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미우라 시온 지음, 이소담 옮김 / 살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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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마사 & 등 단 두 작품밖에 읽지 못한 미우라 시온이지만

처음 접했던 배를 엮다의 깊은 인상 덕분에 오래 전부터 관심 작가로 분류해놓았습니다.

관심에 비해 읽은 작품이 별로 없어서 좀 머쓱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신간인 그 집에 사는 네 여자에 대해선 각별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 사실입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혈연 아닌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행정구역상 도쿄에 속하지만 도심도 교외도 아닌 애매모호한 동네에 자리한 마키타 가()

규모는 호화롭지만 동네아이들이 귀신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낡고 오래된 양옥집입니다.

고고하고 제멋대로인 70대 쓰루요와 자수 전문가인 37살의 독신 사치 모녀만이 살던 그 집에

보험회사 선후배 관계인 유키노와 다에미가 특이한 인연을 통해 들어와 살게 됩니다.

 

성격도, 인생관도, 사랑관도 전부 제각각이라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기만 한 네 여자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겪는 소소한 해프닝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는 딱히 기승전결을 갖춘 것도 아니고 큰 갈등이나 사건이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늘 삐거덕거리던 쓰루요-사치 모녀가 차츰 관계를 개선해나가는 이야기도 있고,

20~30대의 독신인 사치-유키노-다에미의 33색의 사랑이 굴곡 있게 그려지기도 하고,

심지어 난데없는 호러+판타지 코드가 끼어들어서 독자들을 잠시 멍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뼈대는 가족이었다면 충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를 네 여자가 오히려 남남으로 만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의 기쁨과 위안을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름을 또 이 녀석과 나란히, 나고 자란 동네에서 보내고 있다.

(중략) 수없이 반복된 나날 끝에 얻은 것이 이거라면, 이렇게 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위의 문장은 미우라 시온의 마사 & 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격도 처지도 다른 두 노인이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데다

동네 구석구석을 흐르는 운하 위로 배가 떠다니는, 도쿄지만 도쿄 같지 않은 동네가 배경이라

이 작품과 여러 모로 비슷한 인상을 지닌 작품입니다.

거기다가 누군가에게서 얻는 기쁨과 위안을 담은 담백한 두 줄의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마키타 가()의 네 여자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큰 사건도 없이 평평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뭔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은 분명 있습니다.

다만, 잔잔해도 확실한 기승전결을 좋아하는 취향 때문에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혹시 비슷한 실망감을 느낀 독자라면 배를 엮다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디지털 사전과 인터넷에게 밀려난 종이사전 편집부 멤버들의 분투를 그린 작품으로

특별히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우라 시온이 일본에서

인간을 잘 그리는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한국판 표지가 너무 장난스러워서(?) 일본 원작의 표지를 살펴봤는데,

문고판은 좀 뜬금없었지만 하드커버판의 표지는 그대로 가져왔어도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한국판 표지는 미우라 시온 작품임을 몰랐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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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혼자가 될 때까지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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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나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등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꽤 있긴 해도

역시 10대 중고생들이 주조연을 도맡은 미스터리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제 취향과 거리가 먼 초능력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본격미스터리대상일본추리작가협회상후보작이라는 카피에 이끌려 읽게 된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 정도만 읽고 중간에 포기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첫 장을 열었는데,

의외로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금세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했습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3명의 학생이 연이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충격에 빠져 등교 거부 중인 미즈키를 찾아갔던 가키우치는 놀란 만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즈키에 따르면 3명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며 범인은 정체불명의 사신(死神)으로,

그가 3명의 정신을 조종하여 자살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미즈키의 말에 혼란을 겪던 가키우치는

누군가가 보내온 황당무계한 편지를 받곤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 학교에는 대대로 4명의 초능력자, 일명 수취인이 존재하는데,

선대 수취인이 죽은 탓에 무작위로 뽑힌 가키우치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생긴 초능력을 확인한 가키우치는 미즈키의 말에 다시 귀 기울이는 한편

3명의 친구들을 살해한 사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다른 수취인들과 연대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학교 문제를 내포한 듯한 제목과 청춘물 느낌의 표지에서 추정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미스터리뿐 아니라 성장, 청춘, 학교, 사회 등 다양한 코드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사신의 정체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이 초능력+본격 미스터리의 콜라보라면

