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여백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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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는 먼저 떠난 아내의 몫까지 정성을 다해 홀로 딸 가나를 키운다. 하지만 목숨과도 같았던 딸이 교실 난간에서 추락하던 그날, 안도의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괴로워하던 안도 앞에 딸의 친구라는 소녀가 찾아오면서 상황은 급반전 된다. 과연 가나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채 서서히 밝혀지는 가나의 죽음의 진실 앞에서 안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지독한 따돌림이나 폭력을 통한 괴롭힘,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자살 혹은 살인 등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좀처럼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유, 가령 픽션을 통해서라도 끔찍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무감, 또는 어린 나이라고 해도 함부로 용서받아선 안 될 가해자들이 제대로 벌 받고 응징되는 엔딩의 쾌감 같은 것 때문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죄의 여백은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전형적인 미스터리이자 복수극이지만 그에 못잖게 악의 혹은 반성의 의미를 심도 있게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미스터리와 복수극이란 서사보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족)의 내면과 심리가 더 무게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자책과 자괴감에 휩싸인 채 절망의 밑바닥을 헤매던 아버지 안도가 복수와 용서와 반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대목이라든가 가해자인 두 소녀가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을 지나 자기합리화와 은폐를 결심하기까지 겪는 요동치는 심리를 그린 대목들이 오히려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성하면 용서가 될까? 반성을 면죄부로 여기는 사람들, 거기에도 악의는 존재하지 않을까? 죄와 벌, 그 사이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죄의 여백이 존재한다.”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 작품만의 특별함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안도의 복수극은 독자에게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만듭니다. 복수가 성공한다면 통쾌하긴 하겠지만 그것이 안도에게 과연 안식과 만족과 평화를 주게 될까, 라는 우려 섞인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작가는 몇 차례의 반전을 통해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또 어느 정도는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엔딩을 내놓습니다. 이 엔딩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더 폭발력 있는 엔딩을 기대했던 탓에 살짝 아쉽게 느껴진 게 사실이긴 합니다.

 

주인공들만큼 눈길을 끄는 조연은 안도의 동료인 심리학 교수 오자와 사나에입니다. 타인의 심리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져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나에는 쉽게 얘기하면 진담과 농담과 돌려 말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데도 서투른 인물입니다. 재미있는 건 사나에는 애초 초고에는 없던 인물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사나에를 투입하면서 결말이 크게 바뀌었고 안도와 소녀들의 팽팽한 긴장감에 완급을 줄 수 있었다.”라고 언급했고, 번역자는 사나에를 쓸모 있는 곁가지라고 칭하며 공감 능력과 배려심이 뛰어난 척하지만 인간성이 최하인 가해자와 대비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나에 덕분에 시종 팽팽하고 숨 쉴 틈 없을 뻔한 이야기가 나름 굴곡과 완급을 지닐 수 있었는데,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온다면 그것도 꽤 매력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시자와 요는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드는 독특한 연작 괴담집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을 통해 최근 알게 된 작가인데, 처음 만난 작품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그가 학교폭력을 다룬 작품을 집필했다는 점 자체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소재의 스펙트럼도 넓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나 개성도 강한 작가라 앞으로 한국에 자주 소개될 것 같은데 다음엔 어떤 특별한 이야기로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감이 앞섭니다.

 

사족으로...

최근 몽실북스 포스트에서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는데, 이 작품을 포함하여 풀꽃도 꽃이다’(조정래), ‘파멸일기’(윤자영), ‘악의 교전’(기시 유스케), ‘이웃이 같은 사람들’(김재희)이 언급됐습니다.

동의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는데, 덕분에 그동안 읽은 작품들 가운데 제 나름대로의 학교가 지옥이 되어버린 소설 Best 5’를 꼽아봤습니다.

 

1. ‘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2. ‘고백’ (미나토 가나에)

3. ‘어나더’ (아야츠지 유키토)

4. ‘침묵의 교실’ (오리하라 이치)

5. ‘솔로몬의 위증’ (미야베 미유키)

 

지옥의 강도가 강렬한 순서로 꼽은 리스트인데, 사실 솔로몬의 위증지옥이 된 학교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만한 작품으론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이나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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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아이들 - 인기 웹드라마 〈은비적각락〉 원작소설
쯔진천 지음, 서성애 옮김 / 리플레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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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천재이자 전교 수석을 달리는 닝보시 중학교 2학년 주차오양은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온 초등학교 동창 딩하오와 그의 의남매 푸푸 때문에 한순간에 인생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우연히 끔찍한 살인 장면을 녹화하게 된 것은 물론 직접 살인에 개입하는 참사까지 겪게 됐기 때문입니다. 주차오양은 한편으론 동영상 속 살인범과 위험천만한 거래를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이 개입한 살인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골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심하고 겁 많던 14살 소년 주차오양의 눈빛은 그 어떤 살인마와도 비견될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하게 변해갑니다.

