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쿤룬 삼부곡 1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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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년 스녠은 살인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살인집단 ‘JACK’의 조직원만 골라 살해한다. 심한 결벽증 때문에 살인 현장을 항상 강박적으로 청소하며, 죽어 가는 자에게 청소의 요령을 한마디씩 알려 주는 기이한 버릇이 있다. 스녠은 어린 시절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JACK’의 조직원에게 살해당한 그날 이후로 조직원 전부를 죽여 없애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 때문에 일부 소실된 그날의 기억은 늘 스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의 진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스녠은 그날 이상의 충격을 받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제목과 표지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와 이야기가 담긴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과 결코 마르지 않을 복수심으로 중무장한 주인공 스녠은 피도 눈물도 없이 조직원을 살해하는 와중에도 청결에 집착하는 특이한 캐릭터인데, 이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조합은 실은 스녠의 참혹했던 어린 시절이 남긴 트라우마라서 처음엔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읽히다가 나중엔 꽤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조금씩 그 무대를 옮겨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구조인데, 가장 큰 이유는 그날에 관한 스녠의 소실된 기억때문입니다. , 스녠은 소중한 사람을 조직원에게 잃은 뒤로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긴 했지만 정작 그날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탓에 때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며 심한 자책에 빠지기도 합니다. , 그 자책은 자신이 벌이는 복수극 자체에 대한 회의로까지 번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스녠의 과거와 그날의 진실이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가 될 수밖에 없고, 이야기는 아주 조금씩 과거 속으로 무대를 옮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조직원에 대한 복수극과 함께 스녠의 소실된 기억 찾기가 핵심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스녠 못잖게 비밀투성이인 인물들이 개입합니다. 하나는 스녠에게 ‘JACK’ 조직원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판매상 다비도프이고, 또 하나는 부와 명예와 미모까지 갖춘 심리치료사 닥터 야오입니다. 이들은 스녠의 복수극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듯 하면서도 언제라도 스녠의 뒤통수를 칠 것만 같은 수상쩍은 분위기를 내뿜는 인물들입니다. 한 조직원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스녠이 소실된 그날의 기억 일부를 떠올리자 두 사람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냅니다.

 

미스터리든 스릴러든 어지간히 잔혹한 장면들을 꽤 많이 읽은 편이지만 잭 더 리퍼를 숭배하는 조직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살상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희생자의 배를 갈랐던 잭 더 리퍼의 행위를 모방한 살인수법은 무척 디테일하게 묘사되는데 그 장면들의 잔혹함은 개인적으로도 거의 역대급 인상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혹 터지는 블랙 코미디 코드 덕분에 몸서리쳐지는 잔혹함이 중화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결벽증을 갖게 된 스녠은 자연스레 소통에도 익숙지 않은데 그런 스녠 앞에 수시로 나타나 허무 개그를 자아내는 건 일명 사축’(社畜) 샤오쥔입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회사 사람들 탓에 삶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샤오쥔은 특유의 낙천적 성격 덕분에 스녠과 가까워집니다. 본편 뒤에 수록된 번외편은 샤오쥔 덕분에 조금씩 평범한 세상에 적응하는 스녠이 그려지는데 그래서인지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낳기도 합니다.

 

최근 중화권 장르물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는 독특한 캐릭터와 설정 덕분에 꽤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간혹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다소 억지스런 부분도 있는데다 중화권 장르물 특유의 가볍고 요란하고 날것 같은 분위기도 작품 전반에 깔려 있지만 스녠의 캐릭터와 주변 인물들이 빚어내는 블랙 코미디가 곁들여진 잔혹무도한 서사는 그런 아쉬움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흥미롭게 읽힙니다. 다만, 예전에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이 그랬듯이 재미있지만 너무 잔인해서 함부로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인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제 주위에선 이 코멘트 때문에 살육에 이르는 병을 찾아 읽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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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6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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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보슈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에서 보슈는 딸 매들린이 챙겨준 60세 생일을 맞이합니다.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가 40세였으니 어느 새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전작인 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5년 더 연장 받은 보슈는

그 가운데 1년이란 시간을 보낸 가운데 그에겐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1992년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의 배경, 즉 보슈가 처음 독자들과 만난 해입니다.

그 특별한 해의 5월 첫날 새벽, LA를 악몽으로 몰아넣은 대폭동의 한 복판에서

보슈는 덴마크 여기자 안네케 예스페르센이 처형당하듯 살해당한 사건을 맡은 바 있는데,

폭동의 와중에 벌어진 무수한 사건으로 인해 당시 보슈는 단 15분밖에 조사할 시간이 없었고

탄피 하나 외엔 아무 성과도 없이 시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결국 예스페르센 사건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는데,

운명 같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보슈는 20년 전의 미안함을 갚을 기회를 잡게 됩니다.

