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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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여행의 관광버스 짐칸에서 한 아이의 토막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휴게소에서 사라진 아버지 김석일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그를 추적한다.

김석일은 예상 밖으로 빠르게 검거되는데,

검거되기 직전 어떤 빌라에 침입해 한 남자를 중태에 빠뜨릴 정도로 난도질한다.

아이의 시체에서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사건의 잔혹성으로 전 국민이 주목하는 가운데

담당 형사 박상하는 자신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한편 김석일과 이혼하고 떠났던 전처 정지원이 돌아오며 사건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3년에 출간된 더블이후 네 번째로 만난 정해연의 작품 패키지입니다.

한국 장르물 작가 가운데 Top Pick까지는 아니어도 신간소식에 귀 기울여지는 작가인데

어린 아이가 토막난 사체로, 그것도 관광버스 짐칸에서 발견된다는 충격적인 설정 때문에

지금 죽으러 갑니다이후 2년여 만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작품과 만나게 됐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가 희생자인 장르물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심정을 자아내기 마련인데,

그것도 너무나 참혹한 방식으로 살해되고 유기된 탓에

도대체 무엇이 그런 범죄의 원인이 된 것인지, 누구의 소행인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줄거리 소개대로 범인은 일찌감치 아이의 아버지 김석일로 특정됩니다.

아이가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됐던 정황들이 드러난 것은 물론

그 폭력이 막장에 가까웠던 부모의 결혼생활에 기인했다는 점도 주위의 진술로 밝혀지면서

모든 정황이 김석일이 범인임을 가리키지만 그는 자백은커녕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립니다.

 

아이를 참혹하게 살해할 만한 정확한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휴게소와 버스를 범행 공간으로 이용한 것인가?

그가 입을 꾹 다문 것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인가?

 

작가는 박상하의 입을 통해 아이를 죽인 건 김석일 뿐일까?”라는 의문을 자주 제기합니다.

, 김석일 외에도 적잖은 주변인물들이 공범 내지는 방치의 역할을 했다는 뜻인데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과 무관하게 이 의문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로 보입니다.

알면서도 외면했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방치했거나,

물리적인 폭력만 휘두르지 않았을 뿐 실은 공범이나 다름없는 자들에 대한 분노라고 할까요?

 

3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금세 마지막 장까지 완주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해연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어설프거나 아쉬운 대목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표지 뒷면의 카피와 초반부 감식반장의 진술 속에 분명 일곱 토막이라고 돼있던 사체가

몇 페이지 뒤에 등장하는 부검 결과지에는 여섯 덩어리로 표기된 점이라든가,

동행했던 관광객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참혹하게 짓이겨진 아이의 시신을

굳이 어머니 정지원에게 확인하라고 권하는 이해 못할 박상하의 태도는 애교(?)라고 쳐도

미스터리 서사 전반에서 다소 어이없는 아마추어 식 오류가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살인사건을 맡은 형사라면 당연히 해야 될 일 - 범행과 유기 수법 조사,

시신의 정체 확인, 혐의점이 있는 자의 범행당일 행적 조사 등 - 을 방기한 것은 물론

미스터리 독자 수준만 돼도 금세 눈치 챌 일을 마치 대단한 발견인 양 깨우치는 등

박상하의 행적은 담당형사라기보다는 범인 프로필 분석가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 본인 역시 가족폭력의 상처를 지닌 것으로 설정된 탓에

박상하는 수사 내내 객관적인 태도 대신 김석일 가족에게 자신의 가족을 투영하곤 하는데

이 역시 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망각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봐도 주제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가장 궁금했던 범행 이면의 진실에 대한 막판 설명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웃음이 나왔고

범행 수법과 과정 역시 그런 게 가능한가?”라는 반발심만 일으키는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몇몇 결정적 장치들은 끝까지 회수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버려서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름 기대가 많았던 작가의 작품이라 어쩌면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패키지는 설정만 강렬했을 뿐 정작 미스터리는 수준 이하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평점은 악평에 가깝지만 인터넷 서점엔 별 5개를 준 서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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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를 다시 만난다
나카타 에이이치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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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야구 시합 도중 머리에 공을 맞고 정신을 잃은 11살 가바타 렌지.

