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비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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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비밀’(원제 のヒミツ)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에 이은 가족 소설 시리즈’(平成家族小説シリーズ)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을 읽진 못했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또 짓궂은 유머와 온기 가득한 울컥함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능청스런 제목에 눈길이 끌려 따끈따끈한 신간을 얼른 집어 들었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우리 집 비밀이란 수록작은 없다는 점입니다. , 여섯 편 모두 누군가의 또는 어떤 가족의 내밀한 비밀을 다룬다는 공통점 때문에 붙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여섯 편의 주인공 혹은 조연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비밀들이란 남의 일로 여기고 들여다보면 실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까운 지인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소소한 비밀들을 갖기 마련이며 그런 비밀들 중엔 당사자에겐 세상의 절반이 사라져버린 듯한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비밀들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그리면서도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공감률 100%의 인물들을 앞세워 특유의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아이를 갖지 못해 고심 중인 31살의 치과 사무원 아쓰미가 환자로서 치과에 온 유명 피아니스트 - 심지어 아쓰미는 그의 열정적인 팬이기도 합니다. - 를 통해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는 이야기(‘충치와 피아니스트’), 승진 경쟁에서 밀려난 뒤 방황하던 50대 샐러리맨 마사오가 아주 조금씩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 화해하는 이야기(‘마사오의 가을’), 16살 안나가 친아빠와 길러준 아빠 사이에서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안나의 12’), 아내를 잃고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진 아버지를 안쓰럽게 지켜보다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얻는 아들의 이야기(‘편지에 실어’), 옆집에 이사 온 수상한 부부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는 만삭의 임산부의 이야기(‘임산부와 옆집 부부’),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쇠퇴기를 맞이한 탓에 심란해하다가 갑자기 시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아내 때문에 겪게 되는 좌충우돌 감동 스토리(‘아내와 선거’) 등이 실려 있습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문예지 소설 스바루에 연재됐던 단편 중 주옥같은 작품들을 엄선해서 엮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점은 여러 작품에 등장한 50대 남성들입니다. ‘주옥같은 작품들보다는 왠지 인생의 후반전 중반쯤을 지나고 있는 ‘50대 남성들이란 공통점에 맞춰 엄선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과열과 허무의 젊은 날들을 보낸 뒤 뒤늦게 자신만의 세계를 찾거나, 승진 경쟁에서 밀려나 자괴감에 빠지거나, 사랑하던 배우자를 잃고 무기력증에 빠지거나,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내리막길에 선 자신을 발견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인데,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가 1959년생인 오쿠다 히데오의 나이 53~56세 무렵이란 점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억측이긴 하지만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은 눈에 비치는 풍경이 다르다.”(p198, ‘편지에 실어’)는 문장처럼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과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게 된 50대 남성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이 단편집 속에 녹여 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혹은 어느 가족의 비밀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꽤 씁쓸한 비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을 가미해 갑자기 빙긋 웃게 만들거나 갑자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독자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세상은 냉정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하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사람들을 웃고 감동하게 만드는 작은 구석도 존재할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가 매번 그려내는 그 작은 구석들은 설령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처럼 읽힌다 해도 제게는 늘 기분 좋은 위안과 안식으로 다가옵니다. 서평을 마치는대로 아직 못 읽은 이 시리즈의 전작들(‘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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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수집가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장수미 옮김 / 단숨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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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능한 협상전문가였던 알렉산더 초르바흐는 7년 전 비극적인 사고 이후 범죄 전문기자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현재 그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이른바 눈알수집가사건.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뒤 아버지에게 제한시간 안에 아이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남긴 범인은 제한시간이 지나면 아이를 살해하고 한쪽 눈알을 제거하는 전대미문의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사건 이후 초르바흐는 뜻밖에도 경찰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맹인 영매 알리나는 눈알수집가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줍니다.

 

