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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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네 번째 작품인 밤 산책입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클래식의 품격과 시대극의 매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특이한 건 사건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라는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입니다.

과거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렸던 후루가미 를 방문한 야시로는

그곳에서 직접 겪은 참극의 전모를 1인칭 시점 소설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참극의 공포가 절정에 이를 때쯤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문도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부터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다 읽고 나면 왜 이런 설정과 형식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랫동안 영주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몰락한 지경의 후루가미

한때 충성스런 가신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후루가미 를 장악한 센고쿠 사람들이 뒤얽힌

복잡하고 비극적인 가족사 및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연이은 참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륜과 근친상간, 역전된 주종 관계, 꼽추병과 몽유병이라는 불행한 유전병 등

두 가문의 이면에는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악연의 요소들이 잔뜩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후루가미 의 외동딸 야치요의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시점에 이르러

그 악연의 요소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목이 잘린 시체가 줄줄이 발견되고 맙니다.

후루가미 에 초대받은 3류 추리소설가 야시로 도라타는 이 참극을 낱낱이 목격하는데,

그는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소설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범인의 정체를 직접 찾아 나섭니다.

 

야시로에겐 두 가문의 일족들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소름 돋는 일입니다.

늦은 밤의 숲을 산책하는 몽유병 여인, 그 여인의 결혼상대인 무례하고 오만한 화가,

술만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는 노인, 요염함을 전신으로 내뿜는 옛 영주의 부인,

그리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꼽추의 유전자로 인해 괴로워하는 청년 등

누구 하나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기괴한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음침한 저택에서 목 잘린 시체 사건 같은 건 진작 여러 차례 일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살인이 미궁으로 빠진 뒤 경찰마저 손을 놓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후루가미 의 옛 영지인 오카야마 현 귀수촌(鬼首村)에서 똑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그제야 우리의 주인공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에 뛰어들게 됩니다.

(귀수촌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주 무대이기도 한데 두 작품의 내용이 연결되진 않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등장은 제법 늦는 편입니다.

거의 중반 이후 쯤에나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활약상이 많이 보이진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해온 추리소설가 야시로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그가 별도로 꼼꼼한 조사를 벌이는 장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남긴 결정적 오류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챈 긴다이치 코스케는

떠들썩하게 범인을 지목하는 대신 조용히 범인의 뒤통수를 후려칩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독자마다 이 작품의 막판 반전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야박한 평점을 준 독자들은 반전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억지스럽다고 평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작가가 공정한 게임을 펼치지 않고 변명하는 것 같았다고 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 흐릿한 기억이긴 해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도 큰 거부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번에도 막판 반전이 꽤 짜릿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호불호의 차이를 다른 독자들의 서평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어쩌면 제가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서 무조건 좋게만 평가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작가의 팬 사이트인 요코미조 월드에서 옥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제가 잘못 읽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의 제목이 탐미적이고 기괴한 논리의 향연인데

머리 잘린 시체들이 등장하는 끔찍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

막판에 드러난 기괴하지만 애처로운 한 인간의 사연과 욕망을 떠올려보면

더없이 적절한 작품해설의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참된 매력인데

디지털 시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이 끝내주는 매력을

오랫동안 꾸준히 만끽하고 싶은 건 아마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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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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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2147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란 작품은 없습니다.

즉 수록작 중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은 게 아니라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주제를 담은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란 말은 다소 모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허망한 꿈?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꿈?

뭐가 됐든 다소 부정적이거나 불가능한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에다

꿈꾸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는 심플한 띠지의 카피 덕분에

꿈 때문에 상처 받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첫 번째 수록작 니시노 마을의 도둑을 제외하곤

나머지 네 편의 주인공들은 소박하든 속물적이든 애절하든 절실하든

각자 이루고 싶은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위해 열쇠 없는 꿈을 꾸는 인물들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는 36세의 요코의 꿈은 그럴듯한 남자입니다.