하지만 그가 병원에서 깨어난 건 무려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2019년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31살 어른의 몸이란 걸 확인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더구나 약혼자라 자칭하며 그 앞에 나타난 니시조노 코하루는 더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11살의 가바타 렌지의 의식이 20년이 지난 3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왔듯

31살 가바타 렌지의 의식은 20년 전인 11살 가바타 렌지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는 것.

충격적인 건, 과거로 간 31살 가바타 렌지는 그 당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저지하진 못하더라도 진범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다는 점입니다.

 

제목, 표지, 북트레일러 모두 다분히 라노벨 느낌이라 관심 밖의 작품으로 제쳐놓았지만

분명 낯익은 작가의 이름 때문에 출판사 소개글을 살피다가 그 낯익음의 이유를 알게 되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독서목록에 포함시킨 작품입니다.

 

그의 이름이 낯익었던 건 메리 수를 죽이고의 네 명의 필진 중 하나였기 때문인데,

나머지 세 명의 필진은 오츠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입니다.

그리고 이 네 명은 실은 모두 같은 인물, 즉 오츠이치의 분신들입니다.

오츠이치가 호러 미스터리에 주력한 필명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는 괴담소설을, 나카타 에이이치는 연애소설을 위한 필명입니다.

취향과 거리가 좀 먼 SF 타임리프물이지만 미스터리 구도도 흥미로워 보이고

오츠이치의 또 다른 매력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첫 장을 펼쳤고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에는 살짝 고전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의식이 바뀐 두 명의 가바타 렌지 중 한 명이 너무 어린 11살로 설정된 탓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청소년소설처럼) 가볍게 읽힌 점이 가장 큰 이유였고,

타임리프의 작동 원리가 다소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진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작가는 여러 번에 걸쳐 어린 렌지어른 렌지의 의식 교환 전반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씩 이해하는 과정 역시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른의 몸에 들어온 어린 렌지는 만 하루 동안 많은 일을 겪습니다.

약혼녀 코하루로부터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31살에 이르렀는지 알게 된 렌지는

다시 11살로 돌아가더라도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만

동시에 11살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할 일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일가족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야 하고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코하루를 구제하여 그녀의 연인이 돼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겐 두려움이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11살의 어린 렌지몸에 들어가 일가족 살인사건 당일을 맞이한 어른 렌지

어떻게든 살인사건을 저지하거나 진범의 정체라도 파악하려 분투합니다.

그 진실을 기억한 채 31살 몸으로 돌아가면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린 렌지가 겪을 시련과 혼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11살의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모와 녹음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미 일어난 과거는 바꿀 수 없는가?’라는 화두였는데,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그럴 경우 현재의 상황들이 모두 소멸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어린 렌지의 처지는

타임리프 스토리의 전형적인 상황이긴 해도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어지간한 독자라면 그 진상을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방에 뿌려진 크고 작은 단서들이 막판에 이르러 깔끔하게 회수되는 걸 보면서

오츠이치의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또 역자 겸 편집자가 언급했듯 렌지와 코하루의 잔잔한 멜로 감성도 재미있게 읽혔는데,

아마 이런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나카타 에이이치의 필명으로 발표된 것으로 보입니다.

