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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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의 다섯 번째 작품인 팔묘촌입니다.

본격 추리가 가미된 일본 공포의 원점이라는 평과 함께

영화로 세 번, 드라마로 여섯 번이나 제작돼서 인지도에선 으뜸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전 작품인 밤 산책에서 귀수촌을 무대로 사건을 마무리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가까운 이웃마을인 팔묘촌의 어떤 인물로부터 수사의뢰를 받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가 마주한 건 도무지 동기를 알 수 없는 무차별 살인사건으로,

팔묘촌의 세력가인 다지미 의 일족을 포함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상황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다지미 의 후계자라며 최근 마을에 나타난 젊은 남자 타츠야를 의심하지만

코스케는 타츠야는 물론 그 누구도 좀처럼 용의자로 지목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줄거리는 코스케의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했지만 실은 이 작품의 1인칭 화자는

다지미 의 후계자로 지목돼 느닷없이 팔묘촌으로 불려온 평범한 회사원 타츠야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뒤 타츠야가 남긴 팔묘촌에서의 몇 달간의 기록이란 뜻인데,

그래선지 코스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대목은 아주 드물게만 눈에 띌 뿐입니다.

하지만 타츠야는 피해자이자, 용의자이자, 진실을 쫓는 자 등 다양한 역할을 통해

그가 팔묘촌에서 겪은 참혹한 시간과 사건, 그리고 무자비한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팔묘촌에 관한 두 개의 전설적인 사건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팔묘촌이라는 이름의 기원으로, 16세기 중반, 황금을 지닌 8명의 무사들을 참살한 뒤

끔찍한 저주와 악몽을 겪은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묘를 짓고 수호신으로 모시게 된 이력이고,

또 하나는 불과 26년 전, 다지미 의 당주이자 미치광이 병에 걸린 요조라는 남자가

마을사람들 32명을 무차별로 살해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희대의 대량살인사건입니다.

 

다지미 의 후계자로 지목돼 팔묘촌에 불려온 타츠야는 바로 이 요조의 첩의 아들입니다.

본처가 낳은 남매가 건강상의 이유로 가문을 잇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현재 가문의 실질적 주인인 쌍둥이 고모할머니가 첩의 아들인 타츠야를 찾아낸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팔묘촌에 도착한 타츠야는 도착과 동시에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더 큰 문제는 그가 도착한 직후 의문의 독살사건이 연이어 터진다는 점입니다.

마을사람들은 외지인에다 미치광이 살인마 요조의 핏줄이란 점 때문에 타츠야를 의심합니다.

살인이 벌어질 때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던 탓에 스스로 좌불안석이던 타츠야 역시

자신의 핏줄이 사람들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기폭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보나 미치광이의 짓이라면 마을사람들의 의혹이 내게 쏟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몸에는 서른두 명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p349)

 

1인칭 화자인 타츠야는 씩씩하지도, 영민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젊은 남자입니다.

자기 주위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이 용의자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범인과 진실을 찾으려 애쓰지만 그렇다고 용한 탐정노릇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할 수 없는 몇몇 인물들의 도움을 통해

팔묘촌과 다지미 저택에 숨겨진 비밀들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것은 물론

전설에 등장하는 엄청난 양의 황금 찾기, 저택의 비밀통로와 연결된 복잡한 종유동굴 탐험,

생사를 넘나드는 동굴 속 추격전, 그리고 그 안에서 싹틔운 미묘한 로맨스 등

말 그대로 호러, 미스터리, 어드벤처를 롤러코스터 타듯 오가는 액티브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정작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다지 할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는 팔묘촌에 머물며 나름대로 단서와 증거를 찾아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가끔 타츠야 앞에 나타나 선문답 같은 질문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마지막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관련자들 앞에서 진범의 정체를 발표할 뿐입니다.

물론 심증은 있으나 물증과 동기를 몰라서 미리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지만

아무래도 중간중간 그가 펼치는 활약이 구체적으로 묘사됐더라면

독자에게 사뭇 즐거운 팬서비스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워낙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내용 소개는 변죽만 울리다 말았는데,

직접 읽어보면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 전에 읽은 탓에 마치 처음 읽는 듯한 기분이었고

덕분에 이 시리즈 어느 작품에서도 맛보지 못한 다양한 장르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팔묘촌의 미션을 완수한 코스케의 다음 여정은 이누가미 일족입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전후 과도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전통과 근대성의 충돌,

그리고 인습과 미신으로 불거져 나오는 불쾌한 살의를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은명성대로

코스케는 또다시 이누가미 가문이라는 불길한 범죄무대로 발길을 옮깁니다.

