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면무도회 1 ㅣ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4년 11월
평점 :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두말 할 것 없이 주인공의 캐릭터에 있지만,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시대의 비극과 개인의 비극을 깊고 묵직하면서도 적당한 통속성 속에 잘 녹여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패전 직후 일본을 휩쓴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 파국을 맞이한 가족 혹은 가문의 비극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숙제로 등장합니다. ‘가면무도회’ 역시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 별장 지대에서 1959년부터 2년에 걸쳐 벌어진 비극적인 연쇄살인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톱 여배우 오토리 지요코는 네 번의 결혼과 네 번의 이혼을 겪은 현재 산업계의 거물이자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아스카 다다히로와 열애 중입니다. 첫 남편 후에노코지 야스히사가 변사체로 발견된 지 꼭 1년이 된 날, 가루이자와 별장지대에 또다시 문제의 인물들이 모여듭니다. 지요코의 전 남편들, 그녀의 유일한 딸과 시어머니, 그녀의 새 연인인 다다히로의 가족과 제자 등이 그들인데, 불길한 징조처럼 가루이자와를 덮친 엄청난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 그들 앞에 새로운 시신이 등장하면서 1년 전의 변사 사건이 악몽처럼 되살아납니다.
언제나처럼 사건은 기이하고 잔혹하지만 긴다이치 코스케의 소박함은 여전합니다. 어눌하고 덜 떨어져 보이는 외모와 말투로 상대방에게 무시당하곤 하지만, 권력자든 부자든 미인이든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타고난 불감증(?)은 가진 거라곤 다혈질과 권위와 고성(高聲)밖에 없는 경찰들과 대비되어 독자들을 빙긋 웃게 만들거나 통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면무도회’에서 코스케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단서들은 지엽적이거나 모호한데다 그나마도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 상태입니다. 또, 톱 여배우의 네 명의 전 남편과 새 연인의 관계 역시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탐문 자체가 조심스러우며, 안개와 축제 소음으로 인해 일부 목격담의 신빙성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사건의 발단은 오랜 세월 층층이 쌓여온 구원(舊怨)이었습니다. 패전 무렵 일본의 참상 속에서 피어난 한 개인의 탐욕은 괴물처럼 자라난 끝에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또 그 주변 인물들의 마음속에 잠재해있던 시한폭탄 같은 의심과 증오는 한순간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피의 향연을 일으킵니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가면무도회’ 역시 단순히 진실을 찾아낸 통쾌함보다는 범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자괴감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지 등 비극적인 서사의 뒷맛을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게 만듭니다.
다른 시리즈들과 달리 ‘가면무도회’는 상징성이 돋보이는 제목인데, 요코미조 세이시는 에필로그에서 “왜 가면무도회인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정서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는 부연하지 않겠지만, 작품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가면무도회의 화려함과 덧없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조금은 장황하더라도 앞의 내용들을 되새기며 꼼꼼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가면무도회’는 긴다이치 코스케만의 뛰어난 추리력보다는 일부 등장인물들의 목격 진술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퍼즐만을 남긴 채 수사가 제자리를 맴돌 때쯤 예상치 못한 도움이 큰 힘이 되는데, 그러다보니 긴다이치 코스케의 매력과 반전의 충격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 덜 만족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또, 사건의 볼륨에 비해 다소 과도한 분량도 부담스러웠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산만해 보인 점도, 그로 인해 몰입도가 다소 떨어졌던 점도 사실입니다. 1~2권을 합친 710페이지의 분량은 ‘팔묘촌’이나 ‘여왕벌’ 정도(500여 페이지)였더라도 충분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한국 출간 기준으로) 전작인 ‘악마의 공놀이 노래’가 1957~59년에 연재된 작품인데 반해 ‘가면무도회’는 1974년 작품입니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후 20여 편의 시리즈를 더 발표했던 요코미조 세이시는 1964년부터 10년 가까운 절필의 시간을 보냈는데, ‘가면무도회’는 말하자면 그의 복귀를 알리는 작품이자 시리즈의 거의 막바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기괴한 설정과 정교한 트릭이 잘 맞물린 초기작들과는 사뭇 달라진, 시리즈 고유의 색깔이 희석된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캐릭터 역시 중년의 나이에 걸맞게 다소 중후해졌는데 개인적으론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실없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겨져서 ‘가면무도회’ 속 그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족으로... 2021년 출간 예정인 ‘미로장의 참극’은 좀 복잡한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1956년에 단편으로 처음 소개됐지만, 1959년에 중편으로, 1975년에는 장편으로 수정됐기 때문입니다. 장편으로의 수정이 후기에 이뤄져서 ‘가면무도회’와 비슷한 이질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초기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매력이 좀더 잘 살아있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아직은 팔팔하고 어수룩한 긴다이치 코스케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