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버드, 블루버드
애티카 로크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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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00명이 채 안 되는 텍사스의 작은 마을 라크에서 연이어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희생자는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흑인 변호사와 라크에 살고 있던 백인 여성.

텍사스 레인저대런 매슈스는 친구이자 FBI 요원인 그렉에게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정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조사를 시작합니다.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연이어 희생당한 사건이라 인종 범죄로 확신했지만

조사와 탐문이 진행될수록 대런은 사건 이면에 또 다른 사연들이 숨어있음을 확신합니다.

ABT(텍사스 아리안 브라더후드)라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에 대한 의심 역시 접지는 않았지만

대런은 그보다는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작은 마을의 복잡하고 참혹한 악연에 더 주목합니다.

 

작품 속 설명에 따르면 텍사스 레인저스는 일반 경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해결하지 않는 범죄수사에 개입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텍사스의 최고 법집행기관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대런 매슈스는 그 가운데 보기 드문 흑인 레인저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텍사스에서 백인 못잖게 부와 명예를 갖춘 유복한 가문 출신인 대런은

변호사를 꿈꾸며 로스쿨을 다니던 중 거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종 혐오범죄에 충격을 받곤

아내와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정적인 변호사 대신 레인저의 길을 택한 인물입니다.

애초 그가 정직 상태에 놓인 것도 인종범죄에 휘말렸기 때문이었고,

라크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도 명백한 인종범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인종범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백인에 대한 편견 또는 동족에 대한 편애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정의감에 가깝습니다.

 

사건과 주인공 캐릭터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작품의 첫 번째 코드는 인종입니다.

흑백 인종이 드나들 수 있는 술집과 식당이 당연한 듯 분리돼있고

백인이 다수를 점한 법 집행기관은 희생자의 피부 색깔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게 현실입니다.

얼마 전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Black Lives Matter”를 떠올려보면

21세기에 접어든지 20년이 지나도 이 문제가 여전히 뜨거운 감자임을 알 수 있는데,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이 연이어 사망한 사건을 수사하는 흑인 레인저라는 설정 때문인지

읽는 내내 어느 한 페이지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흑인 레인저가 수사하는 인종범죄 스릴러에 머물지 않고

수십 년 전 잉태된 뒤 작은 마을 라크를 잠식해온 혹독한 악연과 가족사를 함께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거듭 증식된 뒤 임계점을 넘어선 끝에

기어이 끔찍한 살인사건들에 이르고 마는 비극적인 과정을 촘촘하고 밀도 있게 묘사합니다.

혹독한 악연과 가족사는 막장에 가까울 만큼 그 강도가 세기도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얽혀있기도 합니다.

덕분에 그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는 대런의 수사는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주인공인 대런을 괴롭히는 건 단지 라크의 백인들만이 아닙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앤젤스 플라이트에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가해자로든 피해자로든) 흑인이 개입된 사건의 경우 차라리 진실을 외면할지언정

결코 인종범죄로 비화되는 걸 원치 않는 법 집행기관의 상층부의 정치적 판단은

이 작품에서도 대런의 수사를 가로막는 큰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더구나 수사담당자가 정직 상태인 흑인 레인저라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대런이 이 걸림돌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막판까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지만 이 작품은 애티카 로크의 네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특히 에드거 상과 CWA 스틸대거, 앤서니 상을 동시 수상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와 힘과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대런 매슈스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출간된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는데

다 읽은 뒤 작가 소개를 보니 2019년에 후속작인 ‘Heaven, My Home’이 출간됐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건 대런 매슈스 시리즈가 아니라 ‘Highway 59 시리즈라고 이름 붙여진 점인데,

텍사스 외곽의 59번 고속도로 변의 작은 마을들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품 속에선 이 59번 고속도로가 북쪽으로 가려는 흑인들의 희망을 담고 있다고 묘사됐는데

과연 다음 작품에선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흑인 레인저 대런 매슈스

59번 고속도로 변의 어떤 마을에서 어떤 사연들과 마주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 새해 초부터 만만치 않은 내공의 작가와 첫 만남을 갖게 돼서 너무 반가웠는데

‘Highway 59 시리즈외에 그녀의 전작들도 빨리 만나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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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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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욕심만 부려왔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지만 연재물인 경우가 많은데다 개정된 작품도 많았고

여기저기 찾아보는 자료마다 출간연도가 제각각이거나 아예 표기 안 된 경우도 적잖은 탓에

일단 임의로 제가 정한 순서대로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이 작품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인 1946년 작 혼진 살인사건을 표제작으로

모두 두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입니다.