역시 오래 전에 읽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누가미 일족에서는

코스케가 좀더 많이, 자주 그 매력적인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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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아르테 미스터리 19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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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촌스러운 느낌의 제목에 의미를 알기 어려운 애매한 표지를 지닌 작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점 때문에 먼저 시선을 뺏겼고,

이어 작가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괴이 현상을 쫓는 이야기라는 소개글을 보곤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가 훅 떠올라 호기심이 급 발동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작가인 아시자와 요는 괴담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얼룩이라는 괴담 소설을 발표하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겪었지만 너무나도 기괴한 나머지 오랜 시간 봉인해뒀던 그 사건을 소설로 쓴 뒤

아시자와는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서 괴담을 듣는 처지가 됐고,

그 가운데 일부를 살을 붙여 단편소설로 발표하면서 점점 괴담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특이한 건, 그가 쓴 다섯 편의 괴담들은 하나같이 직전에 쓴 괴담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인데,

말하자면, 누군가 그가 쓴 괴담을 보곤 나도 해줄 얘기가 있다.”며 들려준 괴담이

결국 그의 손을 거쳐 소설로 발표됐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섯 편의 괴담을 묶어 단행본으로 발표할 계획을 세웠을 무렵

아시자와는 자신이 쓴 괴담에 공통적으로 깃든 그 무언가를 깨닫곤 충격에 빠집니다.

 

수록된 작품은 모두 여섯 편인데, 굳이 분류하자면 5+1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자와가 2년에 걸쳐 띄엄띄엄 발표한 다섯 편의 괴담에

아시자와의 막판 깨달음과 충격을 그린 총정리한 편이 추가된 구성이라고 할까요?

 

다섯 편의 괴담 모두 제각각 다른 사연과 인물들을 다루고 있어서 전혀 별개의 이야기 같지만

아시자와의 직전 작품을 본 누군가가 자신이 겪은 괴담을 그에게 들려주고

그 괴담이 곧 소설로 발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독자는 마지막에 분명 다섯 편을 꿰뚫는 교집합이 등장할 거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 매 작품에 긴장하면서 동시에 마지막 총정리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는 뜻인데,

솔직히 첫 수록작인 얼룩을 본 뒤 교집합이 너무 쉽게 노출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같은 괴담이긴 해도 다섯 편 모두 워낙 성격들이 달라서 함부로 예단할 순 없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괴담을 무척 좋아해서 그런지 이 작품도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시자와 요의 괴담은 미쓰다 신조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다른 색깔의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무섭긴 해도 나에겐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라는 게 미쓰다 신조의 색깔이라면

아시자와 요의 괴담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 속 공포의 위력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나 같은 전형적인 코드들이 동원되긴 하지만

그것들이 지닌 생생한 일상성과 사실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섬뜩함을 발휘합니다.

 

작가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괴이 현상을 탐문하고 소설로 쓰는 설정도 흥미로운데,

단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관찰자 역할을 넘어

마지막 총정리 편에서는 본인이 쓴 괴담들 속에 빨려 들어감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공포와 의문에 휩싸인 주인공은 자신이 쓴 괴담 하나하나를 뜯어보기 시작하고

뒤늦게 다섯 편을 꿰뚫는 교집합의 실체와 함께 자신이 한 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괴담 속의 괴담 또는 괴담 위의 괴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설정 덕분에 마지막 총정리 편은 미스터리와 괴담이 뒤섞인 특별한 맛을 지니게 됩니다.

 

작가의 분신 못잖게 흥미로운 캐릭터는 오컬트 작가인 사카키 깃페이인데,

초보 괴담작가인 아시지와에게 괴담의 본질에 대한 원론적 강의와 함께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괴담 뒤에 숨은 논리적인 미스터리를 간파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

어딘가 왓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시자와에겐 그야말로 셜록 홈즈 같은 존재로 비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얼룩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전형적인 괴담이긴 해도 집에 깃든 원령을 다룬 인연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마지막 수록작이자 총정리 편금기는 살짝 이해가 덜 된 대목도 있긴 했지만

괴담의 본질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어느 수록작보다도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 이전에 유일하게 한국에 소개된 아시자와 요의 작품은 아마리 종활 사진관입니다.