딱히 결혼에 목 맨 건 아니지만 근거 없는 자존감 하나로 센 척 버티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속물적인 요코의 행보는 번번이 스스로를 비참하게만 만들뿐입니다.

을 위한 열쇠를 스스로 걷어차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유혹했던 남자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대남으로 변했지만

미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남자의 태도를 이해하려고 애써봅니다.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의 뒤늦은 후회는 끔찍한 비극을 일으키고 맙니다.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미쿠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재능도, 행운도 없던 그녀는 교사라는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꿈은 대학에서 만난 연인 유다이입니다.

하지만 유다이는 누구도 납득 못할 황당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미쿠는 그 꿈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다이가 자신에게 안주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미쿠의 꿈과 바람에 맞는 열쇠는 없습니다.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요시에의 간절하고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어렵사리 그 꿈을 이루고 잠시 기뻐했지만 실제 육아의 현실은 지옥과도 같았고

이제 갓 10달이 된 딸 사쿠라는 어느새 요시에의 악몽이 됐습니다.

그런 사쿠라가 유모차에 탄 채 백화점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기미모토 가의 유괴’)

 

이렇게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줄거리를 일일이 서평에서 소개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열쇠 없는 꿈에 대한 두루뭉술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재미없는 담론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따라 주인공들은 아주 평범한 것 같기도, 또는 반대로 아주 특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평범함과 특이함은 그녀들이 꾸는 꿈에 달렸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 꿈,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왜곡시킬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꿈,

이뤄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로 연명시키는 꿈 등은

평범한 사람조차 아주 쉽게 특이하고 별난 사람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크든 작든 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런 특질들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다들 말려도 자청해서 열쇠 없는 꿈을 선택하든, 한참 꿈을 꾸다가 열쇠를 잃어버리든,

벼랑 끝에 다다른 뒤에야 손에 쥐고 있는 게 틀린 열쇠임을 깨닫든 말이죠.

츠지무라 미즈키가 직조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씁쓸하게 읽힌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 작가답게 츠지무라 미즈키는 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범죄를 잘 심어놓았습니다.

도둑, 방화, 폭력, 살인, 유괴 등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제목이 풍기는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뉘앙스는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끔찍한 사건들 덕분에 더더욱 그 농도와 밀도가 짙어집니다.

물론 희망적인 엔딩을 다룬 작품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열쇠 없는 꿈 앞에서 허우적대거나 붕괴되거나 초라해지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어서

수시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받았다는 건 다소 의외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도 그만한 포스는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라는 주제도 모호했고 이야기의 깊이나 무게감은 얕고 가벼워 보였는데

술술 잘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나오키 상에 걸맞은 인상과 여운까지 받진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오키 상 수상작 가운데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자주 찾아 읽는 작가이긴 해도 매력 넘쳤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2%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는 확실히 2%보다는 좀더 많이 아쉬웠던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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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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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 노블마인에서 출간된 이후 절판 상태였다가 13년 만에 재출간된 작품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한국에는 야시이후 두 번째로 소개됐던 작품인데

현실과 이계(異界)를 넘나드는 기묘한 판타지를 다룬 야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자

(줄거리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천둥의 계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사의 새, 살인에 탐닉한 소시오패스,

그리고 누명을 쓴 채 이계를 탈출하려는 10대 소년 겐야와 그를 쫓는 귀신조의 추격전 등

판타지와 액션 스릴러의 코드들이 한데 버무려진 특이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바깥세계(현실세계)와는 다른 영역의 공간인 바닷가 마을 ’.

겨울과 봄 사이의 신이 오시는 심판의 계절이라 불리는 천둥의 계절에 누나를 잃은 뒤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람의 정령(바람와이와이)에 씌인 채 살아가던 의 소년 겐야는

출입이 금기시되는 유령들의 처소인 무덤촌에 드나들던 중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비밀은 급기야 겐야에게 누명까지 쓰게 만들었고 결국 겐야는 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귀신조의 추격과 야수의 습격에 노출된 겐야의 여정은 그저 험난하기만 할뿐입니다.

