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이즈의 작은 섬 월금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도모코는 18세가 되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양아버지 다이도지 긴조가 사는 도쿄 대저택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인 19년 전 절벽에서 사고로 추락사한 친부의 죽음에 늘 의문을 품어왔던 도모코는 섬을 떠나기 직전 그 당시 어머니가 봉인했던 방에서 살인의 흔적을 발견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도모코의 양부인 다이도지 긴조와 그의 후원자 앞으로 기묘한 협박편지가 날아듭니다. 19년 전 도모코 친부의 죽음의 비밀에 대한 암시와 함께 도모코가 도쿄에 와선 안 된다는, 그럴 경우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 참혹한 죽음에 이를 거라는 협박이 담겨있습니다.

긴조의 변호사를 통해 도모코의 수행을 의뢰받은 긴다이치 코스케가 분투하지만 이후 한 달에 걸쳐 (협박장 내용대로) 도모코 주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1951~52년에 연재됐으니 태어난 지 꼭 70년이 된 작품이지만 여느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지금 읽어도 너무나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그 시대의 아날로그 정취와 함께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를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인데, 어수룩한 외모와 더벅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캐릭터는 이 시리즈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최고의 매력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여왕벌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구도를 갖고 있는데, 사건이 한 공간에서 벌어지고 그 안에서 다양한 트릭이 난무한 게 이전 작품들의 특징이라면, ‘여왕벌은 외딴 섬 월금도, 옛 화족 저택이었던 고급 호텔, 가부키 극장, 도쿄의 대저택 등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사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성격이나 범행 동기도 이전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 패전 직후를 배경으로 전통과 근대성의 충돌, 그리고 인습과 미신으로 불거져 나오는 불쾌한 살의라는 점에서 벗어나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에 충실한 편이라 이 시리즈의 팬 입장에선 색다른 맛과 함께 좀더 팽팽하고 긴장감 넘치며 농밀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절세미인을 둘러싼 2대에 걸친 집요한 욕망과 저주를 탐미적이고 관능적인 필체로 그린 작품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여왕벌의 특징을 잘 압축해놓은 한 줄 카피라는 생각입니다.

 

도모코를 차지하려는 정혼자 후보들이 살해되고, 도모코 본인에게도 월금도로 돌아가라는 협박장이 날아드는 가운데 긴다이치 코스케마저 범인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빠른 속도로 치닫는데,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이 결국 19년 전 도모코 친부의 죽음의 비밀과 연관돼있다는 설정 덕분에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듯 전개됩니다. 또 막판에 공개되는 결정적 반전은 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크고 깊은 비극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반전의 충격이상의 여운을 남깁니다.

 

지금까지 읽은 어느 작품보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도 매력적으로 그려졌는데, 단순히 명탐정의 역할을 넘어 사건 뒤에 도사린 비극성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켜보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참극의 중심에 내던져진 도모코와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애잔할 정도로 공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 공개된 사실과는 다른, 그만이 포착한 진실을 그만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모습 역시 다시 한 번 그에게 푹 빠지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줬는데, 뭐랄까, 한 뼘 이상 훅 성숙한 긴다이치 코스케를 만난 듯한, 그런 훈훈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트릭들은 다소 쉬워 보이기도 하고 그 구조 역시 특별히 정교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공감도 되고 납득하기도 쉬웠는데, 이 작품의 매력이 명탐정의 트릭 깨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낳은 참혹한 비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쉽고 단순한 트릭이 더 잘 어울려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격의 맛을 기대한 독자들에겐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힘과 재미 면에선 그 어떤 작품에 못잖은 명품이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만난 적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통해 시리즈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옮긴이의 말대로 이 작품은 연애소설도, 환상소설도, SF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의 모티브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일곱 개의 사랑(대부분) 너무나도 기괴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마치 외계나 이계의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낯선 감정처럼 와 닿습니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이나 행복은 물론 죽음마저도 몸 안에 숨어든 날벌레의 생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설정, 사랑에 상처받으면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들, 세 번의 산란을 마친 여자와 적정 수준 이상의 를 뿌린 남자는 급격한 노화 끝에 사망하는 평균 수명 20대 중반인 사회 등 이 작품 속에 그려진 시공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특별함과 기괴함으로 포장돼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하고도 기괴한 시공간에서 그려지는 감정은 너무나도 애틋한 사랑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기괴한 시공간은 그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진하고 농밀하게 만듭니다.