사건의 이면이 드러나는 후반부에는 비단 10대에만 국한되지 않는 꽤 거대한 담론,

즉 개인과 사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학교와 사회에 만연한 계급론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능력과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중후반부까지는 꽤 흥미진진하게 읽히는데다

일찌감치 정체가 드러난 사신과 초능력자들의 두뇌싸움 역시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서

저처럼 의구심을 갖고 첫 장을 연 독자라도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초반에 떨쳐내기 힘들었던 초능력에 대한 위화감도 금세 옅어지는 걸 느꼈는데

아무래도 능수능란하게 캐릭터와 스토리를 설계한 작가의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만, 작가의 의도, 즉 주제에 대해 강의에 가깝게 설파되는 막판 엔딩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호불호가 꽤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사신이 참극을 일으킨 계기와 동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은 물론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 또는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과연 살인을 야기할 만한 문제였던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사쿠라 아키나리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인데

일본 출간작들의 제목만 봐도 무척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느와르 레버넌트’, ‘실연을 각오한 라운드어바웃’, ‘아홉 번째 열여덟 살을 맞이한 너와)

이 작품에서 큰 복선이나 충격적인 반전을 맛보진 못했지만

복선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은 걸 보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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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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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16세 소녀 테사는 시신과 유골들과 함께 묻혀 있다가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람들은 극적으로 살아남은 테사에게 블랙 아이드 수잔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그녀의 증언으로 체포된 테렐 굿윈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17년이 지난 현재,

테사는 무고한 테렐이 자신 때문에 사형수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특히 최근까지도 진짜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흔적이 끊임없이 주변에서 발견되곤 했는데

그 일들은 내내 그녀의 죄책감과 공포심을 계속 부추겨왔습니다.

결국 테사는 법과학자 조애나와 변호사 빌의 도움을 받아 진실 밝히기에 나서기로 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선명하고 깔끔한 진범 찾기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다소 몽환적인 호러 분위기가 감도는 지독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재판을 앞둔 시점에서 테사가 정신과 의사와 나눈 면담을 그린 17년 전의 과거 챕터와

테렐의 사형집행일을 앞두고 테사의 진실 찾기를 그린 현재 챕터가 번갈아 등장하는데,

과거와 현재 모두 간유리로 들여다보듯 모호함이 깃든 문장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호함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근원은 오랫동안 테사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는 수잔들’,

즉 구덩이 속에서 테사와 뒤엉켜있던 시신 한 구와 여러 명의 유골들입니다.

수잔들은 꿈에서건 현실에서건 수시로 테사 앞에 나타나 뭔가를 강렬하게 요구합니다.

환청이나 다름없는 수잔들의 목소리는 18년이 지났어도 너무나 생생했기에

테사는 말짱한 제정신일 때조차 뭔가에 홀려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 생매장됐던 어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테사가 그 또래답지 않은 영악한 태도를 보이거나 애매한 화법을 구사하는 장면이라든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누군가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확신하는 테사의 공포감,

그리고, ‘진범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라는 강박감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건 자체보다는 모호함과 몽환적 분위기가 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물론 테사가 법과학자 조애나, 변호사 빌과 함께 진실과 진범을 찾는 여정도 함께 전개되지만

그런 대목을 그린 미스터리는 심리 스릴러 서사에 비하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소소할 뿐이고

막판에 드러난 진상 역시 명쾌하고 깔끔함 대신 ?”라는 의문을 더 많이 느끼게 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모호함과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도중에 몇 번씩 책장을 덮으려 했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끝까지 달리긴 달렸지만

출판사 소개글처럼 충격적이고 강렬하며 완벽하게 독창적이지도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건지 머릿속에 명료하게 정리되지도 않았습니다.

