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1999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한국에는 2007년에 처음 소개됐으며

이후 2019년 완전히 리모델링되어(번역 정경진, 스핑크스) 복간되기도 한 작품입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진작 읽었어야 할 필독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계속 미적거리다가 이제야 2007년 판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두 여고생을 교살하고 목에 가위를 꽂은 수법 때문에 가위남이란 별명을 얻은 살인범

6개월 만에 세 번째 희생자로 여고생 다루미야 유키코를 선택하곤 집요한 관찰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법을 그대로 모방한 누군가가 먼저 유키코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는 엉뚱하게도 시신을 제일 먼저 발견한 목격자로서 경찰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됩니다.

누가, , 그것도 자신의 수법을 모방해 유키코를 살해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던

범인을 잡기 위해 스스로 탐정이 되어 목격자를 찾고 유키코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다시 나타난 가위남으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메구로니시 경찰서는

경시청 과학수사연구소의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의 지휘 아래 가위남찾기에 나섭니다.

호리노우치는 경시청 수사1과 대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이소베를 비롯

‘2냄새가 폴폴 나는 메구로니시의 형사들과 함께 프로파일링과 탐문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일명 가위남1인칭 시점 챕터와 메구로니시 수사팀의 챕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범인의 정체와 목표와 행적을 수사팀보다 훤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

엉뚱한 곳에서 헛발질만 남발하는 수사팀의 수난을 전지적 시점에서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런 구조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지독한 악의를 지닌 범인이 연이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슈퍼히어로 주인공이 거듭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진상에 다가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가위남은 실은 그런 일반적 구조와는 결이 아주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

사건은 단순하고, 범인은 악의라곤 전혀 없으며, 수사팀도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인데

그래선지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과연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몸통은 가위남의 모방범 찾기와 수사팀의 가위남찾기로 전개되지만

그에 못잖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다소 의외의 내용들입니다.

무엇보다 엽기적인 소시오패스로 보였던 가위남의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데,

그는 성실한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주말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인물입니다.

해리성 인격장애로 인해 또 다른 자아인 의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데,

그 대화에 따르면 가위남은 일반적인 소시오패스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살인범입니다.

실은 그의 범행동기엔 성적 욕망도, 살인의 희열도, 희생자에 대한 지배욕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악의조차 없는 무동기 범죄의 전형으로 진정한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가위남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는 모방범 찾기에 못잖게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아울러 수사팀 쪽 주인공인 신참 형사 이소베의 이야기 역시 다소 장황하게 그려지는데,

뭉뚱그려 정리하면 어설픈 신참에서 진정한 형사로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와 노회한 능구렁이 같은 메구로니시 고참 형사들 틈바구니에서

이소베는 직감과 증거’, ‘관찰의 힘등 원론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나갑니다.

물론 이소베가 어느 날 갑자기 진실 찾기의 주역으로 비약하는 허황된 전개는 없지만

시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설픈 신참의 성장 스토리는 분명 매력적인 설정이긴 한데

그걸 위해 교과서적인 형사 입문 강의가 지루함이 느껴질 만큼 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에선 가위남이 살해된 유키코의 주변과 지인들을 탐문하면서 모방범을 찾아나서고

다른 한편에선 코끼리 다리 더듬듯 막연하고 무모한 수사팀의 행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기고 이 작품의 명성을 탄생시킨 엄청난 반전들이 공개됩니다.

가장 궁금했던 건 당연히 가위남모방범의 정체이니 반전 역시 이들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서평에서 뭐가 뭔지 몰라 다시 앞의 내용을 봐야만 했다.”란 언급이 있을 정도로

독자의 예상과 추정을 뛰어넘는 짜릿한 반전인 건 분명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작가가 설치했던 반전의 재료들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태연스러운 것들이라

오히려 미리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작품의 명성에 비해 이 반전의 매력이 훅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교하게 설계된 트릭 자체는 훌륭하고 빈틈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앞서 전개된 장황하고 상세한, 그래서 지루함마저 느끼게 한 미스터리 외적인 이야기들 탓에

정작 클라이맥스가 오기도 전에 미리 지쳐버렸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 반전의 순간에 ? 이게 뭐지?”라는 모호함과 반감이 먼저 느껴진 것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개운하게 정리되지 않은 몇몇 설정들(주로 가위남의 인격장애 관련) 역시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은 짜릿함보다는 뭔가 찜찜한 느낌을 남기게 한 주범들이었는데,