표제작인 치자나무에는 10년의 불륜을 청산하는 자리에서 불륜남에게 추억의 징표로 한쪽 팔을 요구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여자는 그 팔을 꽃병에 담아 소중히 대하는 것은 물론 외출할 때나 잠을 잘 때에도 항상 곁에 두는 등 이별 후에도 그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불륜남의 아내가 나타나 예상치 못한 요구를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꽃벌레는 운명 같은 사랑과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이 실은 당사자들의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몸에 침투한 한낱 날벌레의 조종의 결과라는 설정이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가짜 감정에 괴로워하지만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벌레의 산물인 사랑과 행복을 소중히 지키려 합니다.

네 번째 수록작인 짐승들에는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 변이는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견디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 때 작동하는 특별한 기제입니다. 여자들과 낮과 밤을 나눠 살아가는 남자들은 그 뱀이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의 화신이란 건 생각도 못하고 끔찍한 괴물로 여겨 잔인하게 처치합니다.

 

수록작 중에는 지극히 일반적인사랑의 이야기도 있고, 폭압적인 현실에서 도피하여 일그러진 애정을 발산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작품집 안에 들어있어서 그런지 그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애증도 결코 평범하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세상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라며,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에 푹 몰입하다 보면 문득 스스로 그 기괴한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로테스크.

아마, 이 작품을 단어 하나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더없이 진부하고 게으른 답이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답은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불편한 책읽기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깊은 인상과 여운을 받은 작품이라 작가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다시 내놓는다면 허겁지겁 찾아 읽을 게 분명할 것 같습니다.

 

여담 한 가지만...

아야세 마루는 2010꽃에 눈멀다’()라는 작품으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와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도 이 문학상 출신이라 여느 일본의 문학상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 모두 19금 판정을 받았습니다.) 같은 상을 받은 아야세 마루의 이력 때문에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도 이미 이 문학상 수상작품이 몇 편인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아야세 마루 덕분에 제 취향에 잘 맞는 일본 작가와 소설들을 발굴할 수 있게 돼서 그저 반가울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 열쇠 열린책들 세계문학 265
대실 해밋 지음, 홍성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20세기 중반에 출간된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자주 읽게 됐는데, 고백하자면, ‘유리 열쇠는 읽기 전에 꽤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몇 년 전에 읽은 대실 해밋의 대표작 말타의 매’(또는 몰타의 매’)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고, 당시 쓴 서평에도 “‘사건만 있고 사람은 잘 안 보이다보니 딱딱한 뒷맛만 남았다. 영미권 하드보일드는 나와는 그리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쓸 정도로 큰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 하필 며칠 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작가인 하라 료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을 읽곤 당분간은 국적(?)을 불문하고 하드보일드는 멀리 하려는 생각을 한 탓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전이 풍기는 유혹과 함께, 북유럽 최고의 탐정 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인 유리 열쇠상의 유래가 된 작품이란 점, 또 오래 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밀러스 크로싱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란 점 등 여러 가지 기대감이 들기도 해서 하드보일드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은 싹 지워버리고 거장 대실 해밋과 다시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폴 매드빅은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 가는 도시의 거물이며, 네드 보몬트는 그런 매드빅의 브레인이자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인물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후원하는 상원의원의 승리를 위해 매표 행위도 서슴지 않던 매드빅은 상원의원의 딸 재닛을 좋아하며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속내를 보몬트에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아들이자 재닛의 오빠인 테일러가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후 사건 관련인물들에게 매드빅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수상한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하고, 언론마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매드빅을 의심하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도박중독자지만 냉정하고 합리적인 브레인이기도 한 보몬트는 정치적 긴장감이 도사린 이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급기야 매드빅과의 관계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역시 하드보일드는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장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작품입니다. 주인공 네드 보몬트의 매력적인 캐릭터라든가 몇 차례의 반전과 의외의 범인 등 충분히 흥미진진한 요소를 갖춘 이야기지만, ‘역자 해설에 언급된대로 등장인물의 내적인 감정과 생각을 배제한 채 그들의 행동과 주변의 정황만으로 글을 이끌어 가는방식은 무미건조함은 물론 때론 너무 불친절하다는 인상까지 남기면서 몰입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책읽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세세한 내면 묘사 때문에 도무지 페이지가 안 넘어가는 일부 심리스릴러 작품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기름기 하나 없는 퍽퍽한 살코기 같은 정통 하드보일드 역시 그에 못잖게 소화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원조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대실 해밋의 작품이니 그 퍽퍽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인물은 논외로 치더라도 주인공인 네드 보몬트의 속내나 감정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는데, 그의 말이나 행동에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고, 특히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으로서의 역할에선 앞뒤 맥락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범죄가 난무하던 시대에 태어난 작품이다 보니 어쩌면 심리나 감정 같은 기름기를 싹 걷어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지니게 된 게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독자가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만 있었다면 훨씬 더 대중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줄거리, 캐릭터, 사건만 보면 재미있는 스릴러를 위한 재료들은 다 모여 있는 셈인데 대실 해밋이라는 셰프의 레시피는 그 재료들의 말초적이고 끈적끈적한 부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취향 가운데 하나가 지극히 대중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하드보일드란 겉멋을 살짝 입힌 스타일인데, 정통 마니아 입장에선 그건 사이비!”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전 딱 그 정도 수준의 하드보일드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하드보일드에 적응 못한 불평만 잔뜩 늘어놓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예로 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드보일드라는 게 문장 하나, 문단 한 대목을 콕 찝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런 인상비평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직접 읽기 전에 하드보일드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무모한 일이니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생긴다면 대실 해밋이든 레이먼드 챈들러든 아니면 다른 어느 작가를 통해서라도 한두 편쯤은 직접 맛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드보일드에 부적응 증상을 보이면서도 책장에 방치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로몬 부티크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좌천 또는 불명예라는 딱지가 붙은 멤버들이 모인 하서경찰서 표적수사대’.