독일의 스릴러를 꽤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그 가운데 유독 독특한 인상을 받은 작가입니다. 대다수의 대중적인 독일 스릴러와는 달리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될 만큼 등장인물들의 이상심리를 강렬하고 집요하게 그리는 것은 물론 사건 자체도 엽기적이거나 기괴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나름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할 수밖에 없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눈알수집가는 초반부터 인물과 사건 모두 그 어느 작품보다 세고 독한 설정으로 포장돼있어서 마음의 준비라는 게 아무 소용없었음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협상전문가 시절의 사고로 인해 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심리치료를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초르바흐는 아직도 자신이 환각, 환청, 환영을 겪는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가정마저 해체되기 직전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알수집가 사건에 유달리 집착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은 그의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눈알수집가와 엮으려 하거나 심지어 눈알수집가로 오인 받게 만드는가 하면, 난데없이 나타난 맹인 영매 알리나는 눈알수집가와의 접촉을 통해 목격한 살인-납치 장면을 들려주며 초르바흐의 정신을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사이코스릴러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설정이긴 하지만 안팎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초르바흐를 지켜보는 것은 꽤나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물론 그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자 소구력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초르바흐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인물은 맹인 영매 알리나인데, 그녀는 시종일관 눈알수집가와 대결을 벌이는 초르바흐를 곁에서 지원하는 것은 물론 접촉을 통해 목격했으나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 눈알수집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기 위해 분투합니다. 다만, 영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 잠시 얼떨떨했던 게 사실인데,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긴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알리나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이질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금세 제바스티안 피체크 표 사이코스릴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뒤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45시간 7분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찾아내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눈알수집가의 범행 동기는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이 부분은 개인적으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정도로 다소 작위적으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독일과 북유럽 스릴러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트라우마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소시오패스설정은 때론 공감이 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설정을 위한 설정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같은 해(2010) 출간된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제치고 독일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크라임&스릴러로 뽑힌 걸 보면 적어도 독일에서는 이런 스타일의 범인과 범행 동기가 전혀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긴 합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눈알사냥꾼이라는 작품 제목을 들어본 적 있는 독자라면 눈알수집가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꽤 큰 떡밥과 함께 다음 이야기를 위한 숙제를 남겨놓았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는데, 맺음말과 서문에 등장하는 고통의 최정점에 서서 죽음이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 그 남자가 나다.”라는 초르바흐의 절규는 눈알사냥꾼이라는 후속작에 대한 두려움 섞인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결코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찾아 읽게 되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매력의 실체가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의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출간목록을 만들고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을 중고로라도 사들이는 걸 보면 그에게는 제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특별하고도 불온한 인력(引力)이 존재하는 것 같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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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
세라 슈밋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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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84,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의 한 저택에서 앤드루 보든과 애비 보든 부부가 도끼로 무참히 살해당했다. 범행 자체의 잔혹성에 더해 부부의 둘째 딸인 리지 보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면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결국 리지는 여성이 이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봐는 그로부터 백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무성한 소문과 추측을 낳은 이 미제 사건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잔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현실에서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요즘 사람들은 사실 어지간히 엽기적인 사건이 아닌 다음에는 거의 불감증에 가까운 무덤덤한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129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딸이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은 헤드라인 자체만 놓고 보면 요즘 사람들, 그것도 미스터리와 스릴러 마니아에게 크게 어필할 만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논픽션은 물론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도 제작된 적 있고, ‘87분서 시리즈를 집필한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맥베인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리지를 출간한 적 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곤 이 사건엔 뭔가 특별한 게 있구나, 라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팩트는 살해된 부부의 몸에 남은 여든한 번의 도끼질 자국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건이 주목을 받는 건 어쩌면 딸이 범인?”이란 의혹보다 끔찍한 범행의 흔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결과적으론 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 셈이지만 말입니다.

 

세라 슈밋은 네 명의 1인칭 화자를 등장시킵니다. 용의자로 지목받은 리지, 그녀의 언니 에마, 아일랜드 출신 가정부 브리짓, 그리고 리지와 에마의 외삼촌이 고용한 해결사 벤저민(유일한 가공의 인물)이 그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어려서부터 소시오패스 기질을 타고난 듯한 리지 외에 나머지 인물들도 보든 부부에 대한 살의를 리지 못잖게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흔이 되도록 혼자 몸인 에마는 평생 동생 리지에 비해 차별받고 무시당해온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돈을 벌기 위해 다정한 가족들을 떠나 미국까지 온 가정부 브리짓은 부부로부터 부당하고 억압적인 처우에 시달려왔으며, 가정폭력을 휘두르다 끝내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증오해온 해결사 벤자민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인 자매의 아버지를 손 봐주라는 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 그 가족에 대해, 그런 집에서 사는 일은 어땠을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왜 사람이 잔혹한 폭력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지 탐구해보고 싶었다.” (p414, ‘작가 노트)

 

작가 스스로 밝혔듯, 이 작품의 중심은 사건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가정부 브리짓의 이 빌어먹을 가족은 모두 미쳤다.”라는 일성은 보든 가문 사람들의 한껏 일그러지고 비틀린 인격을 한마디로 잘 대변하고 있는데, 작가는 그 인격들이 어떻게 싹을 틔웠고, 어떻게 무자비하게 자라났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꼼꼼하게 그려냅니다.

