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 케이스릴러
전건우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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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사건 설정에 관해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눈에 파묻혀 고립되어 버리는 강원도 산골 마을 소복리.

첫눈이 내리던 날, 소복리 언덕 위에 세워진 붉은 별장에 정체불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온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실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종된 현장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반복해서 발견된다.

문제 청소년 선우와 소복리 출신 말단 형사 동수는 힘을 합쳐 실종자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던 중 붉은 별장과 그곳에 온 낯선 자들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건우는 단편선과 앤솔로지를 빼고 단독 작품만 마귀까지 7편을 출간한 중견작가입니다.

그동안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에 실린 단편 해무를 시작으로

소용돌이’(엘릭시르)고시원 기담’(캐비넷)을 읽었는데,

중도에 포기한 고시원 기담을 제외하면 단독 작품으로는 두 번째 만남입니다.

 

고립된 산골마을, 정체불명의 외지인과 그들이 머무는 별장, 연쇄실종과 특이한 문양 등

좋아하는 호러 코드들이 많이 깔려 있어서 사뭇 기대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과도 잘 맞아보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능력자가 아니라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라는 평범한 주인공 설정도 좋았고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호러 코드들을 전개한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판이 깔린 뒤 시작된 본격적인 이야기는 점점 위화감과 실망을 안긴 게 사실입니다.

 

호러의 주역인 의 궁극적 목표는 부활과 영생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작은 산골마을 소복리를 선택했고

가공할 영적 능력으로 끔찍한 살상을 저지르며 오직 부활과 영생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소복리의 문제 청소년과 신참 형사가 용감하게 나서는 한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외부의 조력자들까지 그들을 도와 목숨을 걸고 과 싸웁니다.

상투적이긴 해도 친근하고 익숙한 선악의 대결 구도인 건 맞지만

문제는 부활과 영생, 루시퍼와 사타니즘(Satanism)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기대했던 한국형 호러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국적불명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서양식 루시퍼 전승 스토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진부한 형태라고 할까요?

 

때로 지적 과잉으로 보인 루시퍼와 사타니즘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거리감만 준 것은 물론

의 능력과 스케일을 불필요할 정도로 무적에 가깝게 키우면서 되려 역효과만 일으킵니다.

, 능력으로 따지면 은 세계 정복(?)도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대단해 보이는데

(막판에 그 이유가 설명되긴 하지만) 강원도의 작은 마을을 무대로 한 그들의 작전과 계획은

보유한 능력에 비하면 허술하거나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유럽 고성 스타일의 별장을 지은 일도,

얼마든지 편하게 의식을 치르고 부활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남들 눈에 띄는 방식으로 요란하게, 그것도 서둘러가며 치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고

자초한 거나 다름없는 방해꾼들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과정은

솔직히 애초부터 부활이나 영생을 꿈꿀 만한 깜냥들이 못됐다는 허망함마저 들게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주인공들을 돕기 위해 등장한 소위 유해종교 와해단은 희극적이기만 했습니다.

신부, 수녀, 스님, 무당으로 구성된 이들은 루시퍼에 맞서는 독수리오형제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해내는 일은 별로 없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현실성도 없는 설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문제 청소년과 막내 형사만으로 막강한 을 물리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에게 단지 이야기의 볼륨감을 키우는 것 이상의 특별한 역할을 부여해야 했고

그래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전작 소용돌이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감도 있고, 연쇄살인 코드까지 잘 버무려진 한국형 호러였는데,

그래선지 비슷한 인상을 기대했던 마귀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민속학을 기반으로 일본 고유의 호러 작품들을 창조한 미쓰다 신조처럼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잘 녹아있는 전건우의 호러 작품을 꼭 만나보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욕심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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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리커버 특별판)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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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서사와 캐릭터 등 모든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고,

‘28’을 읽곤 악의 순수한 단면과 정면으로 마주친 끔찍함에 꽤 긴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종의 기원은 전작들보다 더 독하고 센 것을 찾다가 길을 잃은 듯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래서 오히려 초기작인 내 심장을 쏴라는 남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서 갇힌정신분열증 환자 이수명과

타고난 운명 때문에 타인에 의해 갇혀서 미쳐가는류승민의 정신병원 탈출기를 그립니다.

