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로의 여행 열린책들 세계문학 270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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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유럽. 영국 무기제조사의 직원인 엔지니어 그레이엄은 터키 정부와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길에 독일 정보부가 보낸 암살자의 추격을 받는다. 터키 비밀경찰은 그레이엄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그를 소수 인원만 탑승하는 화물선에 승선시킨다. 폐쇄된 배 안에는 비밀경찰이 사전에 신원을 확인한 몇 명의 승객들만 탑승해 있다. 헝가리 출신의 미녀 댄서, 독일 고고학자, 터키 담배상, 프랑스 사회주의자 등. 이렇다 할 위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레이엄이 그럭저럭 항해에 적응해 나갈 무렵, 배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아직 읽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작가 에릭 앰블러의 작품입니다. 사실 작가 이름도 무척 생소했던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걸 알곤 작가나 작품 모두 평범치 않은 위상을 지녔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는 호칭과 함께 값싼 흥미 위주의 스파이 소설들과 결을 달리하는, (중략) 문학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앰블러의 작품들은 스릴러 장르의 작품성을 높이 끌어 올려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켰다.”는 소개글은 지금부터 무려 80년 전에 출간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줬습니다.

 

주인공 그레이엄은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무렵, 영국의 무기제조사의 엔지니어라는 민감한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그건 단지 외양일 뿐 그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애국심에 고취된 것도 아니고, 나치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특정 사상에 경도된 인물도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해외출장이 잦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라 여길 뿐이었지만 본인의 의지나 사상과 무관하게 독일 정보부의 목표물이 된 그레이엄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화물선에서 제목 그대로 공포로의 여행’(원제 Journey into Fear)을 경험하게 됩니다.

 

37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심플하고 단조로운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갑자기 살해위협을 받게 된 무기 엔지니어,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선택한 화물선에서 맞닥뜨린 살해 위협, 그리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선택과 그 선택이 몰고 온 극적인 결말 등 지극히 교과서적인 기승전결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건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1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분량에 그쳤겠지만, 작가는 스파이 심리스릴러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내밀하고 디테일한 문장들을 통해 두툼한 볼륨감과 함께 긴장감으로 가득한 370여 페이지의 분량을 만들어냈습니다.

국제적 사건에 휘말려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된 평범한 개인의 극도의 공포, 육지가 빤히 보이는데도 탈출할 곳이라곤 망망대해밖에 없는 화물선이라는 공간의 압박감, 그 화물선에 탑승한 어딘가 비밀스럽고 위험해 보이는 승객들의 캐릭터, 그 승객들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2차 대전 목전의 불안한 유럽의 정치적 상황 등은 사건의 단조로움을 잊게 만들만큼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들입니다.

 

그레이엄의 공포를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만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는 미녀 댄서 조제트라는 캐릭터인데, 그레이엄은 자신이 처한 극한의 위기가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하면서도 조제트와의 판타지를 꿈꾸며 잠시나마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생생하게 공감하게 만듭니다. 눈앞에 닥친 암살의 공포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다른 어떤 설정보다도 매력적으로 읽힌 대목이었습니다.

 

공포로의 여행은 엄밀히 말하면 요즘의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와 미덕은 단순히 재미나 복잡함을 기준 삼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랜 냉전을 야기한 세계대전 발발 직전 시점에 제대로 된스파이 스릴러의 맹아가 꿈틀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스릴러 독자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보다 1년 먼저 출간된 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 역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2020년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조만간 에릭 앰블러의 고전과 다시 만날 기회를 기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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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 탐정 아이제아 퀸타베의 사건노트
조 이데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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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라는 별명을 지닌 흑인 청년 아이제아 퀸타베는 주위에서 무면허 비밀 해결사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소소한 사건들을 말끔히 해결해주는 동네탐정으로 유명하기 때문인데, 그가 의뢰인들로부터 받는 대가는 음식이나 청소 같은 소박한 현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IQ에게 큰돈이 필요한 상황이 닥칩니다. 후원하는 장애소년의 거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인데 때마침 10대 시절 악연을 맺었던 도슨으로부터 돈이 되는사건을 중개받습니다. 의뢰의 내용은 거물 래퍼 살해미수범을 찾아내는 것. CCTV에 찍힌 범인은 전혀 신원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인데, 더 큰 문제는 그 범인의 흉기가 위험천만한 견종인 대형 핏불이란 점입니다.