고백하자면 표제작 혼진 살인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편은 읽는 내내

십여 년 전에 읽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전혀 기억이 안 나나?”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읽은 건 2003년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혼징 살인사건이었고,

그 작품에 실린 건 표제작 혼징 살인사건나비부인 살인사건으로

수록작 자체가 이번에 읽은 시공사의 혼진 살인사건과는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참고로 나비부인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아닌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혼진 살인사건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첫 작품이란 기념비적인 위상과 함께

이후 이어지는 시리즈의 전반적인 특징들이 골고루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근대화의 물결과 봉건시대 잔재의 충돌이 몰고 온 비극적인 사건 설정,

어수룩해 보이지만 뛰어난 추리력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긴다이치의 매력,

그리고 그 시대의 미스터리를 풍미했던 각종 고전 트릭의 향연 등이 그것입니다.

오랜 역사와 명망을 지닌 여관 혼진을 지켜온 이치야나기 가문을 몰아친 참혹한 살인사건은

기괴함과 함께 이해 불가능한 밀실트릭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만

피해자 유족과의 인연으로 사건에 뛰어든 긴다이치 덕분에 그 전말이 드러납니다.

 

이보다 뒤늦게 집필된 또 다른 수록작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흑묘정 사건

패전 이후 충격과 혼란에 빠진 일본 사회의 단면과 함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의심과 증오에 빠진 개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20여 년 전 시작된 두 가문의 갈등과 대립이 낳은 참극을 그린 도르래 우물은 왜~’

긴다이치가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시리즈의 개성과 매력이 여전히 잘 살아있는 작품이고,

패전 후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악연 관계인 남녀의 비극을 다룬 흑묘정 사건

언제나처럼 뒤늦게 나타나고도 특유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하는 긴다이치가

범인이 정교하게 설계한 복잡한 트릭을 보기 좋게 해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작품에서 긴다이치의 추리는 독자로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비약적입니다.

긴다이치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바라봤던 사소한 것들이 정교한 추리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때론 결과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과정 자체가 실종된 깜짝 결론에 이르기도 해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는 이런 특징은 시리즈의 대부분 작품에서 목격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설정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애정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긴다이치의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벅머리에 초라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옷차림과 흥분하면 말까지 더듬는 그는

언제나 뒤늦게 현장에 투입되고도 사건이나 수사 관련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만드는데,

그 친밀감은 독자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듯 해보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가 내놓는 결과물은 유능하긴 해도 거만하고 재수 없는 명탐정의 성과라기보다는

겸손한 노력형 탐정이 근면하게 일궈낸 가치 있는 결론처럼 보이곤 합니다.

비약적 추리의 대명사인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와는 사뭇 대조적이라고 할까요?

 

다만, 긴다이치의 비범한 능력과 비약적 추리는 독자에 따라 거부감을 느낄 여지가 많고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올드하고 아날로그적인 이야기의 한계와 함께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킬 치명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애정하는 시리즈의 첫 편임에도 무난함을 뜻하는 별 4개에 그친 건 이런 이유 때문인데

아마도 앞으로 다시 읽을 작품 가운데 적잖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읽은 적이 있었음에도 마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웠던 사실은

미국 유학, 경미한 마약중독, 귀국 후 갑작스런 탐정으로의 변신 등 긴다이치의 이력이었는데

과거가 불분명한 모호한 인물이거나 혹은 평범한 소시민 출신 탐정이라고만 여겼던 탓인지

새삼 긴다이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흥미로운 사실들이었습니다.