 

쯔진천의 작품들 가운데 무증거범죄’, ‘나쁜 아이들’, ‘동트기 힘든 긴 밤은 일명 추리의 왕(推理之王) 시리즈로 불립니다. ‘나쁜 아이들은 가장 나중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인데, 시리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수학 교수이자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보다도 세 명의 10대들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다른 작품들과는 톤과 결이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그 또래에 어울리는 쉽고 간결한 문장들은 때론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끔찍한 살인사건에 얽혔다는 공포심과 함께 그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비참한 가족사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탓에 그 어느 작품보다도 무겁고 불편한 책읽기가 됐다는 뜻입니다.

 

우연한 살인 목격우발적인 살인으로 촉발된 주차오양의 비극은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됐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전개됩니다. 고아원을 탈출한 뒤 도망치던 딩하오와 푸푸의 느닷없고 우연한 방문, 우연히 포착한 살인 장면,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영상 속 살인범, 그리고 놀이공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밉살스런 이복동생 등 주차오양의 비극은 대부분 우연과 우발에 의해 거침없이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뛰어난 수재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뒤 아버지의 새 여자와 딸에게 무시당하면서 비참한 10대 시절을 보낸 주차오양의 소름 돋는 변신과 성장은 그래선 안 돼!”라는 안타까움과 부디 너의 계획이 모두 성공하기를!”이란 위험한 응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옌량은 과거 뛰어난 경찰이자 범죄논리학 전문가였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지금은 저장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거의 카메오에 가까운 역할만 맡고 있지만, 막판에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그가 주차오양에게 품은 양립 불가능한 감정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단순히 진실 혹은 진범 찾기가 아닌 그 이상의 무겁기 그지없는 의미를 갖게 만듭니다. 출판사가 소개한 중국판 백야행이라는 독자 리뷰는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출판사가 극도로 내용 소개를 아끼고 있어서 서평에서 자세한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를 하기가 어려운데, 개인적으론 재미나 여운 등 모든 면에서 동트기 힘든 긴 밤에 못잖은 작품이라 쯔진천의 팬이라면 대부분 만족할 것이 분명하고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충분히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만 중언부언해야 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앞선 시리즈 두 작품이 모두 한스미디어에서 나왔지만 이 작품만은 다소 생소한 이름의 출판사에서 출간돼서 의아했습니다. 일부이긴 해도 편집에서 아쉬운 대목들이 보인 게 사실이고, 무엇보다 (스포일러가 될 부분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인터넷 서점에 실린 출판사 소개글은 쯔진천의 팬이 아닌 일반독자의 관심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다 떡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또 엄밀히 따지면 이 작품의 번역제목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인 나쁜 아이가 맞다는 생각인데, 특히 다 읽은 후에는 복수형 제목 자체가 작품의 의미를 오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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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카의 여행
헤더 모리스 지음, 김은영 옮김 / 북로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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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 18살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유대인 소녀 실카는 3년째 갇혀 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마침내 풀려난다. 하지만 그녀가 전쟁 포로로서 상습적으로 강간당한 것을 적군에게 몸을 팔아 살아남은 것이라고 여긴 소련군 내무인민위원회는 실카에게 매춘, 스파이, 나치와의 결탁 혐의를 씌우며 노역 15년형을 선고한다. 그녀가 끌려간 곳은 시베리아의 북극권 내 보르쿠타에 자리한 강제노동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악몽이 여전히 생생한 가운데 실카는 하얀 지옥으로 불리는 보르쿠타에서의 끔찍한 15년의 첫날을 맞이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세실리아 실카클라인은 헤더 모리스의 전작인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에도 등장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를 직접 읽진 못했지만 이 작품에도 실카가 아우슈비츠에 갇혀있던 시기의 이야기가 플래시백처럼 소개되곤 해서 당시 실카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6살에 아우슈비츠로 끌려와 폭력과 강간에 시달리며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실카가 자유의 순간을 얻자마자 억울한 누명과 함께 또 다른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장면은 초반부터 독자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베리아 북극권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또 다시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원점부터 겪게 된 실카를 지켜보고 있으면 죽음이 곧 희망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고 애써도 결국 어떻게든 도드라지고 마는, 그래서 적에게든 동료에게든 금세 눈에 띄고 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그 결과 아우슈비츠에서는 나치의 노예가 되어 동족을 다그치고 그들의 죽음을 코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처지가 됐고, 또 그로 인해 나치 부역자로 낙인 찍혀 보르쿠타의 강제수용소에서의 15년의 지옥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미 한 번 지옥을 경험한 실카에게 보르쿠타에서의 폭력과 강간과 추위와 배고픔은 더 이상 큰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같은 막사의 수용자 중 누군가는 그런 실카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똑같은 이유로 실카에게 의심과 공격을 퍼붓습니다. 실카의 유일한 두려움이라면 아우슈비츠에서의 자신의 행적이 알려지는 것인데, 그건 동시에 실카 스스로 절대 잊지 못할 혐오스런 화인(火印)이자 평생 안고 가야 할 죄책감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 덕분에 험한 강제노역 대신 의료병동 간호사로 발탁되면서 실카는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덜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을 보장받습니다. 하지만 마치 거대한 인력(引力)이라도 지닌 듯 실카는 타인의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탄생과 파괴를 끊임없이 자기 주위로 끌어당겼고, 그것은 때론 찰나의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녀 자신을 무기력과 자책과 암담함으로 이끌 뿐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수용소로 이어지는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여행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그린 점이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다 읽은 뒤에는 실은 이 작품이 실카가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경험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래서 미래를 꿈꾸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단죄하고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 발버둥친 그녀만의 지난한 여정을 그렸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출판사가 소개글을 통해 실카의 여행을 읽는 5가지 키워드로 여행’, ‘죽음’, ‘모성애’, ‘사랑’, ‘희망을 언급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오히려 감흥도 여운도 강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면에서 충실한 자료조사에 기반한 팩트와 적절한 수준의 허구를 잘 배합한 작가의 노력에 새삼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실카의 여행이 남다르게 읽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라는 고통과 분노의 역사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성 노예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의 참극이 벌어진 군함도가 자주 떠올랐는데,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헤더 모리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잊히거나 아예 흔적조차 사라진 한국의 실카를 찾아내 그 혹은 그녀의 여정을 알리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더라도 멈춰선 안 될 후대의 소중한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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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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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명문가 호겐 가()의 여주인 야요이로부터 실종된 손녀 유카리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어 고민 중이던 긴다이치 코스케는 사진사 혼조가 사건 의뢰를 위해 갖고 온 기괴한 결혼사진을 보곤 깜짝 놀랍니다. 지금은 폐허가 된 호겐 가의 옛 가옥(일명 병원 고개 저택’)에서 찍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실종된 유카리와 낯선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를 하기도 전에 이번엔 바로 그 가옥에서 잔인하게 잘린 남자의 목이 발견되어 긴다이치 코스케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자백을 담은 유서가 현장에서 발견됐지만 결국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고 실종됐던 유카리마저 제 발로 호겐 가로 돌아오면서 두 사건 모두 미제 상태로 흐지부지 종결됩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병원 고개 저택의 저주는 또 다시 호겐 가를 끔찍한 살인극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합니다.

