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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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공습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가까스로 개발한 치료제가 인간 외에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의 위험 때문에 육류 소비에 공포를 느낀 인류가 채식에만 의존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일본의 유전공학자 후지야마가 식용 클론(복제인간)’ 생산을 주장합니다. 격론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일본 도처에 식용 클론을 키우고 도축하는 가공시설이 들어서기에 이릅니다. 후지야마는 일약 인기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데, 어느 날 그에게 두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집니다. 하나는 식용 클론 반대운동의 리더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린 일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 그에게 살처분 과정에서 반드시 제거됐어야 할 식용 클론의 머리를 협박장과 함께 배달한 일입니다.

 

이 작품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시라이 도모유키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이것이 일본을 휩쓴 특수설정 미스터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특수설정을 통해 엽기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기발함을 넘어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과 묘사를 태연히 구사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뿐이었다.”라는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시라이 도모유키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능가하는 엽기적인 미스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제공한 체세포로 생산된 클론만을 먹을 수 있으며(즉 타인의 클론은 먹을 수 없음), 도축된 클론은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전 반드시 머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나름 윤리적인 규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동물성 단백질이 희귀해진 인류가 육류 소비를 위해 속성으로 키워진 자신의 클론, 즉 인육을 식탁 위에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용 클론 반대론자들이 도처에 세워진 가공시설을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서사 없이도 충분히 세기말적 호러물 한 편을 완성시킬 수 있는 소재지만 작가는 거기에다 살인, 협박, 폭력, 복수 등 다양한 미스터리 코드를 결합시켜 좀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완성시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소개할 순 없지만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는 절묘한 트릭까지 더해져서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를 미궁에 빠뜨리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부쯤 느껴지는 위화감 덕분에 일찌감치 진실을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막판 에필로그까지 철저하게 숨겨둔 작가의 히든카드에 결국 뒤통수를 얻어맞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는 윤리에 관한 제법 묵직한 주제의식을 내포한 작품입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결국 식인(食人)에 다름 아닌 식용 클론의 도덕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폭력적으로 사육당하는 클론의 인권문제라든가, 샐러리맨의 평균 연봉을 웃도는 식용 클론의 가격에서 비롯되는 유전육식 무전채식이라는 계급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작품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세상이 도래한다면 윤리고 나발이고 동물성 단백질을 더 숭배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미스터리 작품이니 거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면... 실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에서 느꼈던 아쉬움보다는 덜 하긴 해도 여전히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진 게 사실입니다. 두 작품 모두 트릭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분량과 장황하기까지 한 변()들이 동원되는데, 문제는 그 설명들이 대체로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정교한 설계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선 결과를 위해 과정을 꾸민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라는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그런 아쉬움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지만 극단적인 평가와 격론 끝에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이 독자들 사이에서도 꽤 큰 호불호를 일으킬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식용 클론이라는 세기말적 호러 코드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그 부분에 좀더 주목한다면 의외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작가가 인간 시리즈라고 부른다는 후속작들(‘도쿄 결합 인간’, ‘잘 자, 인면창’)까지 마음 편하게 읽을 자신은 없는 게 사실인데, 어떤 설정이 깔려있는지에 따라 꽤나 고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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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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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시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운 난설헌은 8살에 지은 백옥루 상량문으로 놀라운 재능을 세상에 알린다. 여자에겐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지만, 아버지 초당 허엽과 오빠 허봉은 난설헌의 재능을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15살에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녀의 삶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갈라서야 했던 사내 최순치, 똑똑하고 당찬 며느리를 지독히 혐오한 시어머니, 열등감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닫은 남편, 아버지와 오빠의 잇따른 객사, 자식들을 앞세운 상실감까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시를 쓰는 일, 그뿐이었다. 규범의 족쇄와 규방 속 고통을 모두 끌어안았음에도 난설헌의 영혼은 시 안에서 자유로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주로 추미스(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에 집착하는 편이지만 나름 역사소설도 좋아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산북스를 통해 받은 난설헌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란 타이틀까지 갖추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졌던 작품입니다.