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기도 소타 지음, 부윤아 옮김 / 해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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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 신입생 야사카 유리코는 기이한 학교 전설을 듣는다.

대대로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유리코 님이 되어 절대 권력을 갖게 되고,

그 권력에 거역하는 학생에겐 반드시 치명적인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

한자 표기도 상관없고 학년의 제약도 없다. 그저 이름이 유리코라면 자격을 갖게 된다.

, ‘유리코 님이 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뿐이다.

전교에 유리코가 여럿이라면 나머지는 전학, 퇴학, 사건, 사고 등 어떤 식으로든 도태된다.

현재 학교엔 야사카를 포함한 신입생 4명과 전임 유리코 님등 모두 5명의 유리코가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학교괴담, 도시전설, 연쇄살인과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가 믹스된 독특한 작품입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지배하는 유리코 님의 후보가 되며,

마치 신탁(神託)이 작동하듯 부적절한 유리코들이 도태된 뒤 남는 마지막 한 사람이

새로운 유리코들이 들어올 때까지 유리코 님의 지위를 유지하며 학교를 지배한다는,

미스터리보다는 으스스한 괴담이나 전설에 가까운 소재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야사카 유리코는 전혀 유리코 님이 될 마음이 없는 고교 신입생입니다.

하지만 유리코 님에게 거역하는 학생들이 불행에 빠지거나 학교에서 퇴출된다는 전설은

지독한 따돌림의 고통에 빠져있는 야사카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유리코 님이 될 수만 있다면 현재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사카는 누군가의 불행을 제물삼아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대해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진 여리고 유약한 소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한편, 야사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는 시마쿠라 미즈키.

또래답지 않은 냉철함과 예리함을 지닌 미즈키는 유리코 님전설을 미신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야사카가 유리코 님의 힘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일 자체를 말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유리코 님 후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자

미즈키는 그것이 미신 또는 저주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범행임을 입증하고자 앞장섭니다.

 

사실, ‘유리코 님 전설21세기에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든 괴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십 년에 걸친 유리코 님의 저주를 선배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물론

그 괴담이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봤던 탓에

누가 됐든 유리코 님에 등극하는 순간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리코 님의 저주가 집단 따돌림, 입시 스트레스, 차별과 편견 등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마주쳐야 하는 끔찍한 현실의 도피처 역할도 종종 맡아왔기에

전설과 괴담의 힘은 학생들 사이에서 해가 거듭될수록 더 큰 위력을 갖게 됐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사카와 미즈키가 마주한 유리코 님의 저주는 예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의 저주는 고작해야 사고로 인한 부상이 가장 심한 경우였는데,

신입생인 그들이 목격한 유리코 님의 저주는 전례 없는 끔찍한 연쇄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리코 님 후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야사카 역시 극도의 두려움에 빠지는데,

경찰 수사마저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즈키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아무래도 10대 고교생이 명탐정 역을 맡은데다 사건 무대가 학교이다 보니

특별히 새로운 트릭이나 놀라운 설정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트릭은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어서

이 작품의 배경이 현대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괴담 혹은 전설을 연쇄살인과 매끄럽게 결부시킨 작가의 필력은 눈에 띄었는데

그래선지 큰 위화감 없이 흥미롭게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진실이 드러나고도 꽤 많은 분량이 남아서 얼마나 많은 반전이 숨어있을까 궁금했는데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독자의 뒤통수를 친 작가의 정교한 설계는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고 신선했습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담은 에필로그는 다소 무리해 보였던 게 사실인데,

놀랍긴 해도 어딘가 억지스러운, 그래서 작가의 과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앞서 펼쳐놓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막판에 개운치 않게 만든 악수(惡手)라고 할까요?

 

읽는 내내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일본 드라마가 생각나곤 했는데,

3월에 한국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일단 1~2회 정도는 꼭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소설보다는 영상이 이 작품의 매력을 잘 드러내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1989년생인 기도 소타가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독자를 찾을지도 무척 궁금해졌는데

데뷔 전에 이미 많은 이야기를 쓴 이력이 있다고 하니 기대감이 더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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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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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메이지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 나카지마 우타코가 병으로 쓰러집니다.

제자 미야케 가호와 하녀 스미는 그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낯선 원고뭉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소설을 혐오하던 나카지마 우타코가 언문일체 풍으로 쓴 뜻밖의 수기였는데,

두 사람은 그 수기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까지의 동란의 시기를 헤쳐 나온

나카지마 우타코의 애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의 기록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1860년 막부 말기, 에도 여관 이케다야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던 17살 소녀 나카지마 도세는

가난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사무라이 하야시 모치노리와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그 운명을 귀히 여기며 하야시와 부부의 연을 맺은 도세는 가난한 미토 번의 여자가 됩니다.