읽진 못했지만 영정사진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연작 미스터리라는데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로 보입니다.

그의 본업이 괴담 쪽은 아닌 듯 하지만 이 작품을 읽은 뒤의 솔직한 느낌은

다음에 만날 그의 작품 역시 괴담이었으면 좋겠다, 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작가의 분신인 아시자와 요가 활약하는 시리즈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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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버리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나현진 옮김 / 아름다운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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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소개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여섯 작품 중 다섯 번째로 만난 딜리버리입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매번 만족도나 매력이 달리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다섯 번을 만나는 동안 그 편차가 꽤 큰 편에 속하는 작가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이 작품까지의 한 줄 소감을 출간순서대로 요약해보면...

 

사라진 소녀들’ - 매력 없는 형사와 범인. 설정에 비해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무리수.

창백한 죽음아직 못 읽었음.

지옥계곡앞서 전개된 장점을 모두 덮어버린 막판의 뜬금없는 진실.

물의 감옥2016년 베스트 11으로 꼽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

쉐어하우스읽다가 1/3도 못 가서 포기.

딜리버리’ - 앞으로 빙켈만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작품.

 

물의 감옥을 제외하곤 대부분 실망감을 많이 느낀 셈인데

특히 전작인 쉐어하우스는 초반부터 빙켈만의 작품이 맞나?”싶을 정도로 놀란 끝에

결국 1/3도 못 읽고 중도에 포기했던 일이 있어서

신작인 딜리버리의 출간이 반갑거나 기대되기보다는 잠시 주저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일단 쉐어하우스의 실망 대신 물의 감옥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안드레아스 빙켈만을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빼어난 미모의 금발 여성들이 감쪽같이 실종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하지만 함부르크 경찰인 옌스 케르너가 이 연쇄실종사건을 처음부터 인지한 건 아닙니다.

숲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창백한 여인과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한 여인을 조사하던 그는

행정요원(?)인 레베카 오스발트의 꼼꼼한 자료조사 덕분에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최근 스토킹을 당하고 있던 한 여성이 실종되면서 결정적인 실마리를 붙잡은 옌스는

탐문과 함께 레베카가 찾아낸 단서들을 통해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연쇄실종사건이

지독하고 악랄한 소시오패스에 의한 계획적인 납치사건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쉐어하우스에 이은 옌스 케르너 & 레베카 오스발트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중도 포기했던 작품의 시리즈 후속편이란 걸 초반부에 알게 되자 살짝 맥이 빠졌지만,

(‘쉐어하우스에서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책을 덮었던 탓인지)

딜리버리의 초반부에 소개된 두 사람은 흡입력과 매력을 골고루 갖춘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53세의 옌스는 반골 기질이 다분한 거구의 형사지만 동시에 부드러움도 함께 갖춘 인물이고

어릴 적 사고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레베카는 그런 옌스를 흠모하는 경찰 행정요원입니다.

경찰공무원이지만 전혀 공무원 같지 않은 옌스와 그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레베카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오히려 견원지간에 어울릴 것 같은 인물들이지만

두 사람의 일과 사랑에 걸친 미묘한 케미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스릴러 자체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빙켈만의 작품 대부분이 그랬듯) 미모의 여성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로 설정됐고

범인 역시 일반인의 기준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각한 소시오패스로 그려졌습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설정이라 페이지는 잘 넘어간 게 사실이지만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소시오패스가 미모의 여성들을 향해 증오와 복수를 내뿜는다는 설정은

뭔가 특별한 것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더 이상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클리셰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주인공의 케미 외에 어디에서도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던 딜리버리

읽는 동안의 긴장감도, 막판 반전의 충격도, 다 읽은 뒤의 여운도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물론 범인의 독특한 범행수법이라든가 피해자들의 충격적인 상황들은 나름 개성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옌스와 레베카가 어떻게 진실에 접근해갈지, 그들에게 어떤 위기가 닥칠지,

, 범인은 물론 (헛발질로 그치게 될) 주요 용의자들의 행보는 어떻게 그려질지 등

남은 이야기들의 향방이 빤히 내다보일 정도로 쉽고 평범한 스릴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엇비슷한 재료들을 뻔한 조미료로 버무린, 전에 많이 먹어본 듯한 진부한 요리라고 할까요?