 

초반의 가벼움만 잘 극복한다면, 그리고 다소 복잡한 타임리프의 원리만 이해한다면

뒤로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작품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 영화 시나리오로 시작됐다가 제작이 무산되면서 소설로 전환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무척 흥미진진한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덕분에 나카타 에이이치 필명으로 나는 존재가 공기’(2019)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오츠이치의 팬인 이상 그 작품도 놓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가벼운 연애소설이라면 좀 고민이 되겠지만 일단 기대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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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제프리 디버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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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페이스 오프는 역대급 앤솔로지 스릴러 작품입니다.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등 22명의 스타 작가들이 짝을 이뤄

대표 캐릭터들의 콤비 플레이를 그린 11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환상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와 데니스 루헤인의 패트릭 켄지가 한 팀이 되어 활약한다면

스릴러 독자 입장에선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설정 아닐까요?

 

이처럼 하나의 테마 아래 여러 작가의 작품을 수록한 선집(選集)을 뜻하는 앤솔로지는

좀처럼 보기 드문 희귀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언제든 관심을 끌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 앤솔로지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

장르물 애독자가 아니더라도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화제성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의 제프리 디버를 필두로 ‘CSI 과학수사대로 유명한 맥스 앨런 콜린스,

20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미키 스필레인,

한국에선 오픈 시즌으로 소개된 C. J. 박스 등 아홉 작가의 여덟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수록된 작품마다 다채롭고 독특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헌책방을 무대로 한 괴짜 책 도둑의 기이한 사연,

경찰과 마피아 모두 그 행방을 찾으려 애쓰는 한 마피아 두목의 비밀장부,

책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치명적 약점을 잡히고 마는 잔인한 갱단 두목,

살아남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가공의 책 한 권 때문에 평생 발목을 잡히고 마는 유태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에 관한 아버지의 오랜 비밀을 알게 되는 아들 등

수록된 여덟 편 모두 제각각 이 주인공인 독특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직접 작품으로 만난 적이 있는 작가는 세 명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와 관계없이 이 주인공인 미스터리란 이유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운 시간을 즐겼습니다.

물론 작품마다 만족도의 편차는 있었지만

이런 앤솔로지가 아니라면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 분명한 특별한 작품들이기에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첫 번째 수록작인 세상의 모든 책들에서 거론되는 책에 대한 화두들인데,

책장에 갇힌 책들’, ‘종이책과 전자책’, ‘헌책방의 향수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이 전자기기 안에서 빛을 내며 살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절판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자조 섞인 주인공의 이 한마디 한탄은 개인적으로 무척 공감되는 대목이었는데,

어쩌면 종이책만이 적자’(嫡子)라고 여기는 낡고 고루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종이책과 서점이 없는 세상을 떠올리는 건 아직까진 SF영화만큼이나 비현실적이거나

절대 벌어져선 안 될 끔찍한 일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입니다.

 

책에 관한 미스터리’, 그것도 여러 작가의 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진수성찬입니다.

장르물 독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그 맛을 음미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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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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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기 시노의 한국 출간작 8편 중 장편은 유리갈대’,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2021),

그리고 순수의 영역까지 단 3편뿐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매력은 주로 연작단편집과 단편집에서 만끽한 편이지만

그녀의 장편은 다소 호흡은 완만해도 이야기는 더 처연해서 색다른 힘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수의 영역은 어떤 작품들보다 호흡의 완만함과 처연함이 강했던 작품입니다.

 

- 서예가 류세이

화려한 학벌과 어머니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재능에 가로막힌 서예가.

어느 날, 서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췄지만 발달장애를 지닌 스무 살 준카를 만나면서

서예에 새롭게 눈 뜨는 계기를 맞지만 동시에 준카에게 미묘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 보건교사 레이코

무능한 남편 류세이 대신 가계를 책임지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유능한 교사이자 내조와 간병을 마다않는 완벽한 모습이지만,

실은 오랫동안 감정이란 걸 잊은 채 살아온 무미건조함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런 그녀가 준카의 오빠이자 도서관장인 노부키를 만나면서 미묘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 도서관장 노부키

할머니가 사망하자 발달장애를 지닌 준카를 돌보게 됐지만 그로 인해 생활은 엉망이 됩니다.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준카를 알아본 류세이가 그녀를 서예교습소에 드나들게 하는데

그로 인해 알게 된 그의 아내 레이코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합니다.