하지만 막부 말기 혼란의 와중에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은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작 가운데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입니다.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오로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전쟁터에 뛰어든

난부 번의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일대기를 그린 칼에 지다

한국 독자에겐 마음 편히 읽힐 리 없는 일본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니며,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기에 태어난 탓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어서

일본 근대사라는 배경과 무관하게 수시로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던 명품 시대소설입니다.

 

연가칼에 지다와 거의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소설입니다.

하지만 연가는 막부 말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필 그 난세에 태어나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진 것 외엔 아무 것도 지은 죄가 없는

도세라는 한 여자의 절절한 연애담이자 참혹한 내전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그린 시대소설이자

그 지옥을 딛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회고록이기도 합니다.

 

사무라이만은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야시의 아내가 된 도세는

에도를 떠나 미토 번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얼마 안 돼 위험한 현실들과 마주합니다.

외세에 의한 개국을 놓고 막부파와 천황파로 갈린 채 요동치는 일본의 정국,

천구당과 제생당으로 갈린 채 행동노선과 헤게모니를 놓고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의 위기,

그리고 그 와중에 충직한 무사들의 리더로 추앙받는 남편 하야시의 위태로운 처지 등

남편과의 소박한 행복만을 바라던 도세에겐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운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결국 명분 없는 내전은 수많은 목숨들을 허망하게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세는 그 지옥 같은 시간들을 오로지 하야시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간신히 버텨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우타코라는 이름으로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이 된 도세는

말년에 이르러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참혹했던 미토 번의 시간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녀가 병으로 쓰러진 뒤 그 기록들을 읽게 된 제자와 하녀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합니다.

 

나카지마 우타코는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으로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작품 소개글에 따르면 작가가 역사책에 기록된 몇 줄의 문장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역사의 숨겨진 한 뼘을 복원해 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50회 나오키 상과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시대소설 대상의 영예를 차지할 만큼

시대소설로서의 매력과 품격을 골고루 지닌 작품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북스피어를 통해 제공받았는데, 마포 김사장님(북스피어 편집자)의 메모에는

이 작품은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는데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진입장벽은 다름 아닌 작품 안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막부 말기의 역사적 사료들입니다.

인명, 지명, 직책, 역사적 사건 등 한국 독자에겐 다소 어려운 대목들이 많은 편인데

그래선지 각주의 양도 많고 그 내용도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반만 잘 넘기면 그 뒤로는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진입장벽때문에 이 작품의 미덕을 놓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 “두 번째 읽을 때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마포 김사장님의 조언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누구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재독(再讀)의 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저 역시 잠시의 틈을 둔 뒤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을 생각을 갖고 있는데

나카지마 도세가 겪은 운명 같은 사랑과 지옥 같은 시간들의 의미를

진입장벽의 방해 없이 좀 더 진하고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끝으로, 내전의 혼란 중에 도세가 남편 하야시를 향해 읊조린 애절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와카(和歌, 하이쿠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는 앞뒤 표지에도 인쇄돼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애절함의 깊이가 얼마나 무한한지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님에게 사랑을 배웠네

그러니 잊는 길도 가르쳐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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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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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누가미 일족을 통해서였습니다.

비듬 날리는 더벅머리에 어수룩한 외모의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반하기도 했고

시대물의 매력과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나는 각별한 미스터리의 맛에 홀딱 빠졌던 건데

한참 만에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재회한 이누가미 일족

여전히 강한 흡입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명품 고전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신슈 지역의 나스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 이누가미 사헤가 불길한 유언장을 남긴 채 숨집니다.

본처 없이 세 명의 첩만 뒀던 사헤는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과 손자-손녀들보다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은인이었던 자의 손녀인 다마요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유언장을 남겼는데

본문 속 표현대로 유족들을 피로 피를 씻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넣은그 유언은

실제로 끔찍한 참극과 함께 이누가미 일족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다마요와 가까이 지낸 덕에 가장 유력한 상속 후보였던 맏손자 스케키요가

때마침 패전 귀환병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부상으로 얼굴을 다쳐 고무가면 신세가 됐다는 점.

그가 진짜 스케키요냐 여부를 놓고 격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점차 유산상속전이 가열되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듯 끔찍한 살인극이 시작되고 맙니다.