 

무척 독특한 외양을 지닌 작품입니다. 탐정 주인공이 보기 드물게 흑인이라는 점, 일본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가 50대 후반에 데뷔작으로 발표한 작품인데 셰이머스 상, 매커비티 상, 앤서니 상을 석권한 점 등이 그것입니다. 덧붙여 “LA의 뒷골목을 누비는 21세기형 셜록 홈즈라는 홍보카피까지도 이 작품의 독특한 위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핏불을 이용하여 래퍼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범인과 그의 배후를 찾는 현재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IQ가 어떤 우여곡절을 통해 동네탐정 또는 무면허 비밀 해결사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10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은 뒤 형 마커스의 보호 아래 성장하던 IQ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형을 잃은 뒤 IQ는 절망에 빠진 채 방황을 일삼다가 악동 도슨을 만나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맙니다. 잠시 그 세계에 중독됐지만 치명적인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IQ는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발판삼아 탐정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현재, 나름 유명세를 얻은 IQ는 과거의 악연인 도슨이 중개한 사건이란 점이 마땅치 않았지만 거액의 수수료 때문에 래퍼 살인미수사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유일한 단서인 특이할 정도로 거대한 핏불 찾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때 슈퍼스타였지만 지금은 번아웃 상태에 빠져 약물에만 의지하는 래퍼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일그러진 관계들에 주목합니다. 진흙탕 싸움 끝에 이혼한 아내, 새 음반이 절실한 소속사 대표, 어딘가 감추는 것이 많아 보이는 매니저, 지금은 래퍼의 경호 업무를 맡고 있지만 한때 그와 함께 음악을 했던 형제 등 오로지 래퍼 주위에 기생충처럼 머물며 탐욕스런 태도를 감추지 않는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외양만큼이나 이야기 자체도, 서사나 캐릭터도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IQ가 래퍼 살인미수범을 쫓는 과정만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꽤 많은 조연들과 그들이 연루된 현재와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적잖은 비중과 분량을 할애하고 있고, 10대 시절의 IQ를 그린 챕터들도 1/3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때론 래퍼 살인미수라는 메인 사건이 잘 안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메인 사건 중심의 스릴러라기보다는 온갖 볼거리가 난무하는 버라이어티 쇼 같은 느낌인데, 비유하자면,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난해하고 폭력적이고 어질어질한 랩 가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이야기라고 할까요?

 

IQ가 살인미수범을 특정하는 과정은 좀 의외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쉽게 묘사됩니다. 물론 IQ의 궁극의 목표는 살인미수범이 아니라 그를 사주한 진범이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특별히 복잡하지도,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IQ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는 식인데, 나름 근거를 갖춘 깨달음이라 억지스런 비약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짝 아쉬운 대목이긴 했습니다.

, 홍보카피에 실린 그의 별명 ‘LA의 뒷골목을 누비는 21세기형 셜록 홈즈로서의 매력이 크게 다가오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일상 속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장면들에서 홈즈의 향기가 느껴진 건 맞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할까요?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다 읽은 뒤에도 사건 자체보다는 다소 장황해 보였던 IQ의 인생 스토리가 더 기억에 남았는데,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거친 랩, 인종차별, 마약, 불법총기, 갱단, 살인, 돈 등 폭력적이고 어두운 소재들이 총출동한 스릴러지만 악과 대결하는 IQ의 무기는 오직 말빨과 추리뿐이라 어딘가 샌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중대범죄와 맞붙은 경력을 쌓은 IQ가 다음 작품에서는 동네탐정이나 샌님보다는 좀더 과격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작품이 2016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이미 후속작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IQ가 얼마나 세고 독한 탐정으로 변신해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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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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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인 1990, C시에서 끔찍하고 엽기적인 연쇄 강간 토막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네 명의 피해자의 신체를 훼손한 뒤 검은 비닐에 담아 시내 곳곳에 유기했습니다. 경찰 상부는 물론 언론과 여론의 압박에 시달리던 수사팀은 악전고투 끝에 범인을 체포했지만 범인은 법정에서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수사팀 내에서도 진범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 탓에 사형집행이 이뤄진 뒤에도 사건은 여러 사람의 뇌리 속에 불쾌한 앙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현재, 당시 수사팀 중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을 비롯하여 평생을 복수심으로 살아온 피해자의 유족, 우연히 진실 찾기에 가세한 법대생 등 여러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분투를 시작합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그에 걸맞은 묵직한 서사가 담긴 레이미의 작품입니다. 레이미는 천재적 프로파일러 팡무가 활약하는 심리죄 시리즈두 편으로 만난 적 있는데, 엽기적인 범죄, 복잡다단한 구성, 매력적인 프로파일링 등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 작가라서 (‘심리죄 시리즈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 순죄자의 출간소식이 무척 반갑게 들렸습니다.