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학생 시절에 배운 여성이 글 자체를 금지 당하던 시대에 태어났지만 빼어난 작품들을 남긴 천재 시인”, 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정도가 전부였습니다.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결혼 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혹시나 소설적 허구의 산물은 아닐까, 싶어 인터넷에서 지식백과들을 검색해보니 거의 엇비슷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남긴 시 속에서 그녀의 삶의 모습들을 추정한 결과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허난설헌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무척 빈약했지만 작가는 거기에 탄탄한 허구와 상상을 덧붙임으로써 불과 27년이란 허난설헌의 짧은 생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특히 작가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대목, 즉 가장 봉건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운명은 성별을 떠나 어느 독자에게든 강한 인상을 남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삼종지도와 굴종만을 강요받은 것은 물론 지필묵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자신의 치마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숙명이 유독 허난설헌에게 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닌 천재적 재능 때문입니다. 8살에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짓지 않았다면, 또 가족들이 그녀의 능력을 아끼고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허난설헌의 삶은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수많은 족쇄와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한 허난설헌의 의지를 집요하고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그녀의 아이러니함을 동정하지도 않고 가련히 여기지도 않는 일관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허난설헌의) 시는 그 고단한 삶으로 인하여 더욱 처절하고 처연해지며 급기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작품이 된다.”라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은 작가의 그런 일관된 시선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존인물을 다룬 소설이다 보니 소설 자체에 대한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지만 한두 마디만 덧붙이자면, 우선, 예스러운 비유와 정갈한 고어(古語)가 넘쳐나는 문장들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허난설헌과 그녀 주변의 분위기를 사실적인 문장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지만 다소 난해하고 어지럽게 읽힐 여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존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나름의 기승전결을 바라는 독자가 많겠지만 이 작품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삶의 기록에 더 가깝기 때문에 계속 오르막이거나 반대로 계속 내리막처럼 읽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적으론 분노와 슬픔만이 엇갈리는 이야기에 가끔 숨이 막히듯 답답함을 느끼곤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허난설헌을 모델로 삼되 조금은 통쾌하고 따뜻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100%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가 제법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과 삶이 허구를 통해서라도 구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 교과서에 실린 단편적인 정보 외에 허난설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역시 ‘100% 허구의 이야기에 대한 바람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허난설헌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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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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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코너스톤에서 출간한 아르센 뤼팽 전집중 세 번째 작품인 기암성입니다. 1~2편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를 읽고 5년 반 만이니 좀 과한 공백이 있었던 셈인데,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먼저 읽은 두 편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의 경우 청소년 판으로 읽을 때부터 바로 팬이 됐지만, ‘괴도 루팡’(예전엔 이렇게 불렀습니다.)도둑이 주인공?”이라는 호기심과 기대에 비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에 이렇게 뒤늦게야 전집으로 만나게 된 건데, 아무래도 제 성향은 역시 셜록 홈즈 쪽이라는 걸 재확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놓고 예심판사, 검사대리, 현지 경찰은 물론 파리에서 파견된 가니마르 경감마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17살 천재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범행의 목적과 방법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더구나 보트를레는 범인의 우두머리가 뤼팽이란 사실까지 적시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보트를레가 사건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암호 쪽지는 이후 사건의 양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뤼팽을 꺾은 천재소년으로 칭송받게 된 보트를레는 뤼팽과의 끝장대결을 위해 암호 쪽지를 단서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끝내 노르망디 해안에 자리한 기암성, 즉 뤼팽의 요새에 다다르게 됩니다.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을 안 읽은 독자라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들어봤을 만큼 시리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계기로 뤼팽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진 게 사실인데,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친 아쉬움만 잔뜩 남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호흡만 빠르지 상황이나 감정을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 하이라이트 요약본같은 문장들이 내내 거슬렸습니다. 어떤 인물도 자신의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중요한 상황 대부분은 앞뒤 맥락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과하게 압축, 요약돼있습니다.

