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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6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평점 :
‘해리 보슈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에서 보슈는 딸 매들린이 챙겨준 60세 생일을 맞이합니다.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가 40세였으니 어느 새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전작인 ‘드롭’에서 퇴직유예제도(DROP)를 통해 형사로서의 삶을 5년 더 연장 받은 보슈는
그 가운데 1년이란 시간을 보낸 가운데 그에겐 너무나도 특별한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1992년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의 배경, 즉 보슈가 처음 독자들과 만난 해입니다.
그 특별한 해의 5월 첫날 새벽, LA를 악몽으로 몰아넣은 대폭동의 한 복판에서
보슈는 덴마크 여기자 안네케 예스페르센이 처형당하듯 살해당한 사건을 맡은 바 있는데,
폭동의 와중에 벌어진 무수한 사건으로 인해 당시 보슈는 단 15분밖에 조사할 시간이 없었고
탄피 하나 외엔 아무 성과도 없이 시신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결국 예스페르센 사건은 그 후로도 20년 동안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는데,
운명 같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보슈는 20년 전의 미안함을 갚을 기회를 잡게 됩니다.
우선 경찰국장이 폭동 20주년을 맞아 당시 미제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정치 쇼’를 펼쳤고
이어 보슈가 20년 전 예스페르센 피살 현장에서 유일하게 수거했던 탄피를 배출한 총기가
최근 다른 사건에서 쓰인 사실이 과학수사를 통해 밝혀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운명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만큼 다른 때보다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보슈의 수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일명 건 워크(Gun Walk), 즉 여러 사건에 걸쳐있는 탄도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20년 전 예스페르센을 살해한 총기의 행방을 찾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왜 덴마크 여기자가 LA폭동 한복판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보슈는 이번 수사에서 파트너 데이비드 추 없이 거의 단독수사를 감행합니다.
시간만 잡아먹을 뿐 무의미해 보이는 갱단 사건의 기초자료 조사부터 시작해서
불법과 합법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며 관련자들을 샅샅이 탐문합니다.
더불어, 예스페르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유족은 물론 덴마크 신문사까지 수소문하여
그녀가 LA에 온 이유와 그 전후의 동선을 이 잡듯이 포착하려 애씁니다.
신속한 조사를 위해 악연밖에 남지 않은 전 연인인 FBI요원 레이철 월링의 힘까지 빌리는데
복잡한 감정을 무릅써가면서 분투하는 보슈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보슈에겐 ‘내부의 적’들의 방해가 뒤따릅니다.
새롭게 미제사건 전담반장으로 부임한 오툴은 유치한 논리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관료인데
20년 선배인 보슈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또, 한때 평직원들의 환호를 받았던 경찰국장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치꾼으로 변질되더니
급기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고 나섭니다.
폭동 20주년에 맞춰 기획된 미제사건 수사에서 백인여자 피살 사건이 제일 먼저 해결될 경우
정치적, 인종적 문제 때문에 괜한 역풍과 함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논리인데,
피해자와 유족만 생각하는 보슈 입장에선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헛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사고 하나만으로도 바로 해고될 수 있는 ‘계약직 형사 보슈’에겐 큰 위협이 분명하지만
그는 이제는 더는 놀랍지도 않은 내부 감찰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400여 페이지 내내 군살 하나 없이 알맹이로만 채워진 듯해서 다소 뻑뻑하게 읽히긴 했지만
그 가운데 쉬어갈 수 있게끔 안배한 이야기는 이제 16살이 된 딸 매들린에 관한 것입니다.
보슈는 사건 때문에 딸을 방치한다는 자책감에 미안해하지만 정작 매들린 본인은 꿋꿋합니다.
여전히 경찰의 꿈을 놓지 않은 채 보슈의 ‘경찰 DNA’를 차곡차곡 물려받기도 합니다.
아직 한국에 소개 안 된 후속작들에서 매들린이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보슈 부녀의 콤비 플레이를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른 조연들은 딱 자기가 할 역할만 하고 빠진 듯 해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는 앞서 언급한대로 보슈의 ‘원맨쇼’ 덕분에 설 자리를 잃었고,
전작인 ‘드롭’에서 인연을 맺은 보슈의 연인 해나 스톤 역시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예전 파트너 제리 에드거는 회상 장면에만 등장했고,
전 연인인 레이철 월링 역시 카메오처럼 잠깐만 등장해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그나마 그녀는 후속작인 ‘The Burning Room’(미출간)에서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이번 작품에서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보슈의 감찰을 맡은 3급 형사 낸시 맨덴홀이 내내 주목을 끌었는데,
감찰계 형사답지 않은 그녀의 태도는 다음 작품에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보슈의 다음 연인이 되지 않을까, 싶은 설렘 섞인 궁금함이라고 할까요?
2020년 9월에 시작한 ‘해리보슈+@ 다시 읽기’는 ‘블랙 박스’를 마지막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동안 ‘해리 보슈 시리즈’ 16편과 보슈가 등장하진 않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는 4편을 포함
모두 20편의 작품을 순서대로 다시 읽으면서 이 시리즈의 매력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보슈와 주변 인물들의 20년간의 성장과 변화를 연대기처럼 읽은 것이 흥미로웠고
한 작품 속에 전작들의 설정들(인물과 사건)이 살짝 끼어든 대목들 역시
순서대로 읽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시리즈 16편인 이 작품이 한국에서 2019년 7월에 출간됐으니 대략 1년 반 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2020년에 ‘해리 보슈 시리즈’ 23편(겸 ‘미키 할러 시리즈’ 6편)이 출간됐는데
최소한 7편의 작품에서 보슈의 활약을 더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저 무소식일 뿐인 한국 출간소식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2020년을 건너뛴 만큼 부디 2021년에는 꼭 보슈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