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죄 : 검은 강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프로파일러 팡무는 자신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공안국 부국장 싱즈썬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 싱즈썬은 아동 인신매매 조직 수사를 위해 부하를 위장잠입 시켰는데 그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인신매매 조직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 하지만 CCTV는 물론 싱즈썬의 무고함을 밝혀줄 단서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팡무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경찰 내의 분위기마저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팡무는 싱즈썬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납치된 여자아이들이 해외로 팔려 나가는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프로파일링’, ‘교화장에 이은 심리죄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 팡무는 학생 시절부터 천재적인 프로파일링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을 해결한 바 있고(‘프로파일링’), 졸업 후 경찰이 된 직후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범죄 집단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교화장’)

이 작품 속 팡무에게선 이제 제법 베테랑의 품격까지 느낄 수 있는데, 그런 탓인지 그가 마주한 사건 역시 스케일도 커지고 비극이나 잔혹성의 깊이는 전작들보다 훨씬 더 깊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싱즈썬의 무고를 밝히고 그를 함정에 빠뜨린 아동 인신매매 조직을 쫓는 팡무의 여정은 외로움과 고달픔 그 자체입니다. 싱즈썬의 혐의를 벗길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경찰 내부에선 딱히 적극적인 수사를 벌이지도 않는 것은 물론 일부 간부들은 그의 자리를 탐내는 속내를 감추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행보가 번번이 누군가에게 간파당하자 팡무는 경찰 내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애초 위장잠입을 시켰던 부하 외에 싱즈썬이 아무하고도 수사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음을 의아하게 여겼던 팡무는 뒤늦게 싱즈썬이 말할 수 없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고 그 때문에 사적인 복수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상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단독수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몇 차례나 목숨이 날아갈 위기를 겪은 끝에 진실을 찾아내고 악의 세력들을 일망타진합니다.

 

