
그녀의 장편은 다소 호흡은 완만해도 이야기는 더 처연해서 색다른 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수의 영역’은 어떤 작품들보다 호흡의 완만함과 처연함이 강했던 작품입니다.
- 서예가 류세이
화려한 학벌과 어머니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재능에 가로막힌 서예가.
어느 날, 서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췄지만 발달장애를 지닌 스무 살 준카를 만나면서
서예에 새롭게 눈 뜨는 계기를 맞지만 동시에 준카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 보건교사 레이코
무능한 남편 류세이 대신 가계를 책임지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유능한 교사이자 내조와 간병을 마다않는 완벽한 모습이지만,
실은 오랫동안 감정이란 걸 잊은 채 살아온 무미건조함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가 준카의 오빠이자 도서관장인 노부키를 만나면서 미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 도서관장 노부키
할머니가 사망하자 발달장애를 지닌 준카를 돌보게 됐지만 그로 인해 생활은 엉망이 됩니다.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준카를 알아본 류세이가 그녀를 서예교습소에 드나들게 하는데
그로 인해 알게 된 그의 아내 레이코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 발달장애인 준카
발달장애를 지녔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순수함이 빛나는 스무 살 여자.
류세이의 교습소에 드나들게 된 그녀로 인해 여러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시기도, 질투도,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그녀의 순수함이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감정들을 뿌리내리게 만든 것입니다.
이토록 길게 인물소개를 한 이유는 이 작품의 핵심이 인물소개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띠지조차 안 읽는 버릇 때문에 이 작품의 테마가 ‘질투’란 걸 전혀 몰랐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인물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생겨날 때 언제나 곁에 자리하는 감정”이란 작가의 설명이
새삼 확실하게 각인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쿠라기 시노가 그린 ‘질투’는 결코 통속적이지도, 경박하지도 않습니다.
한계에 부딪힌 서예가 류세이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스무살 연하 준카에게 느끼는 감정엔
서예가로서의 부러움은 물론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욕망에 가까운 그 무엇이 혼재돼있습니다.
무능한 남편에 대한 한심함도, 치매 시어머니에 대한 귀찮음이나 미움도 품지 않던 레이코는
감정이란 것과 차단된 채 살아온 자신이 노부키에게 흔들리는 걸 자각하곤 무척 당황합니다.
말하자면 가족이지만 그 어떤 감정도 공유하지 않던 ‘동거인’에 불과하던 그들은
노부키와 준카 남매의 등장으로 작지만 깊은 파동을 겪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오래된 연인 대신 레이코에게 흔들리는 노부키는 특별히 류세이를 의식하진 않습니다.
또, 노골적으로 들이대진 않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자기감정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한복판에 그 모든 관계를 야기한 순수함의 상징 준카가 있습니다.
류세이와 레이코와 노부키 모두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정을 키우는 반면
준카는 생각이든 감정이든 거침없이 있는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언행은 준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 사람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을 키우게 만들고, 질투에 물들게 만들고, 의심과 의문을 증식시키는 형태로 말이죠.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늘 그랬듯,
읽는 내내 좀처럼 멈추지 않는 파문과 함께 뭔가 쏟아질 듯 꽉 찌푸린 하늘이 떠올랐습니다.
등장인물 누구도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 대신 잔뜩 일그러진 삶을 끌어안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속내와 사정을 감춘 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상처나 은밀한 감정이 있고, 자학에 가까운 질투를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런 것들을 다 드러내고 살기엔 자기 자신도, 세상의 눈길도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점잔을 빼면서도 실은 세속적인 욕망을 동시에 품은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다.”는 언급은
비단 번역가만이 느끼는 사쿠라기 시노의 장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녀의 한국 출간작을 모두 읽은 입장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해설이나 역자 후기를 꼭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형태나 정서가 (전작들에 비해) 손에 잡힐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반만 해도 주요 인물들의 첫 등장과 함께 숨이 막힐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는데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긴장감은 이완됐고 모호한 느낌만 잔뜩 들러붙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역시 아쉬움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원작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좀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애매한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의외의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어업과 탄광으로 부흥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훗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의 사계절은
등장인물들의 처연한 심리들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작가 스스로 나고 자란 그 공간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디테일한 풍경들은
인물들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와 감정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힌트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사쿠라기 시노에게 푹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구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꼭 한 번 그곳의 사계절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욕심이 간절할 정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