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팔묘촌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다섯 번째 작품인 ‘팔묘촌’입니다.
“본격 추리가 가미된 일본 공포의 원점”이라는 평과 함께
영화로 세 번, 드라마로 여섯 번이나 제작돼서 인지도에선 으뜸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전 작품인 ‘밤 산책’에서 귀수촌을 무대로 사건을 마무리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가까운 이웃마을인 팔묘촌의 어떤 인물로부터 수사의뢰를 받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가 마주한 건 도무지 동기를 알 수 없는 무차별 살인사건으로,
팔묘촌의 세력가인 다지미 家의 일족을 포함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상황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다지미 家의 후계자라며 최근 마을에 나타난 젊은 남자 타츠야를 의심하지만
코스케는 타츠야는 물론 그 누구도 좀처럼 용의자로 지목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줄거리는 코스케의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했지만 실은 이 작품의 1인칭 화자는
다지미 家의 후계자로 지목돼 느닷없이 팔묘촌으로 불려온 평범한 회사원 타츠야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뒤 타츠야가 남긴 팔묘촌에서의 몇 달간의 기록이란 뜻인데,
그래선지 코스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대목은 아주 드물게만 눈에 띌 뿐입니다.
하지만 타츠야는 피해자이자, 용의자이자, 진실을 쫓는 자 등 다양한 역할을 통해
그가 팔묘촌에서 겪은 참혹한 시간과 사건, 그리고 무자비한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팔묘촌에 관한 두 개의 전설적인 사건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팔묘촌이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16세기 중반, 황금을 지닌 8명의 무사들을 참살한 뒤
끔찍한 저주와 악몽을 겪은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묘를 짓고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이력이고,
또 하나는 불과 26년 전, 다지미 家의 당주이자 미치광이 병에 걸린 요조라는 남자가
마을사람들 32명을 무차별로 살해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희대의 대량살인사건입니다.
다지미 家의 후계자로 지목돼 팔묘촌에 불려온 타츠야는 바로 이 요조의 첩의 아들입니다.
본처가 낳은 남매가 건강상의 이유로 가문을 잇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현재 가문의 실질적 주인인 쌍둥이 고모할머니가 첩의 아들인 타츠야를 찾아낸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팔묘촌에 도착한 타츠야는 도착과 동시에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더 큰 문제는 그가 도착한 직후 의문의 독살사건이 연이어 터진다는 점입니다.
마을사람들은 외지인에다 미치광이 살인마 요조의 핏줄이란 점 때문에 타츠야를 의심합니다.
살인이 벌어질 때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던 탓에 스스로 좌불안석이던 타츠야 역시
자신의 핏줄이 사람들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기폭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보나 미치광이의 짓이라면 마을사람들의 의혹이 내게 쏟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몸에는 서른두 명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p349)
1인칭 화자인 타츠야는 씩씩하지도, 영민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젊은 남자입니다.
자기 주위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이 용의자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범인과 진실을 찾으려 애쓰지만 그렇다고 용한 탐정노릇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몇몇 인물들의 도움을 통해
팔묘촌과 다지미 家 저택에 숨겨진 비밀들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것은 물론
전설에 등장하는 엄청난 양의 황금 찾기, 저택의 비밀통로와 연결된 복잡한 종유동굴 탐험,
생사를 넘나드는 동굴 속 추격전, 그리고 그 안에서 싹틔운 미묘한 로맨스 등
말 그대로 호러, 미스터리, 어드벤처를 롤러코스터 타듯 오가는 액티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정작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다지 할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는 팔묘촌에 머물며 나름대로 단서와 증거를 찾아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가끔 타츠야 앞에 나타나 선문답 같은 질문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마지막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관련자들 앞에서 진범의 정체를 ‘발표’할 뿐입니다.
물론 “심증은 있으나 물증과 동기를 몰라서 미리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지만
아무래도 중간중간 그가 펼치는 활약이 구체적으로 묘사됐더라면
독자에게 사뭇 즐거운 팬서비스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워낙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내용 소개는 변죽만 울리다 말았는데,
직접 읽어보면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 전에 읽은 탓에 마치 처음 읽는 듯한 기분이었고
덕분에 이 시리즈 어느 작품에서도 맛보지 못한 다양한 장르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팔묘촌의 미션을 완수한 코스케의 다음 여정은 ‘이누가미 일족’입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전후 과도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전통과 근대성의 충돌,
그리고 인습과 미신으로 불거져 나오는 불쾌한 살의를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은” 명성대로
코스케는 또다시 이누가미 가문이라는 불길한 범죄무대로 발길을 옮깁니다.
역시 오래 전에 읽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누가미 일족’에서는
코스케가 좀더 많이, 자주 그 매력적인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