 

길고도 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인사라는 작품해설제목대로 77편에 이르는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후 악령도가 출간되긴 했지만 긴다이치 코스케가 과거에 맡았던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 실질적으로는 이 작품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되는 것입니다.

연재 시작 전부터 작가가 이미 마지막을 결심한 탓인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군살(?)도 꽤 많고 전개 속도도 많이 느린 것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마치 마지막을 어떻게든 늦춰보려는 노작가의 아쉬움이 엿보인다고 할까요? 작은 비중의 조연이나 사소한 풍경들까지 과도할 정도로 상게하게 그린 걸 보면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덕분에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살짝 지루하게 읽힌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메이지시대 이후 5대에 걸친 호겐 가의 복잡한 가계도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그 주위에 속물적인 사업가 가문이자 호겐 가의 불행을 잉태시킨 이가라시 가, 대를 이어 기생충처럼 호겐 가에 빌붙은 탐욕스런 사진사 가문인 혼조 가까지 자리 잡고 있는데다 첩, 불륜, 근친혼 등 일그러진 혈연관계까지 뒤엉킨 실타래처럼 끼어드는 바람에 메모 없이는 좀처럼 인물들의 관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사건 역시 기괴하고 엽기적인 것은 물론 2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고 있어서 이야기의 큰 그림을 이해하기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난감했는데, 동시에 이 난감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것도 사실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문란한 성()과 혈연에의 집착이 비극의 단초로 작동하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인간 본능의 저열하면서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생생한 민낯과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능을 이용한 추악한 탐욕과 그 본능 때문에 빚어진 빗나간 애증이 가세하면서 비극은 한없이 확장되고 그만큼 적잖은 인물들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런 탓에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긴다이치 코스케는 물론 독자에게 남는 것은 참담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묵직한 회한과 여운뿐입니다.