또 긴다이치와의 교류를 통해 그가 다룬 사건을 소설로 옮기는 역할을 맡은 추리소설가 Y’

실은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 본인을 투영한 점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 재미있게 읽혔고

두 사람이 처음 맞대면 하는 장면은 마치 프리퀄을 읽는 듯한 신기함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 읽기를 이어가는 동안 이런 소소한 재미들을 재발견하게 될 것 같은데,

짧게는 7, 길게는 13~14년 만에 다시 만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맛을 만끽하려면

어쩌면 모든 게 다 새롭게 보이기만 하는 부족한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었지만 기억 안 남순서대로 시리즈 다시 읽기의 가장 큰 동력이자 매력이라면 너무 억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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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 라이어
태넌 존스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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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상세한 초반부 설정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갑자기 붐을 이룬 심리스릴러, 그중에서도 가족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은

때론 연쇄살인마나 액션 히어로를 다룬 작품들보다 더 짜릿한 매력을 주기도 했지만

적잖은 비율로 지루함과 실망감만 안기기도 해서 가급적 외면하려 한 게 사실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홍보카피에 끌어 쓰긴 했지만

완성도나 매력 면에서 과장 광고란 인상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나 표지, 한 줄 카피에 혹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태넌 존스라는 낯선 작가의, 그것도 데뷔작인 베터 라이어는 그런 경위로 접한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레슬리는 10년 전 집을 나가 소식을 끊은 동생 로빈을 찾아 나서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살아 숨 쉬는 동생이 아닌 죽어 있는 시체였다.

아버지의 유언 탓에 동생이 있어야만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 지망생 메리에게 죽은 동생 로빈을 연기해줄 것을 제안한다.

메리는 로빈 몫의 유산을 주겠다는 레슬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집으로 따라간다.

겉보기엔 부유하고 평화로운 가정이지만 레슬리의 집을 떠도는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메리는

호기심을 넘어 불안한 기운의 이유와 그 안에 깃든 비밀이 뭔지 직접 알아내려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언뜻 보면 유산을 노리고 가짜 동생을 끌어들인 레슬리의 유산상속 스릴러인 것 같지만

예상 외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로빈 역할을 맡아 거액의 사례금만 챙기면 될 메리가

주제넘게도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레슬리의 수상쩍은 비밀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됩니다.

레슬리의 집에 머물게 된 메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털어놓은 사정들이 모두 거짓말 같았고,

무엇보다 급히 상속받아야만 한다던 유산의 사용처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메리의 진실 찾기는 단순히 레슬리의 집 곳곳을 뒤지는데서 그치지 않고

마치 사립탐정이라도 된 양 거침없이 레슬리의 현재와 과거를 탐문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자 레슬리, 메리, 로빈은 각각

죽어야 하는 여인죽음을 연기하는 여인’, 그리고 죽은 여인으로 지칭됩니다.

모두 죽음과 관련 있는 캐릭터란 뜻인데 이 미스터리는 막판에야 독자들에게 공개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대부분 참혹한 비극의 산물로 밝혀지는데

작가는 막판까지 거듭된 반전을 통해 그 비극의 깊이와 무게를 더욱 묵직하게 빚어냅니다.

 

레슬리가 감추는 비밀들과 그것을 파헤치는 메리의 행적이 미스터리 코드를 담당하고 있다면

두 사람이 한 집에 머물며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심리스릴러의 본색을 잘 드러냅니다.

거기에 이미 사망한 레슬리의 부모의 결코 평온하지 못했던 말년의 삶이 끼어들고

단란해 보이는 레슬리 가족에게서 풍기는 은밀하고도 수상쩍은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이른 시간 안에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진실을 캐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마련해놓은 마지막 장면까지 짐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100페이지쯤에서 한 번 포기하려 했고, 200페이지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가족 중심의 심리스릴러가 대부분 그렇듯 느리고 지루한 전개였습니다.