 

- 발달장애인 준카

발달장애를 지녔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순수함이 빛나는 스무 살 여자.

류세이의 교습소에 드나들게 된 그녀로 인해 여러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됩니다.

시기도, 질투도,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그녀의 순수함이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감정들을 뿌리내리게 만든 것입니다.

 

이토록 길게 인물소개를 한 이유는 이 작품의 핵심이 인물소개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띠지조차 안 읽는 버릇 때문에 이 작품의 테마가 질투란 걸 전혀 몰랐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인물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생겨날 때 언제나 곁에 자리하는 감정이란 작가의 설명이

새삼 확실하게 각인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쿠라기 시노가 그린 질투는 결코 통속적이지도, 경박하지도 않습니다.

 

한계에 부딪힌 서예가 류세이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스무살 연하 준카에게 느끼는 감정엔

서예가로서의 부러움은 물론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욕망에 가까운 그 무엇이 혼재돼있습니다.

무능한 남편에 대한 한심함도, 치매 시어머니에 대한 귀찮음이나 미움도 품지 않던 레이코는

감정이란 것과 차단된 채 살아온 자신이 노부키에게 흔들리는 걸 자각하곤 무척 당황합니다.

말하자면 가족이지만 그 어떤 감정도 공유하지 않던 동거인에 불과하던 그들은

노부키와 준카 남매의 등장으로 작지만 깊은 파동을 겪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오래된 연인 대신 레이코에게 흔들리는 노부키는 특별히 류세이를 의식하진 않습니다.

, 노골적으로 들이대진 않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자기감정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한복판에 그 모든 관계를 야기한 순수함의 상징 준카가 있습니다.

류세이와 레이코와 노부키 모두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감정을 키우는 반면

준카는 생각이든 감정이든 거침없이 있는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런 언행은 준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 사람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을 키우게 만들고, 질투에 물들게 만들고, 의심과 의문을 증식시키는 형태로 말이죠.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늘 그랬듯,

읽는 내내 좀처럼 멈추지 않는 파문과 함께 뭔가 쏟아질 듯 꽉 찌푸린 하늘이 떠올랐습니다.

등장인물 누구도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대신 잔뜩 일그러진 삶을 끌어안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속내와 사정을 감춘 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상처나 은밀한 감정이 있고, 자학에 가까운 질투를 느끼기 마련이지만,

그런 것들을 다 드러내고 살기엔 자기 자신도, 세상의 눈길도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점잔을 빼면서도 실은 세속적인 욕망을 동시에 품은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다.”는 언급은

비단 번역가만이 느끼는 사쿠라기 시노의 장점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녀의 한국 출간작을 모두 읽은 입장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 본인의 설명이나 평론가의 해설이나 역자 후기를 꼭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형태나 정서가 (전작들에 비해) 손에 잡힐 것처럼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반만 해도 주요 인물들의 첫 등장과 함께 숨이 막힐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는데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긴장감은 이완됐고 모호한 느낌만 잔뜩 들러붙기 시작했습니다.

번역 역시 아쉬움의 이유 중 하나였는데 원작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좀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애매한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의외의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어업과 탄광으로 부흥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훗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의 사계절은

등장인물들의 처연한 심리들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작가 스스로 나고 자란 그 공간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디테일한 풍경들은

인물들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와 감정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힌트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사쿠라기 시노에게 푹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구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꼭 한 번 그곳의 사계절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욕심이 간절할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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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사쿠라기 시노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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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입니다.