 

크게 눈에 거슬린 대목은 없었지만 수시로 책읽기를 멈칫하게 만든 번역도 다소 아쉬웠는데

편집 과정에서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던 매끄럽지 못한 일부 문장들은

안 그래도 긴장감 없이 읽히는 이야기를 더 밍밍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출판사와 관계된 아쉬움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를 보면 스포일러 정도가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공개하고 있는데

사건의 실체와 범인의 정체 등 굳이 책을 볼 필요가 없게끔 완벽한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겐 무척 낯선 이름의 출판사지만 그래도 다양한 장르의 책을 206편이나 출간한 곳이던데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해도 되는 건지 그저 의문일 뿐입니다.

 

앞서 빙켈만 작품에 대한 한 줄 평에서도 밝혔듯

딜리버리는 앞으로 빙켈만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쉐어하우스를 중도 포기했던 게 오독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간접적으로 입증해준 셈인데

다음 신작이 나오게 되면 일단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먼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못 읽은 채 책장에 방치해놓은 창백한 죽음은 어찌됐든 읽긴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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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 개정판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1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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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검색할 때마다 제목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끌리던 작품이었는데

얼마 전 장바구니를 채워놓고 보니 배송비 무료 혜택까지 딱 2,000원이 남았기에

더는 고민하지 않고 얼른 픽업해버렸습니다.

 

아름답고 교훈적인 동화나 민담이 원래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위험하고 음란한 부분들이 정제됐다는 건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가령, 친숙하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실은 소시오패스나 사악한 욕망덩어리였다든지

아름답고 고귀한 주인공들이 실은 음란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든지

또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까지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실은 그 뒤에 끔찍하고 추악한 진짜 엔딩을 갖고 있다든지....

고백하자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오리지널에 대한 궁금증이 부쩍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아마 이 작품이 내내 제 눈길을 끌었던 건 바로 그 궁금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인 기류 마사오는 두 명의 작가 - 우에다 가요코, 쓰쓰미 사치코 의 필명입니다.

프랑스 유학파인 두 작가는 특이하게도 유럽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에피소드에 주력했는데

악녀대전’, ‘우아하고 잔혹한 악녀들’, ‘프랑스의 잔혹한 이야기들’, ‘아름다운 고문의 책

집필한 작품 제목만 봐도 그녀들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머리말에 따르면 그림 동화초판의 잔혹하고 거친 표현 방법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학, 역사학, 정신분석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해석을 참고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곁들여 새롭고 생생한 그림 동화를 엮었다고 합니다.

 

시리즈 1편인 이 작품엔 백설공주’, ‘신데렐라’, ‘숲속의 잠자는 공주등 친숙한 동화는 물론

현대의 많은 작가들이 모티브로 삼은 끔찍한 이야기 파란 수염까지 여섯 편이 실려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인공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파격적인 내용들이 전개됩니다.

 

백설공주의 경우 근친상간, 비속살해, 난잡하고 문란한 남녀관계, 처절한 복수가 등장해서

오리지널과 동화 사이의 간격이 (전혀 다른 작품인 것처럼) 멀게 느껴졌고,

개구리 왕자님숲속의 잠자는 공주는 일반인들이 익히 아는 엔딩 그 이후의 이야기,

즉 행복하게 잘 살 줄 알았던 주인공들의 뜻밖의 후일담이 그려져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파란 수염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하성란), ‘푸른 수염’(아멜리 노통브),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제인 니커선) 등 많은 작품에 모티브를 준 오리지널인데

동화라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공포괴담에 가까운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고,

노간주나무역시 짧은 분량 안에 농도 짙은 호러 판타지가 담긴 작품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그림 형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들의 작품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심했고

그런 탓에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고육지책으로 캐릭터나 사건을 꽤 순화했다고 하는데,

특이한 건 성()에 관계된 설정들은 대폭 삭제된 반면

살인, 고문, 인육 등 잔인한 폭력 장면들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았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도덕적 잣대의 성격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순화되고 삭제된 게 이 정도라면 오리지널에 그려졌던 성적(性的) 설정들이

얼마나 기괴하고 노골적이었는지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흥미 위주의 작품인데다 기대만큼 파격적이지 않았던 탓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림 동화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무래도 일반독자 입장에선 싼 티 나는 듯한 장난스런 표지 때문에

이 작품을 집어 드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번역본은 일본 원작 표지를 반전만 한 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9판정을 받은 것 역시 독자들의 선입견에 한몫을 한 것 같은데,

대부분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밖엔 구할 수 없는 상태지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시리즈(모두 세 편) 중 한 편쯤은 장바구니에 넣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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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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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은 건 2003년 문예출판사에서 낸 판본이지만 오래전부터 절판 상태라서

부득이하게 현재 판매중인 열린책들 판본에 서평을 올립니다.