호러 분위기가 깃든 심리 스릴러가 취향에 맞는 독자라면 꽤 열광할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어지간히 힘든 책읽기를 경험한 작품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언젠가부터 대놓고 심리 스릴러라고 홍보하는 작품은 일부러 멀리해왔는데,

명확하고 선명한 서사를 좋아하는 제겐 블랙 아이드 수잔같은 지독한 심리 스릴러는

결코 맞지 않는 옷이란 걸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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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사쿠라기 시노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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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92월 출간된 별이 총총이후 통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중에

몽실북스에서 들려온 사쿠라기 시노의 새 작품 출간 소식은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에 살짝 놀랐고,

그 제목에 딱 어울리는 따뜻하고 훈훈한 표지 디자인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는데,

지금까지 읽은 그녀의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카이도의 쇠락한 항구도시 구시로를 무대로 한 스산하고 처연한 이야기라든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혹독한 계절과 거친 환경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로 미약하나마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적도 종종 있지만

대체로 가슴 한쪽을 무겁게 만들거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게 그녀 작품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내비치는 긍정적 이미지와 따뜻한 낙관론은 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덕분에, 당혹스러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읽은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쿠라기 시노만의 독특한 레시피는 여전했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구시대의 전유물인 영사기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변변한 수입이라곤 없는 노부요시는

간호사인 아내 사유미에게 (본인 표현대로라면) 얹혀사는 40세의 남자입니다.

아직도 영화 시나리오와 평론을 여기저기 투고하며 막연한 꿈을 안고 살아가긴 하지만

빈둥거리는 기둥서방도, 아내에게 무력감과 열패감을 내쏟는 저급한 인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해서 답답함을 자아내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친정엄마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노부요시와 결혼한 사유미는 올해 35.

딱히 어느 쪽의 요구도 아니면서 여전히 피임 중인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열심히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발버둥치는 노부요시에 대해서도 다소의 불안감을 갖곤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 한쪽에 밀어둔 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 꿋꿋한 인물입니다.

발포주를 즐기는 유쾌한 면도 있지만 의외로 쉽게 상처받기도 하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 모두 소통이나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둘 다 외동인데다 수입도 거의 없는 고독한영사기사 일을 하는 노부요시는 말할 것도 없고

간호사지만 의사든 환자든 보호자든 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유미 역시

사람들과 어울려 희로애락을 나누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들 주변에 들고 나는 인물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면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또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안쓰러워하고 자위하는 이야기가

연작 스타일의 270여 페이지 분량에 담겨 있습니다.

 

소소한 갈등 외에는 겉보기엔 평범하고 오붓한 평화를 누리는 두 사람이지만

노부요시와 사유미 사이엔 요란하진 않아도 결코 멈추지 않는 풍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곤란함, 처가의 냉대, 임신과 출산, 낙관적이지 않은 미래 등 외적인 문제 외에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상대의 속마음같은 내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울 수도 있는 시기를 자신들만의 현명함으로 극복합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얻은 자양분으로 둘이서 살아갈 날들의 토대를 단단하게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모여 둘이 되었다가, 셋을 거쳐 다시 둘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사별 후 혼자가 되어서도 마음만으로는 둘이 함께 하는 삶을 계속한 사람도 있고,

혼자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둘이 함께 하는 방식을 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그들을 통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출간된 순수의 영역과의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입니다.

순수의 영역속 부부가 무능한 서예교습가 남편과 생계를 책임진 보건교사 아내라는 점에서

영사기사와 간호사로 설정된 노부요시-사유미 부부와 직업이나 처지 모두 비슷한 설정입니다.

하지만 순수의 영역속 부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 비밀과 거짓말에 사로잡힌 채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쩌면 순수의 영역속 부부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이며,

오히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잘 꾸며진 해피엔딩 판타지 속 부부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에서 적잖은 놀라움을 여러 번 느낀 건 바로 이런 차이점 때문일 것입니다.

팬 입장에서 볼 때 사쿠라기 시노의 오리지널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순수의 영역에 비하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낙관론자로의 변절(?)’처럼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곳곳에서 그녀 특유의 날카롭고 싸하고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단해지는 두 사람. 오늘도 부부가 되어 갑니다.”라는 뒷표지 카피대로

역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따뜻함 또는 훈훈함이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팬이라면 급격한 변화가 낯설긴 해도 특별한 간식처럼 여길 수 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게 원래 이 작가 스타일인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독자라면 나오키 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이나 그녀의 데뷔작인 빙평선을 추천합니다.

그 작품들을 읽은 뒤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펼친다면

처음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을 확실히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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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드래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4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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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살인사건 전담반 소속이지만 지원 차 주류점 살인사건 조사에 나섰던 보슈는

사건 배후에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가 있다고 추정하고 유력한 용의자를 쫓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경고 전화가 날아들고 홍콩에 사는 딸 매들린이 납치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보슈는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홍콩으로 날아갑니다.