우선 경찰국장이 폭동 20주년을 맞아 당시 미제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정치 쇼를 펼쳤고

이어 보슈가 20년 전 예스페르센 피살 현장에서 유일하게 수거했던 탄피를 배출한 총기가

최근 다른 사건에서 쓰인 사실이 과학수사를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운명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만큼 다른 때보다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보슈의 수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일명 건 워크(Gun Walk), 즉 여러 사건에 걸쳐있는 탄도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20년 전 예스페르센을 살해한 총기의 행방을 찾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왜 덴마크 여기자가 LA폭동 한복판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보슈는 이번 수사에서 파트너 데이비드 추 없이 거의 단독수사를 감행합니다.

시간만 잡아먹을 뿐 무의미해 보이는 갱단 사건의 기초자료 조사부터 시작해서

불법과 합법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관련자들을 샅샅이 탐문합니다.

더불어, 예스페르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유족은 물론 덴마크 신문사까지 수소문하여

그녀가 LA에 온 이유와 그 전후의 동선을 이 잡듯이 포착하려 애씁니다.

신속한 조사를 위해 악연밖에 남지 않은 전 연인인 FBI요원 레이철 월링의 힘까지 빌리는데

복잡한 감정을 무릅써가면서 분투하는 보슈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슈에겐 내부의 적들의 방해가 뒤따릅니다.

새롭게 미제사건 전담반장으로 부임한 오툴은 유치한 논리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관료인데

20년 선배인 보슈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 한때 평직원들의 환호를 받았던 경찰국장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치꾼으로 변질되더니

급기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고 나섭니다.

폭동 20주년에 맞춰 기획된 미제사건 수사에서 백인여자 피살 사건이 제일 먼저 해결될 경우

정치적, 인종적 문제 때문에 괜한 역풍과 함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논리인데,

피해자와 유족만 생각하는 보슈 입장에선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헛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사고 하나만으로도 바로 해고될 수 있는 계약직 형사 보슈에겐 큰 위협이 분명하지만

그는 이제는 더는 놀랍지도 않은 내부 감찰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400여 페이지 내내 군살 하나 없이 알맹이로만 채워진 듯해서 다소 뻑뻑하게 읽히긴 했지만

그 가운데 쉬어갈 수 있게끔 안배한 이야기는 이제 16살이 된 딸 매들린에 관한 것입니다.

보슈는 사건 때문에 딸을 방치한다는 자책감에 미안해하지만 정작 매들린 본인은 꿋꿋합니다.

여전히 경찰의 꿈을 놓지 않은 채 보슈의 경찰 DNA’를 차곡차곡 물려받기도 합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 안 된 후속작들에서 매들린이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보슈 부녀의 콤비 플레이를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른 조연들은 딱 자기가 할 역할만 하고 빠진 듯 해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는 앞서 언급한대로 보슈의 원맨쇼덕분에 설 자리를 잃었고,

전작인 드롭에서 인연을 맺은 보슈의 연인 해나 스톤 역시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예전 파트너 제리 에드거는 회상 장면에만 등장했고,

전 연인인 레이철 월링 역시 카메오처럼 잠깐만 등장해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그나마 그녀는 후속작인 ‘The Burning Room’(미출간)에서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이번 작품에서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보슈의 감찰을 맡은 3급 형사 낸시 맨덴홀이 내내 주목을 끌었는데,

감찰계 형사답지 않은 그녀의 태도는 다음 작품에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보슈의 다음 연인이 되지 않을까, 싶은 설렘 섞인 궁금함이라고 할까요?

 

20209월에 시작한 해리보슈+@ 다시 읽기블랙 박스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동안 해리 보슈 시리즈’ 16편과 보슈가 등장하진 않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는 4편을 포함

모두 20편의 작품을 순서대로 다시 읽으면서 이 시리즈의 매력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보슈와 주변 인물들의 20년간의 성장과 변화를 연대기처럼 읽은 것이 흥미로웠고

한 작품 속에 전작들의 설정들(인물과 사건)이 살짝 끼어든 대목들 역시

순서대로 읽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이 한국에서 20197월에 출간됐으니 대략 1년 반 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2020년에 해리 보슈 시리즈’ 23(미키 할러 시리즈’ 6)이 출간됐는데

최소한 7편의 작품에서 보슈의 활약을 더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저 무소식일 뿐인 한국 출간소식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2020년을 건너뛴 만큼 부디 2021년에는 꼭 보슈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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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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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인 엄마 수제트,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인 알렉스 그리고 사랑스러운 일곱 살 딸 해나.

완벽해 보이지만 이들 가족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심각한 균열을 안고 살아간다.