 

요약하면, 23년 전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자들, 그리고 진범이 벌이는 ‘3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도 사건이지만 진실 찾기를 둘러싼 각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장난 같은 게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원죄(冤罪), 증오, 후회, 복수 등 23년이 지났어도 조금도 변치 않은 각 인물들의 감정은 뒤늦게 발동이 걸린 진실 찾기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비난을 무릅쓰고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들과 등을 돌리고 만 두청, 뒤늦게 진범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과 동료들의 파멸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한 뤄사오화, 압박에 시달리던 끝에 신빙성 없는 증거에 눈이 뒤집혀 억울한 자를 사형대로 보낸 마졘 등 톄둥 분국 소속인 세 명의 경찰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이제 편안한 삶을 바랄 수 있는 60대에 이르러 옛 사건 때문에 다시 충돌한 이들의 애증은 조사가 진척될수록 23년 전보다 더 깊고 싸늘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명백해도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딜레마도 충분히 이해되는 설정이어서 독자는 이들 사이의 무저갱 같은 운명에 긴장감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두청을 비롯한 경찰들의 진실 찾기가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 사고까지 당해 평생 양로원에 갇혀온 지쳰쿤과 봉사활동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법대생 커플 웨이중, 웨샤오후이가 이끌어갑니다. 두청과 마찬가지로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했던 지쳰쿤은 양로원에서 무력한 삶을 살던 중 웨이중, 웨샤오후이 덕분에 삶의 의지를 되찾곤 아내를 살해한 진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관계자들 대부분이 60대라서 독자들에게 더 주목을 받게 되는 젊은 두 주인공은 당초 관찰자 입장에서 23년 전 사건을 접하게 되지만, 점차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데 평범한 법대생 웨이중이 지쳰쿤을 돕는 과정에서 진실과 정의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도, 무슨 이유에선지 웨이중 못잖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웨샤오후이의 비극적인 사연도 경찰 쪽 이야기나 엽기적인 사건 못잖게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고백하자면, 읽기 전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주저했던 게 사실이고, 읽기 시작한 뒤론 다소 지루하고 동어반복적인 초반 상황들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각자의 목표를 확실히 정립하는 대목이 꽤 늦게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론 대략 100페이지 정도만 정리됐다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배가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작가가 왜 초반에 지루할 만큼 기초공사를 거듭 다졌는지 알게 되지만, 초반의 느슨함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은 물론 분위기조차 공개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과한 우연들(인물들 간의 관계라든가 사건 모두)과 막판의 억지스럽고 공감하기 어려운 마무리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찬호께이의 ‘13.67’에 버금가는 묵직한 작품이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순죄자심리죄 시리즈보다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심리죄 시리즈가 사건의 엽기성과 천재 프로파일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라면, ‘순죄자는 그에 덧붙여 무겁고 비극적인 감정들을 충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도 기대하고 있지만 레이미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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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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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는 인적 없는 사막에서 무자비한 총격을 받은 차량과 시체들을 우연히 발견합니다. 현장에 있던 대량의 마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200만 달러가 넘는 현금을 훔쳐 달아난 모스는 그 순간 이후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돈의 주인과 마약조직은 물론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안톤 시거까지 가세하여 모스를 뒤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회한 보안관 벨은 도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인극에 그저 무기력한 행보만 보일 뿐입니다.

 

워낙 여러 번 들어본 제목인데다 한때 무척 좋아했던 코엔 형제가 영화로 만들었던 작품이라 언젠가는 꼭 읽어보겠다는 생각만 하면서도 내내 책장에 방치해온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리 길게 서평을 쓰게 될 것 같진 않은데, 기대에 비해 실망감이 컸던 탓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었던 탓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돈 가방을 들고 튄 모스와 그를 쫓는 지독한 살인마 안톤 시거의 추격전이고, 또 하나는 추격전 챕터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노회한 보안관 벨의 회고입니다.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극을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건조하고 삭막하게 읽힙니다. 대사와 지문이 뒤섞인 채 감정 같은 건 조금도 실리지 않은 기계적인 문장들과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이상한 상황들, 즉 한쪽은 무작정 도망치고 한쪽은 무작정 뒤쫓는, 도무지 목적을 알 수 없는 추격전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훔친 이유도, 그걸 갖고 뭘 하겠다는 욕망도 없는 도망자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지, 아니면 도망자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도 모를 추격자의 행보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그에 반해 노회한 보안관 벨의 회고에는 본인 외에는 무엇을, 왜 회고하는지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회고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에 맞닿아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도망자 모스, 추격자 시거, 보안관 벨 등 세 주인공의 난해한 행보들은 작가의 불친절한 문장과 플롯으로 인해 더 난해해질 따름입니다. 기승전결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딱히 고발이나 상징의 흔적들이 엿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래서 뭐?”라는 어이없는 자문밖엔 할 수 없었는데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저의 자문이 그리 드문 반응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품이 끝나고도 물음은 계속된다. 그 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아주 능숙하고 냉철한 독자만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작품을 읽는 진정한 재미도 오롯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납득하기 힘든 출판사의 소개글도, 작가와 이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찬사들도 하나같이 저에게 능숙하지도, 냉철하지도 못한 무식한 독자!”라는 비난을 보내는 것만 같았는데, 제가 미처 몰라본 이 작품의 진가라는 게 정말 있는 건가 싶어, 여기저기 찾아보니 의외로 80년대 미국의 상황이라든가 신자유주의 등 생각지도 못한 코드들에 대한 언급들이 많았습니다.