당연히 사건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의 행보도 정신없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데, 고교생인 보트를레가 애초 어떻게 사건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가 굳이 뤼팽과의 전면전에 목숨을 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인 뤼팽은 이 작품에서 신출귀몰한 도둑으로서의 면모는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순정남으로 그려지지만, 작품 내내 통 잘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나타났다 하면 말도 안 되는 변장술만 부리고, 감정은 전부 제 입으로만 설명하고 있으니 도둑이든 순정남이든 어느 하나 매력적인 면모가 없었습니다.

 

기암성서평 대부분에서 지적되는 조연들의 문제도 굉장히 실망스러웠는데, 뤼팽의 숙적인 헐록 숌즈(코난도일의 동의를 못 얻은 탓에 셜록 홈즈가 이런 식으로 표기됩니다.)는 멍청한 헛발질만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악행까지 저질러서 이럴 거면 왜 나온 거야?”소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고, 역시 뤼팽을 쫓는 단골 추격자 가니마르 경감은 늘 뒷북만 치거나 그 뒷북마저 아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위기감은커녕 헛웃음만 나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뤼팽의 요새이자 은신처인 노르망디 해안의 기암성은 터무니없는 역사와 그 용도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억지 그 자체로만 보였습니다. 그저 뤼팽을 신격화하기 위한 황당무계한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읽으면서도 조금도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기암성에서의 마지막 대결까지 연결됐는지조차 애매모호할 따름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그 중요한 대목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제 기억력과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거나 아니면 이해도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며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한 이야기탓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리즈 다음 작품은 기암성못잖게 유명한 ‘813’인데, 솔직히 그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괴도 뤼팽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 있을 텐데, 한 편이라도 그런 작품을 만난다면 스스로를 달래서라도 이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이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리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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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엔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1
윌리엄 요르츠버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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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59년 뉴욕.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재력가 루이 사이퍼로부터 10여 년쯤 스타덤에 올랐다가 전쟁 중 부상으로 장기입원 중인 가수 자니 페이버릿의 근황을 알아봐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처음엔 그저 그런 안부 확인 차원의 의뢰라고 여겼지만 자니가 오래 전에 병원에서 사라진 상태였고 그를 담당했던 의사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엔젤은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때부터 자니의 흔적을 찾는 엔젤의 집요한 탐문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자니의 과거를 파고들수록 부두교, 악마숭배, 마법 등 기괴한 단서들이 연이어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그보다 엔젤을 더욱 큰 충격에 빠뜨린 건 그가 탐문 과정에서 만났던 인물들이 마치 악마의 의식과도 같은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된다는 점입니다.

 

읽는 건 몰라도 오컬트 호러를 영상으로 보는 건 기피하던 저였지만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 엔젤 하트를 본 건 순전히 배우 미키 루크 때문이었습니다. 좀 무서운 영화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끔찍한 영상들과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대부분 기억에서 날아갔고 일부 그로테스크한 앵글들만 아른거리는 가운데 절대 잊지 못할 장면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피를 내뿜으며 뛰고 있는 인간의 심장을 클로즈업 한 장면입니다.

엔젤 하트의 원작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이 작품을 발견하곤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넣었던 건데, 막상 사놓고 꽤 오래 뜸을 들였던 건 역시나 오컬트 호러의 후유증을 두려워한 소심함 때문이었습니다.

 

뉴욕의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냉소와 자만과 겉멋으로 똘똘 뭉친 이른바 전형적인 영미권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입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여권을 가졌지만 국적은 불분명한데다 이름부터 수상한 의뢰인 루이 사이퍼(Louis Cyphre)를 만난 이후 그의 탐정으로서의 행보는 초중반까지만 해도 좀 가벼워 보이는 필립 말로처럼 보였고, 제가 기억하는 영화 엔젤 하트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이라 당황하기까지 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소설이 딱 그렇습니다.”라는 스티븐 킹의 평은 이 작품 속에 기묘하게 섞여있는 하드보일드 탐정 서사와와 오컬트 호러 코드를 한마디로 잘 압축하고 있는데, 어쨌든 좀 가벼워 보이는 필립 말로로 출발한 이야기는 조금씩 끔찍한 악마가 날뛰는 지옥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뉴욕 탐정지극히 비현실적인 악마의 주술이 어떻게 접점을 가지게 될까,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는 자니 페이버릿의 행방을 쫓는 해리 엔젤의 발자취 속에 그 접점의 단서들을 아주 조금씩 풀어놓음으로써 이질감이나 위화감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자니 페이버릿 주위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부두교나 악마숭배에 빠져있는 설정은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뒤에 가면 그런 설정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적절한 타이밍에 터지는 엽기적인 살인사건들(눈에 총을 맞고, 성기가 입과 기도를 막고, 심장이 몸에서 분리되고...)은 한편으론 해리 엔젤이 현실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도 한편으론 그 수법이 너무나도 악마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런 장면들 역시 독자로 하여금 섞이기 힘든 두 장르의 교묘한 합체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꽤 놀라긴 했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였는데, 책으로 다시 접한 반전은 놀랍고 충격적이긴 해도 뒤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았다는 느낌까진 받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마치 분량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한 듯한, , 뭔가 설명하다 만 것 같은, 그래서 굉장히 애매모호해서 이런저런 상상과 추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반전이랄까요?