 

등장인물도 워낙 많고 사건도 미로처럼 복잡해서 상세한 줄거리 소개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다 보니 어중간한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그만큼 이 작품은 사전정보 없이 읽어야 제 맛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사건에 비해 과도한 분량이라든가 사족처럼 보일 정도로 온갖 것에 동원된 디테일한 묘사, 그리고 트릭보다는 비극 자체에 초점을 맞춘 서사 등 개인적으론 아쉽게 여겨진 대목들이 많아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만 아니라면 그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높은 평점을 주긴 어려운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를 애정해온 독자 입장에서 팔팔한 20대에서 노회한 60대에 이르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어온 주인공과 이별해야 한다는 남다른 마음가짐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기도 해서 예우(?) 차원의 평점을 준 게 사실입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을 끝으로 현재(20214)까지 한국에 소개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를 모두 마쳤는데,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하고 보니 그동안 순서와 무관하게 띄엄띄엄 읽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각 작품의 매력과 미덕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더는 읽을 작품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쉽긴 하지만, 올해 7년 만에 출간될 미로장의 참극을 시작으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자주, 꾸준히 한국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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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이동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2 미치 랩 시리즈 1
빈스 플린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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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명의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대통령은 겨우 지하 벙커로 대피하지만 적잖은 인질들이 테러범들에게 억류된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 사내가 투입되는데, 그는 바로 CIA의 대 테러센터 비밀요원 미치 랩이다. 대학 시절 테러로 여자친구를 잃은 후 복수를 위해 요원이 된 미치 랩은 10여 년간 엄청난 성과를 올려온 최고의 살상무기다. 백악관으로 침투한 미치 랩은 당초 보고와 달리 벙커 속의 대통령이 안전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구출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내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미치 랩 시리즈는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첩보액션=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에 좀처럼 책으로 읽을 생각을 안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모 카페의 댓글에 달린 이 시리즈에 대한 찬사를 보곤 첫 편인 권력의 이동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구하게 됐습니다.

초반부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테러리스트 납치 장면까지만 해도 역시 첩보액션은 영화로 봐야 돼.”라며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백악관을 점령당하고 미치 랩이 주인공으로서 활약하는 대목부터는 갑자기 몰입감이 확 높아지면서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을 단숨에 마무리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는 미드 ‘24’나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를 활자로 읽는 듯한 짜릿함이랄까요?

 

이야기 얼개나 인물들의 구도는 대 테러리스트 첩보액션물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충실합니다. 슈퍼울트라급 주인공 미치 랩과 그를 돕는 매력적인 조연들(은퇴요원 밀트 애덤스, 여기자 애너 릴리), 냉혹하고 잔인한 테러리스트들,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CIA와 특수부대, 벙커에 갇힌 정의로운대통령과 경호팀,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비열한 정치인들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숨 막히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미치 랩은 CIA의 대 테러센터 오리온팀의 비밀요원이지만 실은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비공식 프리랜서입니다. 10여 년 전 비행기 테러로 여자친구를 잃은 뒤 비밀요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미치 랩은 말 그대로 제이슨 본 못잖은 최고의 살상무기로 진화했습니다. 여느 첩보액션물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터프하고 시니컬하지만 그의 진짜 매력은 터뜨릴 때 터뜨릴 줄 아는 다혈질 성격과 비밀요원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수시로 회의에 잠기곤 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 냄새가 제대로 나는 살인기계라고 할까요?

 

테러리스트들의 백악관 점령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비열한 처신과 오로지 작전 성공만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실무진들의 분투, 그리고 그들 사이의 팽팽한 갈등도 눈길을 끄는 대목인데, 다만, 의외로 배신자 캐릭터가 단순한데다 특별한 반전 같은 게 없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미드 ‘24’의 경우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전개가 백미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권력의 이동은 비교적 돌직구에 가까운 구도였다는 생각입니다.

 

미치 랩과 함께 백악관 내부에서 위태로운 미션을 수행하는 두 인물 - 은퇴요원 밀트 애덤스, 여기자 애너 릴리 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는데, 이들이 다음 작품에서도 계속 미치 랩과 활약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미치 랩과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미치 랩 시리즈는 이른바 미국의 패권을 미화하고 자국의 이익이 곧 선이고 정의라는 미국 제일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다소 비판적인 책읽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소설은 단지 소설일 뿐이니까.”라는 옮긴이의 말대로 재미있는 첩보액션 그 자체로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미치 랩 시리즈를 순서대로 다 읽게 될 것 같은데, “대통령의 비밀 지령을 받아 중동 테러리스트들에게 생화학 무기 공장을 지원하는 유럽 기업가를 암살하러 나선다.”는 두 번째 작품 3의 선택은 물론 한국에 출간된 나머지 시리즈 모두 머잖아 제 손에 들어올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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