해나는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일곱 살이 되도록 도무지 말을 내뱉지 않는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해나가 연이어 퇴학을 당한 후론 수제트가 홈스쿨링을 담당하지만

해나의 행동이 점점 위험하고 잔인해지자 수제트는 심신의 쇠약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예전에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부모도 아이가 그 또래가 되면 밉다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그 말은 세상이 변하고 아이들이 세상에 빨리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이렇게 진화했습니다.

미운 세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

 

이 작품 속 일곱 살 해나는 그저 평범한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 아닙니다.

끔찍한 소리지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게 확실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라고 할까요?

모함과 속임수 등 소소한 폭력으로 시작된 엄마 수제트를 향한 해나의 공격은

수제트를 사라지게 하거나 죽이겠다는 확고한 목표의식과 함께 치명적인 수위를 넘어섭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나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마치 말 자체를 거부하듯 말이죠.

수제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 역시 ?”라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수제트에 대한 증오가 싹텄던) 해나의 세 살 무렵의 기억이 아주 잠깐 묘사되긴 하지만

그것을 해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원인으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습니다.

작가 역시 ?”라는 궁금증에 대해 뚜렷한 인과관계로 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위험하고도 불가지한 그 무엇이 발산하는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쌓아갈 뿐입니다.

 

한편, 해나의 소시오패스 행각의 대의중 하나는 엄마에게 사로잡힌 아빠 구하기입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읽고 공감해주는 아빠 알렉스만이 해나에겐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언행을 일일이 일러바치는 수제트를 좀처럼 믿지 않는 알렉스의 태도 덕분에

해나는 승리감에 도취하는 것은 물론 훨씬 더 위험한 다음 계획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구도만 보면 아가이자 악마인 해나와 엄마 수제트 간의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로 보이지만

실은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띤 논픽션 기록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수제트와 해나 모녀의 우열 관계가 역전되거나 아빠 알렉스의 태도가 점차 변하는 등

뚜렷한 굴곡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기승전결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에 매료됐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글을 쓰게 됐다는 작가의 이력을 생각해 보면

훨씬 더 큰 파열음과 얼얼한 충격을 지닌 비극으로 치닫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작가는 그보다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아를 둔 가족의 비극자체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 작가는 수제트를 통해 여성모성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합니다.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정작 필요할 땐 방치했던 무책임한 엄마를 증오했던 수제트는

그런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나 한때 전도유망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딸에게 공포심을 느끼는 이상한 엄마이자 무력한 전업주부가 돼있을 뿐입니다.

수제트는 엄마를 증오했던 것 이상의 혐오와 공포를 딸 해나에게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해나의 이상증세가 마치 (자신의 엄마처럼) 모자란 모성 탓인 양 자책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여성에게 모성이란 당연한 건지, 해나가 없어지길 바라는 자신이 이상한 건 아닌지,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모성

어린 소시오패스 해나가 낳은 비극 못잖게 이 작품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데뷔작!”이라든가 영화계를 매료시킨 서스펜스 스릴러의 절정

이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이 개인적으론 조금 과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춘 서스펜스 스릴러, 혹은 스티븐 킹 스타일의 서사를 기대했다가

논픽션에 가까운 이야기 전개에 다소 아쉬움을 느낀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리얼리티는 생생했고 긴장감 역시 픽션과는 질적으로 달랐던 게 사실입니다.

수시로 내가 수제트라면?”, “내가 알렉스라면?”이라며 스스로를 대입시켜보곤 했던 것도

어쩌면 이 작품만이 가지는 리얼리티의 산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본인이 영화 프로듀서인만큼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은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취향은 아니지만 이 작품만은 꼭 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수제트의 공포와 장래가 촉망되는 소시오패스해나의 폭주는

어쩌면 영상을 통해 더 강렬하고 진하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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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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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미 마코토는 일본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20년에만 두 편의 작품이 출간되어 조금씩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작가입니다.

우사미 마코토와 처음 만난 작품인 소녀들은 밤을 걷는다’(현대문학)

호러, 기담,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포진된 (연작 성격의) 단편집입니다.

끈적함과 서늘함, 안쓰러움과 공포심이 묘하게 뒤섞인 10편의 단편들은 무척 매력적이었는데

덕분에 후속작, 그것도 그녀의 장편을 꼭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막바지에 드디어 어리석은 자의 독을 만나게 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50년에 걸친 시간적 배경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세 남녀의 기구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생 전반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965~66, 1985~86, 2015~2016년 등 세 시기가 배경인데,

현재 시점엔 고급 요양원에 몸을 의탁한 한 할머니가 과거를 되짚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80년대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30대 여성 요코와 기미의 인연과 함께

그녀들 사이에 낀 한 남자 유키오까지 포함된 세 남녀의 파국과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60년대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탄광촌을 무대로 절망에 빠진 여중생 기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 유키오와 함께 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물이나 사건 소개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 자세한 언급은 하기 힘들지만,

띠지에 적힌 문구인 그 순간 우리는 공범이 되었다.”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출발점은 시대의 어둠과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살인을 저지른 자들,

그래서 평생 그 죄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절망입니다.