레슬리가 메리를 동생 로빈의 대역으로 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지점까진 무척 빠르지만

그 뒤로 심리스릴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속도감은 느려지고 호흡은 마냥 길어집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막판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위해 필요한 포석인 건 이해하지만

느리고 지루한 심리스릴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일깨워 포기를 고민하게 한 것도 사실이라

어떻게든 완주해놓고도 다시는 심리스릴러는...”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문장이라곤 하나도 없겠지만 야박하고 이기적인 독자 입장에선

100페이지쯤 생략됐다면 속도감과 긴장감 가득한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정교한 미스터리 구성,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 매력적인 캐릭터, 거듭된 반전 등

데뷔작답지 않은 필력을 갖춘 작가라 후속작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후속작 역시 만연체의 심리스릴러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몰입도 높은 작품에 만족하는 것은 물론,

후속작이 기대되는 신인작가의 탄생에 당연히 환호하고도 남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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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기 쉬운 미래
우라가 카즈히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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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그 해의 베스트 11’으로 꼽았던 수면의 감옥의 우라가 카즈히로 작품입니다.

그 이후로 신간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띠지 앞면에 적힌 우라가 카즈히로 유작이란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20202월에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이 작품까지 단 두 편만 소개돼서 생소하게 여길 독자들이 훨씬 많겠지만

개인적으론 너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유명 만화가 진나이 류지는 어느 날 갑자기 약혼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패닉에 빠집니다.

어마어마한 팬을 보유하고 있던 연재만화의 여주인공을 허망하게 죽이는가 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은 물론 인생의 전부였던 만화에 대해 애정 하나 안 남을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약혼녀는 이틀 후에 죽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전달됩니다.

문제는 그 편지의 발신날짜가 약혼녀가 죽기 이틀 전이란 점입니다.

즉 누군가 약혼녀의 죽음을 예지했단 건데, 발신자를 만난 진나이는 더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진나이의 광팬인 한 남자는 숭배하던 여주인공을 함부로 죽인 진나이를 증오한 끝에

그를 죽이겠다는 각오와 함께 차근차근 살인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원제는 こわれもの’(, ), 즉 파손된 물건, 파손되기 쉬운 물건이란 뜻인데

깨지기 쉬운 미래는 내용과 주제를 잘 담아낸 번역 제목이란 생각입니다.

현재는 물론 모든 것이 밝고 환하던 진나이의 미래는 약혼녀의 죽음과 함께 깨지고 말았고

그녀의 죽음을 예지했던 자는 미래라는 게 얼마나 쉽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지를

진나이에게 재차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에게서 미래의 의미를 모두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실제로 진나이의 미래를 박살내고 빼앗으려는 한 광팬의 살의가 구체화될수록

독자는 그에게 과연 미래라는 게 남아있을까, 라는 불안한 의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가까이 있는 자의 죽음을 예지하는 능력자가 등장하지만 SF나 판타지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예지력 자체가 거듭되는 반전의 결정적 재료로 이용되는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수면의 감옥이 이중 구조, 클로즈드 서클, 교환살인 등 다양한 미스터리 코드가 뒤섞였다면

깨지기 쉬운 미래는 예지력과 미스터리가 정교하게 믹스돼 반전의 맛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실은 작가는 초중반까지 비교적 쉬운 힌트를 교묘하게 잘 위장해놓았는데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에 주목하다 보면 의외로 빠른 해답을 얻을 수도 있지만,

수면의 감옥에서도 그랬듯이 결국 독자는 마지막 한 방을 맞고 나서야

그 힌트들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는 미스터리의 쾌감을 만끽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약혼녀가 갑자기 죽었다고 그녀를 투영했던 인기 여주인공을 갑자기 죽인 진나이도,

숭배하던 여주인공을 죽인 만화가를 직접 살해하겠다고 나선 오타쿠 기질의 광팬도

실은 다소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이 있어서 100% 공감하긴 어려웠지만

그 점 외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완주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신작을 만나볼 수 없게 됐지만

한국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의 대표작 안도 나오키 시리즈를 통해서라도

우라가 카즈히로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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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벰버 로드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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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22,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보스 카를로스의 심복인 프랭크 기드리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신이 맡았던 작은 심부름이 그 거대한 암살 음모의 일부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건 관련 인물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자 살아남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도망치던 기드리는

두 딸과 함께 무책임한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LA로 향하던 샬럿과 마주친다.