다행히 번역가가 같은 분이어서 동일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만, 서평에 인용한 본문과 그것이 수록된 페이지는 문예출판사 판본에 따랐습니다.)

 

우선 고백할 것은 제목만큼은 여느 고전이나 명작 못잖게 자주 들어봤어도

실제로 읽기 전까지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포스터 속의 그레고리 펙을 봤던 기억 탓에,

또 제목이 풍기는 심상찮은 뉘앙스 탓에 고전 스파이 스릴러라고 예단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그 예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지만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읽기 전에 상세한 소개글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점인데,

만약 소개글을 봤더라면 “1930년대를 배경으로 인종차별을 고발한 법정 스릴러라는,

앞서 저지른 터무니없는 예단보다 더 잘못된 기대감을 가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의 메이콤이란 소도시에서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소신껏 흑인 용의자를 변호하는 이야기라고 돼있는데,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제대로 대변한 소개글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아니라 그의 딸 진 루이즈 핀치이며

일명 스카웃이라 불린 그 소녀가 7살부터 대략 3년 동안 겪은 다사다난한 사건들과 함께

몸과 마음이 소녀에서 숙녀로 도약하는 성장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스카웃은 그 또래답게 천방지축이지만 뚜렷한 소신과 고집을 가진 소녀입니다.

나이답지 않은 똘똘함과 함께 영악한 악동 기질까지 지닌 그녀는

은둔생활 중인 이웃 아서 래들리를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오빠 젬과 덫을 놓기도 하고

당돌한 언행으로 흑인 식모 캘퍼니아는 물론 고상한 이웃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근엄하면서도 자식과의 소통을 중요시 여기는 아버지 애티커스 덕분에 올곧게 자라납니다.

그런 그녀는 조금씩 세상의 민낯들과 마주하면서 크고 작은 혼란들을 겪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애티커스는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남을 이야기들을 남겨주곤 합니다.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 (p60)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버릴 까닭은 없어.” (p147)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p173)

 

스카웃은 아버지가 변호를 맡은 흑인 톰 로빈슨이 백인여성을 강간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여전히 통용되던 백인중심의 부조리한 가치관을 직시하게 됩니다.

태어난 이후 흑백의 구분이라는 사회현상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 온 스카웃이지만

메이콤 사람들이 흑인 용의자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심지어 떼를 지어 위험천만하고 폭력적인 위협까지 가해오자

적잖은 충격과 함께 자신이 속한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1930년대 미국 남부 소도시의 갈등과 혼란, 그리고 첨예한 인종차별 문제는

어린 소녀 스카웃의 눈을 통해 그려진 덕분에 더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작가가 스카웃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교훈은 어쩌면 거대하고 심오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서 내내 그녀의 좌표가 돼줄 소박하고 진정성 어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애티커스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변호하려 했던 흑인 톰 로빈슨이나

스카웃이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괴롭혔던 이웃의 은둔남 아서 래들리 같은 인물들을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그래서 함부로 죽여선 안 되는 앵무새에 비유하여 지은 제목을 보면

작가는 스카웃에게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다지고 굳건하게 만들기를,

그래서 올곧고 정의롭고 강한 숙녀로 성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독자에겐 낯선 인종차별이라는 소재가 전면에 포진한 탓에

미국 (또는 흑백 갈등이 작동하고 있는 나라)의 독자만큼 푹 빠져들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로 꼽힌 일이나

첫 출간 후 6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적어도 영미권에서 이 작품이 갖는 절대적인 가치는 분명히 인정해야 될 거란 생각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위대한 개츠비등 최근 읽은 영미권의 고전급 명작들과 마찬가지로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이나 여운을 맛보지 못하긴 했지만

나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읽기 시간이 됐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장르물에 익숙해진 나머지 너무 빨리 책장을 넘긴 게 살짝 후회됐는데,

그래선지 하퍼 리가 이 작품 이후 55년 만에 출간한 후속편 격인 파수꾼을 읽을 때는

20대가 된 스카웃의 이야기를 조금은 더 꼼꼼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성인이 된 그녀가 자신의 양심의 파수꾼이던 아버지 충돌하며 갈등하는 내용이라고 하니

어쩌면 좀더 공감하기 쉬울 수도, 또 훨씬 더 무겁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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