또 그 인격들의 민낯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서 풍기는 온갖 악취, 등장인물들의 기분 나쁜 구취와 체취,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쏟아내는 오줌과 토사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더욱 고약하게 만드는 8월의 폭염 등 꽤 불편하고 불쾌한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여러 매체의 평가에 범죄 현장에 스민 여름의 열기처럼 불안감을 자극”, “밀실공포증을 일으키는 악몽 같은 이야기”, “긴장감 넘치는 심리학적 탐구라는 문구가 담긴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심리스릴러의 요소들이 다소 모호하거나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목들이 많아서 쉽고 편한 책읽기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용의자로 몰렸다가 무죄 판결을 받은 리지에게 주목했던 독자들은 옮긴이의 말대로 리지의 심술과 변덕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듯한 찝찝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부모는 물론 언니 에마와도 극심한 갈등을 벌이는 리지의 행보는 소시오패스와 정신분열이 뒤섞인 듯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이유로 별 한 개를 뺐는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사족이지만, 리지의 무죄판결문에는 여자가 그런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을 리 없다.”, “자신보다 거구인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하기 어렵다.”란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1892년이란 점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지만, 드물긴 해도 요즘에도 비슷한 수준의 판결을 지켜본 것 같은 기시감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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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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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 도시에 사는 40대 남자 바튼 도스는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죽은 아들 찰리와의 추억이 담긴 집과 평생 일해 온 세탁공장이 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철거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두 집씩 정든 땅을 떠나는 가운데 바튼은 새 집을 알아보는 일도, 자신의 업무인 새 공장부지 계약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기시킵니다. 딱히 무슨 기대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버티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철거일은 점점 다가오고 급기야 바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집과 공장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로드워크는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Richard Bachman)이란 필명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한국에는 “100명의 소년이 1명만 남고 죽을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죽음의 서바이벌을 다룬 롱 워크’(2015, 황금가지) 이후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리처드 바크만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은 현대인의 가치관과 심층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밀히 묘사한 심리스릴러라는 평을 들었다는데, 그래서인지 로드워크는 그동안 읽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과 인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로드워크는 바튼 도스가 집과 공장을 지키기 위해 고속도로 확장 공사에 맞서 싸우는 사건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와 저항, 공포와 무기력 등 바튼 도스 내면의 심리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갈등, 직장에서의 충돌, 과격하긴 해도 별 소득 없던 물리적 저항 등 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철거일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무너져가는 바튼 도스의 자아를 집요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낡은 집과 고만고만한 세탁공장을 지켜내고 싶은 절실함에 사로잡혀 있지만 무자비한 고속도로 확장 공사를 벌이는 거대한 힘 앞에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한 바튼 도스가 취할 수 있는 마땅한 대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걸 잘 알면서도 바튼 도스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한 채 그저 뭉기적거릴 뿐입니다. 마치 그렇게 하다 보면 뭔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허무한 희망 같은 걸 품었다고 할까요?

 

나는 이유를 모른다. 당신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대체로 신조차 이유를 모른다.

정부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고 한다. 그게 전부다.”

- 1967년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일반인 인터뷰에서 인용 (p9, 프롤로그 )

 

물론 바튼 도스는 현실적인 대책도 준비합니다. 생명보험을 털어 생활비를 준비하고, 거액을 들여 위험천만한 총기를 사들이는가 하면, ‘총공격을 위해 모종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대부분의 시간은 술과 TV프로그램과 끊이지 않는 악몽에 잠식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의 내면이 무너져가는 동안 고속도로는 점차 확장되고 현실은 석 달에 걸쳐 그의 모든 것을 천천히 파국으로 몰고가버립니다. 그 석 달이 지난 뒤 그가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작품이 리처드 바크만이 아니라 스티븐 킹의 이름으로 집필됐더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됐을 것입니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스토리는 강한 극성(劇性)과 선명한 전개를 지녔을 것이고, 거기에 스티븐 킹 특유의 공포 코드까지 가미됐을 게 분명한데, 고백하자면, 그런 스타일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인지 심리스릴러에 가까운 이 작품의 서사는 장편보다는 중편의 분량에 어울렸을 거라는 아쉬움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물론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스티븐 킹 특유의 매력은 여전했고, 쉬지 않고 단숨에 마지막까지 달리게 만드는 그의 마력 역시 여느 작품들처럼 강렬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의 가치관과 심층적인 문제를 다룬 심리스릴러의 대가리처드 바크만이 아니라 호러 킹스티븐 킹의 작품이었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 저만의 소감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2015, 황금가지)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아내를 살해하고 시궁쥐가 득실거리는 우물 속에 사체를 유기한 남자를 그린 ‘1922’라는 작품이 있는데, ‘로드워크의 홍보카피를 보곤 문득 그 작품과 비슷한 톤이 아닐까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혹시 이 작품에서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스티븐 킹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3편의 중편과 1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별도 없는 한밤에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리처드 바크만의 이름으로 발표된 롱 워크는 번역의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독특한 설정을 다루고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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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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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소녀 에이미가 실종된 뒤 용의자로 지목된 건 실종 당일 아르바이트 베이비시터로 에이미를 돌봤던 10대 소년 키이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의 의혹과 편견 섞인 시선이 키이스에게 쏟아진다. 키이스의 아버지 에릭 무어는 아들의 무죄를 믿지만 사건 당일 밤 키이스의 불확실한 행적이 마음에 걸린다. 안 그래도 폐쇄적이고 반항적이던 키이스가 사건 이후 노골적인 적의까지 드러내자 에릭은 혼란에 빠진다. 시간이 지나도 에이미는 발견되지 않고, 에릭의 삶 전반에 걸쳐 모든 걸 부식시키는 의심과 거짓의 소용돌이가 몰아닥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가족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p13)