, 바깥세계 출신인 자신이 에 살게 된 사연과 가족이 맞이했던 참극을 알게 된 겐야는

바람와이와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파탄 낸 악령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합니다.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니 약간 비현실적 배경에 담긴 단순한 액션스릴러처럼 보이는데,

물론 이야기의 가장 큰 맥은 겐야의 도주극과 복수극인 게 분명하지만

실은 줄거리에 담지 못한 쓰네카와 고타로 식 판타지가 이 작품의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

바깥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지만 시공간의 개념이 완전히 다른 특별한 장소 ’,

안에서도 산 자들의 공간과 완벽히 차단된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촌’,

천둥의 계절마다 사람들을 잡아가는 공포의 집단 귀신조’,

그리고, 풍령조(風靈鳥), 즉 바람의 정령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불사의 새이자

생명이 깃든 것에 내려앉아 그 생명체에게 신비한 힘과 기운을 갖게 하는 바람와이와이

쓰네카와 고타로만의 독특한 피조물과 공간들이 읽는 내내 신비감과 긴장감을 내뿜습니다.

 

덧붙여, 세컨드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0대 소녀 아카네와 바람와이와이의 특별한 인연,

무덤촌의 문지기로서 유령들을 상대하다가 겐야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되는 오도,

출신으로 부활을 거듭하며 100살 넘게 살아온 희대의 소시오패스 도바 무네키,

그리고 바깥세계를 향한 겐야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 또래 소녀 호다카의 기구한 사연 등

중요한 조연들의 이야기도 겐야 이야기 못잖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최근 읽은 멸망의 정원이 독특한 이계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 판타지를 그린 탓에 아쉬움이 남았던 게 사실인데,

천둥의 계절은 그보다 더한 이계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쉽고 선명한 감정선과 공감률 100%의 캐릭터들과 액션물을 방불케 하는 스토리 덕분에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전에 읽은 장편(‘금색기계’, ‘멸망의 정원’)과 단편집(‘야시’, ‘가을의 감옥’) 모두

특별한 시공간과 거기에 휘말린 평범한 인물들의 괴담들을 그린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지만

천둥의 계절은 쓰네카와 고타로의 단편의 매력과 장편의 힘이 골고루 잘 배어든 작품입니다.

 

판타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만큼은 놓치지 않고 읽게 되는 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르물 최고의 덕목을 재미여운으로 여기는 제가 그의 작품에 빠져드는 걸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성과도 같은 특별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극단적으론 황당한 만화처럼 여길 독자도 있겠지만

단편집인 야시를 흥미롭게 읽은 독자라면 여지없이 빠져들 게 확실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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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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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의 작은 섬에서 패전을 맞은 코스케는 귀환 도중 사망한 전우로부터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하면 세 여동생이 살해당할 거란 유언을 받습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전사한 전우의 고향인 세토 내해의 작은 섬 옥문도로 향한 코스케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에다 에도 시대 죄인들의 유형지였다는 이력을 가진 탓인지

옥문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더구나 세 여동생은 물론 전우가 후계자로 예정됐던 (섬을 지배하는) 기토 가문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숨기거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코스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섬사람들을 탐문하며 살인의 기운을 포착하려던 코스케의 의심은 점점 증폭됐지만

결국 단서 하나 못 잡은 상태에서 전우의 예언대로 악몽 같은 살인사건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혼진 살인사건’, ‘백일홍 나무 아래등 두 편의 중단편집에 이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인 옥문도를 읽었습니다.

옥문도는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시리즈 중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인데

앞서 읽은 두 중단편집보다 깊이와 무게감이 비교할 수 없이 육중하게 느껴지는 건

장편 자체의 힘과 함께 폐쇄적 공간이자 불길함으로 휩싸인 옥문도란 섬의 마력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해적과 죄수들의 섬이었던 탓에 복잡한 혈연관계와 지독한 배타성을 지녔으며

최근 전쟁의 참화까지 입은 옥문도는 외지인으로선 견딜 수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입니다.