이수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던 베테랑(?)이라면,

류승민은 재벌가의 유산싸움에 휘말린 끝에 납치되다시피 정신병원에 갇힌 인물입니다.

물론 류승민도 어린 시절부터 방화를 즐겼으니 딱히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갇힌 수리 희망병원은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악하고 악질적인 정신병원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적인 약물과 전기치료로 환자들을 길들이는 게 일상적인 곳입니다.

덕분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수명과 승민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깥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체념의 길을 선택한 수명과 달리

승민은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승민이 정신병원에 갇힌 사연을 알게 된 수명은 그의 희망과 의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승민의 탈출을 돕는 과정에서 진작 포기했던 바깥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스스로 굳게 봉인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미션이 정신병원 탈출이니 당연히 마지막에 성공하긴 합니다. 일단....

(수명과 승민의 운명이 탈출 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09년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처음 60쪽의 지루함만 참아내면...”이라고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론 승민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는 1/3지점까지 꽤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읽혔습니다.

, 그 뒤로도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승민의 탈출 시도와 실패,

그리고 뒤로 물러날 줄만 알았던 수명이 조금씩 분노를 느끼게 되는 과정에 할애됐고,

둘의 대척점에 서있는 정신병원의 관계자들의 폭력과 동정이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기승전결 식 이야기 전개라기보다는 심리 스릴러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전혀 다른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힌 두 사람이 끝내 자신이 꿈꾸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목표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 탓인지 탈출이 성공하길 바라는 절실함이 들지 않았고

승민의 캐릭터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으로 설정된 듯 한데다

무엇보다 감동, 각성, 희망이라는 걸 어디서 찾고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어느 정도이상은 심사위원들의 평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갖는 이유는

갇힌 이유, 갇힌 상태의 절망감, 탈출 후 누리고자 하는 바나 목표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인데

수명과 승민의 경우 가장 중요한 목표가 모호하거나 미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수명에겐 자신을 파멸시킨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전부이고,

승민의 경우 복수도 도주도 아닌 판타지 같은 낭만적 자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들의 목표를 감동, 각성, 희망의 구현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정유정 스타일의 독하고 구체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한 저에겐

밋밋하고 어정쩡한 해피엔딩 이상으로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라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별 두 개나 세 개에 머문 서평들도 간혹 보여서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독특한 서사와 캐릭터, 성실한 취재에 기반한 디테일한 묘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감동, 각성, 희망에 방점을 찍은 엔딩에는 제 취향이 적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7년의 밤‘28’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종의 기원에서 실망한 탓인지

이후 출간된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하다진이, 지니는 아예 읽을 생각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제겐 독하고 센 정유정 이야기만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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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2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오유리 옮김 / 작가정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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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략의 스토리에 대해서도, 드라마로 만들어진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라는 묘한 제목과 그에 어울리는 표지 디자인은

비슷한 제목을 지닌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달의 뒷면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어설픈 짐작은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엄청난 착각이었던 걸로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유명한 호텔 웨딩홀에서 한 날 열린 네 건의 결혼식을 소재로

결혼 당사자, 웨딩플래너, 하객 등 여러 인물의 희로애락을 그린 옴니버스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호텔 아르마이티는 화려한 웨딩홀로 유명한 곳입니다.

500만 엔이 넘는 엄청난 비용뿐 아니라 예비신랑신부가 꼽는 1순위 웨딩홀이기 때문인데,

무슨 우연인지 길일로 꼽히는 1122일에 예정된 네 건의 결혼식엔

저마다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기구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약혼자의 어이없는 행태로 파혼을 겪은 뒤 웨딩플래너가 된 5년차 베테랑 야마이 다카코가

사상 최악의 신부를 맞아 결혼식 당일까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이야기를 포함하여,

부모조차 헷갈리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꾸민 기상천외한 신부 바꿔치기 음모,

좋아하는 이모의 결혼식을 앞두고 예비 이모부의 끔찍한 비밀을 알아채버린 소년의 혼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늘 인생의 바리케이드가 자신을 지켜줬다는 행운을 믿는 한 유부남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실을 감춘 채 또 한 여자의 신랑이 되어 결혼식 당일을 맞이하게 되자

초조함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벌이는 위험하고 무모한 행각 등이 그것입니다.