보슈를 원망하는 전처 엘리노어와 함께 매들린 찾기에 나서지만 단서는 희미할 뿐이고

겨우 찾아낸 매들린의 흔적은 절망적인 추측만 낳게 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벌어진 낯선 자들과의 총격전은 돌이킬 수 없는 참극으로 종결되고 맙니다.

삼합회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로 소중한 딸을 끔찍한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자책하는 보슈 앞에

진실은 전혀 예상 못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 14번째 작품 나인 드래곤은 앞선 작품들과는 사뭇 결이 달라 보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작품 속 메인 무대가 홍콩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사건의 중심에 보슈의 가족 전처 엘리노어, 딸 매들린 - 이 있다는 점입니다.

LA경찰국에서 할리우드 경찰서로, 다시 경찰국 강력계로 좌천과 복귀를 반복했지만

지금까지 보슈와 그의 적들의 행동반경은 LA나 라스베이거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 멀리 떨어져 살면서 1년에 두 번 정도 밖에 못 보고 지내는 13살 딸 매들린이

삼합회가 연루된 납치사건의 당사자로 등장한 것은 꽤 낯설게 느껴지는 설정이었습니다.

 

살인사건, 삼합회, 딸의 납치 등 이야기의 스케일은 결코 작지 않지만

사건의 전개나 해결 등 전체적인 구도만 따지면 스릴러치곤 비교적 심플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나인 드래곤은 어떤 전작들보다 보슈의 내밀한 개인사,

특히 그의 삶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가족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한 덕분에

훨씬 더 그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10년 전, 4살도 안 된 매들린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피붙이를 만난 격정보다는

당혹감과 불길한 예감을 가졌음을 회상하는 대목은 보슈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재도 모르고 살았던 딸을 처음 만난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과 동시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악의 세력이 딸을 찾아내고 그를 치기 위한 방법으로

딸을 이용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p221)

 

제프리 디버의 엣지에서도 가족은 가장 취약한 지점, 즉 모서리(edge)로 표현됩니다.

가족과 담을 쌓고 살아온 보슈가 그 어떤 스릴러 주인공보다 더 분노하고 폭발하는 모습은

어쩌면 지독하게도 역설적이라서 더 긴장감 넘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급박하고 위기일발인 상황에서 보슈는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읽는 내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실수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실수도 있지만 그럴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치명적 실수 중 하나가 보슈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심각한 내상을 남긴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은 해결됐어도 보슈가 떠안은 내상과 그걸 극복해야 할 앞날을 떠올리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따름입니다.

 

나인 드래곤은 다른 작품들과 연결된 인물이나 사건들이 꽤 많이 등장하는 편입니다.

(이는 해리 보슈 시리즈대부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전처 엘리노어에게 처음 들은 보슈가 4살 매들린과 마주하곤

엄청난 충격과 그만큼의 감동에 빠지는 모습은 로스트 라이트엔딩에 등장합니다.

, 주류점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70대 중국인 사장은 앤젤스 플라이트에서

거대한 폭동의 와중에 보슈와 짧지만 인상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더불어,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주인공이자 보슈의 이복형제인 변호사 미키 할러는

작품 막판에 아주 잠시 등장할 뿐이지만 그야말로 빛나는 카메오 역할을 맡았으며,

시인의 주인공 잭 매커보이는 실물대신 이름으로 특별출연을 하고 있습니다.

라스트 코요테에서 상관 폭행으로 정직을 당한 보슈의 심리상담을 맡았던 히노조스 박사는

이번에는 매들린을 보살피기 위한 역할을 맡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LA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서 재즈와 맥주로 하루의 노고와 분노를 달래던 보슈였지만

가족이 생긴 이상 어쩌면 그의 베란다에서의 고독과 낭만은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보슈의 새로운 삶에 대한 궁금증을 낳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의 후속작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더욱 강렬한 궁금증을 갖게 될 것입니다.

2년 전, ‘나인 드래곤후속작인 드롭을 이미 읽어서 보슈의 미래를 잘 알고 있는 저조차도

나인 드래곤을 덮는 순간 새삼 보슈의 미래가 궁금해지고 기대감을 갖게 됐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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