유일하게 그 딱지에서 자유로운 경위 민재경은 대원들과 함께 팀장 정두현의 지휘 아래

7년에 걸쳐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수험생 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그런데 재경은 두현을 통해 이해 불가능한 괴짜 인물을 소개받습니다.

일말의 체취만으로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착해내는 뛰어난 후각의 남자 남타신은

두현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수사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내내 거절해왔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표적수사대에 도움을 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갖 재수 없음의 총집합체인 남타신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재경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직접 체험하곤 인내심을 발휘하여 파트너로 받아들입니다.

또 그가 갑자기 수사에 도움을 주기로 한 이유가 자신 때문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고백하자면, ‘페로몬 부티크는 한 번 중도포기했던 작품입니다.

100페이지도 채 못 가 책장을 덮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현실감 없는 멋부림이었는데,

황당하기만 했던 재경과 타신의 첫 만남 에피소드에서 바로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능가하는 후각을 지닌데다 VVIP급 고객을 거느린 향수 전문가인 남타신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성격에 막말과 안하무인이 몸에 밴 인물인데,

그와 재경과의 첫 만남부터 어이없는 판타지 로맨스 같은 장면이 펼쳐진 탓에

그 뒤의 연쇄살인 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찌어찌 다시 연이 닿아 결국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습니다.

사건도, 캐릭터도,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무엇 하나 자연스럽게 따라가지지 않았고,

이야기는 화려하고 복잡하긴 한데 산만하기만 할 뿐 중심이 잡히지 않아 보였습니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죄다 어떤 식으로든 연쇄살인과 엮여 있는데

필연적인 경우도 있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연인 경우도 있습니다.

, 소위 찌질이들을 갖다 모아놓은 표적수사대라는 곳은

고위간부 한 사람의 입김만으로도 쉽게 해체시켜버릴 만한 만만한 곳처럼 그려졌지만

정작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들조차 무슨 이유에선지 쉽게 손대지 못합니다.

