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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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60세인 엘리엇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명망 있는 외과의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회한이 있다. 그것은 30년 전, 사랑하는 연인 일리나를 사고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것. 일리나를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던 엘리엇은 캄보디아에서 만난 신비한 노인으로부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10개의 알약을 얻은 덕분에 그 소원을 풀 기회를 잡게 된다. 30년 전인 1976년으로 돌아간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일리나를 살려내지만, 과거의 한 조각이 뒤바뀌면서 벌어진 나비효과는 그의 삶 전체를 엉망진창의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기욤 뮈소, 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를 끄는 외국 작가들입니다. 동시에 저와는 별로 궁합이 맞지 않는 작가들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무라카미 하루키는 살짝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기욤 뮈소는 초창기에 한두 작품을 초반만 읽곤 그 뒤로 관심 밖으로 밀어냈던 작가입니다. (그에 대해 잠시 관심을 가졌던 건 2018년에 출간된 아가씨와 밤을 읽었을 때인데, 스토리와 미스터리 모두 기대 이상이라 의아하게(?)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2014년 봄에 10권으로 구성된 기욤 뮈소 양장본 전집 세트를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7년을 책장에 방치해놓았으니 아무리 기욤 뮈소와 궁합이 안 맞는 독자이긴 해도 책에게 오랫동안 참 못할 짓을 한 셈입니다.

그래도 무슨 인연인지 전집 세트 10권 중 한 권을 읽어보기로 큰 결심을 하게 됐는데, 내용도 모르고 독자들의 평가도 무시한 채 가장 분량이 짧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절도 채 안 돼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이란 걸 눈치 채곤 순전히 짧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선택한 걸 후회했는데, 딱히 시간여행이란 소재를 싫어해서라기보다 여러 장르에서 너무 자주 활용된 탓에 지레 피로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는데도 어딘가 느슨하고 가볍고 밋밋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탓에 초중반쯤엔 역시 나와는 인연이 아닌가보네.”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반을 살짝 넘어선 부분부터 이 작품의 매력과 미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과거를 수정했지만 그것이 더 끔찍한 비극을 몰고 온 것은 물론 현재마저 엉망으로 뒤엉키게 만든 것을 깨달은 엘리엇이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과거를 살리자니 현재가 붕괴되고, 현재를 살리자니 과거의 실수를 바로 잡을 길이 없는 엘리엇의 딜레마는 그야말로 재미와 초조함을 동시에 만끽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란 뜻입니다.

, 시간여행 트릭은 겉으론 다소 허술해보였지만 실은 꽤 꼼꼼하고 정교하게 설계돼있었고, 엘리엇의 연인 일리나, 절친인 매트 등 주요 조연들의 캐릭터와 역할도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엘리엇 못잖게 궁금증과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느슨하고, 가볍고, 밋밋하던 초반에 비해 속도감과 긴장감을 장착한 문장들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엄청난 기세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는데, 다만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스토리에 비해 문장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게 느껴진 건 끝까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만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이라면 한두 번쯤은 눈가가 뜨끈해지거나 울컥해질 만도 한데 기욤 뮈소는 도무지 그럴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고백하자면, 기대라곤 거의 없이 약간의 의무감으로 시작한 책읽기였는데, 어쩌면 그 덕분에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책장에 방치된 전집 세트의 나머지 9권이 슬그머니 신경 쓰이게 된 것도 사실인데,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던 생각은 잠시 접게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달려들 일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 이번처럼 별 기대 없이 한 권씩 읽는다면 언젠가는 기욤 뮈소를 마스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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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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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귀족 츠바키 히데스케가 의문투성이의 기괴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는 전대미문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렸다가 수상쩍은 알리바이를 대고 겨우 혐의를 벗어난 직후 자살한 터라 의혹은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츠바키의 딸 미네코의 의뢰로 저택을 방문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주인의 몰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황량한 저택의 분위기는 물론,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는 츠바키의 친인척들의 음험한 태도에 한기를 느낍니다. 더구나 여기저기서 죽은 츠바키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가 죽기 전 작곡한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가 녹음된 레코드가 누군가에 의해 수시로 저택에 울려 퍼지면서 귀기 어린 공포가 모두를 사로잡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불길한 예상대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극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분신사바를 연상시키는 모래점, 불길한 모양의 피부 반점, 죽은 귀족이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정황, 그리고 소름 끼치는 멜로디의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등 호러 코드가 다분한 작품입니다. 거기에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귀영화를 누리던 귀족들이 패전의 그늘 속에서 하루아침에 몰락을 맞이한 시대적 배경까지 덧붙여져서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더욱 서늘하고 기괴해질 뿐입니다.

 

나는 이 이상의 굴욕, 불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유서 있는 츠바키 가문의 이름도 이것이 폭로되면 수렁에 빠지고 만다. 아아,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나는 아무래도 그날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구나.” (p33)

 

츠바키 히데스케가 남긴 이 유서는 온통 수수께끼 같은 말만 가득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다시 떠올려보면 행간에 숨은 비통한 사연들이 절절이 느껴지는 탓에 자살을 결심한 그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했을지 어렵지 않게 수긍하게 됩니다.

