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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 위기의 남자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평점 :
‘해리 보슈 시리즈’ 15편인 ‘드롭’의 제목에는 세 가지 중첩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두 가지는 이번 작품에서 보슈가 맡은 사건과 관련 있는데,
우선 22년 전 살해당한 19세 여성의 몸에서 발견된 한 방울(a drop)의 혈흔이 하나이고,
고급호텔에서 일어난 시의원 아들의 추락(drop) 사건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보슈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시켜준 퇴직유예제도(DROP)가 그것인데,
세 개의 ‘drop’ 모두 보슈에게 꽤 묵직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한국판에만 있는 것 같지만) ‘위기의 남자’라는 부제가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작 ‘나인 드래곤’ 이후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에서 다시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돌아온 보슈는
LA경찰국과의 계약 만료 이후 퇴직유예제도를 통해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받습니다.
22년 전의 19세 여성 살해사건을 맡은 보슈는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와 수사준비를 하지만
갑자기 국장으로부터 시의원 아들의 추락사 사건부터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곤 의아해합니다.
일명 하이징고(경찰수뇌부가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 외압이 가해지는 사건)라는 얘긴데,
더 큰 문제는 그 시의원이 보슈에게는 최악의 악연인 전 부국장 어빈 어빙이란 점입니다.
한때 자신을 파멸시키려던 어빙이 자신을 점찍어 수사를 맡겼다는 점에 보슈는 크게 놀라지만
모든 사감을 억누른 채 적극적으로 추락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 22년 전 19세 여성 살해사건까지 병행하던 보슈는
오로지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한 피 한 방울밖에 가진 게 없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은 끝에 LA 전체를 충격에 빠뜨릴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때 LA경찰국 부국장을 지냈던 어빙과 그 휘하에 있던 보슈의 악연은 무척이나 질깁니다.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에 보슈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고 믿는 어빙은
보슈는 물론 LA경찰국을 괴롭히기 위해 시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패를 부려왔습니다.
그런 어빙이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보슈를 택한 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보슈는 악연과 수사는 별개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어느 때보다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문제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정치적인 냄새가 진동하고 불편한 위화감이 든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서 하이징고를 다루긴 했지만
‘드롭’은 정치권과 경찰과 언론 사이에 낀 ‘일개 형사’ 보슈의 자존감을 무너뜨릴 정도로
압도적인 깊이와 무게를 지닌 하이징고를 전면에 내세운 셈인데,
그래선지 사건을 해결하고도 참담함을 느끼는 보슈를 지켜보는 건 꽤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능한 형사였다가 관료의 길을 택한 예전 파트너 키즈 라이더의 정치적 태도는
보슈에겐 연장된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 자체를 회의적으로 여기게 만들기까지 하는데
“모두가 중요하거나 모두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명감만으로 버텨온 보슈가
과연 이후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 무척 궁금하면서도 안쓰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전개되는 22년 전 19세 여성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추격전으로 그려지지만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원초적인 문제까지 함께 다루고 있어서
하이징고와는 또 다른 긴장감과 주제의식을 전해줍니다.
“악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인 사람을 동정해야 하는가?”,
“악은 과연 선의로 갱생될 수 있는 것인가?” 등 정답 없는 물음들이 사건에 내재돼있어서
단순히 범인 찾기나 진실 찾기 이상의 무게감을 맛볼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건 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보슈의 딸 매들린의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나인 드래곤’ 이후 보슈와 함께 살게 된 매들린은 이제 15살이 됐습니다.
그 또래 치곤 아빠와의 둘만의 생활에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매들린은 보슈가 놀랄 정도로 ‘형사의 딸’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건 매들린의 꿈이 보슈를 꼭 닮은 유능한 형사라는 점입니다.
추리는 물론 사격 실력도 만만치 않은 매들린을 지켜보고 있으면
언젠가 ‘강력계 신참 매들린 보슈’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하이징고와 소시오패스, 그리고 딸 매들린의 이야기까지 풍성하게 차려진 작품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시리즈 가운데 만족도가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제 39개월밖에 남지 않은 보슈의 형사로서의 ‘유효기간’이 아쉽긴 하지만
후속작인 시리즈 16편 ‘블랙 박스’ 이후에도 (2020년 기준, 다른 주인공과의 콜라보를 포함)
무려 일곱 편의 작품에 그가 등장한 걸 보면 아쉬움 이상의 안도감도 느끼게 됩니다.
2021년이 막 시작된 지금까지도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The Burning Room’이란 제목으로 레이철 월링이 함께 등장하는 걸로 아는데,
미국 출간이 2014년이었으니 한국에도 진작 소개됐어야 할 작품입니다.
부디 2021년에는 못 해도 두어 편 정도는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