 

다소 추상적인 일본 문고판 표지에 비해 메시지가 확실해 보이는 한국판 표지를 보면

줄거리에서 언급한 맏손자 스케키요의 고무가면이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임을 알 수 있는데,

핵심인물이 가면을 쓰고 등장할 경우 미스터리의 전개 방향을 대략 가늠할 수 있긴 하지만

복잡다단한 캐릭터와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정교하고 꼼꼼하게 직조한 설계 덕분에

꽤 쉬워 보일 것 같았던 미스터리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탁월한(?) 독자 가운데에는 범인이 빤히 보였다.”는 서평을 남긴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누가미 일족은 범인 찾기 자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미스터리 이상의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 탐욕, 복수, 증오 등 인간이 서로에게 겨눌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감정들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우연들과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끔찍한 비극의 여운이

오히려 (미스터리보다 더 압도적인)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의 이누가미 사헤가 겪었던 구원과 은혜, 배신과 죄책감의 흔적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들이 대를 이어 거듭 덧나면서 끝내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막장의 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누구냐를 떠나 인간 감정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미스터리 못잖은 서사의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밤 산책팔묘촌에서 다소 소극적이거나 비중이 적었던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번 작품에서는 초반부터 이누가미 가문 가까이에 머물며 적극적으로 수사를 펼치는데

덕분에 옥문도이후 오랜만에 그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두는가 하면,

작은 깨달음에도 쉽게 흥분하며 비듬이 휘날리도록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정감 가는 명탐정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내용 소개를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작품이다 보니

대략적인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가급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누가 살해되는지 자체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목인데

서평이나 소개글에는 그런 내용들까지 제법 상세하게 노출돼있기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 저의 추천도 객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누가미 일족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명품이라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못한 독자라면 첫 만남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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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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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1940~50년대에 출간된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됐는데,

세련미나 화려함에서는 현대 작품들에 비해 다소 투박해 보이긴 해도

그윽한 아날로그의 정취와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인간미는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1950)이와 손톱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빌 밸린저의 작품입니다.

치밀한 복수극과 정교한 법정 공방전이 전개되는 이와 손톱

웰 메이드 흑백영화처럼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연기로 그린 초상은 큰 틀이나 전개방법에서 이와 손톱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작품입니다.

 

시카고에서 영세 수금대행업으로 먹고 사는 대니 에이프릴에겐 평생의 로망이 있습니다.

16살 때 우연히 목격한 또래의 아름다운 소녀를 꼭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어느 날, 10년 전 한 지역신문이 개최한 미인대회 수상자의 사진을 보게 된 대니는

그 사진 속 여인 크래시 알모니스키가 자기가 찾던 바로 그 소녀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난 10년간 그녀가 살던 집들, 그녀가 다녔던 학원과 회사 등을 찾아다니며

크래시의 10년간의 발자취를 쫓는 대니의 집요한 탐문이 시작됩니다.

 

한편, 번갈아 전개되는 챕터에서는 크래시의 지난 10년의 시간이 소개됩니다.

크래시는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인대회를 이용했고

그 뒤로는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사기와 거짓말을 통해 한 계단씩 신분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런 크래시 앞에 집요하게 그녀를 찾아 헤매던 대니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나타나고

두 사람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격정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 대니 스스로 고백하듯 크래시 찾아 헤매기는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스치듯 지나간 한 소녀를 평생 마음에 품은 일도,

미인대회 수상자 사진 속의 크래시를 그 소녀라고 여기곤 일도 내팽개친 채 찾아 헤매는 일도

어쩌면 환상의 여자를 찾는 무모하고 어이없는 행각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6살의 희미한 기억과 신문 속 사진이 전부일 뿐인 크래시는 대니에겐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떠올리려 해도, 그려보려 해도 금세 허공으로 사라지고 마는 연기로 그린 초상처럼 말이죠.

하지만 대니는 크래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순수하고, 사랑스런 여자라 확신합니다.

그런 심정으로 크래시가 남긴 아주 작고 희미한 흔적들에 목매는 대니를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다가도 안쓰러움과 애절함까지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독자 입장에선 대니의 챕터에 이은 크래시의 챕터를 읽으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크래시는 대니의 기대나 로망과는 180도 다른 욕망덩어리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명 외에 캐서린 앤드루스, 캐런 앨리슨, 캔디스 오스틴, 워터베리 부인, 캔디스 파워스 등

상황에 따라 이름을 바꿔 위장하며 새 신분을 얻곤 했던 크래시는

남자를 이용하는 것 외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몸과 마음을 이용하여 팜므 파탈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고 지독하고 캐릭터로 발전하는데,

과연 대니가 크래시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크래시는 영세 수금대행업자에 불과한 대니의 짝사랑을 어떤 표정과 심정으로 대할까?”

이런 궁금증 때문에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28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둘의 만남은 그중에서도 아쉬울 만큼 짧게 그려집니다.