애초 희대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굴욕의 원인으로 추정됐지만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가 혐의를 벗기 위해 마지못해 진술했던 미묘한 알리바이에 더욱 주목합니다. 강도살인사건 발생일을 전후하여 그가 머물렀다는 고즈넉한 여관을 찾아간 코스케는 여러 사람의 진술을 통해 츠바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인척들이 연루된 끔찍한 과거사를 눈치 채는데, 문제는 단서가 잡힐 만하면 누군가에 의해 그 단서가 차단되거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살인의 동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막장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또 그 탐욕이 낳은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닥없는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어 마땅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치렀다는 개운함보다는 끔찍한 살인극을 저지른 범인의 심정과 기괴한 제목의 플루트 곡을 작곡한 뒤 자살을 선택한 귀족 츠바키의 고뇌가 남긴 씁쓸한 여운이 더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도 지적됐지만 다 읽은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소 어수룩하거나 허점이 엿보이는 설정들이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호러 코드는 다소 억지스러웠고, 범인의 계획이나 살인행위도, 또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도 우연 또는 비약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귀기 어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이런저런 단점이나 아쉬움을 떠올릴 틈도 없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런 게 거장의 마력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물론 취향이 안 맞는 독자에겐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띄겠지만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에겐 또 한 번 이 시리즈의 매력을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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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는 대화와 어느 과거에 관하여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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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똑같은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기억이란 기제는 그것을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과장시켜서 혹은 왜곡시켜서 뇌리에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난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어.”라고 기억하는 일을 누군가는 네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라고 기억하는 건 설령 CCTV나 몰래카메라로 그 상황을 찍어놓았다고 해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네 편의 단편은 과거에 대한 상이한 기억들 또는 상이한 판단들로 인해 한없이, 또 불쾌하게 어긋나버리는 대화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만에 재회한 인물들은 때론 반갑게, 때론 설렌 마음으로, 때론 초조한 기분으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이내 자신과 전혀 다른 과거를 기억하는 상대방으로 인해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기대했던 만남이 불쾌함으로 가득 찬 악몽으로 변질되는 걸 목격합니다.

오해나 기억의 오류 탓이라면 어떻게든 바로 잡을 수 있겠지만, 어긋난 대화를 초래한 과거는 이미 각자의 뇌리 속에서 전혀 다른 색깔로 고착돼버린 탓에 지울 수도, 덧칠을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걸.”이란 후회와 씁쓸함만 남는 이야기들이라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라 불리는 작품들보다 더 찜찜하고 지저분한(?) 뒤끝을 맛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이런 뒤끝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많은 설정이긴 합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 치곤 꽤 야박한 평점을 줬는데, 소재나 주제 때문에 나름 긴장감이 넘치긴 해도 소설로서의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과거에 관한 어긋난 대화와 그로 인해 벌어진 불쾌한 상황자체가 전부라 딱히 기승전결이라 할 만한 굴곡도 별로 없는, 다소 밋밋한 나열식 이야기란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지나치게 생생한 현실감도 소설적 재미를 떨어뜨린 원인일 수 있는데, 그래선지 소설이라기보다 자전 에세이나 회고록처럼 읽힌 것도 사실입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팬에게는 필독서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읽기 전에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두루두루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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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모노가따리 1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이승웅 옮김 / 다산글방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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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간된 다른 번역본과 달리 이 작품은 제목, 작가 이름, 본문에 모두 경음(,,,)을 사용하고 있는데, 서평에서는 편의상 격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읽고 싶었던 일본의 고전 겐지모노가타리’(原氏物語)를 말 그대로 맛보기정도로 만나봤습니다. 11세기 초, 그러니까 1,000년도 전에 지어진 작품으로 현대적 의미의 소설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작가가 여성이란 사실, , 서민들 사이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작품집일 거라는 (아무 근거 없는) 예상과 달리,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히카루 겐지의 일대기, 그중에서도 수많은 여성들과의 로맨스를 그렸다는 점에 꽤나 놀랐습니다.