사실 심리죄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선명하고 명쾌한 구조의 작품들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주인공 팡무가 프로파일러라 그런지 범죄 자체도 기괴하고 범행동기나 심리 역시 다소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작품인 검은 강은 전작들에 비하면 악당들의 캐릭터나 범행 자체가 구체적인데다, 팡무의 활약도 프로파일러보다는 물불 안 가리는 열혈형사에 가까워서 수월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물론 곳곳에서 프로파일러 팡무의 맹활약도 맛볼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재미가 골고루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범죄조직의 수법과 범행 스케일, 그리고 팡무의 목숨을 건 활약들 가운데 다소 사실감이 떨어지는 설정들이 자주 발견돼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위화감 또는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없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런 아쉬움들이 적잖이 쌓인 탓에 높은 평점을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막다른 벽에 가로막힌 팡무의 다음 행보를 위한 단서들은 때론 너무 쉽게, 때론 느닷없는 조력자에 의해 제공됐고, 몇 차례 팡무의 목숨을 위협했던 극단의 위기들은 조금은 억지스럽게 해소되곤 합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단독수사에 임한 팡무가 막판에 악당들을 예상외의 방법으로 궤멸시키는 대목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한 나머지 허구의 냄새가 과하게 풍긴 점도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 소녀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의 범행 수법도 그 규모나 잔악함에 비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어수룩하거나 허술해 보여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쉬움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터너로서의 위력은 가장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며 숱한 위기를 넘긴 팡무가 프로파일러를 넘어 뛰어난 현장 전문가로 성장하는 대목도 계속 눈길을 끌었는데, 덕분에 과연 다음에는 팡무가 어떤 사건들과 마주하게 될지 무척 기대하게 됐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카르테 4 - 의사의 길 아르테 오리지널 9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김수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호(文豪) 나쓰메 소세키를 사랑하는 괴짜 내과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24시간 365일 진료를 내세운 혼조병원에 근무하다가 더 나은 의사가 되기 위해 시나노대학 의학부에 들어간 지도 벌써 2. 대학원생이자 의사로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는 그는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에 온 이후로도 유독 환자복(?)이 많은 신세. 4내과 3팀에서 실질적인 리더를 맡고 있는 구리하라는 정의감에 불타는 후배 의사들에게 공감하면서도, 모순투성이의 대학병원이라는 조직에도 나름대로 순응하려 한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을 가족과 보내고 싶어 하는 29세의 췌장암 환자 후타쓰기의 치료법을 둘러싸고, 의국의 실권을 장악한 우사미 준교수와 격하게 부딪치고 마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신의 카르테 1’을 만난 건 2011년 봄(당시 출판사는 작품’)의 일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줄거리 자체는 가물가물하지만,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 & 시라토리트 시리즈나 일본 드라마 하얀 거탑과는 사뭇 다른 따뜻하고 감동적인 의사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미스터리에 열중하던 저로서는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2011년 가을 신의 카르테 2’까지 출간되곤 이후 오랫동안 후속작 소식이 없었는데, 2018년에 아르테에서 앞선 두 편의 개정판은 물론 신의 카르테 3’, ‘신의 카르테 0’까지 한꺼번에 출간돼서 잠시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뒤늦게 신의 카르테 4’를 통해서야 거의 10년 만에 나쓰카와 소스케와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10년 전 내가 읽었던 그 구리하라 이치토가 맞나?”라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열정과 따뜻한 품성을 지녔지만 아직은 의사로서 미숙한 캐릭터로만 기억하고 있던 그가 어느 새 산전수전과 풍파를 겪은 끝에 베테랑의 품격까지 갖춘 멋진 의사로 성장해있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끌어당기는 구리하라라는 별명답게 시나노대학 소화기 제4내과 3팀의 실질적 리더를 맡은 구리하라는 만만치 않은 환자들을 쉴 새 없이 받아들입니다. 오로지 환자에만 집중하는 구리하라는 조직의 논리와 효율적인 운영만을 우선시하는 의국과 사사건건 부딪히면서도 끝내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는 진정한 의사의 모습을 수시로 보여줍니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시추에이션 드라마처럼 전개돼서 장편이라기보다는 연작단편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중에서도 메인 스토리라 부를 만한 것은 29살의 췌장암 말기 환자 후타쓰기를 전력으로 치료하는 구리하라의 분투입니다. 무의미한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그녀를 진심을 다해 설득하여 병원으로 데려온 구리하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지만, 끝내 죽음은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함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대학병원의 경직된 규칙과 가이드라인이 그녀의 희망을 짓밟고 퇴원을 가로막자 구리하라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구리하라 본인도 깜짝 놀랄 만한 충격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대학병원을 부조리와 불합리와 모순이라는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권위라는 커다란 지붕을 얹은 곳.”(p36)으로 여기면서도 구리하라는 나름 그곳의 규칙에 적응하려고 애씁니다. 대학병원은 그곳 나름대로의 역할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 탓에 정의감에 휩싸인 열혈 후배에게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대학병원의 병폐를 깨뜨리는데 가장 앞장서는 것은 다름 아닌 구리하라 본인입니다. 대학병원 안팎에는 이런 구리하라를 지지하는 아군들이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응원을 보내줍니다. 독자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흐뭇하고 가슴 벅찬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유독 서평에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공감되는 문장도 많았고, 구리하라의 품격을 돋보이게 만드는 멋진 문장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진지함이란 진검승부라는 뜻.”이라는, 구리하라가 종종 인용한 나쓰메 소세키의 명문입니다. 의국 상층부에게 진지함이란 그저 조직을 위해 규칙과 가이드라인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에 불과하지만, 구리하라에겐 목숨을 내걸 수 있는 진심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구리하라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든 환자들은 물론 병원 안팎의 인물들에게 신망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진지함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인 의사의 길은 어쩌면 구리하라의 진지함이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그에게 큰 위기와 고난을 안겨 주는 것 역시 바로 이 진지함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쓴 서평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무겁고 시니컬한 분위기의 메디컬 소설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수시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해학과 유머가 풍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맛깔스런 조연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고, 구리하라와 그의 가족이 머무는 오래된 여관 온타케소가 내뿜는 블랙코미디와 낭만 역시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조언자의 역할을 맡은 구리하라의 아내 하루나와 선천적으로 고관절에 문제를 지녔지만 밝고 씩씩하게 성장하는 딸 고하루 역시 대학병원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적절히 상쇄시켜주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인물들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당장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주위에 이런 의사가 한 명쯤 존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만드는 구리하라 이치토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됐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진지함이란 것이 어떻게 다져지고 뭉쳐졌는지, 거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 조연들은 어떤 모습들이었는지도 찬찬히 지켜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6, 백인경찰이 흑인소년을 사살한 사건으로 LA 전역이 또다시 긴장감에 휩싸인 가운데, 한인마켓에서 약사로 일하는 그레이스 박은 이 사건에 대한 TV뉴스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닥친 끔찍한 사건을 계기로 그레이스 박은 자신만 모르고 있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40대 흑인남성 숀은 10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사촌 레이가 가족과 섞이지 못한 채 방황하자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자신의 누나 에이바를 살해하고도 집행유예만 받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 여성이 괴한의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들리자 숀은 레이에 대한 의심과 함께 28년 동안 묵혀왔던 분노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1991년에 벌어진 일명 두순자 사건과 이듬해 벌어진 LA 폭동입니다. 1992LA 폭동의 도화선은 분명 백인경찰이 흑인청년을 무차별 폭행한 로드니 킹 사건이었지만,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한인 사회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대두된 것이 1년 전 벌어진 두순자 사건인데, 이는 15세 흑인소녀를 도둑으로 여긴 한인상점 주인 두순자가 폭력을 주고받다가 총으로 소녀를 사살한 사건입니다. 두순자는 유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금고형은 면했고 이는 흑인사회에 큰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1년 후 LA폭동에서 한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숀의 누나 에이바가 한인마켓 주인에게 사살당한 사건은 두순자 사건을 거의 그대로 따온 설정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에이바의 죽음을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만 삼은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 확장시킵니다. , 당시 에이바를 살해하고 종적을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이 28년만인 2019, 누군가에게 응징당하듯총에 맞는 사건을 설정함으로써 되풀이되는 비극에 휩싸인 두 가족 숀 일가와 한인마켓 주인의 가족 의 상처를 그리는 것은 물론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인종갈등의 골의 민낯을 독자 앞에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어설픈 화해나 용서를 제시하지도 않고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지도 않습니다. 또 다큐멘터리처럼 인종갈등 문제를 고발하는 자세를 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백인중심사회에서 살아가는 두 유색인종 가족 내부의 고민과 갈등에 좀더 방점을 찍는가 하면,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고민과 갈등이 사회적 문제나 우발적인 폭력과 스파크를 일으켰을 때 얼마나 끔찍하고 궤멸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소름 돋을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80년대에 이민 와 힘겹게 정착한 부모를 둔 그레이스는 흑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공분하고 추모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올곧은 인물이지만 자신의 가족이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자 저도 모르게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가족을 지키려 분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진실일 뿐입니다.