어쩔 수 없이 저의 상상과 추정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스포일러 게시물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저의 무지함 또는 지나치게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뭔가를 놓친 게 아니라면 해리 엔젤이 맞이한 반전과 엔딩에 대해 적어도 20~30페이지 정도는 친절한 설명이 추가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 작품을 읽은 덕분에 영화로 만들어진 엔젤 하트를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비록 영상으로 제작된 호러물에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는 소심한 1인이지만, 좀더 간결하고 선명하게 해리 엔젤의 이야기를 맛보고 싶은데다 가물가물하긴 해도 압도적으로 느껴졌던 그로테스크한 앵글의 묘미도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때 푹 빠졌던 미키 루크의 리즈 시절을 즐기고 싶은 욕심 역시 한몫 거들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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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탑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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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친을 잃고 백부의 보호 아래 성장한 오토네는 어느 날 갑자기 백억 엔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의 상속자가 됩니다. 미국에 산다는 일면식도 없는 가문의 노인은 상속의 조건으로 자신이 특정한 남자 다카토 슌사쿠와의 결혼을 내걸었는데, 오토네는 결국 그를 만나보지도 못합니다. 슌사쿠는 오토네의 백부의 생일파티가 열리던 호텔에서 참혹하게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백억 엔의 유산은 가문의 후예들에게 1/N로 분할 상속되는 걸로 결정되는데, 문제는 그 결정 이후 상속후보자들이 하나둘씩 살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용의자로 지목받은 오토네는 엉겁결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사악한 남자와 함께 살인이 난무하는 유산상속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삼수탑은 앞서 읽은 시리즈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 작품입니다. (한국 출간기준으로 직전 작품인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서도 살짝 그런 기운이 엿보이긴 했지만)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등장하는 통속 스릴러의 분위기가 굉장히 강한 점, 사디즘 혹은 퇴폐적이고 문란한 성()이 꽤 노골적으로 묘사된 점, 그리고 처음으로 여성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점이 그것입니다.

 

유산상속을 둘러싼 참혹한 살인극이란 설정 자체는 본격 미스터리의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삼수탑속의 살인사건에는 별다른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해법 역시 본격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일반적인 방식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좀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려는 상속후보자들(과 그의 측근들)의 탐욕스럽고 변태적인 모습들이 도드라지게 묘사되는 것은 물론 음란한 피가 흐르는 가문의 기질이 적잖은 분량에 걸쳐 집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 성폭력의 피해자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욕정에 사로잡혀 가해자를 동경하게 된 여성, 한 남자를 연인으로 둔 쌍둥이 자매, 양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인 의붓딸, 두 배 가까운 나이차의 미소년을 으로 둔 지방덩어리 중년여성 등 백억 엔의 유산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가문의 후예들은 하나같이 자기비하적이거나 엽기적이거나 변태적인 여성들이라서 다분히 선정성을 염두에 둔 의도적인 설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이 출간될 무렵인 1950년대 중반의 일본은 퇴폐와 허무가 판치는 가운데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콘텐츠들이 범람하던 시절이며, 요코미조 세이시 역시 당시의 유행에 편승하여 본격 미스터리에 충실했던 시리즈 초기작들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작품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 입장에선 미스터리의 성격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다소 당혹스럽게 읽힐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다 주인공 오토네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한 탓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비중과 분량은 거의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당혹감과 아쉬움이 함께 들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끔찍한 연쇄살인극에 단단하게 묶어두는데, 가장 주목을 끄는 건 범인의 동기입니다. 한 푼이라도 유산을 더 차지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참극을 일으키는 것인지 막판까지 그 동기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된 희생자가 12명으로 (작품해설에 따르면) 시리즈 역대 최다를 기록한 점도 독자들에게 숨 돌릴 틈조차 없는 긴박감을 선사하는 대목입니다.

비록 긴다이치 코스케의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유산상속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오토네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서 미스터리 못잖은 서스펜스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당혹감과 아쉬움 속에서도 어느 작품 못잖게 재미있게 읽은 게 사실인데, 그런 면에서, “‘삼수탑을 본격 미스터리의 잣대로 재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뒷맛만 개운치 못하다. 허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준비한 서스펜스 롤러코스터에 몸을 싣는 것이 어떨까.”라는 작품해설속 한마디는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하기 위한 적절한 조언으로 보입니다. 다만,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않은 독자라면 삼수탑이누가미 일족이나 여왕벌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전면에서 활약하는 작품들을 먼저 접한 뒤에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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