그런 불편함 때문인지 굳이 앞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두 번째 읽기에서 참맛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트릭에 하나하나 감탄하거나 놀라면서 행간의 매력까지 새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한번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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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판한다 - 마이크 해머 시리즈 1 밀리언셀러 클럽 30
미키 스필레인 지음, 박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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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면, 2020년에 출간된 세상의 모든 책 미스터리’(북스피어)가 아니었다면

미키 스필레인과 그가 창조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를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제프리 디버를 비롯 여러 작가가 을 주제로 쓴 미스터리 앤솔로지인 그 작품의 수록작 중

미키 스필레인과 맥스 앨런 콜린스가 함께 쓴 모든 것은 책 속에라는 단편이 있는데,

(실은 미키 스필레인의 미완성 원고를 ‘CSI 시리즈의 맥스 앨런 콜린스가 완성한 것으로)

탐정 마이크 해머가 마피아 두목이 남긴 중요한 ’, 즉 비밀장부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단편이지만 시한폭탄 같은 탐정 마이크 해머의 캐릭터와 냉소 가득한 서사에 반하게 됐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 2005년 한 해에 세 편의 작품이 동시에 출간된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심판한다마이크 해머 시리즈의 첫 편으로 원작 출간년도가 무려 1947년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I, The Jury’입니다. 내가 심판이고 배심원이고 판사.”란 뜻인데,

주인공 마이크 해머는 말 그대로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소신과 함께

살인범에겐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내가 직접 응징하고 처단한다.”는 행동원칙이 있습니다.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기에 규정이나 규율에 구애받지 않는 그는

속 시원한 사이다 같은 파격적 행보와 수사를 감행합니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마주한 사건은 절친이자 전직 경찰인 잭 윌리암스의 참혹한 죽음입니다.

전쟁(2차 대전) 중 위기에 빠진 해머를 구하느라 팔을 잃은 뒤 경찰을 그만둬야 했던 그는

주위에서 정의감 넘치는 호인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라 살해될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고,

그런 이유로 해머의 분노와 범인에 대한 증오심은 거의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릅니다.

역시 절친인 뉴욕 경찰의 강력계 반장 팻 체임버스는 해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해머는 어떻게든 팻과 뉴욕 경찰보다 먼저 범인을 색출하여 반드시 자기 손으로,

그것도 잭이 당한 것과 똑같이 고통스럽고 참혹한 방식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마이크 해머는 몸과 마음이 시한폭탄 같은 캐릭터입니다.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덕분에 요즘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데,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수사방식은 물론 통제 불능의 바람둥이 기질까지 함께 갖고 있어서

읽는 내내 뜨거운 감자를 물고 있는 듯 좌불안석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잭이 살해당하던 날 벌어진 파티에 참석했던 자들은 해머의 서슬 퍼런 탐문을 피할 수 없었고

범죄현장에서 해머의 눈에 먼저 띈 중요한 단서들은 경찰에겐 그림의 떡이 되고 맙니다.

늘 경찰보다 한걸음 앞서 가는 그의 광폭 수사는 때론 위험천만한 상황을 자초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45구경 권총은 조금도 주저 없이 불을 내뿜곤 합니다.

, 마치 본드걸들에게 둘러싸인 007을 연상시키는 그의 열광적인 리비도(?)도 눈길을 끄는데,

폭주하는 수사의 와중에도 자신을 흠모하는 매력적인 비서 벨다와 밀당을 벌이는가 하면

입이 떡 벌어지는 미녀 의사 샬럿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기도 하고,

성욕을 주체 못하는 쌍둥이 자매의 육탄 공격에 비실비실 허물어지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마초 중에도 극상의 마초라고 할까요?

 

잭의 죽음 이후 연이어 주변인물들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면서 미스터리는 점점 고조되고

해머는 한 손엔 직감을, 다른 한 손엔 단서를 틀어쥔 채 명탐정으로서의 기질을 발휘한 끝에

쉽게 예상할 수 없었던 진범의 정체를 밝혀냅니다.