숀은 지금까지도 에이바를 추모하고 그리워하지만, 에이바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그녀를 무작정 미화하고 이용하려는자들을 극도로 혐오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에이바를 착하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소녀로 포장하려는 가족들도, 에이바에 관한 책을 펴내 부와 인기를 얻으려는 위선자들도 숀에겐 모두 가증스럽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에이바를 죽이고 자취를 감췄던 한인마켓 주인의 피격사건은 숀이 28년 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에 기름을 끼얹고 맙니다.

 

서로 접점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레이스와 숀은 중반 이후 누가 한인마켓 주인을 쏘았는가?”라는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들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화해나 용서를 나누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주장과 설득을 펼칠 뿐입니다. 어느 한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과도 같은 각자의 입장들은 이른바 인종갈등을 소통이나 화해로 해결하겠다는 선언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지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도, 어설픈 관용도, 현실에 대한 냉소도 던지지 않은 작가의 진짜 의도는 독자에게 정답 없는 고민거리를 건네주려던 게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돈에 빠진 그레이스와 숀을 묘사한 후반부 몇 줄의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고 말할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는 사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때까지 그들은 불길을 함께 바라봤다.” (p3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한 잠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력적인 폭주 여탐정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을 담은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2020년에 출간된 이별의 수법을 통해 하무라 아키라의 팬이 됐는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기다리던 신간이 308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집이라 아쉬움이 꽤 컸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별의 수법을 순식간에 읽어냈던 걸 기억하면 300여 페이지는 그저 아쉽기만 한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기치조지 주택가에 있는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아르바이트 점원이자, 이 서점이 거의 장난삼아 시작한 백곰 탐정사에 소속된 유일한 탐정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점 2층 한쪽에 주거 공간 겸 탐정사무실을 얻어 겨우겨우 노숙을 면한 하무라는 자신의 표현대로 불혹의 나이가 넘어 언덕길을 구르는 것처럼 나이를 먹어가고있지만 박봉과 고된 업무는 물론 사람을 험하게 부리는 서점 오너 도야마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떠맡은 탓에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대형 탐정사 도토종합리서치의 지인 사쿠라이 하지메로부터 이런저런 일거리를 제공받지만 보수도 얄팍하고 하찮아 보이는 의뢰들이 대부분인데,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란 그녀의 별명답게 처음엔 별 것 아니게 보이던 사건들이 어느 하나 쉽고 곱게 끝나는 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에서 하무라가 받은 의뢰들은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수양딸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 갑자기 소식이 끊긴 연인의 흔적을 찾아달라는 것, 세상을 떠난 지인을 소중히 여긴 그 누군가를 찾아달라는 것 등 대부분 심부름센터나 흥신소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의뢰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럽고 탁한 연못에서 익사할 뻔하거나, 청소기 코드에 목이 졸리거나 식칼로 찔릴 뻔하거나 심지어 차에 탄 채 산사태에 휘말리는 등 그야말로 목숨을 건 악전고투들을 겪게 돼서 독자 입장에선 그저 한숨과 연민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무라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과 전개는 이별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읽는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군더더기나 사족 하나 없이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살코기만 가득한 뻑뻑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완급 조절과 적재적소의 블랙 유머 덕분에 엄청난 속도감과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피식피식 웃으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 것도 사실인데, 중편이나 장편에 어울리는 방대한 설정 때문에 다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록작이 많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의뢰인의 수양딸을 에스코트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 첫 수록작 거품 속의 나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사건 자체도, 해결 과정도 명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표제작인 불온한 잠은 단편 속에 욱여넣기에는 인물관계도 많이 복잡했고 핵심인물의 과거사도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도는 해체 직전의 빌딩이 주 무대인 새해의 미궁과 사라진 희귀도서의 행방을 찾다가 그 희귀도서에 집착하는 여러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그린 도망친 철도 안내서도 소재나 사건에 비해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사건 배경은 엄청 복잡합니다. 반면, 이야기의 속도감은 숨이 가쁠 정도로 대단한데, 정작 그것들을 뒷받침해줄 친절한 설명이 부족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 ‘여성 하드보일드 소설의 진수와 함께 와카타케 나나미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별칭은 단편의 여왕입니다. 이 작품 속의 네 편의 수록작은 사실 찬찬히 뜯어보면 그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들 만한 수작들인 게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들 때문에 도저히 찬찬히 뜯어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빠르고 복잡한 단편들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그때라면 단편의 여왕의 진수를 조금은 더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모두 여덟 편입니다. ‘나쁜 토끼를 제외하곤 한국에 모두 소개됐는데, 조만간 절판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순서대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특히 13년의 공백(2001'나쁜 토끼' 이후 출간된 작품이 2014'이별의 수법')을 사이에 둔 20~30대와 40대의 하무라 아키라가 각각 어떤 모습들일지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발된 여자 케이스릴러
김영주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확인한 날, 수완은 무대에 오를 날만 고대하며 버텨오던 극단에서 잘린 것은 물론 남자친구에게 전셋집 보증금을 사기 당한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수완 앞에 재벌가 며느리 경진이 나타나 놀라운 제안을 한다. “다시 행복하게 살게 해 줄게요. 대신 죽은 내 여동생 남경으로 살아줘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수완은 남경으로 변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수완은 곧 경진의 요구 이면에 감춰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경진의 계획. 수완은 이 연극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자주 이용되던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번 독자(혹은 관객)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매력적인 설정이기도 합니다. 거짓 가면을 쓴 채 유유히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행보도 흥미롭고, 언제 그 가면이 벗겨질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스릴 넘치는 긴장감도 좀처럼 외면하기 힘든 관심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만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좀 심하게 말하면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아서 자세한 내용 언급이 어렵다 보니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겐 다소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 수 있습니다.)