모두 354권으로 구성돼있다는데, 제가 읽은 다산글방의 겐지모노가따리 1’1부 중 8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겐지의 출생부터 그의 여성편력의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그리고 있는데, 실제 문장에는 음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가만히 행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란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갖는 겐지의 행보가 그저 파격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태어난 후로 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탓에 황자(皇子)가 될 수 없었던 겐지는 궁 밖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의 첫사랑이자 진실한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인 제()가 어머니 대신 새로 들인 후궁입니다. ()는 일찍 세상을 떠난 후궁 기리쓰보(겐지의 어머니)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와 꼭 닮은 후지쓰보를 후궁으로 맞이했는데, 겐지는 그 후지쓰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란 걸 인정한 겐지는 고위관료의 딸과 결혼한 후로도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 후지쓰보를 대신할 존재로 그녀의 조카인 10살 소녀 무라사키노우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키운 끝에 결혼에 이릅니다. (결혼 부분은 제가 읽은 1권에는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의 도덕이나 예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겐지의 행보는 파격과 문란 그 자체입니다. 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겐지에게 있어 여성은 평가의 대상 또는 관계의 대상으로만 그려져서 당시(헤이안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사료라는 점 외에 이 작품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다는 건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며, 겐지와 관계를 갖는 여성들의 지난한 삶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세간의 평가를 보면, 아무래도 54권 중 겨우 8권만을 읽은 제가 함부로 예단해선 안 되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한글로 번역됐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독해의 수준이 필요합니다. 이름과 호칭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고,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직역에 가깝게 번역돼있어서 문장 자체가 난해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와카(和歌, 하이쿠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를 통해 주고받는 은유적인 대목들도 많고, 그걸 설명하기 위한 각주도 그만큼 많아서 평범한 책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고전이다 보니 함부로 일반독자 눈높이에 맞춰 현대적인 문장으로 번역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먼저 내용을 이해한 뒤 원작에 가까운 번역문을 읽는다면 좀더 이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한 고전에 평점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점의 경우 서평 올리려면 평점 체크가 필수적이라) 매기긴 해야 해서 가장 무난한 별 4개를 줬는데, 큰 의미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으로선 2권까지 읽을 자신은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인데, 저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쉽게 읽는 겐지모노가타리같은 번역작이 출간된다면 그저 고마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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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에 젖다 케이스릴러
이수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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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고향 무억도를 도망치듯 떠나온 정영선은 과거를 지우고 정태희로 개명까지 한 후 강남 사모님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배송된 의문의 향수에 의아해하던 태희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곤 충격에 빠집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버린 이름 정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살았던 무억도 시절의 절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나타나선 16년 전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을 거론하며 거액의 돈을 요구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혼조건으로 내걸었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풍족하고 화려한 삶이 단박에 붕괴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태희는 어떻게든 무억도 친구들의 협박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고즈넉이엔티의 케이 스릴러 시리즈는 기성작가보다는 대부분 신인작가의 데뷔작인 작품이 많이 포진돼있습니다. ‘케이 스릴러 시리즈가운데 여덟 번째로 만난 향수에 젖다도 그런 경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시리즈가 한국 장르물의 든든한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족도나 평점은 들쑥날쑥한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리면 어떤 이야기들인지 대략의 소개글이라도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게 되곤 합니다.

 

향수에 젖다는 과거의 비밀을 놓고 협박, 복수, 살인이 벌어진다는, 다소 고전적인 설정이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선명한 구도 때문에 선택한 작품입니다. 요약한 줄거리는 초반 전개부 정도만 정리한 것인데, 이 뒤로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에 더는 상세한 소개가 어렵습니다. “인연을 끊어냈던 절친들이 16년 만에 나타나 과거를 들먹이며 협박하자 주인공이 그에 대처한다.”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뼈대도 근육도 빈약한 단순한 스릴러에 머물렀겠지만, 작가는 태희를 향한 정체불명의 또 다른 위협을 설정함으로써 이야기의 층위도 복잡하게 만들고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희는 절친들의 협박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그들 사이의 미묘한 대립 관계를 역이용하며 나름 유리한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양쪽의 전세는 그야말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좀처럼 승부를 가늠하기 어렵게 전개됩니다. 특히 독자 입장에선 협박에 시달리는 태희를 선한 주인공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여러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딱히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 돈을 요구하는 절친들보다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의 존재가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는데, 태희뿐 아니라 절친들 모두에게 의문의 선물(향수와 디퓨저)을 보낸 누군가는 초반부터 16년 전 무억도에서 벌어진 한 전학생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는 것으로 소개된 덕분에 비밀과 거짓말, 원한과 복수 등 좀더 긴장감 넘치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릴러를 구축합니다.

 

중반 또는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명한 캐릭터, 단단한 문장들, 깔끔하고 정교한 구성이 돋보여서 작가에게 거는 기대감도 커졌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했지만, 작가가 승부를 건 트릭이 조금씩 엿보일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 트릭이 완전히 공개될 즈음에는 꽤 큰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좀처럼 수긍하기 어려운 막판 트릭이 몇 가지 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이 그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트릭이라도 마지막까지 예상 밖의 전개를 보였다면 얼마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겠지만, 실은 이 작품의 후반부는 트릭 자체도 전형적이었던 것은 물론 주요 인물들의 감정, 목표, 태도 등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돼서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그래서, 다들 어떻게 됐다는 거지?”라는 의문만 머릿속에 남고 말았습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진부하고 타성적인 엔딩에서 벗어나려다 오히려 이야기가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진의 신작 소식이 들린다면 기꺼이 찾아 읽고 싶은 욕심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만큼 필력과 내공이 돋보였고, 자기 스타일에 잘 맞는 재료들을 끌어 모은다면 향수에 젖다의 아쉬움을 전부 날리고도 남을 매력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꽤 높은 확률로 기대하고 싶은 작가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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