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사쿠라기 시노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2019년 2월 출간된 ‘별이 총총’ 이후 통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던 중에
몽실북스에서 들려온 사쿠라기 시노의 새 작품 출간 소식은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에 살짝 놀랐고,
그 제목에 딱 어울리는 따뜻하고 훈훈한 표지 디자인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는데,
지금까지 읽은 그녀의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카이도의 쇠락한 항구도시 구시로를 무대로 한 스산하고 처연한 이야기라든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혹독한 계절과 거친 환경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로 미약하나마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남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적도 종종 있지만
대체로 가슴 한쪽을 무겁게 만들거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게 그녀 작품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내비치는 긍정적 이미지와 따뜻한 낙관론은 저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입니다.
덕분에, 당혹스러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읽은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쿠라기 시노만의 독특한 ‘레시피’는 여전했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구시대의 전유물인 영사기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변변한 수입이라곤 없는 노부요시는
간호사인 아내 사유미에게 (본인 표현대로라면) 얹혀사는 40세의 남자입니다.
아직도 영화 시나리오와 평론을 여기저기 투고하며 막연한 꿈을 안고 살아가긴 하지만
빈둥거리는 기둥서방도, 아내에게 무력감과 열패감을 내쏟는 저급한 인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해서 답답함을 자아내는 쪽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친정엄마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노부요시와 결혼한 사유미는 올해 35살.
딱히 어느 쪽의 요구도 아니면서 여전히 피임 중인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열심히’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발버둥치는 노부요시에 대해서도 다소의 불안감을 갖곤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 한쪽에 밀어둔 채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 꿋꿋한 인물입니다.
발포주를 즐기는 유쾌한 면도 있지만 의외로 쉽게 상처받기도 하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 모두 소통이나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둘 다 외동인데다 수입도 거의 없는 ‘고독한’ 영사기사 일을 하는 노부요시는 말할 것도 없고
간호사지만 의사든 환자든 보호자든 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유미 역시
사람들과 어울려 희로애락을 나누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들 주변에 들고 나는 인물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면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또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안쓰러워하고 자위하는 이야기가
연작 스타일의 270여 페이지 분량에 담겨 있습니다.
소소한 갈등 외에는 겉보기엔 평범하고 오붓한 평화를 누리는 두 사람이지만
노부요시와 사유미 사이엔 요란하진 않아도 결코 멈추지 않는 풍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곤란함, 처가의 냉대, 임신과 출산, 낙관적이지 않은 미래 등 외적인 문제 외에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상대의 속마음’ 같은 내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울 수도 있는 시기를 자신들만의 현명함으로 극복합니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 사랑과 증오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것들로부터 얻은 자양분으로 둘이서 살아갈 날들의 토대를 단단하게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모여 둘이 되었다가, 셋을 거쳐 다시 둘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사별 후 혼자가 되어서도 마음만으로는 둘이 함께 하는 삶을 계속한 사람도 있고,
혼자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둘이 함께 하는 방식을 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그들을 통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보다 5년 먼저 출간된 ‘순수의 영역’과의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입니다.
‘순수의 영역’ 속 부부가 무능한 서예교습가 남편과 생계를 책임진 보건교사 아내라는 점에서
영사기사와 간호사로 설정된 노부요시-사유미 부부와 직업이나 처지 모두 비슷한 설정입니다.
하지만 ‘순수의 영역’ 속 부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 비밀과 거짓말에 사로잡힌 채 파국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쩌면 ‘순수의 영역’ 속 부부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이며,
오히려 노부요시와 사유미는 잘 꾸며진 해피엔딩 판타지 속 부부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에서 적잖은 놀라움을 여러 번 느낀 건 바로 이런 차이점 때문일 것입니다.
팬 입장에서 볼 때 사쿠라기 시노의 오리지널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순수의 영역’에 비하면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은 일종의 ‘낙관론자로의 변절(?)’처럼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곳곳에서 그녀 특유의 날카롭고 싸하고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단해지는 두 사람. 오늘도 부부가 되어 갑니다.”라는 뒷표지 카피대로
역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따뜻함 또는 훈훈함이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사쿠라기 시노의 팬이라면 급격한 변화가 낯설긴 해도 ‘특별한 간식’처럼 여길 수 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게 원래 이 작가 스타일인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독자라면 나오키 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이나 그녀의 데뷔작인 ‘빙평선’을 추천합니다.
그 작품들을 읽은 뒤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펼친다면
처음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을 확실히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