몇 대 전부터 유력한 선주인 기토 가문에 의해 실질적인 지배가 이뤄지면서 안정을 찾았지만

젊은 후계자 후보들이 침략 전쟁에 징집된 이후 옥문도엔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 와중에 전우가 예고한 참혹한 살인사건을 막고자 정체를 감추고 옥문도에 온 코스케로선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는 섬의 폐쇄성이 시한폭탄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섬 주민들은 모두 상식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기묘한 구석을 갖고 있어요.

(중략) 본토 사람 따위는 생각도 못할 괴상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에요.

거기다 저 전쟁이 있었지요. 모두 크든 작든 미쳐 있습니다.” (p139~140)

 

섬을 지배하고 있는 기토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대립과 갈등,

전쟁에 징집된 기토 가문 후계자 후보들의 생사에 과도하게 촉각을 곤두세운 섬사람들,

살해당할 거란 예언 속에 등장하는 세 자매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난잡한 언행 등

코스케에겐 모든 것이 섬의 이름만큼이나 불온하게만 보입니다.

결국 코스케가 손 쓸 틈도 없이 기이하고 잔혹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주요 인물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하고 단서들은 하나같이 모호할 뿐입니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 않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불투명한 탓에

코스케의 수사는 답보를 거듭할 뿐 아니라 섬사람들의 의심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지만) ‘옥문도는 일본색이 워낙 강한 작품입니다.

일본의 전통문화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워낙 많아서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고,

특히 단시(短詩)인 하이쿠를 비롯 일본어 유희자체가 사건 곳곳에 자주 또 깊이 끼어들어서

여느 작품과 달리 각주를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꽤 많습니다.

, 시리즈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렇듯 패전 이후 봉건 색채가 짙게 남아있는 지방을 무대로

호러에 가까운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강한 일본색의 흔적 중 하나인데,

오래 전에 읽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다음 작품인 이누가미 일족역시

사건과 배경과 작품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옥문도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와 워낙 밀접한 시대적 배경이라 무척 민감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비롯 참전과 패전, 전사와 귀환을 겪은 인물들을 통해

명분 없는 전쟁과 그것이 낳은 비극에 몰두하고 있어서 크게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또 근대와 봉건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몰락한 기층 지배계급의 비극을 주된 소재로 삼은 점은

(비록 그 시대를 살아본 건 아니더라도) 딱히 일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코스케의 빛나는 추리는 옥문도의 불길한 기운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기에 이르고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그릇되고 허망한 봉건적 욕망이란 점까지 포착해냅니다.

하지만 그가 찾아낸 진실은 관련자 누구 하나 살인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과 함께

결국 옥문도의 비극은 지독한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씁쓸한 여운이 강하긴 하지만 코스케에게 딱 어울리는 엔딩이라고나 할까요?

 

독자에 따라 막판의 미스터리 해법에 대해 살짝 실망할 수도 있을 텐데,

다소 허술해 보이거나 비약이 심하다고 여겨지는 대목들이 가끔 눈에 띄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게 그 시대를 그린 아날로그 미스터리의 매력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단점조차 애써 포용하고 싶은 사심이 있는 건 맞지만

(억지이긴 해도) 시대에 어울리는 서사와 주인공, 그것이 이 시리즈의 진짜 미덕 아닐까요?

이미 한 번 읽은 작품인데도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다음 작품 이누가미 일족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들뜨는 것 역시 사심 팬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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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4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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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여 년 전쯤 미드 덱스터의 시즌1 가운데 초반 몇 편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적 복수라는 코드를 좋아하는데다 물러터진 사법체계에 환멸을 가진 탓에

흉악범들에게 끔찍한 천벌을 내리는 주인공 덱스터 모건에게 푹 빠졌던 건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원작소설을 통해 다시 덱스터를 만나게 됐습니다.