, 해머는 그저 저돌적이기만 한 단순한 탱크가 아니라

비상한 추리력을 가진 명탐정의 미덕도 함께 갖추고 있다는 뜻인데,

시리즈 첫 편이라 그런지 그의 추리는 다소 산만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 결정적인 순간마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존하는 장면도 살짝 아쉽게 느껴졌는데

그런 이유들 때문에 평점에서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이후 작품들에서 그런 아쉬움들이 어떻게 커버될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1918년생인 미키 스필레인(2006년 사망)은 모두 13편의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1996년에 발표된 블랙 앨리’(Black Alley)가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했지만 그의 진가는 탐정 마이크 해머를 통해 빛났다는 평가이고

그런 면에서 한국에 시리즈 첫 세 편만 소개되고 만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입니다.

그나마도 2005년에 한꺼번에 세 작품이 출간된 뒤 아무 소식이 없으니

원작을 읽을 게 아니라면 나머지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만날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시리즈 2~3편은 각각 내 총이 빠르다복수는 나의 것인데

아쉬운대로 이 두 작품을 통해서라도 마이크 해머의 매력을 한껏 음미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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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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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두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출간시기가 다른 단편들을 모아놓은 탓에 엄밀하게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순 없는데,

가령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는 전쟁에 징집됐다가 귀환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그가 탐정으로 데뷔한 중편 혼진 살인사건의 바로 뒤를 잇는 작품이며,

향수 동반자살은 시대적 배경이 이누가미 일족이후로 꽤 한참 뒷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표제작 백일홍 나무 아래를 비롯한 초기의 명품들을 한데 모아놓은 단편집이라

일단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선정했습니다.

 

대부분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의 수록작들은 대체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패전 이후의 혼란은 물론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인물들을 끌어들인 것은 여전해서

의족 신세가 된 귀환병(‘살인귀’, ‘백일홍 나무 아래’)이 등장하는가 하면

백화점과 화장품 회사 등 당시의 상류층의 일탈과 혼선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전쟁 중 부상으로 의족과 의안 신세가 된 채 나타난 전 남편으로 인해 공포에 빠진 여자와

희망 없는 세상에서 가불로 겨우 먹고 사는 한 추리소설가가 얽힌 이중살인극 (‘살인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백화점 귀금속 매장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성의 기이한 절도행위와

그 행위 이면에 도사린 오래된 증오심이 낳은 불행한 살인극 (‘흑난초 아가씨’),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 현장을 뒤덮은 대량의 향수의 비밀과 함께

유명 화장품 회사 일족에게 닥친 얽히고설킨 비극을 그린 미스터리 (‘향수 동반자살’),

그리고, 9살 소녀를 돈으로 산 뒤 자신의 바람대로 사육한한 남자의 욕망이

끝내 소녀와 자신은 물론 주변 인물들까지 파국으로 몰고 간 이야기 (‘백일홍 나무 아래’)

수록작 네 편 모두 제각기 독특한 살인사건과 미스터리를 품고 있습니다.

 

어느 작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코드는 욕망원한입니다.

두 가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들이긴 하지만

거기에 패전 후의 혼란과 전쟁으로 망가진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서사는 극적으로 확장됩니다.

똑같은 욕망과 원한이라 하더라도 그 배경에 직간접적으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가미되면

단순한 범인 찾기 이상의 의미, 즉 사회파 미스터리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배경이 명분 없는 미친 전쟁이 남긴 파탄과 혼란뿐이라면

개인의 욕망과 원한은 한없이 일그러지고 파괴적인 양상을 띨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네 편의 수록작 속의 살인범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욕망과 원한에 무기력하게 굴복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진실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취한 객관적이면서도 조용한 관찰자적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무기력함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 해설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 단편집 속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어쩐지 평소만큼 명쾌하고 시원스럽지 않다.

삶과 죽음의 무게에 잔뜩 눌려서일까, 사건을 해명하는 그의 어조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아쉬움을 느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동시에 미스터리가 풀린 걸 확인하고도 결코 개운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전체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해설이기도 한데,

속 시원하고 명쾌한 미스터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 특별하면서도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가

실은 이 시리즈를 탐독하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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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사이드 하우스
찰리 돈리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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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웨스트몬트 기숙학교의 비밀동아리 맨 인 더 미러

매년 하지와 동지에 폐 사택에서 섬뜩한 심령놀이를 통해 신입회원의 가입을 승인해왔습니다.

2019년 하지 늦은 밤, 그 심령놀이에 참가한 학생 일부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일찌감치 밝혀진 범인은 종적을 감췄다가 기차에 몸을 던졌고 그로 인해 사건은 종결됩니다.