기드리는 조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단란한 가족으로의 위장이 필요했고

차 고장으로 곤경에 처한 샬럿은 하루 빨리 LA에 도착하기 위해 기드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조직 최고의 암살자 폴 바로네가 무자비한 살인극을 벌이며 기드리를 바짝 추격해오는 가운데

우연과 운명 덕분에 함께 하게 된 여정의 끝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2019년에 읽은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루 버니의 작품입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은 오클라호마시티를 무대로

26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사건의 진실을 쫓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였는데

각각 참혹한 기억과 깊은 상심을 지닌 주인공들이 집요하게 진실 찾기에 나선 이야기라

무척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노벰버 로드196311월을 배경으로 한 로드 스릴러입니다.

목숨을 걸고, 또는 인생을 걸고 도망치면서도 애정, 온기, 추억들을 쌓아가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쫓는 피도 눈물도 없는 추격자라는 설정 때문에

읽는 내내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몸담았던 조직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살아남기 위해 과거와 단절하려는 기드리에게도,

꿈도 희망도 없는 소도시와 무책임한 남편이 지배하던 과거와 단절하려는 샬롯에게도

이 무모한 여정 끝에 딱히 믿고 의지할 사람이나 약속의 땅같은 게 있는 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와 바람만 갖고 각각 라스베이거스와 LA로 달려가긴 해도

그곳에는 비참한 죽음 또는 냉랭한 문전박대가 기다릴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벰버 로드를 달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지우고 싶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함께 보낸 1주일의 시간은 어쩌면 그들에겐 평생 가장한 행복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뉴올리언스의 환락과 폭력 속에서 살아온 기드리가 누군가를 간절히 지키고 싶어진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온 샬롯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온기를 느끼며 희망을 가진 것도

이전의 과거 속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면서도

기드리와 샬롯이 달콤한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를 바란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을 소재로 한 스릴러 중 기억나는 건 스티븐 킹의 ‘11/22/63’인데

시간여행을 동원한 기발한 발상은 놀라웠어도 이야기 자체는 다소 밋밋했던 반면,

노벰버 로드는 팩트에 기반한 픽션이지만 좀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설정을 지녔습니다.

대통령 암살을 도모한 마피아가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연루된 측근들을 제거한다는 구상은

케네디 암살을 소재로 활용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꿈과 희망을 위해 무모한 가출을 감행한 샬롯과 그녀의 딸들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단순한 액션 로드 스릴러를 넘어 휴먼드라마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습니다.

 

뉴올리언스 마피아 중간보스 기드리의 캐릭터 때문인지

작가가 문장에 멋도 많이 부리고 기교도 많이 부린 느낌이었는데

영화 대부를 보듯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다소 어렵게 읽힐 때도 있었습니다.

뭐랄까, 과도한 생략과 멋부림이 물 흐르듯 이어져야 할 책읽기를 살짝 방해한 느낌이랄까요?

, 기드리와 샬롯이 감정을 쌓아가는 시퀀스가 생각보다 좀 길게 묘사된 점이라든가

그들을 추격하는 암살자의 행보가 예상보다 처져 보인 점 등이 아쉬웠는데,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하나를 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당초 초고가 전작의 성공을 의식한 듯 너무나 대중적인 공식을 따르는 스릴러가 된 탓에

작가가 기본 설정만 남겨두고 1년에 걸쳐 거의 새로 썼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봤는데,

그 초고가 무척 궁금하기도 하고 제 취향에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해봤습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나 노벰버 로드모두 2%가 조금 넘는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앞으로도 루 버니의 신작 소식에는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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