물론 짧긴 해도 엄청 굵고 두껍고 긴장감 넘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이 그려지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론 수십 페이지 정도는 더 할애됐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약간은 동어반복 같았던 대니의 크래시 찾기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 점과 함께

이 짧고 급한 클라이맥스와 엔딩 때문에 별 0.5개를 빼고 말았는데,

둘의 만남 이후 사건도 좀 더 많고, 우여곡절도 좀 더 겪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습니다.

 

아무튼...

이와 손톱에서도 맛봤던 빌 밸린저 특유의 막판 뒤통수치기는 이번에도 여전했는데

덕분에 속도감과 긴장감과 반전의 매력이 가득한 단편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여러 개의 이름으로 가린 채 거짓말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온 크래시도,

, 잡히지 않는 연기 같은 환상의 여인을 쫓아 집요한 추격전을 펼친 대니도

엎치락뒤치락 롤러코스터를 탄 끝에 그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니와 크래시를 기다리는 건 끔찍한 비극일까요? 달달한 해피엔딩일까요?

궁금한 독자라면 빌 밸린저의 매력적인 작품을 통해 꼭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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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앨리 스토리콜렉터 91
윌리엄 린지 그레셤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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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 유랑극단에서 마술 무대를 담당하는 영리하고 야심 찬 청년 스탠턴 칼라일.

그는 속임수로 독심술을 부리는 동료 지나에게서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요령을 배운다.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여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낸 스탠은

유랑극단 동료인 몰리와 함께 카니발을 떠나 독심술 쇼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한 발 더 나아가 속임수를 통해 죽은 자와의 교신을 중개하는 영매 노릇을 자행하던 스탠은

몰리의 반대를 뿌리치고 더 많은 돈을 위해 심령술 목사가 되어 부자들을 갈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점차 심신이 무너지고 수면장애와 불안이 폭발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과 죄책감,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 감정들을 위로해주고, 쓰다듬어주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보여준다면

기꺼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 이 작품이 출간된 1940년대는 예지, 심령, 영매 등 비현실적 개념들이

(지금보다) 설득력도 있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잘 먹히던 시대였고,

특히 저택의 귀부인이나 대기업의 총수 등 이른바 배울 만큼 배운 상류층들조차

그럴듯해 보이는 심령 쇼에 돈과 마음을 갖다 바칠 정도로 아날로그적인 시대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스탠은 타고난 재능에다 유랑극단 동료로부터 전수받은 비법과 함께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면 누구든 조종할 수 있다.”는 좌우명을 앞세워

평범한 사람들부터 부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홀리며 돈을 뜯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박진감 넘치는 사기꾼 스릴러도 아니고 권선징악을 다룬 작품도 아닙니다.

물론 유랑극단에서 출발하여 독심술사와 영매로 진화하는 스탠의 사기행각이

빠른 템포와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위주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심리, 심령, 트라우마, 정신분열 등

내밀하고 복잡한 코드들이 다소 낯선 문장과 언어들 속에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나이트메어 앨리’, 악몽의 골목이라는 제목은 그런 코드들의 집합체라는 생각인데

그래서인지 다 읽은 뒤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사건이나 기승전결 자체보다는

심신이 천천히 붕괴되다가 결국 악몽의 골목에 빠지고 마는 스탠의 비극적인 여정이었습니다.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다소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된 건 독특하고 낯선 문장들 때문입니다.

심리적 서사가 강한 작품들은 몽환적이고 모호한 단어와 문장들이 돋보일 수밖에 없는데

윌리엄 린지 그레셤이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본인 스스로 정신분석과 타로에 몰두해있었고

실제로 정신과에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다는 서문의 내용을 보면

독특하고 낯선 문장들이 탄생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스탠의 심신이 붕괴되는 과정은 작가 본인의 그것과 비슷한 비극이었을지도 모르고

그 때문에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톤도 결도 전혀 다른 작품이 창조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이런 독특한 서사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제법 갈릴 수도 있지만

출간된 직후인 1947년과 2021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영화로 제작된 것은 물론

미국 클래식 누아르로 불리며 작가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줬다는 소개글을 보면

나름 충분히 대중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194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유랑극단 자체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심리 혹은 심령 쪽 서사가 강했던 점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좀처럼 맛보기 힘든 특별한 간식을 즐겼다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습니다.

다만, 다 읽고도 흐릿한 안개 속에 서있는 듯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들이 꽤 있었는데,

그에 대한 해설이나 해석을 기대했던 옮긴이의 말서문이 욕심만큼 친절하지 않아서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통해서라도 이 작품에 대한 의견을 두루두루 찾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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