 

당사자는 물론 식장 관계자나 하객 모두 다소 들뜨기 마련인 결혼식이 이야기의 주 무대지만

그 들뜬 분위기의 이면에는 비밀과 거짓말, 분노와 공포, 자책과 혼란 등

결혼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행하고 불편한 감정들이 깔려있습니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누군가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알아선 안 될 비밀 때문에 홀로 괴로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

미스터리는 물론 갈수록 증폭되는 긴장감이 시종일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무겁거나 심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국식 로맨스나 블랙코미디 또는 우화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상황은 분명 심각해 보이지만 독자는 그 이상의 가벼움도 동시에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짝 과장해서 말하면 미스터리와 긴장감이 잘 버무려진 유쾌한 시트콤에 가까운 작품인데,

비유하자면, 포장은 꽤 심각하지만 내용물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같다고 할까요?

 

누구나 이 작품 속 네 건의 결혼식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엔딩에 이를지는 쉽게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츠지무라 미즈키다운 적절한 반전과 소소한 감동이 숨어 있는데

덕분에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한 번에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보태면...

이 작품의 원제는 本日大安なり, 직역하면 오늘은 만사 대길하게정도인데,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의 국내 소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직역 제목은 츠지무라 미즈키의 팬이라도 그리 끌리는 제목이 아닌 건 맞습니다.

그렇다 해도 달의 뒷면은 비밀에 부쳐라는 뜬금없는 번역 제목이 나온 이유는 뭘까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뜬금없는 제목의 불편함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통 가시질 않았습니다.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을 연상시키는 표지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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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 위기의 남자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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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5편인 드롭의 제목에는 세 가지 중첩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두 가지는 이번 작품에서 보슈가 맡은 사건과 관련 있는데,

우선 22년 전 살해당한 19세 여성의 몸에서 발견된 한 방울(a drop)의 혈흔이 하나이고,

고급호텔에서 일어난 시의원 아들의 추락(drop) 사건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보슈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시켜준 퇴직유예제도(DROP)가 그것인데,

세 개의 ‘drop’ 모두 보슈에게 꽤 묵직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한국판에만 있는 것 같지만) ‘위기의 남자라는 부제가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작 나인 드래곤이후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에서 다시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돌아온 보슈는

LA경찰국과의 계약 만료 이후 퇴직유예제도를 통해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을 연장받습니다.

22년 전의 19세 여성 살해사건을 맡은 보슈는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와 수사준비를 하지만

갑자기 국장으로부터 시의원 아들의 추락사 사건부터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곤 의아해합니다.

일명 하이징고(경찰수뇌부가 관심을 갖거나 정치적 외압이 가해지는 사건)라는 얘긴데,

더 큰 문제는 그 시의원이 보슈에게는 최악의 악연인 전 부국장 어빈 어빙이란 점입니다.

한때 자신을 파멸시키려던 어빙이 자신을 점찍어 수사를 맡겼다는 점에 보슈는 크게 놀라지만

모든 사감을 억누른 채 적극적으로 추락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 22년 전 19세 여성 살해사건까지 병행하던 보슈는

오로지 피해자의 몸에서 채취한 피 한 방울밖에 가진 게 없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은 끝에 LA 전체를 충격에 빠뜨릴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때 LA경찰국 부국장을 지냈던 어빙과 그 휘하에 있던 보슈의 악연은 무척이나 질깁니다.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에 보슈가 적잖은 역할을 했다고 믿는 어빙은

보슈는 물론 LA경찰국을 괴롭히기 위해 시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패를 부려왔습니다.