7년을 끌어온 사건인데 유력한 용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으로 수사선상에 떠올랐고,

범인은 즉시 제거했어야 할 피해자들을 별 이유도 없이 7년 동안 질질 끌며 처리해왔습니다.

재경과 타신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끌려가는 이미지가 더 강했고

어설픈 티격태격 로코의 뒤끝은 조금도 예쁘지도, 흥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복잡다단한데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내용 소개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인상비평에 가까운 혹평만 하게 됐는데,

대중적이고 말초적인 재미는 분명 여러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미스터리도, 로맨스도 여기저기 산만하게 씨앗들만 잔뜩 뿌려놓았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회수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엔딩을 맞이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강지영을 처음 만난 건 개들이 식사할 시간이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단편집이었는데,

그 뒤로 만난 살인자의 쇼핑몰’, ‘심여사는 킬러는 대중적 재미와 안정적 구도는 갖췄더라도

개들이 식사할 시간의 강렬한 개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라 다소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페로몬 부티크는 한 가지 매력이라도 딱히 손꼽기 어려웠던 것은 물론

강지영의 장점과 필력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과 함께 쇠락해가는 신주쿠 뒷골목의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어느새 오십대에 접어든 탐정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날 중년의 은행지점장이 찾아와 한 여자의 뒷조사를 의뢰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여자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지만,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와자키는 의뢰인이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복면강도와 마주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이후 2년 반 만에 하드보일드 탐정 사와자키를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일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인데,

개인적으론 어떤 의미나 기준을 갖고 시즌을 구분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사와자키의 다른 어떤 면모보다 ‘50라는 점을 강조한 걸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 후반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시즌 2’라는 타이틀이 조금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개의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는 구성입니다.

하나는 은행지점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전통 요정의 여사장에 대한 뒷조사이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휘말리게 된 은행 강도사건입니다.

단순히 강도사건의 인질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사와자키는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악연 덩어리인 신주쿠 경찰 니시고리로부터 공범으로 의심받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악연 덩어리인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하시즈메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요정 여사장의 뒷조사를 의뢰한 뒤 종적을 감춘 은행지점장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사와자키는 그를 찾는 일에 주력합니다.

동시에 그가 뒷조사를 의뢰했던 요정 여사장에 대해서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와자키의 매력은 여전했습니다.

50대라는 나이가 강조되긴 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 노련하고 노회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그와 함께 이 시리즈의 매력적인 조연들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여전한 활약을 펼쳐서

적이든 아군이든 언제나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솔직히 다 읽고도 무슨 이야기였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무척 모호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언제나처럼 사와자키는 탐문, 단서, 추리를 펼치면서 여러 번의 위기를 겪는데

나중에 본인 스스로 촌극이라 부를 만큼 사건은 용두사미 식으로 전개됐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분량과 인물들이 필요했는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다소 빈약하고 허술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 (하라 료가 진짜 강조하고 싶었던 걸로 보이는) 다소 억지스런 휴먼 미스터리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은 물론 감동을 목적으로 한 티가 너무 역력해보였습니다.

그 휴먼 미스터리의 해결 과정 역시 뜬금없는 비약을 통해 이뤄지는 바람에

감동은 물론 이해조차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에 관련된 꽤 많은 인물들의 개인사나 가족사가 장황하게 설명되곤 하는데

정작 그 설명들이 미스터리 자체와는 그다지 연관이 없어서 지루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과연 하라 료가 이 작품을 통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뭘까, 궁금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더불어, 다 읽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제목 역시 아직도 의문일 뿐입니다.)

 

이런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사와자키의 매력 때문입니다.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지독한 독설, 특유의 블랙 유머, 빠른 템포의 속사포 같은 대화에다

그의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는 하라 료만의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미스터리 자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장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장을 읽고 싶어서 사와자키 시리즈를 기다린다.”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말이 다른 어느 서평이나 홍보글보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즌 1’에 해당하는 초기 세 작품을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어느 정도 아쉬움이 있긴 했어도 캐릭터, 문장, 미스터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게 확실했는데,

지금부터의 내일은 미스터리의 함량이 기대에 너무 못 미친 탓에

오로지 사와자키의 캐릭터와 하라 료의 문장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