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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평점 :
프레드릭 배크만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또, 지금까지 그의 대표작인 ‘오베라는 남자’와 (역시 못 읽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의 작가가 다른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한때 장안의 화제였던 두 작품은 표지는 물론 번역 제목의 뉘앙스까지 엇비슷해서 당연히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로 연이어 출간된 ‘닮은꼴 표지에 비슷한 뉘앙스의 제목’들은 잘 해야 자기복제품이거나 아니면 인기에 편승한 모방작들이라는 근거 없는 의심 속에 관심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다산책방의 서평단 덕분에 뒤늦게 만나게 됐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편중된 저의 취향이 프레드릭 배크만을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었던 게 사실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는 더 많이 했어도 괜찮았고 우려는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었습니다.
새해를 이틀 앞둔 작고 평화로운 소도시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하나는 무장 은행강도 사건이고 또 하나는 오픈하우스(구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주택이나 아파트를 둘러볼 수 있게 공개하는 것)에서 벌어진 인질극입니다. 그런데 두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정체는 당장 내야 할 한 달치 월세가 필요했던 겁 많고 소심한 인물로, 하필 쳐들어갔던 곳이 현금 없이 운영되는 은행이라 강도질에 실패한 뒤 엉겁결에 오픈하우스 중인 아파트로 도망쳤다가 자기도 모르게 인질범이 되고 만 것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든 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인질범과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드센 인질들의 만 하루의 동거는 과연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 작품을 최대한 압축해서 요약한다면 ‘웃픈 인질극’, 즉 언뜻 보면 웃기는데 곰곰이 씹어볼수록 슬퍼지는 인질극쯤 될 겁니다. 어설픈 범인과 범인에겐 별 관심도 없는 인질들에, ‘덤 앤 더머’를 연상시키는 부자(父子) 경찰의 좌충우돌 수사 등 해프닝에 충실한 지독한 소동극 설정이 초반부 내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사포 같은 재미난 만담 혹은 능구렁이 변사(辯士)의 요란한 원맨쇼 같던 초반부를 지나 범인-인질들-부자 경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씩 소개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그 톤을 확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그 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변화무쌍하게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건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 (p151)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작가가 의도했던 장르는 무려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불안에 시달리며 버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코미디’, ‘밀실 미스터리’가 그것인데, 도무지 섞이지 못할 것 같은 세 장르는 ‘웃픈 인질극’을 통해 웃음, 한숨, 안타까움, 반전, 감동 등 팔색조 같은 느낌을 발산합니다. 인물과 이야기도 많은데 장르마저 다양하다 보니 마치 회전무대를 통해 순식간에 시공간을 바꿔버리는 템포 빠른 연극무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큰 그림, 즉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기만의 불안에 휩싸였던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교감하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를 상투적이거나 진부한 방식이 아닌, ‘웃픈 인질극’으로 풀어냅니다.
“칼에 맞지 않게 하느님이 보호해주지는 않으시지. 그래서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주신 거야. 서로 보호하면서 살 수 있게.” (p301)
부자 경찰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남긴 단순하면서도 깊은 함의를 담은 이 한마디는 ‘웃픈 인질극’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절묘한 표현입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평생을 안고 온 뿌리 깊은 불안이 단 하루의 인질극의 인연으로 해소된다는 건 픽션에서나 가능한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안한 사람들’은 독자로 하여금 어쩌면 그런 기적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할지 모른다는, 다소 무모하면서도 욕심내고 싶은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등장인물 모두 내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며, (클라이맥스는 다소 동화 같긴 해도) 그들이 해피엔딩을 이끌어내는 방식 역시 특별한 마법이 아니라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열고 말을 건네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프레드릭 배크만이 건네는 위로는 남다르면서도 더없이 따뜻하다. 왜냐하면 그가 위로를 건네는 방식은 세상에 당신 말고도 수많은 바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을 단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눈가가 뜨근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박한 기쁨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그동안 관심 밖에 둔 채 외면했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작품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날카로움에 질릴 때쯤 가장 먼저 떠오를 작가 중 한 명이 프레드릭 배크만이 될 것임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