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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평점 :
1902년, 메이지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 나카지마 우타코가 병으로 쓰러집니다.
제자 미야케 가호와 하녀 스미는 그녀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낯선 원고뭉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소설을 혐오하던 나카지마 우타코가 언문일체 풍으로 쓴 뜻밖의 수기였는데,
두 사람은 그 수기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까지의 동란의 시기를 헤쳐 나온
나카지마 우타코의 애절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의 기록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1860년 막부 말기, 에도 여관 이케다야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던 17살 소녀 나카지마 도세는
가난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사무라이 하야시 모치노리와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그 운명을 귀히 여기며 하야시와 부부의 연을 맺은 도세는 가난한 미토 번의 여자가 됩니다.
하지만 막부 말기 혼란의 와중에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은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작 가운데 한 편으로 꼽는 작품이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입니다.
막부 말기의 혼란기에 오로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전쟁터에 뛰어든
난부 번의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일대기를 그린 ‘칼에 지다’는
한국 독자에겐 마음 편히 읽힐 리 없는 일본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니며,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이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기에 태어난 탓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어서
일본 근대사라는 배경과 무관하게 수시로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던 명품 시대소설입니다.
‘연가’는 ‘칼에 지다’와 거의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소설입니다.
하지만 ‘연가’는 막부 말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필 그 난세에 태어나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진 것 외엔 아무 것도 지은 죄가 없는
도세라는 한 여자의 절절한 연애담이자 참혹한 내전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그린 시대소설이자
그 지옥을 딛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회고록이기도 합니다.
“사무라이만은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야시의 아내가 된 도세는
에도를 떠나 미토 번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얼마 안 돼 위험한 현실들과 마주합니다.
외세에 의한 개국을 놓고 막부파와 천황파로 갈린 채 요동치는 일본의 정국,
천구당과 제생당으로 갈린 채 행동노선과 헤게모니를 놓고 내전에 휩싸인 미토 번의 위기,
그리고 그 와중에 충직한 무사들의 리더로 추앙받는 남편 하야시의 위태로운 처지 등
남편과의 소박한 행복만을 바라던 도세에겐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운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결국 명분 없는 내전은 수많은 목숨들을 허망하게 사라지게 만들었고,
도세는 그 지옥 같은 시간들을 오로지 하야시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간신히 버텨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우타코라는 이름으로 메이지 시대를 풍미한 여류 시인이 된 도세는
말년에 이르러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참혹했던 미토 번의 시간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녀가 병으로 쓰러진 뒤 그 기록들을 읽게 된 제자와 하녀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합니다.
나카지마 우타코는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 히구치 이치요의 스승으로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작품 소개글에 따르면 작가가 “역사책에 기록된 몇 줄의 문장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역사의 숨겨진 한 뼘을 복원해 냈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50회 나오키 상과 ‘전국 서점 직원이 뽑은 시대소설 대상’의 영예를 차지할 만큼
시대소설로서의 매력과 품격을 골고루 지닌 작품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북스피어를 통해 제공받았는데, 마포 김사장님(북스피어 편집자)의 메모에는
“이 작품은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는데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진입장벽’은 다름 아닌 작품 안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막부 말기의 역사적 사료들입니다.
인명, 지명, 직책, 역사적 사건 등 한국 독자에겐 다소 어려운 대목들이 많은 편인데
그래선지 각주의 양도 많고 그 내용도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초반만 잘 넘기면 그 뒤로는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진입장벽’ 때문에 이 작품의 미덕을 놓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또, “두 번째 읽을 때 작품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마포 김사장님의 조언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누구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재독(再讀)의 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저 역시 잠시의 틈을 둔 뒤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을 생각을 갖고 있는데
나카지마 도세가 겪은 운명 같은 사랑과 지옥 같은 시간들의 의미를
‘진입장벽’의 방해 없이 좀 더 진하고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끝으로, 내전의 혼란 중에 도세가 남편 하야시를 향해 읊조린 애절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와카(和歌, 하이쿠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는 앞뒤 표지에도 인쇄돼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애절함의 깊이가 얼마나 무한한지 새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님에게 사랑을 배웠네
그러니 잊는 길도 가르쳐 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