모스와 시거와 벨이 당시 특정 계층, 특정 사고방식을 대변하고 상징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이런 평가는 흥미로운 스릴러를 즐기려는 일반독자들에겐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서평을 위한 서평, 분석을 위한 분석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억지 주장이라고 할까요? 이야기도, 캐릭터도, 사건도 뒤늦게나마 ,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라고 공감할만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어느 독자의 서평처럼 이 작품은 오히려 코엔 형제의 영화로 만난다면 그 의미와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들의 표정이라도 보고 있으면 적어도 ?”라는 무의미한 자문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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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 라디오 - 제11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장정일 해설 / 이상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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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로오는 사회에 나갔다가 22살에 살인을 저지르고 수도원으로 도피합니다. 수도원장은 은닉의 대가로 은밀한 특별봉사를 요구했고, 그걸 수락한 로오는 부속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수녀 지망생인 아스피란트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로오는 농장에서의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과 고행을 통한 카리스마 덕분에 수도원 청소년들의 우상이 됩니다. , 신부 앞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연상인 수녀를 범할 계획을 고해성사를 통해 사전에 용서받고 실행에 옮기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나는 소설을 통해 나의 독자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한 표지를 열고 첫 장을 열자마자 눈에 훅 들어온 작가의 일성은 일종의 경고처럼 보였습니다. 독자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왠지 그 정도에 그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크게 빗나가지 않은 예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연들의 캐릭터도, 줄거리도 파격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작품인데, 한국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19금 판정을 내린 건 어쩌면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그런 반향을 일으켰는데 동시에 119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살인을 저지른 로오가 수도원으로 돌아와 겪는 부적절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위험천만한 관계와 사건들로 채워집니다. 덧붙여, 로오가 10대 초반 시절에 겪은 수도원에서의 악몽들이 중간중간 끼어들곤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화두는 신과 종교입니다. 로오는 때론 극단적인 무신론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누구보다 신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의 구원을 바랐던 순간에 그 어떤 손길도 얻지 못한 그는 현재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신과 종교를 비아냥댑니다. 특히 종교를 성()과 결부시키는, 일종의 금기를 도발에 가깝게 토로하곤 합니다.

 

모든 쾌감의 본질은 반복이다. 기도와 성행위가 바로 그런 점에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종교의 진정한 쾌락을 이해해 가고 있었다. 자아 없는 반복, 그것이 최고다.” (p55)

 

사실, 다 읽고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건, 신과 종교, 성과 폭력을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딱히 집중해야 할 게 뭔지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인간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는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깊은 뜻은 활자는 물론 행간에서도 명확히 읽히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아가 회개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신과 종교의 허구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성과 폭력에 빠진 채 금기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를 탐미적으로 팔로우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작가의 첫 일성대로 우울하고 불편한 책읽기가 된 건 사실인데, 작가와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조차 알 수 없으니 그저 우울함불편함만 남았다고 할까요?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를 보면 기승전결이나 등장인물의 행동 이유를 무시해버리는 서사성이 희박한 작품을 연속으로 발표했다.”라고 돼있는데, 그렇다면 저의 몰이해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실린 장정일의 해설을 통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건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표피적인 해석 또는 본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만 담겨 있어서 솔직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르마늄 라디오는 하나무라 만게츠가 종교를 주제로 기획한 대하소설 왕국기의 도입부 격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분명 종교가 첫 번째 화두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쩌면 수도원에서 금기와 파격을 자행하던 로오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이 이후 작품에서 그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선 그 뒷이야기가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독자들의 말초감각을 건드리려는 목적으로 금기에 도전한 책은 아니다.”라는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엉뚱한 호기심으로 읽을 책은 아니란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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