이후 50년에 걸친 공범들의 악몽 같은 삶이 그려지고

그들의 삶에 끼어든 또 다른 의미의 공범들의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그려진다는 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소개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되어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죽기 전에 다 수지타산이 맞춰지게 돼있다.”인데,

말하자면, 죄를 지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지지 못하고 오랜 시간 서로의 죄를 보듬으며 살아온 기미와 유키오,

죽은 언니가 남긴 정신지체아 조카 다쓰야를 키우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에 몸서리치는 요코,

오랜 시간 기미와 유키오 주위를 맴돌며 악의 화신처럼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온 남자,

그리고 그 외에도 이들 주위를 맴돌았던 꽤 많은 인물들까지

대부분 바로 이 인생의 수지타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기다 시대의 풍파, 죄와 업보, 비극과 운명이라는 불길한 기운의 재료들까지 곁들여져서

읽는 내내 가슴 한쪽에 큰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한 무거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설정 때문인지 수시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야기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한순간 인생의 방향이 최악으로 틀어져버린 주인공들을

애증 섞인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쉽게 잊히지 않을 깊은 여운을 각인시킨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막장의 끝이란 소릴 듣기에 딱 알맞긴 하지만

활자로 만난 50년에 걸친 비극은 막장과는 거리가 먼 비애감을 깊이 심어줍니다.

,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임에도 진범 찾기가 목적인 정통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시대의 풍파에 휩쓸린 인간의 절망과 내면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비평에 관심이 끌린다면

어리석은 자의 독과 꼭 만나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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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자
재스퍼 드윗 지음, 서은원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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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를 졸업하고 수련의 과정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신참 정신과 의사 파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력과 재정이 열악한 코네티컷 주립 정신병원에 자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6살에 입원한 뒤 30년 동안 수용돼있는 조라는 환자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의 주목을 끈 건 단순히 긴 입원 기간뿐 아니라 확실한 병명조차 없다는 점과 함께

그동안 그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이 미치거나 자살했다는 기이한 사실이었습니다.

병원장과 상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당의를 자처한 파커는 치료 첫날부터 충격에 빠집니다.

조는 진료 서류상의 기록이나 떠도는 소문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알맹이는 위에서 소개한 줄거리 다음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한 달 가까이 조와 면담을 나눈 파커가 그의 처치를 놓고 병원 측과 충돌하는 이야기,

30년 전 최초로 조를 담당했던 의사와의 격론 끝에 다다른 파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결론,

6살의 조가 겪었던 야경증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부모를 찾아간 일,

그리고 조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찾아온 끔찍한 혼란과 패닉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출판사조차 이 뒷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있어서

이렇듯 두루뭉술하고 감질날 정도로만 서평에 담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다 읽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주 오래 전에 푹 빠졌던 환상특급이란 드라마였습니다.

매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나름 반전에 대비하곤 했지만

번번이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적인 엔딩에 놀라움과 소름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환자는 그만큼 환상특급에 잘 어울리는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러 분위기가 살짝 가미된 메디컬 스릴러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솔직히 어디로 튈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30년 간 갇혀있던 소시오패스의 탈출기? 또는 이후의 연쇄살인극?

그렇다면 주인공인 의사 파커의 역할은 뭘까?, 등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일었는데,

환자도 의사도 정신과 쪽 인물이라 그런지 그 분야의 모호한묘사들이 계속 이어져서

아무래도 소시오패스나 연쇄살인보다는 심리 스릴러로 흐를 것 같은 예감이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선사한 막판 반전은 그야말로 환상특급을 능가하는 충격적인 것이었고,

혹시 잘못 읽은 건 아닐까, 싶어 몇 번이고 반전이 등장한 대목을 되읽을 정도였습니다.

 

워낙 극단적인 반전이라 독자에 따라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릴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어느 쪽이 됐든 깜짝 반전이 전해 준 충격의 강도는 엇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충격다음으로 받은 인상이 당황과 허탈 사이쯤 됐는데

호러와 공포 쪽 취향의 독자라면 꽤 환호할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매끄러웠지만 결정적 대목에서 살짝 모호했던 번역이 아쉬웠고,

페이지마다 글씨 진하기가 달랐던 인쇄 부분의 오류는 계속 눈에 거슬렸습니다.

낯선 이름의 신생 출판사로 보이는데 응원과 함께 좀더 세심한 마무리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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