하지만 1년 후, 당시 심령놀이에 참가했던 생존 학생들이 하나둘 자살하기 시작했고,

한 유명 앵커는 의문투성이인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팟캐스트로 인기를 끄는데 성공합니다.

그와 함께 자의 혹은 타의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인물들까지 진실 찾기에 나서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사건의 이면이 한 조각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나는 동전 하나로 형을 죽였다. 간단하고도 가볍게, 그리고 완벽히 그럴듯하게.”

이 작품의 첫 문장으로, 누가 봐도 막판에 밝혀질 진범의 고백처럼 읽힙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 짧은 챕터를 통해 이 진범의 고백들이 독자에게 소개됩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누구인지 불분명한 이 고백들은

한 소시오패스의 성장기이자 웨스트몬트의 참극을 벌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데,

작가는 이 진범의 고백들과 함께 ‘2019년 사건 당시’, 그리고 ‘2020년 현재

세 가지 시점과 관점을 한 챕터씩 번갈아 독자에게 들려주며 미스터리를 전개시킵니다.

 

2019년 웨스트몬트의 참극은 실은 각자의 사연을 갖고 각기 다른 곳에서 잉태된 비극들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적으로 한꺼번에 조우하며 빚어낸 사건입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하게 구성돼있어서

독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러 화자의 관점을 집중력을 갖고 들여다봐야만 합니다.

 

엄격한 통제와 규율에 지친 기숙학교 10대들의 비밀동아리에 대한 환상과 열망,

서양판 분신사바라 할 수 있는 심령게임 맨 인 더 미러를 통한 은밀한 가입절차,

그리고 그 게임에 끼어든 잔인한 살인마의 숨겨진 살의 등이 미스터리의 1차 재료들이지만,

사건 종결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연이어 자살을 택하는 당시 생존 학생들의 기이한 행태는

독자는 물론 뒤늦게 진실 찾기에 나선 주인공들에게도 혼란만 가중시키는 2차 재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심령게임이 벌어졌던 폐 사택 인근 선로에서 참혹한 죽음을 선택했지만

동기는 물론 왜 하필 이제 와서?”라는 의문에 대해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몬트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은 꽤 많습니다.

1년 전부터 집요하게 자료를 모으고 블로그를 운영해온 기자 라이더 힐리어,

선정적인 팟캐스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나선 유명 앵커 맥 카터,

범죄심리학 교수이자 유명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와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

그리고 1년 전 수사를 담당했던 베테랑 형사 헨리 오트와

동전 하나로 형을 죽인 소년사건을 맡았던 퇴직형사 거스 모렐리가 그들인데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맡은 역할을 통해 흩어진 미스터리의 조각들을 찾아냅니다.

 

그 가운데 프로파일러 레인 필립스의 연인인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가 돋보이는데

자폐증과 강박증에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까다로운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능력 덕분에 경찰을 도와 미결 또는 난제 사건을 해결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능력 중엔 객관적인 단서와 자료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추리력 외에도

다소 심령적인 부분 희생자와의 교감? - 까지 언급돼서 잠시 어라?”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로리 무어 & 레인 필립스가 등장한 두 번째 작품인데

로리 무어의 특별한 능력은 아마도 전작에 좀더 상세히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하고 묵직한 이야기들이 짧게 끊어진 챕터들 덕분에 더욱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읽는 내내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이 두 가지 정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인물들, 주인공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각자 역할이 분담돼있긴 하지만 따라가야 할 주인공이 확실하지 않아 산만하게 읽혔고,

똑같은 단서를 놓고 번갈아가며 똑같은 고민을 하는 장면도 적지 않아서

때론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비중 면에서 그래도 ‘1순위 주인공으로 보인 로리 무어의 역할인데,

그녀의 능력과 사연을 소개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에 반해

정작 그녀가 얻어낸 성과들은 기대만큼 풍성하거나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앞서 장황하게 묘사된 그녀의 능력치가 별로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별 한 개를 빼긴 했지만 어쨌든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인 건 사실입니다.

2018년에 데뷔한 뒤 3년 동안 5편의 작품을 낸 걸 보면 작가의 이력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한국에 처음 소개된 이 작품이 선전한다면 다른 작품들도 곧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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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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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로드 오슈(Lord Auch)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조르주 바타유의 첫 장편소설이다.