이 작품 본편의 첫 문장입니다.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그것은 모두 거짓이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이 쩍 벌어져버린 균열을 감추려는 어설픈 위장이라는 게 작가가 독자에게 건넨 이 작품의 불길하고도 섬뜩한 첫 인상인 셈입니다.

키이스가 소녀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가운데 약 2주가 지난 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는 미스터리 구도는 무척 심플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정체는 범인 찾기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아주 지독한 심리스릴러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무한대로 자라나는 에릭 무어의 의심과 불신, 두려움과 공포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에릭에겐 두 개의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과 여동생으로 이뤄진 옛 가족, 아내 메러디스와 아들 키이스가 있는 현재의 가족이 그것입니다. 불행하게 해체됐던 옛 가족의 상처 때문에 에릭은 일본단풍나무가 드리운 숲속의 집에서 자신이 꾸린 현재의 가족을 소중히 가꿔왔지만, 아들 키이스가 에이미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으면서 그 소소한 행복은 산산조각 납니다. 애초 아들 키이스의 불확실한 행적과 거짓말에 국한됐던 그의 의심은 우연과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이미 해체된 옛 가족들은 물론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 확대되고 맙니다.

사업 실패로 전 재산을 날린 폭군 같던 아버지의 음모,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끔찍한 사고의 진실, 아버지에게 멸시당한 끝에 무능한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 형의 비밀 등 그동안 은폐됐던 옛 가족의 민낯과 마주한 에릭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나머지 그 의심의 칼끝을 아내 메러디스에게까지 들이대게 된 것입니다.

 

의심은 산()이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산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p114에서 발췌)

 

에릭의 의심은 때론 모르는 게 나았을 추악한 진실과 마주치기도 하고 때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이미 해체됐던 옛 가족은 다시 한 번 무참한 해체를 겪게 되고, 현재의 가족 역시 의심이라는 산()에 의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릭이라는 인물이 어딘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치명적인 의심병 환자로 설정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에릭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입니다. 끝없이 바닥을 향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에릭의 의심이 더 생생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에릭의 평범함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의심에 하도 심하게 시달린 탓에 그 나뭇가지 밑에 보이는 것이 피가 고인 웅덩이인지, 아니면 그냥 흩어져 있는 붉은 낙엽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p344)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붉은 낙엽아름답고 또 그만큼 고통스러운 작품입니다. “(자기파괴적인 자세와) 자학적인 경향이 쿡의 작품에서 풍기는 기묘한 아름다움과 매력의 진정한 원천이 아닐까.”라는 평가도 실려 있는데, 사실 꽤나 불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읽은 작품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옮긴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이 이중적인 여운은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인상적인 클라이맥스와 엔딩 덕분이란 생각인데,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대로 이 작품이 토머스 H. 쿡의 대표작이란 평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붉은 낙엽은 물론 앞서 읽은 채텀 스쿨 어페어’, ‘밤의 기억들’, ‘브레이크하트힐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는 작품들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토머스 H. 쿡에게 번번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마약 같은 매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앤솔로지를 제외하면 한국에 소개된 그의 작품 가운데 줄리언 웰즈의 죄심문이 남은 셈인데, 연이어 토머스 H. 쿡을 읽는 것은 꽤나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음엔 어떤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되는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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