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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평점 :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는 신주쿠 뒷골목의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어느새 오십대에 접어든 탐정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날 중년의 은행지점장이 찾아와 한 여자의 뒷조사를 의뢰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여자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지만,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복면강도와 마주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이후 2년 반 만에 하드보일드 탐정 사와자키를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일’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인데,
개인적으론 어떤 의미나 기준을 갖고 시즌을 구분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사와자키의 다른 어떤 면모보다 ‘50대’라는 점을 강조한 걸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 후반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시즌 2’라는 타이틀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는 구성입니다.
하나는 은행지점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전통 요정의 여사장에 대한 뒷조사이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휘말리게 된 은행 강도사건입니다.
단순히 강도사건의 인질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사와자키는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악연 덩어리인 신주쿠 경찰 니시고리로부터 ‘공범’으로 의심받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악연 덩어리인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요정 여사장의 뒷조사를 의뢰한 뒤 종적을 감춘 은행지점장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사와자키는 그를 찾는 일에 주력합니다.
동시에 그가 뒷조사를 의뢰했던 요정 여사장에 대해서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습니다.
50대라는 나이가 강조되긴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 노련하고 노회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그와 함께 이 시리즈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여전한 활약을 펼쳐서
적이든 아군이든 언제나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솔직히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였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무척 모호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언제나처럼 사와자키는 탐문, 단서, 추리를 펼치면서 여러 번의 위기를 겪는데
나중에 본인 스스로 ‘촌극’이라 부를 만큼 사건은 용두사미 식으로 전개됐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분량과 인물들이 필요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다소 빈약하고 허술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또, (하라 료가 진짜 강조하고 싶었던 걸로 보이는) 다소 억지스런 휴먼 미스터리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은 물론 감동을 목적으로 한 티가 너무 역력해보였습니다.
그 휴먼 미스터리의 해결 과정 역시 뜬금없는 비약을 통해 이뤄지는 바람에
감동은 물론 이해조차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에 관련된 꽤 많은 인물들의 개인사나 가족사가 장황하게 설명되곤 하는데
정작 그 설명들이 미스터리 자체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어서 지루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과연 하라 료가 이 작품을 통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뭘까, 궁금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더불어, 다 읽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제목 역시 아직도 의문일 뿐입니다.)
이런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사와자키의 매력 때문입니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지독한 독설, 특유의 블랙 유머, 빠른 템포의 속사포 같은 대화에다
그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하라 료만의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미스터리 자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장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장을 읽고 싶어서 사와자키 시리즈를 기다린다.”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말이 다른 어느 서평이나 홍보글보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즌 1’에 해당하는 초기 세 작품을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어느 정도 아쉬움이 있긴 했어도 캐릭터, 문장, 미스터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게 확실했는데,
‘지금부터의 내일’은 미스터리의 ‘함량’이 기대에 너무 못 미친 탓에
오로지 사와자키의 캐릭터와 하라 료의 문장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