 

수완이 잠시의 갈등과 저항 끝에 경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초반부까지만 해도 과연 언제까지 수완이 거짓 가면을 쓰고 남경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가 이 작품의 기둥 이야기로 보였고, 덕분에 기대감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경은 이미 죽은 인물이라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짠~ 하고 나타날 일도 없으니 수완의 새 인생은 그만큼 더 강렬하고 짜릿한 롤러코스터를 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완이 미처 새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톤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중반부터 경진과 그녀의 남편을 둘러싼 (현재와 과거에 걸친) 불륜, 욕망, 시기, 질투가 전면에 포진되더니 이내 살인과 납치 등 서스펜스 스릴러가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수완 대신 경진이 주연 자리를 차지하면서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의 이야기라는 당초의 설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까지 갖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결여되거나 안이하게 설정된 대목과 인물들이 너무 많았고 그저 이야기를 크고, 세고, 독하게 확대시키는 데만 열중한 듯한 작가의 과욕이 여러 차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에게 가짜 인생을 부여해놓곤 정작 중요한 사건은 그와는 별로 연관 없는 딴 이야기로 몰아간 느낌이랄까요? 앞서 언급한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갈팡질팡 캐릭터와 스토리라는 지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왜 경진은 수완을 콕 찝어 죽은 동생 역할을 하게 만들었나?”인데, 너무 빨리 읽었거나 명백히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수완이 남경과 닮았기 때문에? 단지 비슷한 또래라서? 뭔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떠오르는 동기도 없습니다. 중반 이후 경진이 가장 집착한 부분은 수완의 임신혹은 눈엣가시 같은 자들을 제거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인데, 이 두 가지 모두 왜 남경의 대체인물이 필요했는가? 또 그것이 반드시 수완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진이 필요에 의해 수완을 이용했다.”라고 묘사하는데, 필요가 뭔지는 지금도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매력적인 출발을 보인 초반부 전개와 수완의 캐릭터에 비해 엉뚱한 방향으로 확장돼버린 뜬금없는 서스펜스 스릴러는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아 보인 작가의 필력 때문에 아쉬움이 배가된 게 사실인데, 이야기의 볼륨감을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크고, 세고, 독한 설정들대신 가짜 인생을 살게 된 수완에게 집중한 간결하고 선명한 설계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제 나름의 확신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