새해(2021) 들자마자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그동안 아끼고 아끼느라 안 읽고 모셔뒀던(?) 그녀의 작품 두 편을 연이어 읽기로 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책 정보에는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2013년에 출간된 걸로 소개돼있지만

실은 2009년에 발표된 단편집 恋肌과 수록작이 거의 비슷합니다. (두 편 외에 동일)

책 출간을 통한 공식 데뷔가 2007년의 빙평선인 점을 감안하면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은 사쿠라기 시노의 초기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입니다.

 

270여 페이지의 분량에 7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대략 4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장편에 못지않습니다.

신작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제외하고 한국에 출간된 그녀의 작품 7편 중 5편을 읽었으니

어느 정도 사쿠라기 월드에 익숙해졌을 만도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작품은 가슴을 찌르는 통증과 처연한 여운을 첫 경험마냥 강렬히 각인시켰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의 주인공은 훗카이도에 살거나 그곳과 인연을 맺은 여자들입니다.

또 대부분 잘 해야 평균, 아니면 그 이하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기서 평균이란 때론 지극히 현실적인 처지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하고,

때론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무척 강합니다.

그리고 그 강함의 가장 큰 원천은 그녀 이야기의 주된 공간적 배경인 훗카이도,

그중에서도 쇠락한 항구도시이자 여름엔 안개로, 겨울엔 추위로 둘러싸인 구시로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의 단편집 빙평선에서 숨 막힐 듯한 구시로의 여름을 압축적으로 묘사한 문장입니다.

그에 반해 겨울의 구시로는 바람과 동토가 전부인 황무지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더는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쇠락한 항구도시의 여름과 겨울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여자들은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나름 잘 견뎌내고 잘 버텨냅니다.

때론 내일이란 게 없는 것처럼 자신을 놓아버린 인물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엔딩은 대체로 강하다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곤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시집온 뒤로 말문을 닫아버렸지만 자신만의 심지를 놓치지 않는 호아하이,

무능한 기둥서방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도 결국 사소한 호의에 무너지는 치즈루,

스트립쇼 댄서지만 자신의 춤에 긍지를 갖고 있으며 거리낌없이 새 출발을 감행하는 시오리,

실직한 남편 때문에 천직을 버렸지만 끝내 자신의 길을 되찾는 나나코 등

암담하거나 상심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강한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이 쇠락의 부정적 기운을 고스란히 받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무능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여자들에게 그 약점들을 숨기느라 포악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울과 말빨만 좋은 기자였지만 결국 기둥서방을 자처한 야비한 남자,

기둥서방도 모자라 살인을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여자에게 의지하는 남자,

실직 후 열패감과 열등감에 몰린 나머지 생계를 맡은 아내를 증오하는 남편이 그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을 여성 편향적이라고 오해해선 안 되는데

나름 견고한 애정을 간직하거나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는 건실한남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을 관능적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거의 매 작품마다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이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애(性愛)라기보다는 고통스럽거나 건조하거나 무의미한 분위기를 띠곤 합니다.

이 작품 속의 섹스 역시 몸을 섞는다기보다 사포로 문지르듯 상처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상대를 완전히 잡아먹거나 반대로 상대에게 완전히 잡아먹혀야만

비로소 쾌감이든 자괴감이든, 만족감이든 열패감이든 느낄 수 있다는,

위태롭고 무모한 확신에 빠진 남녀들의 자학에 가까운 몸짓이 대부분입니다.

결코 관능적일 수 없는, 오히려 인물들의 심연을 민낯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까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딱히 출간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단편집이나 연작집이 많은 탓도 있지만

어느 작품을 먼저 읽든 나중에 읽든 일관성 있는 정서와 분위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를 알게 됐고

그 뒤로 정신없이 사쿠라기 월드에 빠져들었는데,

혹시 이 작품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면 호텔 로열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곧 출간될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제목부터 따뜻함과 훈훈함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왠지 사쿠라기 시노 스타일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 고유의 정서가 배제됐을 리는 없을 테니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직 안 읽은 순수의 영역을 읽으며 그녀의 신작이 배송되기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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