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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147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츠지무라 미즈키의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란 작품은 없습니다.
즉 수록작 중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은 게 아니라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주제를 담은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는 뜻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란 말은 다소 모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허망한 꿈?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꿈?
뭐가 됐든 다소 부정적이거나 불가능한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에다
“꿈꾸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는 심플한 띠지의 카피 덕분에
꿈 때문에 상처 받거나 좌절하거나 불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첫 번째 수록작 ‘니시노 마을의 도둑’을 제외하곤
나머지 네 편의 주인공들은 소박하든 속물적이든 애절하든 절실하든
각자 이루고 싶은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위해 열쇠 없는 꿈을 꾸는 인물들입니다.
어머니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는 36세의 요코의 꿈은 ‘그럴듯한 남자’입니다.
딱히 결혼에 목 맨 건 아니지만 근거 없는 자존감 하나로 센 척 버티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속물적인 요코의 행보는 번번이 스스로를 비참하게만 만들뿐입니다.
‘꿈’을 위한 열쇠를 스스로 걷어차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유혹했던 남자가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학대남’으로 변했지만
미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남자의 태도를 이해하려고 애써봅니다.
그 남자는 한때 자신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의 뒤늦은 후회는 끔찍한 비극을 일으키고 맙니다.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미쿠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지만 재능도, 행운도 없던 그녀는 ‘교사’라는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녀의 또 하나의 꿈은 대학에서 만난 연인 유다이입니다.
하지만 유다이는 누구도 납득 못할 황당한 꿈을 꾸는 남자입니다.
미쿠는 그 꿈을 깨부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다이가 자신에게 안주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미쿠의 꿈과 바람에 맞는 열쇠는 없습니다.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요시에의 간절하고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어렵사리 그 꿈을 이루고 잠시 기뻐했지만 실제 육아의 현실은 지옥과도 같았고
이제 갓 10달이 된 딸 사쿠라는 어느새 요시에의 악몽이 됐습니다.
그런 사쿠라가 유모차에 탄 채 백화점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기미모토 가의 유괴’)
이렇게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줄거리를 일일이 서평에서 소개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열쇠 없는 꿈’에 대한 두루뭉술하고 형이상학적이고 재미없는 담론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겼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기에 따라 주인공들은 아주 평범한 것 같기도, 또는 반대로 아주 특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평범함과 특이함은 그녀들이 꾸는 꿈에 달렸다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 꿈,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왜곡시킬 정도로 집착에 가까운 꿈,
이뤄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로 연명시키는 꿈 등은
평범한 사람조차 아주 쉽게 특이하고 별난 사람으로 변질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크든 작든 ‘꿈’이란 걸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조금씩은 이런 특질들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다들 말려도 자청해서 열쇠 없는 꿈을 선택하든, 한참 꿈을 꾸다가 열쇠를 잃어버리든,
벼랑 끝에 다다른 뒤에야 손에 쥐고 있는 게 틀린 열쇠임을 깨닫든 말이죠.
츠지무라 미즈키가 직조한 ‘꿈’ 이야기는 그래서 더 씁쓸하게 읽힌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 작가답게 츠지무라 미즈키는 ‘꿈’에 대한 이야기 속에 범죄를 잘 심어놓았습니다.
도둑, 방화, 폭력, 살인, 유괴 등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열쇠 없는 꿈을 꾸다’라는 제목이 풍기는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뉘앙스는
주인공들이 휘말리는 끔찍한 사건들 덕분에 더더욱 그 농도와 밀도가 짙어집니다.
물론 희망적인 엔딩을 다룬 작품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열쇠 없는 꿈 앞에서 허우적대거나 붕괴되거나 초라해지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어서
수시로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이 나오키 상을 받았다는 건 다소 의외의 일로 여겨졌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와 아홉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도 그만한 ‘포스’는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열쇠 없는 꿈’이라는 주제도 모호했고 이야기의 깊이나 무게감은 얕고 가벼워 보였는데
술술 잘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나오키 상에 걸맞은 인상과 여운까지 받진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나오키 상 수상작 가운데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자주 찾아 읽는 작가이긴 해도 매력 넘쳤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늘 2%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열쇠 없는 꿈을 꾸다’는 확실히 2%보다는 좀더 많이 아쉬웠던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