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평점 :
1928년 로드 오슈(Lord Auch)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조르주 바타유의 첫 장편소설이다.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이 있는 소녀 시몬과 점점 더 성(性)에 탐닉하는 소년 ‘나’,
그리고 둘 사이에서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소녀 마르셀 등 세 명의 10대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눈(目)’이라는 사물이다.
또 눈과 형태, 색깔, 어휘의 유사성을 지닌 ‘달걀’과 ‘불알’이 주요 매개체로 등장한다.
‘눈 이야기’는 과잉과 광기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성 입문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 바타유의
사상적 근간이 엿보이는 한 편의 철학적 우화로 읽을 수도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인간의 범주는 영원이나 영성 혹은 지성만이 아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
본문을 읽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작가 조르주 바타유의 일성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의 작품이지만
‘이성적인 관점’에선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오직 원초적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거기다가 끔찍하기까지 한 육체의 향연 그 자체일 뿐입니다.
점잖게 말하면 그렇고, 좀 심하게 말하면 지독하고 파괴적인 포르노그래피라고 할까요?
먼 친척뻘인 ‘나’와 시몬은 첫 만남부터 서로의 육체와 배설물을 통해 욕망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마르셀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부모들 몰래 또래들을 불러 모아 난교 파티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욕망 추구는 감금, 자살, 살인, 도피를 낳기에 이르고,
스페인으로 무대를 옮긴 ‘나’와 시몬은 스폰서, 투우사, 신부 등을 통해
한층 더 원초적이고 강도 높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짐승 같은 본능을 실현시킵니다.
주인공들이 10대로 설정된 탓에 ‘철없는 아이들의 무분별한 성 입문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나’, 시몬, 마르셀 등 세 인물에게서 10대의 향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난 침대 속에서 이렇게 부인들처럼 하는 건 흥미가 없어!”라는 시몬의 원색적인 고백은
풍부한 경험으로 다져진 닳고 닳은(?) 불량청소년의 음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은 그 어떤 이물질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본능일 뿐입니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노골적인 성애 작품들보다 충격이 컸던 건
아마도 이런 10대 주인공들의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태초부터 짐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에 관한 한 초보자지만 아직 깨끗하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소유한 10대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 아닌가, 추정해볼 뿐입니다.
본편 자체는 23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절반 조금 못 미친 정도이고
그 뒤로 작가 스스로의 고백을 담은 ‘일치들’과 수전 손택의 ‘해설’, 김태용의 ‘해제’(解題) 등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부록들이 실려 있습니다.
육체와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배설물에 탐닉하며 욕망을 분출하는 10대들의 이야기는
사실 읽는 내내 당혹스럽기만 했을 뿐 어떤 형태의 지적 고민도 일으키지 못한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허겁지겁 ‘부록들’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 당혹감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공포, 배설물과 눈(目)에 집착하게 됐던 사연을 담은 작가의 고백 ‘일치들’은
흥미롭긴 했어도 ‘불행한 가정환경 탓에 만들어진 소시오패스’처럼 상투적으로 읽혔고,
포르노그래피와 문학에 대한 수전 손택의 장황한 에세이는 그 요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으며,
환각과 몽상 그 자체처럼 읽힌 김태용의 해제 역시 작품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행간에 숨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 자괴감이 강해진 끝에
“이 작품은 형이상학적 논리와 논쟁을 즐기는 평론가를 위한 텍스트.”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정반대로 “이건 단지 자극적인 변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해.”라는 반발심만 생겼다고 할까요?
‘부록들’ 없이도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를 단박에 깨달은 누군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평점을 두고 “무식, 저급, 몰이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탐미주의의 여운과 미덕도,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문제의식도 발견하지 못한 저로서는
고백하자면, 민망한 성적 자극을 받은 것 외엔 달리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는 작품입니다.
‘부록들’에서 얻은 약간의 이해력을 동원해 다시 한 번 본편을 읽어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당장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일단 책장에 꽂아놓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는 바타유의 말이 떠올라
다시금 이 원초적인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질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는 “공감각적 언어유희와 지적 은유를 선보이는 바타유의 원문에
최대한 가깝도록 번역문을 세심히 다듬었다.”고 소개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도 문맥도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문장들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만큼이나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