 

덱스터는 이미 소년시절부터 소시오패스의 기질이 몸에 배어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기질이 무차별 살인마로 뻗어나가지 않게 막은 건 그의 양부 해리였습니다.

하지만 양부의 충고는 그런 짓은 절대 해선 안 된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소명을 덱스터에게 물려줬습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보통사람처럼 스스로를 위장하는 방법부터 실질적인 기술까지 말이죠.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로 덱스터는 본격적인 흉악범 척결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자비한 응징은 정의감이나 확고한 소신의 산물 따위는 절대 아닙니다.

물론 흉악범들을 처단하기 전에 그들이 저지른 죄를 묻고 비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물러터진 사법체계를 대신할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는 보편적 감정이나 평범한 일상의 희로애락에 전혀 무감한 것을 넘어

솜씨 좋은 동업자(?)가 토막 낸 희생자들의 사체에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대상이 흉악범일 뿐 덱스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잔혹한 소시오패스란 뜻입니다.

 

그런 덱스터가 데뷔 무대인 시리즈 첫 편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강적과 맞닥뜨립니다.

마이애미 일대의 매춘부를 살해하고 토막 낸 뒤 혈흔 한 방울 없이 내다버리는 범인은

경찰이 방향성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사방팔방에 자신의 전리품을 뿌려놓습니다.

이미 수십 명의 흉악범들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응징해온 덱스터 입장에선

혈흔 한 방울 없이 정교하고 깔끔하게(?) 희생자를 토막 낸 범인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범인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시기, 질투, 부러움, 호기심이라고 할까요?

여동생(양부 해리의 친딸)이자 마이애미 경찰인 데보라 때문에 사건에 말려든 덱스터는

범인이 누구인지도 의문이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위장 매춘부에서 벗어나 살인계로 옮겨가고 싶은 데보라는 덱스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덱스터는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긴 채 데보라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설정 자체가 불편했던 독자들은 내용과 관계없이 덱스터의 캐릭터에 대한 악평만 남겼는데

정반대로 그의 기이한 면모에 환호 또는 흥미를 느낀 독자가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여러 시즌에 걸쳐 방송됐다는 건 그에 대한 확실한 반증인데,

실은 책으로 만난 덱스터는 몇 편밖에 못 봤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좀더 간결하고 쉽고 대중적인 코드에 맞춰 제작되기 마련이라

덱스터의 복잡한 내면이나 심리보다는 흥미 위주의 사건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론 책에서 심층적으로 다룬 이 내면과 심리때문에 아쉬움이 커진 게 사실입니다.

 

일반인과 소시오패스의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는 덱스터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는

꼭 필요한 분량과 비중을 넘어 지나치게 장황하게 거듭된 나머지 오히려 부작용만 느껴졌고,

그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검은 승객이라는 무의식속의 존재는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나, 라는 의문과 함께 사실상 덱스터를 좌지우지하는 존재로 그려져서

심하게 말하면, “덱스터 스스로 결정하는 건 별로 없다.”는 식의 인상까지 남기는 바람에

오히려 주인공으로서의 덱스터의 매력과 존재감을 깎아내렸다는 생각입니다.

그 외에도 심령 호러물의 한 대목처럼 읽힌 덱스터의 예지에 가까운 꿈설정,

,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 및 덱스터의 대처 역시 아쉬웠거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아쉬움들은 아무래도 드라마를 먼저 봤기 때문에 느껴진 것 같은데,

흉악범을 응징하는 소시오패스의 통쾌하고 재미있는 액션 스릴러라는 기대와 달리

어딘가 스티븐 킹의 향기가 연상되는 호러물의 색채가 더 강했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재미와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 탓에 이어지는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되나 고민하다가

두 번째 작품(‘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까지는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또다시 내면과 심리가 강조되고 액션 스릴러보다 호러물에 가까운 서사를 읽게 된다면

이어지는 작품들을 계속 읽을 자신은 없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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