엉덩이로 달걀을 깨는 기벽이 있는 소녀 시몬과 점점 더 성()에 탐닉하는 소년 ’,

그리고 둘 사이에서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소녀 마르셀 등 세 명의 10대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이라는 사물이다.

또 눈과 형태, 색깔, 어휘의 유사성을 지닌 달걀불알이 주요 매개체로 등장한다.

눈 이야기는 과잉과 광기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성 입문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 바타유의

사상적 근간이 엿보이는 한 편의 철학적 우화로 읽을 수도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인간의 범주는 영원이나 영성 혹은 지성만이 아니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

 

본문을 읽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작가 조르주 바타유의 일성입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신화를 전복하는 데 일생을 바친 이단적 지성의 작품이지만

이성적인 관점에선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오직 원초적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거기다가 끔찍하기까지 한 육체의 향연 그 자체일 뿐입니다.

점잖게 말하면 그렇고, 좀 심하게 말하면 지독하고 파괴적인 포르노그래피라고 할까요?

 

먼 친척뻘인 와 시몬은 첫 만남부터 서로의 육체와 배설물을 통해 욕망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강화하기 위해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마르셀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부모들 몰래 또래들을 불러 모아 난교 파티를 벌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욕망 추구는 감금, 자살, 살인, 도피를 낳기에 이르고,

스페인으로 무대를 옮긴 와 시몬은 스폰서, 투우사, 신부 등을 통해

한층 더 원초적이고 강도 높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짐승 같은 본능을 실현시킵니다.

 

주인공들이 10대로 설정된 탓에 철없는 아이들의 무분별한 성 입문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 시몬, 마르셀 등 세 인물에게서 10대의 향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난 침대 속에서 이렇게 부인들처럼 하는 건 흥미가 없어!”라는 시몬의 원색적인 고백은

풍부한 경험으로 다져진 닳고 닳은(?) 불량청소년의 음란한 갈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은 그 어떤 이물질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한 본능일 뿐입니다.

사드의 소돔의 120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노골적인 성애 작품들보다 충격이 컸던 건

아마도 이런 10대 주인공들의 캐릭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며 태초부터 짐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에 관한 한 초보자지만 아직 깨끗하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소유한 10대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 아닌가, 추정해볼 뿐입니다.

 

본편 자체는 23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절반 조금 못 미친 정도이고

그 뒤로 작가 스스로의 고백을 담은 일치들과 수전 손택의 해설’, 김태용의 해제’(解題)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부록들이 실려 있습니다.

육체와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배설물에 탐닉하며 욕망을 분출하는 10대들의 이야기는

사실 읽는 내내 당혹스럽기만 했을 뿐 어떤 형태의 지적 고민도 일으키지 못한 게 사실인데

그래선지 허겁지겁 부록들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 당혹감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공포, 배설물과 눈()에 집착하게 됐던 사연을 담은 작가의 고백 일치들

흥미롭긴 했어도 불행한 가정환경 탓에 만들어진 소시오패스처럼 상투적으로 읽혔고,

포르노그래피와 문학에 대한 수전 손택의 장황한 에세이는 그 요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으며,

환각과 몽상 그 자체처럼 읽힌 김태용의 해제 역시 작품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행간에 숨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 자괴감이 강해진 끝에

이 작품은 형이상학적 논리와 논쟁을 즐기는 평론가를 위한 텍스트.”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정반대로 이건 단지 자극적인 변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해.”라는 반발심만 생겼다고 할까요?

 

부록들없이도 이 작품의 진가와 의미를 단박에 깨달은 누군가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평점을 두고 무식, 저급, 몰이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탐미주의의 여운과 미덕도,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문제의식도 발견하지 못한 저로서는

고백하자면, 민망한 성적 자극을 받은 것 외엔 달리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는 작품입니다.

부록들에서 얻은 약간의 이해력을 동원해 다시 한 번 본편을 읽어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당장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일단 책장에 꽂아놓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다. 우리는 태초부터 짐승이었다.”는 바타유의 말이 떠올라

다시금 이 원초적인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해질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출판사에서는 공감각적 언어유희와 지적 은유를 선보이는 바타유의 원문에

최대한 가깝도록 번역문을 세심히 다듬었다.”고 소개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도 문맥도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문장들은

이단적 지성의 심오한 생각만큼이나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든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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