그런 어빙이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보슈를 택한 건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는 일인데

보슈는 악연과 수사는 별개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어느 때보다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문제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정치적인 냄새가 진동하고 불편한 위화감이 든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서 하이징고를 다루긴 했지만

드롭은 정치권과 경찰과 언론 사이에 낀 일개 형사보슈의 자존감을 무너뜨릴 정도로

압도적인 깊이와 무게를 지닌 하이징고를 전면에 내세운 셈인데,

그래선지 사건을 해결하고도 참담함을 느끼는 보슈를 지켜보는 건 꽤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능한 형사였다가 관료의 길을 택한 예전 파트너 키즈 라이더의 정치적 태도는

보슈에겐 연장된 39개월의 형사로서의 삶 자체를 회의적으로 여기게 만들기까지 하는데

모두가 중요하거나 모두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명감만으로 버텨온 보슈가

과연 이후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 무척 궁금하면서도 안쓰러워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전개되는 22년 전 19세 여성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추격전으로 그려지지만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원초적인 문제까지 함께 다루고 있어서

하이징고와는 또 다른 긴장감과 주제의식을 전해줍니다.

악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인 사람을 동정해야 하는가?”,

악은 과연 선의로 갱생될 수 있는 것인가?” 등 정답 없는 물음들이 사건에 내재돼있어서

단순히 범인 찾기나 진실 찾기 이상의 무게감을 맛볼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건 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보슈의 딸 매들린의 이야기입니다.

전작인 나인 드래곤이후 보슈와 함께 살게 된 매들린은 이제 15살이 됐습니다.

그 또래 치곤 아빠와의 둘만의 생활에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매들린은 보슈가 놀랄 정도로 형사의 딸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더 놀라운 건 매들린의 꿈이 보슈를 꼭 닮은 유능한 형사라는 점입니다.

추리는 물론 사격 실력도 만만치 않은 매들린을 지켜보고 있으면

언젠가 강력계 신참 매들린 보슈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자연스레 갖게 됩니다.

 

하이징고와 소시오패스, 그리고 딸 매들린의 이야기까지 풍성하게 차려진 작품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시리즈 가운데 만족도가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꼽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제 39개월밖에 남지 않은 보슈의 형사로서의 유효기간이 아쉽긴 하지만

후속작인 시리즈 16블랙 박스이후에도 (2020년 기준, 다른 주인공과의 콜라보를 포함)

무려 일곱 편의 작품에 그가 등장한 걸 보면 아쉬움 이상의 안도감도 느끼게 됩니다.

 

2021년이 막 시작된 지금까지도 해리 보슈 시리즈의 신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The Burning Room’이란 제목으로 레이철 월링이 함께 등장하는 걸로 아는데,

미국 출간이 2014년이었으니 한국에도 진작 소개됐어야 할 작품입니다.

부디 2021년에는 못 해도 두어 편 정도는 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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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고대~근대 편 - 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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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한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허무한 망상이란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망상대로 역사가 바뀌었다 해도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고

오히려 더 큰 비극이나 참사를 이끌어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서문에서 인류 역사 전반에 일관된 현상이 하나 있다면,

아무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흥미를 돋우는 독특한 주제와 형식이라도 지루한 강의 스타일의 역사서라면 금세 질렸겠지만

재미있는 인강을 듣는 듯 재치 있고 유머 넘치는 문장들 덕분에

잘 모르거나 어렴풋이 알던 역사적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임진왜란 등 조선이 등장하는 챕터도 몇몇 들어있는데

아무래도 좀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각 챕터마다 역사적 팩트를 기술한 뒤에 언급된 가정법이 재미있었는데,

그때 그랬더라면 이렇게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작가의 바람(?)

때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때론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챕터는,

탈출 순간에도 화려한 마차를 고집했던 탓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

문화적 차이를 간과한 탓에 식민지 군대의 반란을 자초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어이없는 실수,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넘기게 된 역사적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

애초의 목적과 달리 오히려 미국의 경제를 후퇴시킨 금주법의 아이러니,

히틀러가 나치의 괴수가 아니라 평범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던 기막힌 사연 등입니다.

 

고대~근대 편에는 모두 50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

기초지식 자체가 별로 없는 오랜 역사적 사건은 아무래도 100% 몰입하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서인지 현대편에 실려 있을 에피소드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흑역사라는 건 어차피 결과론일 뿐 그 당시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간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 자체도 분명히 유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지금의 권력자들이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흑역사라는 것 대부분이 위정자 또는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필독서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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